난 잘 지내고 있어요 - 밤삼킨별의 at corner
밤삼킨별 지음 / MY(흐름출판)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흐름출판서포터즈로 활동하며 제공받아 읽게 된 도서입니다.

 

밤삼킨별을 필명으로 사용하는 저자는 여행사진 작가이며 캘리그라퍼이다.

책의 곳곳에 감성을 툭툭 건드리는 사진들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편집되어 있다.

각 계절마다 저자의 이야기들이 담백한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 여름, 가을은 책의 앞면에 배치되어 있고,

겨울은 아예 뒷면에 새로 편집되어 있어 읽는 이에게 새로운 느낌과 놀라움을 준다.

 

책의 처음을 읽으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나서 함께 배송된 <일본 최고 MBA 경영 수업>이라는 이성만으로 읽어야하는 책을 섞어서 읽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경험한 만큼, 생각한 만큼 느껴지는 것은 아닌지.

여유를 두고 천천히 읽어가면서 빠르게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나이 50아저씨에게도.

 

긴 이야기가 아닌 산문에서, 시처럼 짧은 저자의 이야기에서, 때론 고백처럼 때론 대화처럼 들러오는 이야기에 고개도 끄덕여보고 아니면 나랑 다르게 느끼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동안 책은 끝이 났다.

<겨울>편에는 북해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가보고 느꼈던 북해도와는 다른 이야기들.

온전하게 자신에게 집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의 취향이 온전히 나만의 취향인가.

다른 사람들의 영향과 압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취향이었는가를 생각해본다.

 

흐름출판 서포터즈를 하면서 좋은 점으로 어느 분께서 독서의 편식을 막는다고 하셨다.

이 책을 읽으면 크게 동감하였다.

 

<winter> intro

어른이 되어갈수록 괜찮다혹은 잘 지낸다는 생래적 거짓말을 한다. 잘 지낸다는 단단하고 따뜻한 말이 단지 그렇지, 실은 그렇지 못한 어른들의 거짓말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잘 지내지 못하는 상황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텐데 행복하기 위해 불행을 병처럼 여기고, 병을 고치려는 노력 대신 감추려 애를 썼기 때문이다.

----

마음에 물기가 사라져 조금만 뒤척여도 슬픔이 소리를 내고, 마음이 부서진다. 잘 지낸다는 거짓말이 나쁜 마음을 흘려보낼 마음 길을 다 막고 있으니 그러하다. 불안, 우울, 외로움, 슬픔, 괴로움만이 전부인 때는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지옥을 보는 일이라서 괜찮아, 잘지내라는 말로 지인들의 다정한 안부의 말을 잘라내고, 숨었다.

----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며 상황인 난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말이 의심 없이 들리고 말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곧 찾아오길 바라며,

사실 나는 잘 지내지 못하고 있어요,

고백한다.

-밤삼킨별 올림

 

49 행복하지 않은 이 순간마저도 나는 잘 지내고 싶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을 순간의 여백이 되어줄, 북해도에 찾아왔다. 앞으로 나에게 잘 지내냐고 물어줄 계절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으로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그 겨울에 간다면,

내가 당신의 계절이 되어 안녕을 전하기를

 

60 왜 좋음에 완전히 몰입되지 못하는가 북해도 VII

여행은 면세된 제품을 사고, 남들 다 가보는 그곳을 기념하며 역시 남는 게 사진이라 말하는 기억이 아니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만나거나 평생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그 찰나를 겸허히 만나 나도 모르는 새 마음으로 정신으로 스며든 풍경 속에서 시나브로 일상에서, 인생에서, 내게 작용하는 나를 구원하는 힘을 만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88 나의 여행이 늘 그랬듯 도쿄에서도 꼭 봐야 하는 것과 알아야 하는 것은 없었고,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저 여행하는 나 자신이 먼저였다.

