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합본)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김용규 지음 / IVP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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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집회의 주요한 축으로 보수기독교계가 등장한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때로는 이스라엘기마저 흔들며 집회에 참석한다.

시민들의 의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들을 펼치고 심지어 가짜뉴스마저 유포하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일까?

하나님이란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보다 근본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 선택한 책이 바로 김용규선생님의 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이다.

900쪽이 넘는 분량과 서양의 여러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사상이 소개되며 예술과 과학과 문학이 버무려지는 그의 설명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아둔함이 너무 컸다.

그러나 나와 같은 독자들을 이해시키려는 저자의 끈질긴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 이어져서 겨우 완독할 수 있었다. 곁에 두고 다시 꺼내어 볼 책.

 

이 책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격자로서의 하나님, 유일자로서의 하나님을 그와 관련된 문학·역사·철학·과학·예술 등과 연계하여 살펴본다.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그뿐 아니라 기독교에 의해 형성된 서양문명의 심층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자 한다.

 

구약의 창세기에서 20세기 신학까지, 플라톤에서 현대 철학까지 고루 살피며, 신에 대한 탐구가 진화론, 상대성이론, 빅뱅이론, 다중우주론 등 과학의 발견과 어떻게 관련되고 조화를 이루는지 꼼꼼하게 조명하는 이 책은 저자의 오랜 공부의 결실이며,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개인적·사회적 문제들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하고자 하는 애정 어린 노력이다.

동시에 배타성과 폭력성 등 반기독교적 유산을 따끔하게 지적하며 기독교의 회복을 촉구하는 예언자적 외침이기도 하다.

 

56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 이상 간데없이 뻗은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한 것 같은 극적인 종합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분히 종교적이면서도 분명 존재론적이고, 여전히 히브리적이면서도 여실히 그리스적인 기독교적 신 개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하나님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하나님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할 뿐 하나님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으로 모든 존재물을 자기 안에 창조하지요.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며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151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입니다! 시간을 매개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이 하나로 종합된 겁니다. 우리가 이처럼 독특한 사유 방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히브리인들의 사유 내지 언어 사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인 야훼의 속성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며, 나아가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데 디딤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221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갖느냐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렸지요. 만일 당신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될 겁니다. 알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논증을 펼친 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확인하려는 목적보다는 하나님의 현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도들의 이성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257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본인이 뜻한 바는 전혀 아니었지만 회심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는 이미 아카데미학파의 회의주의를 통해 인간 이성의 한계를 깨달았고,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지적 회심을 이루었으며, 철저한 죄의식을 통해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은 그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리는 징표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그의 오랜 망설임이나 갈등과는 달리그것이 차례로그리고 철저하게준비되어 왔기 때문에-때가 이르자 마치 둑이 무너지고 봇물이 터지듯 극적으로 일어났지요.

 

291 다른 모든 이론들이 그렇듯이, 과학 이론도 더는 연역될 수 없는 가정公理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지요. 설사 언젠가 그 궁극적 가정들을 설명할 증거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 새로운 증거의 근거에 대한 물음이 계속 되풀이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그때마다 그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 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답하겠지요.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경험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312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언어놀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자는 이야기는 과학과 종교를 분리함으로써 평화로운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언어놀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우선 과학과 종교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하자는 것이지요. 언어놀이 이론이 과학과 종교의 소통을 막으리라고 우려하는 존 호트도 이 점에 대해서는 과학과 신앙을 제멋대로 섞는 행위를 막으려면, 과학과 신앙의 만남은 신중하고 자의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같은 입장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지요.

 

320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라는 말이 137억 년쯤 전인 아득히 먼 예전의 어떤 시간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물리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태초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 그런 만큼 이 말은 하나님이 시간의 밖에서우주를 창조했고,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야 하지요. 더 정확히 말해 태초는 시간 밖시간 안의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51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시간을 삽니다.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 존재물의 시간과 존재의 시간, 세속적 시간과 신적 시간, 요컨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그때마다 적당히 골라 번갈아 가며 살지요.

355 순간, 순간 사라지는 크로노스를 사는 것, 이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바람처럼 흘러가 버린 과거나 신기루처럼 멀리 있는 미래는 모두 잊고 오직 현재에만 몰두하는 것이 시간의 파괴성과 허무의 늪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현실적인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392 완전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어떻게 불완전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본성 내지 전지전능함과 어긋나지 않는가?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선하지 않든지 아니면 전능하지 않든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가 불완전하게 될 가능성, 곧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에 의해서창조되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무로부터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421 다윈이 발견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잇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은 확실히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생물들의 형태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며, 거기에는 미리 계획한 의도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하지 않는다. 만약 자연의 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눈먼시계공이다. -리커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430 진화론을 한 문장으로 간략하면 이렇습니다.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생존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이 일어난다.

