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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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힐, 박현주 역, [뿔], 비채, 2012. 

Joe Hill, [HORNS], 2010.

 

  기독교 신앙에서 아직도 명확하게 풀지 못한 명제 중의 하나는 바로 '악'에 관한 문제이다. 신은 완전하여 자신의 백성과는 철저히 구분되면서도, 전혀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주권과 섭리로 그들을 다스린다. 하지만 완벽하다는 신의 통치 아래에는 어느 한 개인의 불행한 삶이 있고,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 하며,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살인마의 등장으로 수백만의 사람이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인류는 알 수 없는 질병과 핵전쟁의 위협... 등 엄청난 악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다. 더욱이 이러한 고난은 신앙의 여부와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찾아오기에 그 의문은 커져만 간다.

 

  몇몇 신학자들은 이것을 신의 측량 불가능성으로, 죄에 대한 심판으로, 교육적인 연단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모두가 파편적인 생각에 머무를 뿐, 누구도 근본적인 악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악을 주관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실체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악을 말할 때에는 '악의 신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릴 때에 신이 아닌, 악의 실체가 찾아온다면...?

 

  뿌리 쪽은 두꺼웠지만 갈고리처럼 위로 구부러지면서 끝이 점점 좁아져 뾰족했다. 뿔은 끄트머리만 빼고는 아주 창백한 살갗으로 덮여 있었는데, 피가 몰린 듯 빨개서 흉했고 양쪽 뿔 끝이 살을 막 뚫고 나오려는 듯했다. 한쪽을 만져봤더니 끝에 감각이 있고 약간 쓰렸다. 손가락으로 양쪽을 쓸어보고 쪽 잡아당기며, 매끈한 살갗 아래 뼈의 밀도가 얼마나 되는지 더듬어보았다.(p.12)

 

  술에 취해 자는 동안에 머리에 뿔 두 개가 자라났다는 설정은, 마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었다는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 연상된다. 작품을 쓴 조 힐의 본명은 조셉 힐스트롬 킹으로 저명한 작가인 스티븐 킹의 아들이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아버지의 명성에 기대고 싶지 않아 영국에서 책을 출간한다고 하니... 문학적 혈통과 독특한 이력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과연 아버지의 명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앞으로가 기대된다.

 

  바짝 마른입으로 성심 성당을 쳐다보았다. 메린이 죽은 이후로는 한동안 저기에, 아니 어떤 성당도 가지 않았다. 대중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고, 다른 교인들이 쳐다보는 눈길도 견디기 어려웠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하느님 쪽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p.48)

 

  사도 요한의 제자로 초기 기독교 교부로 활동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린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이름을 가진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는 하루하루가 절망과 고통의 연속이다. 사랑하는 약혼녀 메린은 옛날 주물공장 근처의 숲에서 강간당한 후에 끔찍하게 살해당했고,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는 용의자로 지목되어 긴급 체포되었다. 다행히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으나 대다수 사람은 그를 진범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절망의 나락에서 그는 매일 술에 절어 온갖 추잡한 짓거리를 해대었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머리에 뿔이 달려 있었다.

 

  뿔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라도 뿔 앞에 서면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살짝 손길이라도 스치면 과거의 기억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뿔을 본 사람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뿔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그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목소리를 마음대로 변조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언어를 다 이해한다. 이외에도 뱀이 따라다니고, 불과 대화를 하며, 신체를 재생할 수 있다. 머리에 뿔이 난 페리시는 맨 처음에 동거녀를, 병원을 찾아 간호사와 의사를, 운전 중에 단속 경찰을, 성당에 들려 신부와 수녀를, 오랜만에 가족의 곁을 찾아가지만... 추악한 인간의 본성과 욕망만이 그를 맞이한다.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페리시는 자신의 뿔을 이용하여 약혼녀의 죽음과 사건의 진실을 찾기로 하는데...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했던 여자가 어떤 종말을 맞았는지 보라. 목에 예수의 십자가를 걸고 있었고 교회에도 성실히 나갔다. 그러나 교회는 모금함에서 그녀의 돈을 갈취하고 면전에 대고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해준 게 없지. 마음속에 예수를 매일같이 모셨고 밤마다 주님께 기도했건만 어떤 은혜를 주었는지 보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수없이 많은 이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위해 울지. 예수만큼 고통받은 사람이 없는 양. 수백만의 사람들이 더 심한 고통을 당하고 기억되지 못한 채 죽어간 적 없는 양. 내가 빌라도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주의 옆구리에 직접 기쁘게 창을 꽂고 그의 고통을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p.301)