나의 마음과 시선으로 보이는 것, 담기는 것, 스치는 사소함 하나하나도 소중한 시간들은 지금 또한 변함없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다. 삿포로에는 무엇이 맛있고 유명하고, 여기는 꼭 가봐야한다는 정해진 장소가 없어도, 천지사방 눈밖에 없어도, 그 눈을 쏟아내는 이 계절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손이 시리고 발끝에 얼음이 박히는 시간이어도 그 언젠가 가장 따뜻한 시간이었노라 회상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124 무언가를 선택해서 갖고 이루고자 하는 것만이 노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노력이다. 여행을 떠나고자 꿈꾸는 것만이 행복이고 떠나지 못하는 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 머무는 차선을 선택한 것 또한 행복이다. 상처 없이 산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가려던 길을 걷다 넘어져 얻는 상처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누군가들이 만들어놓은 가만 있어야 유지되는 중간을 뒤흔들며 잘 살고 있지 않은 우리 모두의 하루를 응원한다

 

<spring>

다가서다

시간과 날씨를 파는 가게에 들러서 너의 로맨틱한 어느 날과 봄꽃 가득 내릴 날씨를 테이크아웃 했어

곧 갈게.

 

33 사랑하는 우리가 사랑할수록

하나를 알게 되면 둘을 알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를 알게 되면 또 하나를 모르게 되는

어려지기만 하는 어른의 사랑을 하는 시간이 좋아.

----

사랑하는 마음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다 하지 못할 거 같아서

사랑하는 너를 좋아해라고 말하는

우리의 벅찬 이 시절이 참 좋아.

 

<summer>

두근거리다

자꾸만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하게 되어요. 남들은 못 보는데 나만 보여요. 당신과 나는 사랑에 빠진 비정상적인 두근거림증 환자들.

 

55 하루 종일 고정되어 있는 주파수처럼 당신을 틀어놓고 지내요.

 

하루 종일 당신을 틀어놓은 채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고 낮잠을 자요. 꺼지지 않는 고장 난 라디오. 나의 오래된 주파수. 나는 늘 당신에게 고정되어 살아요.

 

68 더 좋아하는 사람의 몫

서운하고나 섭섭한 마음은 나의 마음을 모르는 당신 때문도 아니고, 내가 바라는 그만큼을 해주지 않는 당신 때문도 아니다. 원하고 기대한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당신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나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섭섭해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고, 힘들다 말할 수도 없다.

 

<autumn>

달래다

꽃 사주세요. 어느 날 당신에게 부탁하는 낭만.

 

106 사랑은 단 하나의 모양이 아닌데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랑만이 사랑이라 생각하며 사랑의 순간을 스쳐 지나만 간다.

인연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인연이었던 적이 더 많았던 시간들. 그러나 그 인연을 모른 채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지나쳐간 시간이 인생이다.

 

120 나는 너를 우리는 당신을 상처주지 말자

거의 대부분의 상처는 아는 이에게 받는다. 아는 이에게 받은 상처는 모르는 타인의 글과, 타인의 사진과, 타인의 노래로 위로받고, 위안 삼는다.

그래 나는 너는 우리는 타인에게 은혜를 입고 산다. 그렇게 입은 은혜를 갚는 방법은 우선, 아는 이에게 상처 주지 않는 것이다.

 

124 마음을 켜고 힘을 보낼게

마음을 켜고 바라보면 당신의 하루가 조금 더 섬세히 보일지도 모르겠다.

시무룩해하지 말고 지쳐하지 말고 조금 더 생기 있게 하루를 보내길 바랄게 내가 바랄게-

오늘 하루종일 내 마음을 켜고 당신에게 힘을 보낼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추얼
메이슨 커리 지음, 강주헌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

 

우리는 예술인들은 모두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규율을 깨뜨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와 낭만, 현실과 일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161명의 음악가, 미술가, 작가, 철학자들은 세부적인 활동들은 모두 달랐지만, 큰 틀에서는 모두 자신의 규범 안에서 철저하게 생활하였다.

 

의미가 있는 삶이 지속가능한 삶이다. - 김정운(문화심리학자)

의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추얼을 통해서다. 리추얼은 일상의 반복적인 행동패턴을 말한다. 사소하고 단조로운 반복으로 보이지만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 삶의 사소함에서만큼은 내가 삶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주체로서의 삶을 일상의 리추얼에서 확실하게 경험된다.