 

456 호트에 의하면, 진화가 창조의 메커니즘 가운데 일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주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자기조직을 하는 본유적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무한자인 하나님의 사랑을 유한자인 우주가 받아들이려면 진화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에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는 설득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473 ’본래적 원인‘causa per se이자 제1원인인 하나님은 우연적 원인‘causa per accidens이자 제2원인인 진화법칙에 자연의 창조와 진행을 맡겼다. 하지만 제2원인 역시 제1원인에 의해 창조되고 조정된다. 요점은, 우연성(맹목적성)은 제2원인의 속성이고 필연성(합목적성)은 제1원인의 속성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시간 밖의 존재이고, 자션은 시간 안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2원인과 제1원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합목적적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연이 맹목적적으로 진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487 “하나님은 세계를 자연법칙이라는 자신의 일반섭리에 맡겨 운용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특정한 유전자적 변이의 기초가 되는 양자역학적 과정 안에 개입, 작용함으로써 자신의 특별섭리를 개진한다. 내 말의 요점은, 우연성(맹목적성)은 일반섭리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속성이고 필연성(합목적성)은 특별섭리의 차원에서 표출되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이 맹목적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합목적적으로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로버트 존 러셀

 

493 완전한 하나님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의 구원입니다. 인간과 세계가 존재 자체, 진리 자체, 선 자체 또는 아름다움 자체인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라는 이야기지요. 바로 이것이 고백록전체를 꿰뚫는 주제이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엉뚱하게도 고백록의 말미에 자서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창조에 관한 신학 이야기를 덧붙였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불완전한 자기 자신이나 세계가 하나님처럼 완전해지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종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이지요.

 

548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정의해 선언했듯이 인간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고요? 일찍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561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경험하고 그에 응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도를 하나님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했습니다.

 

572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 곧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물질적 풍요에 대한 기도는 전혀 안 들어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하는 물질적 풍요가 하나님 보기에그에게 궁극적으로 좋다면,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예정되어 있다면, 그에게 물질적 풍요를 차고 넘치게내려 줄 겁니다. 설사 그가 그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만일 해롭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가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르려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577 요컨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하나님의 섭리는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관건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사람은 마치 욥이나 하박국, 그리고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빌립보서 4:11~12)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란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기도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도록 하며 자족하게 하지요.

 

595 “무한한 체념 속에는 고통 속에서의 위로와 평화와 안식이 있다.” -키르케고르

 

609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또한 바로 이것! 다시 말해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633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은 의롭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징계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선한 자가 복 받고 악한 자가 벌받는 인과응보가 사람의 정의이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이루는 섭리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647 윤리는 보편적인 것이고 믿음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당연히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에, 즉 믿음이 윤리에 종속도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이성적 판단입니다. 이런 이성적·윤리적 판단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고, 아가멤논, 옙다, 브루투스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목숨을 바쳤던 거지요. 그러나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보다, 다시 말해 믿음이 윤리보다 높이 있다는 것이 믿음의 역설이라고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662 기독교 교리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서양문명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이성과 계시라는 서로 전혀 다른 두 토양이 만난 땅에서 자라났습니다.

 

664 그리스적 사고는 탈시간화되어 있고 히브리적 사유는 시간화되어 있지만, 기독교적 사고는 그 둘이 융합되어 있습니다.

 

686 하나님의 섭리가 만물을 창조하고 돌보는 세계에서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을 고통과 불행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이 생겨날 수 있느냐의 질문에 결론부터 먼저 밝히자면, 그것이 자연 악이든 인간 악이든 간에,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 악은 자연법칙에서, 인간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온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입니다.

 

750 오리게네스에게 성부는 플라톤의 선 자체‘, 알비누스의 제일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동일하고, 성자인 말씀은 플라톤의 창조주‘,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정신에 해당하며, 성령은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영혼과 같은 것이지요. 오리게네스 이후 서양문명 안에서는 일자·정신·영혼이 성부·성자·성령과 각각 짝을 맞춰 일치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혼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790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일자]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그 셋은 이렇게 구분되고 이렇게 연합되어 있다!

 

804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하나님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814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나 폭력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포괄성이며, 일치와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렇다면, 또는 그럼에도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해 온 배타성과 폭력성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간략히 답하자면, 그것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 기독교적 유산입니다.

 

825 존재이자 창조주인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 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846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상호내주적 또는 상호침투적 사랑으로 인식하고, 그의 유일성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인 본질공동체적·영원동등적 포괄성과 통일성으로 파악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에 대한 신앙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추구하는 비위계적·비지배적 인간 공동체의 원형으로 나타난다면, 틸리히의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과 그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그러한하나님을 바로 그렇게신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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