 

  악은 성실함과 정확한 타이밍으로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며 다가온다. "너의 영혼을 나에게 주면, 나는 악마의 뿔을 너에게 주겠다."라는 속삭임이 들리는듯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슬픔, 억울한 범죄의 누명, 종교적인 신념 체계는 무너지고, 세상의 모든 이들은 경멸과 증오의 시선을 보낸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위로보다는 외면하는 현실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의 외형은 카프카의 [변신]을 닮았지만, 글을 읽을수록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걸고 악마와 거래를 한 괴테의 [파우스트]가 떠올랐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7-21)

 

  악의 신비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과 원수 갚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것은 신의 영역이고 신의 백성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작가는 "내가 악(惡)을 통해서 묻고자 한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성을 지킨다는 것, 타인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아직 우리에게 가능한가."라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조 힐의 소설 [뿔]은 악마의 뿔이 등장하는 판타지이다.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이 있고,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1장(지옥)은 완벽한 짜임새로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단편 같았다. 올해 읽은 최고의 서론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뿔의 능력을 통한 기억의 전이는 현재 상황과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서술한다. 개인적으로는 1장의 발칙한 상상에 크게 반해 작가의 다른 단편이 매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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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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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디버, 최필원 역, [도로변 십자가], 비채, 2012. 

Jeffery Deaver, [ROADSIDE CROSSES], 2009.

 

  최근에 국내에서 살인 사건에 연류된 용의자들이 수배를 피해 필리핀으로 도주하여,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납치와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마닐라를 거점으로, 피해자들이 인터넷 카페에 올린 여행 계획을 보고 의도적으로(모 기업 파견 직원으로 현지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으로 속여) 접근해 연락처를 교환하는 등 친분을 쌓았고, 여행안내 및 편의 제공을 미끼로 유인하여 현지에서 감금한 뒤에 국내에 있는 가족을 협박해 몸값을 송금받는 수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모바일 SNS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개인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은 자신을 표현하는 좋은 수단이고 소통을 나누는 중요한 도구이지만, 이것을 범죄에 악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혹시 들뜬 마음에 휴가나 여행 계획을 인터넷 공간에 올린 적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빈집 털이범과 납치 강도범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불손한 목적으로 다가와 결정적인 순간에 돌변한다고 하니, 물질적인 피해와 인간적인 배신감은 뒤로하고 생명의 위협에까지 노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 현상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요? (한국에서는 번역 출간이 늦어 아쉬움이 있지만) 제프리 디버의 [도로변 십자가]는 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CBI) 요원인 '캐트린 댄스'가 등장하는 시리즈로(세밀한 묘사, 정교한 플롯, 충격적인 반전을 제공하는 제프리 디버는 천재 법의학자이면서 전신 마비 환자인 '링컨 라임'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와 동작학 전문가로 뛰어난 수사력을 선보이는 '캐트린 댄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를 1년마다 번갈아 집필한다고 합니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다툼이 현실의 공간에서 범죄로 연결되어 연쇄적인 사건으로 번지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갓길의 모래바닥에는 십자가 하나가 꽂혀 있었다. 도로변 기념비. 높이가 45센티미터 정도인 십자가는 누군가가 나뭇가지 두 개를 주워와, 어둠 속에서 꽃집 주인들이 쓰는 철사로 대충 묶어 만든 것 같아 보였다. 십자가 아래에는 짙은 빨간색 장미 몇 송이가 놓여 있었다. 십자가에 걸어놓은, 판지로 만든 동그란 판에는 사고 날짜가 파란색 잉크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p.10)

 

  으스스한 분위기의 월요일,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한 경관은 몬터레이 방향 캘리포니아 1번 고속도로 도로변에서 꽃으로 장식한 십자가를 발견합니다. 교통사고 피해자를 위해 추모하는 기념비로 여겼으나, 내일 날짜가 적혀 있어... 뭔지 모를 사건의 징후가 느껴집니다.