일상의 사소한 반복을 가치 있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거대한 세리모니나 이벤트를 이어가며 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진정한 삶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사소하게 진행되는 과정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 그 일상을 가치 있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 리추얼은 바로 무의미한 듯 반복되는 일상을 의미 있게 만드는 기술이다.

 

스키너가 1974년 하버드 교수직에서 은퇴할 무렵, 밤 시간은 그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그즈음, 동틀 녘의 두 시간에 야간 작을 위한 한 시간이 더해지면서 그의 타이머는 하루에 네 번 울렸다. 자정, 새벽 1, 아침 5, 아침 7시였다. 스키너는 이런 습관을 휴일까지 포함해 하루도 빠짐없이, 1990년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기계처럼 충실하게 따랐다.

 

정오에 정확히 작업을 멈추고 점심 식사를 했다. 차이콥스키는 음식에 까다롭지 않은 데다 모든 음식이 정성스레 준비된 것이라 여겨 주방장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점심 식사 후에는 날씨에 상관없이 오랜 산책을 나갔다. 동생인 모데스트의 기록에 따르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두 시간의 산책이 필요하다는 글을 어디선가 보았는지, 형님은 오후의 산책을 미신처럼 받아들이며 엄격하게 지켰다. 5분이라도 일찍 끝내면 병에 걸리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운이 닥칠 것처럼 정확히 두 시간 동안 산책했다.”

 

진정한 통찰의 순간들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헨리 밀러

 

조지 리벤터는 학생 때부터 유용한 습관을 몸에 익혔다. 오후에 네 시간을 자면 이른 새벽까지 민활한 정신과 육체를 유지할 수 있었고, 새벽에 다시 네 시간을 자고 일어나 남은 하루에 대비했다.” 폴란드계 미국 작가 코진스키가 1977년에 발표한 소설 블라인드 데이트의 첫 구절이다. 코진스키가 주인공을 내세워 썼던 습관은 실제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언젠가 사르트르는 굳이 오랫동안 일하지 않아도 성과를 낼 수 있다아침에 세 시간, 저녁에 세 시간, 이것이 내가 따르는 유일한 규칙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르트르의 삶이 느긋했으리라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사르트르는 거의 평생 동안 광적인 창조력을 발휘하며 살았던 철학자답게, 하루 여섯 시간의 작업을 꼬박꼬박 지키면서도 푸짐한 식사와 엄청난 음주와 흡연 및 약물로 채워진 사회적 삶을 살았다.

 

아인슈타인은 1933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45년 은퇴할 때까지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그 시절, 아인슈타인의 일상은 매우 단순했다. 9시부터 10시까지 아침 식사를 하며 일간지들을 정독했고, 1030분에는 집을 나와 연구실로 향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걸어 다녔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대학교에서 그의 집까지 스테이션왜건을 보냈다. 아인슈타인은 오후 1시까지 연구에 몰두했고, 130분에는 집으로 돌아가 점심 식사를 하고 낮잠을 즐겼다. 그 후에도 오후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연구를 했고, 방문객을 만났으며, 아침 일찍 비서가 선별한 편지들을 처리했다. 630분에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도 집에서 연구를 하며 편지들을 처리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아침나절에야 눈을 뜨고 11시 남짓까지 침대에서 뒹굴며 사색하고 글을 끄적거리는 걸 좋아했다. 1629년부터 생을 마치기 수개월 전까지 살았던 네덜란드에서 보낸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이곳에서 나는 누국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매일 열 시간씩 잠을 잔다네. 꿈속에서 내 정신과 숲과 정원과 마법의 궁전을 헤매고 다니며,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즐거움을 맛본 후에 잠을 깨면 밤의 몽상과 낮의 몽상이 뒤섞이기 시작한다네라고 썼다. 데카르트는 정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빈둥거리는 습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야 한다. 성공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습관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한창 집필하던 1860년대 중반 가끔 쓰던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들지 않는 토끼 - 1등 기업을 만드는 기계 뇌의 비밀
가토 에루테스 사토시 지음, 이인호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he age of cyber brains

1등 기업을 만드는 기계 뇌의 비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동차가 스스로 달리고, 히트 칠 노래를 기계가 발굴하고, 의사를 대신해서 기계가 진단을 하고, 할리우드 영화의 배역과 줄거리를 기계가 수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생각하는 일자체를 기계가 대신한다는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필자는 이를 산업혁명에 비견할 만한 기계 뇌의 시대라고 부른다.

