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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조 힐, 박현주 역, [뿔], 비채, 2012.
Joe Hill, [HORNS], 2010.
기독교 신앙에서 아직도 명확하게 풀지 못한 명제 중의 하나는 바로 '악'에 관한 문제이다. 신은 완전하여 자신의 백성과는 철저히 구분되면서도, 전혀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주권과 섭리로 그들을 다스린다. 하지만 완벽하다는 신의 통치 아래에는 어느 한 개인의 불행한 삶이 있고,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 하며,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살인마의 등장으로 수백만의 사람이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인류는 알 수 없는 질병과 핵전쟁의 위협... 등 엄청난 악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다. 더욱이 이러한 고난은 신앙의 여부와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찾아오기에 그 의문은 커져만 간다.
몇몇 신학자들은 이것을 신의 측량 불가능성으로, 죄에 대한 심판으로, 교육적인 연단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모두가 파편적인 생각에 머무를 뿐, 누구도 근본적인 악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악을 주관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실체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악을 말할 때에는 '악의 신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릴 때에 신이 아닌, 악의 실체가 찾아온다면...?
뿌리 쪽은 두꺼웠지만 갈고리처럼 위로 구부러지면서 끝이 점점 좁아져 뾰족했다. 뿔은 끄트머리만 빼고는 아주 창백한 살갗으로 덮여 있었는데, 피가 몰린 듯 빨개서 흉했고 양쪽 뿔 끝이 살을 막 뚫고 나오려는 듯했다. 한쪽을 만져봤더니 끝에 감각이 있고 약간 쓰렸다. 손가락으로 양쪽을 쓸어보고 쪽 잡아당기며, 매끈한 살갗 아래 뼈의 밀도가 얼마나 되는지 더듬어보았다.(p.12)
술에 취해 자는 동안에 머리에 뿔 두 개가 자라났다는 설정은, 마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었다는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 연상된다. 작품을 쓴 조 힐의 본명은 조셉 힐스트롬 킹으로 저명한 작가인 스티븐 킹의 아들이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아버지의 명성에 기대고 싶지 않아 영국에서 책을 출간한다고 하니... 문학적 혈통과 독특한 이력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과연 아버지의 명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앞으로가 기대된다.
바짝 마른입으로 성심 성당을 쳐다보았다. 메린이 죽은 이후로는 한동안 저기에, 아니 어떤 성당도 가지 않았다. 대중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고, 다른 교인들이 쳐다보는 눈길도 견디기 어려웠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하느님 쪽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p.48)
사도 요한의 제자로 초기 기독교 교부로 활동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린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이름을 가진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는 하루하루가 절망과 고통의 연속이다. 사랑하는 약혼녀 메린은 옛날 주물공장 근처의 숲에서 강간당한 후에 끔찍하게 살해당했고,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는 용의자로 지목되어 긴급 체포되었다. 다행히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으나 대다수 사람은 그를 진범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절망의 나락에서 그는 매일 술에 절어 온갖 추잡한 짓거리를 해대었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머리에 뿔이 달려 있었다.
뿔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라도 뿔 앞에 서면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살짝 손길이라도 스치면 과거의 기억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뿔을 본 사람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뿔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그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목소리를 마음대로 변조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언어를 다 이해한다. 이외에도 뱀이 따라다니고, 불과 대화를 하며, 신체를 재생할 수 있다. 머리에 뿔이 난 페리시는 맨 처음에 동거녀를, 병원을 찾아 간호사와 의사를, 운전 중에 단속 경찰을, 성당에 들려 신부와 수녀를, 오랜만에 가족의 곁을 찾아가지만... 추악한 인간의 본성과 욕망만이 그를 맞이한다.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페리시는 자신의 뿔을 이용하여 약혼녀의 죽음과 사건의 진실을 찾기로 하는데...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했던 여자가 어떤 종말을 맞았는지 보라. 목에 예수의 십자가를 걸고 있었고 교회에도 성실히 나갔다. 그러나 교회는 모금함에서 그녀의 돈을 갈취하고 면전에 대고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해준 게 없지. 마음속에 예수를 매일같이 모셨고 밤마다 주님께 기도했건만 어떤 은혜를 주었는지 보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수없이 많은 이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위해 울지. 예수만큼 고통받은 사람이 없는 양. 수백만의 사람들이 더 심한 고통을 당하고 기억되지 못한 채 죽어간 적 없는 양. 내가 빌라도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주의 옆구리에 직접 기쁘게 창을 꽂고 그의 고통을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p.301)
악은 성실함과 정확한 타이밍으로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며 다가온다. "너의 영혼을 나에게 주면, 나는 악마의 뿔을 너에게 주겠다."라는 속삭임이 들리는듯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슬픔, 억울한 범죄의 누명, 종교적인 신념 체계는 무너지고, 세상의 모든 이들은 경멸과 증오의 시선을 보낸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위로보다는 외면하는 현실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의 외형은 카프카의 [변신]을 닮았지만, 글을 읽을수록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걸고 악마와 거래를 한 괴테의 [파우스트]가 떠올랐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7-21)
악의 신비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과 원수 갚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것은 신의 영역이고 신의 백성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작가는 "내가 악(惡)을 통해서 묻고자 한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성을 지킨다는 것, 타인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아직 우리에게 가능한가."라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조 힐의 소설 [뿔]은 악마의 뿔이 등장하는 판타지이다.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이 있고,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1장(지옥)은 완벽한 짜임새로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단편 같았다. 올해 읽은 최고의 서론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뿔의 능력을 통한 기억의 전이는 현재 상황과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서술한다. 개인적으로는 1장의 발칙한 상상에 크게 반해 작가의 다른 단편이 매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