 

  인터뷰와 심문에서의 동작학적 분석은 기선을 다져놓는 과정이다. 기선은 상대가 진실을 얘기할 때 보이는 태도들의 목록이다. 손을 어디에 두는지,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얼마나 자주 마른침을 삼키고 헛기침을 하는지, 말이 항상 '음'으로 시작되지는 않는지, 발로 바닥을 두드리지는 않는지, 몸을 웅크리거나 앞으로 기울이지는 않는지, 답변하기 전에 머뭇거림이 있는지.

  신뢰할 만한 기선이 마련되면 동작학 전문가는 상대가 거짓 답변을 내놓을 이유가 있을 만한 질문을 던져놓고 상대의 반응이 기선을 벗어나는지 지켜본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그에 따른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기선을 벗어나는 제스처나 말투를 쓰게 된다. 댄스가 가장 좋아하는 인용문은 '동작학'이라는 표현을 백 년이나 앞서 사용했던 찰스 다윈이 했던 말이다.

  "억제된 감정은 거의 언제나 몸짓으로 드러난다."(p.52-53)

 

  사건이 일어난 화요일, 도로변 십자가가 놓인 근처의 해변, 한 여학생이 클럽 주차장에서 납치되어 트렁크에 갇힌 채 옮겨 버려집니다. 다행히 밀려든 바닷물은 차 전체를 삼키지 못했고, 극적으로 구조됩니다. 댄스는 사건의 해결을 위해 피해자를 만나는데, 동작학 전문가의 눈은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진실을 찾기 위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를 분석하는데...

 

  "동요가 일면서 글쓴이들은 점점 난폭해져 갑니다. 그리고 결국엔 블로그 전체가 떠들썩한 싸움판이 돼죠."(p.108)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되면 이렇게 다투지 못할 겁니다. 블로그에선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이토록 격렬한 싸움이 며칠, 길게는 몇 주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p.109)

 

  "비평가들은 그냥 말과 사진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주먹만큼이나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죠. 게다가 상처도 훨씬 오래 남습니다."(p.110)

 

  한 개인이 창간해 운영하는 인터넷 신문은 자극적인 기사와 선정적인 특종으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매일 여기에 달리는 수많은 댓글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치열한 논쟁을 넘어서 격렬한 싸움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느 특정인을 상대로 사진과 글을 올려 마녀 사냥식으로 여론을 몰아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터넷상에서의 싸움이 현실에서의 복수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은 아닌지? 수사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그리고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계속해서 사건은 발생합니다.

 

  제프리 디버의 [도로변 십자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 동안에 있었던 연쇄 사건의 기록입니다. 범인은 도로변에 꽃으로 장식한 십자가를 놓아둠으로 범행을 미리 예고합니다. 그리고 경찰의 추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실행하여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동작학 전문가, 컴퓨터 전문가, 범죄 수사 전문가가 모여서... 살아남은 피해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인터넷 사이트의 모든 댓글을 분석하며, 범행 예고와 패턴을 연구합니다. 작가는 누가 범인이고?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으며? 왜 이렇게 되었는가? 라는 서술을 통해 마치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현대 사회의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악플, 중독, 살인... 라는 소재를 조합해서 매번 예상을 뒤집는 전개가 흥미롭고, 논리적이고 개연성 있는 수사 진행이 마음에 듭니다. 다만 한 가지, 인터넷과 현실을 오가는 범죄가 이미 만연한 시대라서 참신성이 약하다는 생각입니다. 출간의 타이밍을 조금만 더 빠르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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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추억 전당포 스토리콜렉터 11
요시노 마리코 지음, 박선영 옮김 / 북로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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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 마리코, 박선영 역, [반짝반짝 추억 전당포], 북로드, 2012. 

Yoshino Mariko, [OMOIDE AZUKARIMASU by Mariko Yoshino], 2011.