딥 러닝의 시대인공지능의 시대가 아니라 기계 뇌의 시대라고 부른 이유는, ‘역직기 혁명이나 증기기관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고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에서 토끼는 방심하며 걸음을 멈췄지만, 알고리즘은 방심하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으므로 사람이 자는 사이에도 계속 자동으로 개선을 해 나갈 수 있다.

데이터를 집약할 수 있는 플랫폼과, 그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으로 개선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갖춘 기업의 사례를 다룬다. 그러한 기업은 대단히 진화 속도가 빠르기에, 이른바 잠들지 않는 토끼라고 할 수 있다. 잠들지 않는 토끼와 경주하면 거북이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저자는 기계학습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활용하기 위해 우선 기계 학습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관해 쓴 책이다.

 

기계 뇌는 언뜻 보기에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처리를 하는 것 같지만, 할 수 있는 기능은 오직 세 가지이다. 가시화, 분류, 예측

1. 가시화-데이터를 인간이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거나 번역하는 기능

-혼다기연공업의 인터내비: 기존 교통 정보는 차의 흐름을 거시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으나, 인터내비는 각 차의 개별적인 거동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도로 행정 분야에서 특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고마쓰제작소의 콤트랙스: 원래 건설용 중장비의 위치 파악부터 시작했지만, 현재는 가동 상황 가시화, 보수 점검 효율화, GPS를 통한 자동 운행 등 여러 방면으로 진화했다.

-조지루시마호빙의 아이포트

-히타치제작소의 비즈니스 현미경

 

2. 분류-성질이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별하는 기능, 방대한 데이터 중에서 원하는 것이 있는지 판단하는 일을 기계에게 맡기려는 시도.

-페이팔의 부정 검출

-후지필름과 앤섬의 암 분류

-파친코와 카지노 산업의 얼굴 인식 기술

 

3. 예측-과거를 바탕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는 기능

-에파고긱스의 영화 흥행 예측

-아마존과 라쿠텐의 구매 예측과 추천

-휴렛 팩커드의 사원의 퇴직 가능성

-클라이미트와 프로그레시브의 보험

 

기계 뇌를 만들 때 생각해야 할 사항들 [ABCDE 프레임워크]

A=Aim(목적) 이 기계 뇌가 무엇을 이루어야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는가

B=Brain(기계 뇌의 종류) 이 기계 뇌는 어떤 알고리즘을 사용하나

C=Coding/construction(프로그래밍 작업, 구현) 이 기계 뇌의 프로그램과 서버 구성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가

D=Data(데이터 선정 및 정비) 이 기계 뇌는 어떤 데이터를 학습해서 판단하는가

E=Execution(실행) 이 기계 뇌를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고 운영할 것인가

 

기계 학습에 관한 수많은 저서를 낸 드류 콘웨이는, 진정으로 유능한 데이터 과학자는 엔지니어링 능력, 통계수학 지식, 실무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능력을 갖춘 진정한 데이터 과학자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필요한 세부 능력을 지닌 여러 팀원을 모아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대화함으로써,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여러 기업들의 실제 케이스들과 운영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충고, 데이터과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해야할 과제 등등 저자의 애정 어린 조언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항상 학생들과 생활하는 나에게는 어려운 내용들이 등장했지만, 비즈니스 현장에 계신 분들에게는 꼭 필요한 책이라 생각된다.

세상의 변화의 방향이 확인이 된 이상 그 방향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데이터 과학이 새로운 무기인 이상 피해 가는 것은 좋은 대응방법이 아니다.