 

  동화를 좋아하시나요?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만난 동화는 [피터 팬]입니다. 물론 직접 읽은 것은 아니고요. 당시에 회사를 다니던 사촌 누나가 함께 살았는데, 매일 밤마다 잠들기 전에 조금씩 읽어 주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읽은 동화는... 어느 날,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우연히 옆집에 사는 고등학생 형을 만났습니다.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 한쪽 구석의 서점으로 가더니, 여기에서 하나 골라보라고 해서... 박진감 있는 제목과 중세 유럽풍의 기사들이 그려진 표지가 취학 전 사내아이의 시선을 끌었나 봅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원탁의 기사]였습니다. TV에서도 아서왕의 모험을 내용으로 하는 만화영화가 방영 중이었는데, 책에서는 마녀가 나오지 않고 내용이 크게 다른 것을 보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은 [한국 전래동화]입니다. 동화 자체의 기발한 상상력이 좋았고, 독특한 주인공 캐릭터와 그들이 갖춘 특수한 능력이나 아이템 설정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여 해피엔드의 결말은 순수한 아이의 마음에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저는 동화를 좋아합니다.

 

  요시노 마리코의 [반짝반짝 추억 전당포]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동화 같은 소설입니다. 배경은 현대적이지만, 한 어린아이와 다른 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고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가 등장합니다. 어른들은 모르는 신비한 세계가 펼쳐지고요. 사소한 오해와 작은 사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점점 확대되어 결정적인 순간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합니다. 물론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추억'에 관한 내용입니다.

 

  "전당포라는 건 말이지, 네가 맡기는 것의 보관료로 돈을 지불해. 네가 맡기는 걸 전당품이라고 해. 어렵니?"(p.15)

 

  "네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돈을 갚으면 전당품은 돌려줘. 하지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돈을 갚지 않으면 전당품은 내게 되는 거야. 다시 말해 너는 더 이상 전당품을 돌려받을 수 없어."(p.16)

 

  "네 추억. 정말정말 즐거웠던 추억, 혼나서 억울했던 추억, 쓸쓸했던 추억. 너는 나한테 그런 추억들을 이야기해주는 거야... 그걸 듣고 그 추억에 얼마를 줄지, 값을 정하는 건 내 마음이야. 그러니까 내가 정말 재미있거나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많은 돈을 주고 추억을 보관할 거야. 하지만 네가 비슷한 추억을 몇 개나 갖고 오거나 내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 추억에는 많은 돈을 줄 수 없어."(p.16)

 

  요즘에는 전당포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구지라사키 마을에서는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전당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찾지 않는 바닷가 절벽 아래에는 아이들만이 갈 수 있는 '추억 전당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몰래 이곳에 와서 현대적인 외모를 가진 마법사를 만나 거래를 합니다. 자신의 추억을 맡기고 가격을 매겨 얼마간의 돈을 받아가는 것이죠. 여기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기분을 움직인 추억이어야 한다.

  - 추억을 이야기하면 마법사는 내용에 따라 적당한 가격을 제시한다.

  - 거래가 성사되면 맡긴 추억은 기억에서 지워진다.

  -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돈을 갚으면 추억을 되돌려받을 수 있지만, 돈을 갚지 않으면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다.

  - 추억은 하루에 하나밖에 맡길 수 없다.

  - 인생 최초의 추억은 어떤 내용이라도 8,888엔을 준다.

 

  "그래도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돈을 내고 돌려받으면 되잖아요?"

  ...

  "아이들 대부분이 찾으러 오지 않아... 돈은 있지, 다들. 어릴 때보다는 말이야. 하지만 그 소중한 돈으로 추억을 되찾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추억 같은 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특별한 문제될 일은 없으니까."(p.20)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나날은 과거의 추억보다는 현재의 돈 몇 푼이 더 귀한가 봅니다. 마법사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돈을 갚으면 추억을 되돌려받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자기의 필요에 따라 추억 전당포를 이용합니다. 갖고 싶은 게임기를 사기 위해 찾아오는 꼬마, 소문을 듣고 마법사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중학교 신문부 부장, 왕따 당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찾아오는 소녀, 마법사와의 친분으로 추억을 이야기하지만 절대로 맡기지 않는 소녀... 세월은 흘러 이들에게도 스무 살이 다가옵니다.

 

  "만나고 싶다, 만나고 싶다. 이런 건 우리에게는 없는 마음이야.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

  "어, 그런가요?"

  "그래. 왜냐하면 우리 마법사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거든. 때문에 지금 만날 수 없더라도 앞으로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너희 인간이 누군가를 정말정말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언젠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될 날이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p.42)

 

  유한하기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는 인간과는 달리 영원하기에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마법사... 그녀는 왜 추억을 담보로 하여 아이들만이 찾을 수 있는 전당포를 만들었을까요? 요시노 마리코의 기발한 상상력은 기대할만합니다.