기계 뇌가 주축이 되는 산업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한 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튼 터치 하트
이경전.전정호 지음 / 더난출판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AI 시대, 생산과 소비 그리고 관계의 미래

더난출판의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버튼은 새로운 세계를 상징하고, ’터치는 새로운 상호작용, 즉 소통의 방식을 표상하며, ;하트는 이를 통해 인간이 누리는 새로운 가치와 행복을 의미한다.

 

미국인공지능학회의 혁신적 인공지능 응용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신진 학자 이경전 교수의 초연결 사회와 비즈니스 모델 전략

사이버 세계와 실세계가 하나 되면서 영토의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누가 새로운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이 될 것인가?”

 

우리 주위에서 많이 듣는 말이 정보 사회와 4차 산업혁명이 아닐까 한다.

너무나도 많이 듣는 말이지만 실제로 얼마나 생활 속에서 활용하는 있는지를 따져보지는 않는다. 항상 손에 쥐고 다니는 스마트폰과 우리 주위의 스마트 디바이스들이 우리 생활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종합적으로 따져보지는 않는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에 대해서도 대충은 알고 있지만 우리 생활에 어떻게 작용하고 운영되는지를 알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4차 산업혁명과 정보사회의 헤게모니는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났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의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의 운용과 흐름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버튼 터치 하트이다.

 

저자의 통찰력 있는 해설로써 4차 산업혁명의 속성과 현실에서의 적용 사례와 전략들이 잘 이해되었다.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우리의 좌표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또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스마트 디바이스를 이용해 실세계와 소통하고 미디어에 의해 확장되고 서로 소통하는 세계 속에 편입되어 있다. 저자는 이를 확장된 세계Extension of World라고 명명한다.

사람이 확장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고, 사물이 확장되어 새로운 사물이 되고 있다.

매클루언이 미디어가 인간의 확장이라 했다면, 이제는 실세계 그 자체가 확장되어 새로운 미디어가 되고 전통적인 미디어가 실세계에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소통 기술이 주도하고 있다.

이제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을 모두 포함하는 세계의 확장이며 그 결과 세계가 미디어가 되고, 미디어가 세계가 된다.

 

지난 30년이 오프라인상에서의 물리적 행동을 온라인화해온 시간, 즉 오프라인 프로세스를 온라인 프로세스로 바꾸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는 30년간 구축해온 새로운 온라인 행동들이 오프라인에서 구현되는 일이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행동을 우리는 스마트 버튼과 같은 오프라인의 사물을 누름으로써 수행하게 될 것이다. 오프라인 공간에서 고객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면 고객과의 관계가 강화된다. 이 과정에서 그 결과가 온라인으로 자연스럽게 확산되어 새로운 고객을 얻는 선순환 구조를 이룩할 수 있다.

 

사물인터넷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인터넷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인터넷이 전 세계의 컴퓨터를 서로 소통하도록 만든다는 생각이 실현된 것이라면, 사물인터넷은 이제 전 세계의 사물들을 컴퓨터로 만들어서로 소통하도록 만든다는 생각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컴퓨터가 된 사물들이 그들 간 또는 인간의 스마트 기기와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두 톱니바퀴의 관계와 비슷하다. 사물인터넷 제품과 서비스는 다종다양한 데이터를 발생시키고, 적절한 소유와 공유, 그리고 철저한 보안 속에서 분석된 데이터는 다시 사물인터넷 제품과 서비스의 기능 향상을 위해 피드백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소통한다는 것은 제품이 본질적으로 더 이상 제품이 아니라 서비스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 산업의 서비스화라고 할만하다. 자동차 산업이 더 이상 제조업이 아니라 교통 서비스업에 편입되는 현상은 우버를 통해 이미 잘 보고 있다.

 

지금 고객은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휴대전화Phono+지혜Sapiens)로 확장되어있다.

플랫폼에서는 사업자와 고객이 따로 없고 모두가 사용자다. 고객 중심 경영을 뛰어넘어 이제 능력이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 포노사피엔스의 혁명이 도래하고 있다. 굳이 혁명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기존의 사고를 버려야 하고, 기존의 구조를 뜯어고쳐야 하고, 역발상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하며, 결과를 이끌어내기까지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연결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람-사물-공간-디지털 콘텐츠 사이의 연결완전성Seamlessness이라 할 수 있다. 실세계의 사물과 공간 등에 디지털 콘텐츠로 연결되는 링크가 내재되면, 사람이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 정보로 변환하는 비용을 아낄 수 있으므로 정보가 끊김 없이 흐르게 된다. 이를 통한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의 통합은 물리적 공간의 활동에서도 정보들이 디지털 공간처럼 끊김없이 이용되어 두 공간에 구분이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거래 비용을 감소시키고 거래 정보의 품질을 향상시키며 거래 과정을 투명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NFC 태그부터 버튼 인터넷까지 다양한 기술을 기반으로 사업을 수행하면서 얻은 중요한 통찰은 정작 고객은 그 기술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고객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서비스를 받고자 할 때 얼마나 쉽고 간편하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뿐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버튼을 누른다라는 행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실세계가 미디어화된 환경에서는 상거래와 미디어가 실세계에 혼재되어 유기적으로 연결된 환경으로, 실세계가 재탄생한다. 실세계에는 사람, 사물, 장소, 콘텐츠가 존재한는데, 여기에 하이퍼링크가 더해짐에 따라 사람, 사물, 장소, 콘텐츠가 미디어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상거래가 발행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하나의 축은 네트워크, 즉 소통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잠차 연결되고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연결된 사람, 사물, 공간 사이의 집단 지성을 통해 점점 지능화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연결성과 지능성이 상호작용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근미래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인가?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며 만족하는 서비스를 지속 가능하게 제시하고, 사회 전반의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협력 사회 / 간편 사회 / 안심 사회 / 문화 사회 / 공유 경제 / 봉사 국가 /

 

아직 잘 모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다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더글러스 노스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다양한 사고와 창조적 경쟁을 허용하자. 이러한 문화가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사회의 적응 효율성을 높여 경제적 성과를 높일 것이다. 불확실성이 큰 환경에서는 달리 대안이 없다. 4차 산업혁명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한 소통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어떤 기술이 이를 주도할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모른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자. 단정 짓지 말자. 다만 다양한 사고와 창조적 경쟁을 허용하자.”

 

스타트업 사이에서는 빨리 실패하라, 그리고 반복하라라는 문구가 매우 유명하다. 좋은 사회로의 진화를 위해 작은 부분부터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개선해나간다면, 시민들은 스마트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이는 시민 서비스의 품질을 향상시킬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합본)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김용규 지음 / IVP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극기집회의 주요한 축으로 보수기독교계가 등장한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때로는 이스라엘기마저 흔들며 집회에 참석한다.

시민들의 의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들을 펼치고 심지어 가짜뉴스마저 유포하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일까?

하나님이란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보다 근본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 선택한 책이 바로 김용규선생님의 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이다.

900쪽이 넘는 분량과 서양의 여러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사상이 소개되며 예술과 과학과 문학이 버무려지는 그의 설명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아둔함이 너무 컸다.

그러나 나와 같은 독자들을 이해시키려는 저자의 끈질긴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 이어져서 겨우 완독할 수 있었다. 곁에 두고 다시 꺼내어 볼 책.

 

이 책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격자로서의 하나님, 유일자로서의 하나님을 그와 관련된 문학·역사·철학·과학·예술 등과 연계하여 살펴본다.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그뿐 아니라 기독교에 의해 형성된 서양문명의 심층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자 한다.

 

구약의 창세기에서 20세기 신학까지, 플라톤에서 현대 철학까지 고루 살피며, 신에 대한 탐구가 진화론, 상대성이론, 빅뱅이론, 다중우주론 등 과학의 발견과 어떻게 관련되고 조화를 이루는지 꼼꼼하게 조명하는 이 책은 저자의 오랜 공부의 결실이며,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개인적·사회적 문제들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하고자 하는 애정 어린 노력이다.