 

  [반짝반짝 추억 전당포]는 어른들이 모르는 바닷가 절벽 아래, 마법사가 사는 한 채의 집, 추억을 맡길 수 있는 전당포,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움, 신기함과 신비로움... 이러한 동화적인 설정이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더구나 허황한 상상이 아니라, 추억과 관련하여 작가의 철학이나 논리가 이야기 속에 잘 녹아 있어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필요하고, 정작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가벼우면서도 잔잔한 이야기가 가슴을 파고들어 진지한 여운을 남깁니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전부 다 소중한 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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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스페셜 에디션 한정판)
하야마 아마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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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야마 아마리, 장은주 역,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예담, 2012. 

Hayama Amari, [29SAI NO TANJOBI, ATO INEN DE SHINO TO KIMETA], 2011.

제1회 일본감동대상 대상

 

  '아홉 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한 어원이나 확실한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9, 19, 29...와 같이 아홉이 든 수로 나이에 이 수가 들면 결혼이나 이사를 꺼린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장황한 제목을 보면서 아홉 수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열을 채우기 이전의 아홉은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채우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기 이전에 번데기의 시간을 보내듯이...

 

  하야마 아마리는 얼굴 없는 작가로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일본에 더 큰 감동을!'이라는 슬로건으로 제1회 일본감동대상에서 대상을 받으며 혜성같이 등장했는데, 필명인 아마리는 '여분'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부여한 1년 치 여분의 삶'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절망 가운데 맞이한 아마리의 스물아홉 생일로부터 치열한 1년 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물아홉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어렸을 때에 꿈꿨던 미래는 그 어디에도 없었고, 나는 안정된 직장과 애인, 돈... 뭐 하나 갖추지 못한 인생에 절망하고 있었다. 절망이 너무나 큰 나머지, 인생을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스스로 '1년의 삶'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스물아홉 생일로부터 1년간의 치열한 기록'이다.(p.12-13)

 

  태어나는 것이 절망인 사람이 있고, 사는 것이 절망인 사람이 있고, 앞으로 살아갈 것이 절망인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하받고 기뻐해야 하는 스물아홉 번째 생일에 왜 서른이 되는 날 죽기로 했을까요? 도대체 어떤 아홉 수의 사연이 있기에 스스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하고 일 년 후의 죽음을 계획할 정도로 무엇이 그토록 절망적이었을까요?

 

  나는 스물아홉이다.

  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

  나는 혼자다.

  나는 취미도, 특기도 없다.

  나는 매일 벌벌 떨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할 만큼만 벌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내가 이렇게도 형편없는 인간이었나?(p.21)

 

  3평짜리 원룸에서 혼자 덩그러니 앉아 맞이하는 생일입니다. 동네 편의점에서 사온 조각 케이크에는 달랑 촛불 하나가 켜져 있습니다. 원래라면 큰 초 두 개와 작은 초 아홉 개를 꽂아야 하지만, 그럴만한 자리가 없습니다. "Happy Birthday to ... me."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가 이렇게 긴 줄 몰랐습니다. 케이크 위에 얹힌 탐스러운 딸기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딸기가 툭 하고 떨어져 바닥에 뒹굽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안 울려고 했는데, 의지와는 상관없이 뜨거운 눈물이 볼 위로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뒤룩뒤룩 살찐 서른 즈음의 외톨박이 여자, 파견사원으로 근무하여 3개월마다 직장이 바뀌는 불안정한 삶... 이것이 아마리의 인생입니다.

 

  스스로 부여한 여명(餘命)은 앞으로 1년.

  더 이상의 삶은 바라지도 않는다. 오직 인생의 마지막 날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아낌없이 불태우리라. 그리고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자.(p.49)

 

  앞으로 1년이면 20대의 막을 내립니다. 50년을 더 산다고 치면, 집세는 제대로 낼 수 있을까? 수도가 끊긴 좁고 어두운 방 안에서 냄새나는 늙은이로 혼자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문득 '고독사'(孤獨死)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죽음조차 혼자 쓸쓸히 맞아야 하는 미래의 모습이 암울하기만 합니다. 그때 부엌에 걸어 둔 칼이 눈에 들어옵니다. 손에 칼을 쥐고 죽으려는데, 무섭고 용기가 없습니다. 그때 TV에서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영상이 보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서른이 되기 직전,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 라스베이거스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생각되는 멋진 순간을 맛본 뒤에 죽는 거야. 카지노에서 전부를 잃어도 상관없다. 인생 전부를 걸고 승부를 펼쳐보는 거다. 그리고 땡, 서른이 되는 날 미련없이 목숨을 끊는다... 이것이 아마리의 계획입니다.