동시에 배타성과 폭력성 등 반기독교적 유산을 따끔하게 지적하며 기독교의 회복을 촉구하는 예언자적 외침이기도 하다.

 

56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 이상 간데없이 뻗은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한 것 같은 극적인 종합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분히 종교적이면서도 분명 존재론적이고, 여전히 히브리적이면서도 여실히 그리스적인 기독교적 신 개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하나님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하나님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할 뿐 하나님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으로 모든 존재물을 자기 안에 창조하지요.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며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151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입니다! 시간을 매개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이 하나로 종합된 겁니다. 우리가 이처럼 독특한 사유 방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히브리인들의 사유 내지 언어 사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인 야훼의 속성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며, 나아가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데 디딤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221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갖느냐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렸지요. 만일 당신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될 겁니다. 알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논증을 펼친 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확인하려는 목적보다는 하나님의 현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도들의 이성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257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본인이 뜻한 바는 전혀 아니었지만 회심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는 이미 아카데미학파의 회의주의를 통해 인간 이성의 한계를 깨달았고,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지적 회심을 이루었으며, 철저한 죄의식을 통해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은 그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리는 징표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그의 오랜 망설임이나 갈등과는 달리그것이 차례로그리고 철저하게준비되어 왔기 때문에-때가 이르자 마치 둑이 무너지고 봇물이 터지듯 극적으로 일어났지요.

 

291 다른 모든 이론들이 그렇듯이, 과학 이론도 더는 연역될 수 없는 가정公理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지요. 설사 언젠가 그 궁극적 가정들을 설명할 증거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 새로운 증거의 근거에 대한 물음이 계속 되풀이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그때마다 그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 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답하겠지요.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경험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312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언어놀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자는 이야기는 과학과 종교를 분리함으로써 평화로운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언어놀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우선 과학과 종교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하자는 것이지요. 언어놀이 이론이 과학과 종교의 소통을 막으리라고 우려하는 존 호트도 이 점에 대해서는 과학과 신앙을 제멋대로 섞는 행위를 막으려면, 과학과 신앙의 만남은 신중하고 자의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같은 입장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지요.

 

320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라는 말이 137억 년쯤 전인 아득히 먼 예전의 어떤 시간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물리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태초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 그런 만큼 이 말은 하나님이 시간의 밖에서우주를 창조했고,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야 하지요. 더 정확히 말해 태초는 시간 밖시간 안의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51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시간을 삽니다.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 존재물의 시간과 존재의 시간, 세속적 시간과 신적 시간, 요컨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그때마다 적당히 골라 번갈아 가며 살지요.

355 순간, 순간 사라지는 크로노스를 사는 것, 이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바람처럼 흘러가 버린 과거나 신기루처럼 멀리 있는 미래는 모두 잊고 오직 현재에만 몰두하는 것이 시간의 파괴성과 허무의 늪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현실적인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392 완전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어떻게 불완전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본성 내지 전지전능함과 어긋나지 않는가?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선하지 않든지 아니면 전능하지 않든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가 불완전하게 될 가능성, 곧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에 의해서창조되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무로부터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421 다윈이 발견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잇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은 확실히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생물들의 형태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며, 거기에는 미리 계획한 의도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하지 않는다. 만약 자연의 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눈먼시계공이다. -리커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430 진화론을 한 문장으로 간략하면 이렇습니다.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생존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이 일어난다.

 

456 호트에 의하면, 진화가 창조의 메커니즘 가운데 일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주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자기조직을 하는 본유적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무한자인 하나님의 사랑을 유한자인 우주가 받아들이려면 진화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에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는 설득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473 ’본래적 원인‘causa per se이자 제1원인인 하나님은 우연적 원인‘causa per accidens이자 제2원인인 진화법칙에 자연의 창조와 진행을 맡겼다. 하지만 제2원인 역시 제1원인에 의해 창조되고 조정된다. 요점은, 우연성(맹목적성)은 제2원인의 속성이고 필연성(합목적성)은 제1원인의 속성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시간 밖의 존재이고, 자션은 시간 안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2원인과 제1원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합목적적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연이 맹목적적으로 진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487 “하나님은 세계를 자연법칙이라는 자신의 일반섭리에 맡겨 운용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특정한 유전자적 변이의 기초가 되는 양자역학적 과정 안에 개입, 작용함으로써 자신의 특별섭리를 개진한다. 내 말의 요점은, 우연성(맹목적성)은 일반섭리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속성이고 필연성(합목적성)은 특별섭리의 차원에서 표출되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이 맹목적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합목적적으로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로버트 존 러셀

 

493 완전한 하나님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의 구원입니다. 인간과 세계가 존재 자체, 진리 자체, 선 자체 또는 아름다움 자체인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라는 이야기지요. 바로 이것이 고백록전체를 꿰뚫는 주제이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엉뚱하게도 고백록의 말미에 자서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창조에 관한 신학 이야기를 덧붙였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불완전한 자기 자신이나 세계가 하나님처럼 완전해지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종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이지요.

 

548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정의해 선언했듯이 인간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고요? 일찍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561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경험하고 그에 응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도를 하나님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했습니다.

 

572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 곧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물질적 풍요에 대한 기도는 전혀 안 들어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하는 물질적 풍요가 하나님 보기에그에게 궁극적으로 좋다면,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예정되어 있다면, 그에게 물질적 풍요를 차고 넘치게내려 줄 겁니다. 설사 그가 그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만일 해롭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가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르려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577 요컨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하나님의 섭리는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관건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사람은 마치 욥이나 하박국, 그리고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빌립보서 4:11~12)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란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기도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도록 하며 자족하게 하지요.

 

595 “무한한 체념 속에는 고통 속에서의 위로와 평화와 안식이 있다.” -키르케고르

 

609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또한 바로 이것! 다시 말해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633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은 의롭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징계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선한 자가 복 받고 악한 자가 벌받는 인과응보가 사람의 정의이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이루는 섭리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647 윤리는 보편적인 것이고 믿음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당연히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에, 즉 믿음이 윤리에 종속도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이성적 판단입니다. 이런 이성적·윤리적 판단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고, 아가멤논, 옙다, 브루투스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목숨을 바쳤던 거지요. 그러나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보다, 다시 말해 믿음이 윤리보다 높이 있다는 것이 믿음의 역설이라고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662 기독교 교리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서양문명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이성과 계시라는 서로 전혀 다른 두 토양이 만난 땅에서 자라났습니다.

 

664 그리스적 사고는 탈시간화되어 있고 히브리적 사유는 시간화되어 있지만, 기독교적 사고는 그 둘이 융합되어 있습니다.

 

686 하나님의 섭리가 만물을 창조하고 돌보는 세계에서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을 고통과 불행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이 생겨날 수 있느냐의 질문에 결론부터 먼저 밝히자면, 그것이 자연 악이든 인간 악이든 간에,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 악은 자연법칙에서, 인간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온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입니다.

 

750 오리게네스에게 성부는 플라톤의 선 자체‘, 알비누스의 제일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동일하고, 성자인 말씀은 플라톤의 창조주‘,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정신에 해당하며, 성령은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영혼과 같은 것이지요. 오리게네스 이후 서양문명 안에서는 일자·정신·영혼이 성부·성자·성령과 각각 짝을 맞춰 일치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혼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790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일자]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그 셋은 이렇게 구분되고 이렇게 연합되어 있다!

 

804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하나님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814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나 폭력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포괄성이며, 일치와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렇다면, 또는 그럼에도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해 온 배타성과 폭력성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간략히 답하자면, 그것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 기독교적 유산입니다.

 

825 존재이자 창조주인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 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846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상호내주적 또는 상호침투적 사랑으로 인식하고, 그의 유일성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인 본질공동체적·영원동등적 포괄성과 통일성으로 파악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에 대한 신앙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추구하는 비위계적·비지배적 인간 공동체의 원형으로 나타난다면, 틸리히의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과 그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그러한하나님을 바로 그렇게신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