 

  난 미나코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몇 번이고 전율을 느꼈다. 나는 '죽음의 의식(儀式)'으로서 라스베이거스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삶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의 목표와 계획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부러워하기조차 했다. 물론 그녀는 나의 라스베이거스 행에 대해 정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지만, 왠지 전혀 의미가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내가 생각해 왔던 나'를 훨씬 더 괜찮은 존재로 격상시켜 주었다.(p.146-147)

 

  스물아홉 생일에 1년 후 죽기로 한 아마리는 라스베이거스라는 목표를 향해 시한부 삶을 시작합니다. 낮에는 파견사원으로 성실히 근무하고, 저녁에는 긴자의 호스티스로 일합니다. 주말에는 누드모델로 활동하고, 틈틈이 영어공부와 블랙잭을 연습합니다. 인생의 목표는 변화의 시작이었고 활력이 되었습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친구가 생겼고, 바쁜 일정으로 체중이 감소합니다. 서서히 외모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인생의 변화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드디어 1년이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라스베이거스로 떠나는데...

 

  자전적인 이야기로 구성된 이 소설은 읽는 이에게 절망이 무엇이고 희망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고 치열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이, 외모, 직업...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한 여자가 스물아홉 생일에 느껴야 했던 처절한 절망감이 생생합니다. 1년 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화려한 승부를 펼치고 죽겠다는 결심은 여성으로서 자존심을 버리고 호스티스와 누드모델로 살아가는 치열함이 뚜렷합니다. 길고도 짧은 1년의 세월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이 소설과 함께 현실에서도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키케로의 말대로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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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셀러 -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의 반짝이는 사랑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3
아리카와 히로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아리카와 히로, 문승준 역, [스토리셀러], 비채, 2012. 

Arikawa Hiro, [STORY SELLER], 2010.

 

  사람이 죽음 다음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더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 거절이 염려되어 남몰래 사랑하는 이에게 쉽게 고백하지 못하고,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영원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며,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매일 확인하려는 것은 거의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7-8)

 

  사랑은 종교적이든, 정신적이든, 하물며 육체적이든... 모든 사랑은 그 나름대로 소중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성향으로 한국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사랑은 잘 보지 않는다. 한때 '최루성 멜로'라는 말이 있었다. 남녀 간의 가슴 아픈 이별이나 비극을 내용으로 하여 보는 이들의 눈물을 억지로 짜내는... 그 영향 때문일까? 멜로는 감정의 낭비가 크고, 비록 허구이지만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어서 일부러 외면하는 장르이다. 그런데 우연히 아리카와 히로의 [스토리셀러]를 읽게 되었다. 처음으로 만나는 작가인데, 내 주변의 모든 블로그 여성 이웃들은 작가에 대해서 호평이다. 독특한 문체와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가독성으로...

 

  "나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책을 읽어왔지만 네가 쓴 글이 가장 재미있었어. 그래서 지금 엄청나게 흥분한 상태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쓴 사람이 프로는 아니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것에. 읽기만 하는 사람인 내가 처음으로 쓰는 사람을 만난 거야. 더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가진 사람을. 그러니까 네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채 글을 써왔다면, 나는 네 첫 팬인 셈이야."(p.34)

 

  여기에는 출생의 비밀, 천문학적인 유산, 후계자 경쟁, 심각한 삼각관계, 음모와 배신, 그리고 복수... 등의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 단 두 사람이 나온다. 간혹 몇몇 주변인이 등장하지만, 이 둘의 이야기를 보충 설명할 뿐이고 모든 이야기는 두 사람을 통해서 진행된다. 그리고 조금은 특별하고 흥미로운 구조로 되어 있는데, 남자의 시선에서 쓰인 여자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이드(Side A)를 이루고, 여자의 시선에서 쓰인 남자의 이야기가 다른 사이드(Side B)를 이룬다. 즉 두 개의 중편이 서로 연관되어 하나의 입체적인 작품을 완성하였다.

 

  "너는 날개를 갖고 있어. 나는 네가 나는 모습이 보고 싶어."(p.64)

  "날든 날지 못하든 너는 잃어버릴 게 아무것도 없어. 나는 네 영원한 팬이니까."(p.65)

  "네가 날기를 원한 건 나야. 너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난 거잖아. 지금, 날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내려오지 않아도 돼. 날았다는 기쁨만 맛보게 하고 미래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내려오게 하다니, 나를 그런 이기적인 남자로 만들지 말아줘."(p.69-70)

 

  Side A에서... 남자는 여자를 같은 디자인 회사에서 동료로 만났다. 모두가 디자이너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틈에서 유일하게 혼자 충실한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문어체를 사용하는 그녀, 남자는 컴퓨터에서 여자가 쓴 소설을 읽게 된다. 그리고 한순간에 매료되어 그녀의 첫 번째 팬이 되는데...

 

  "일을 그만두든지 이대로 죽음에 이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p.9)

  "부인의 뇌는 쓰면 쓸수록 급격하게 노화합니다."(p.9)

  "요컨대 부인은 사고(思考)하는 대신 수명을 잃게 됩니다."(p.10)

  "치료 방법은 없습니다. 복잡한 사고를 강요하는 현재 직업을 그만두고, 일상생활에서도 가급적 평범한 사고만 하는 게 좋습니다... 가능하다면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하죠."(p.10)

 

  연애하며 소설을 쓰고, 결혼하여 소설을 쓰고, 전업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고...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데, 여자는 병에 걸린다. 뇌를 쓰면 안 되는, 복잡한 사고를 멈추어야만 하는 치사성뇌열화증후군으로 소설을 계속 쓸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서 그만둘 것인가? 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스토리셀러>는 언제 책으로 나오는 거야?"

  ...

  "단편이라기보다 중편 분량이잖아. 그거 한 편이 책 반 정도를 잡아먹어버리거든. 그렇게 되면 책 구성에 균형이 깨진다면서 항상 제외됐어. 그리고 담당 편집자가 그 이야기에 정말 애착을 갖고 있어. 소설의 느낌을 잘 살려서 만들고 싶다면서 같은 분량에 내용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써달라고... 말하자면 그게 책이 되려면 중편 하나가 더 필요한 거야. 책으로 만들고 싶다면 하나 더 써라. 이런 상태지."

  "독자로서 요구할게. 써."(p.151)

 

  Side B에서... 여자는 같은 직장에서 소설을 읽는 남자를 만난다. 남들 몰래 눈물을 흘리며 여자의 소설을 읽는 남자. 여자는 자신이 쓴 소설임을 알리며 둘 사이는 가까워진다. 결혼하고 남자는 절대 지지자가 되어 여자에게 전폭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마치 아리카와 히로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또는 작가로서 바라는 것을 소설 속 인물에게 투영해 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후원이다.

 

  "돈이나 노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가질 수 없는 걸 나는 가졌거든.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인생이라니,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실제로 작품에 내 아이디어가 반영된 적도 있고. 이건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즐거움인데 너는 모르겠구나. 쓰는 사람이라."

  "오히려 힌트를 주거나 조언 같은 걸 해줘서 나만 더 이득 보는 느낌인걸."(p.167-168)

 

  남자와 여자로, 작가와 독자로, 남편과 아내로,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의 아름다운 조화는 어느 날 갑자기 조금씩 깨어지기 시작한다. 남자의 교통사고와 췌장암의 발병으로 시련이 다가오는데...

 

  [스토리셀러]는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마지막까지 둘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여자와 마지막까지 첫 번째 독자가 되어 둘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려질 정도로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작가의 시원시원한 글솜씨는 사랑의 알콩달콩함과 이별의 애절함을 감성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입체적인 구조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Side A와 B는 서로 현실과 소설, 소설과 소설 속의 소설 같은 느낌을 주고받는데, 책을 읽으며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소설일까? 어느 것이 소설이고 어느 것이 소설 속의 소설일까? 라는 기분 좋은 혼란을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일본소설의 매력은 가벼움과 소재의 다양함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만족할 수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즐거움을 다시 찾은 기분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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