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대소동 - 묫자리 사수 궐기 대회
가키야 미우 지음, 김양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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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키야 미우, 김양희 역, [파묘 대소동], 문예춘추사, 2024.

Kakiya Miu, [HAKAJIMAI RHAPSODY], 2023.

우리는 혼인 후에 각자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부부별성제도'를 따르고 있다. 반면, 일본은 민법 제750조에 의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부부는 남편 또는 아내의 성씨 중 하나를 선택해 동일한 성씨를 사용해야 하는 '부부동성제도'를 채택하고 있고, 실제로 약 96%는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시댁의 일원이 되거나 아내를 따라 데릴사위가 되면, 가문의 묘지를 물려받아야 한다. 가키야 미우의 소설 [파묘 대소동]은 차별적인 법령과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이 여성에게 강요되는 현실을 꼬집는다.

"어머니가 병원에 누워계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대. 마쓰오 가문의 묘에는 죽어도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p.16)

어머니의 장례식 후 사십구재를 앞두고, 어머니는 가족 묘지가 아니라 따로 수목장을 원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을 관공서의 부시장으로 보필한 기품 있는 현모양처였고, 시대를 고려해도 시집살이와 가정불화는 없었는데, 어머니는 죽어서까지 마쓰오 집안의 묘에는 들어가기 싫었던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배신감과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분명 생각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여자인 내가 사토루의 성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을 고민하거나 의식해본 적조차 없겠지. 결혼하면 여자가 남자의 성으로 바꾸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니까.(p.21)

딸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라야 하고, 집안의 묘지를 돌봐야 하는 부담감으로 고민한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생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는 묘지라니... 더구나 일가친지를 초대해 성대하게 혼례를 치르고자 하는 부모의 바람과 다르게 소박하게 예식을 하고자 하는 당사자의 마음은 엇갈린다. 누구의 성씨를 따를 것인가? 어떻게 결혼식을 올린 것인가? 를 두고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생각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그대로 둬도 지옥, 이장도 지옥이다.(p.248)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 도쿄와 같은 대도시에서 자리를 잡은 지 수십 년이다. 가고시마에 있는 고향 집과 가족 묘지는 관리가 어렵고, 의무와 책임은 무겁다. 지방 사찰은 도시하고 다르게 폐쇄적이고, 인구가 줄어드는 마을에서 단가의 후원은 필수적이다. 도쿄 근처의 묘지로 이장하는 것은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 어머니가 수목장으로 해달라고 하셨을 때 형님은 그 자리에서 승낙하신 거죠?

- 그럼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 왜냐면 죽으면 인간은 '무(無)'니까요.

- 형님은 사후세계를 믿으세요?(p.89)

"한번 묘를 만들면 쉽게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요. 마쓰오 씨는 훌륭한 묘를 만듦으로써 자존감이 충족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마음이 아이들에게까지 계승된다고는 할 수 없어요. 반대로 성묘도 보시도 부담스러워서 묘에서 해방되고 싶은 젊은 세대가 요즘은 많아진 것 같습니다."(p.151-152)

"묘비에 혼을 넣는 등의 의식은 원래 불교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니까요. 불교의 가르침은 색즉시공이에요."

"색즉시공, 이라면...... 어떤 의미였지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형태는 일시적인 것으로, 본질은 비어있으며 절대 불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비어있다고요?"(p.316)

결혼을 주저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키야 미우는 남편을 따라 성씨를 바꿔야 하고, 가문의 묘지를 이어받아야 하는 문제에 주목해 여성의 입장을 대변한다. 과거에는 짧은 생을 애도하고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가족 묘지를 마련하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자식(특히 며느리)에게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하고 다른 특수한 상황이고, 여성주의를 가볍게 포장하고 있어서 몰입하기 어려웠다. 어떤 주장을 하든지 이야기가 흥미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부부는 반드시 같은 성씨를 써야 한다는 법이 제정된 배경이나, 제도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하면 어땠을까? 또한 등장인물 간의 갈등은 제대로 봉합되지 않는다. 사랑과 신뢰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며 함께 성장하고, 책임과 헌신으로 서로를 돌보는 것이 결혼의 본질이라는 생각인데, 이러한 가치를 외면한 채 성씨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다. 결국 혼담은 깨지고, 삼십 대 후반의 여자는 자신을 이해하는 아홉 살 연하의 남자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일반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아 매우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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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아일랜드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임희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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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요시 리카코, 임희선 역, [배틀 아일랜드], 하빌리스, 2025.

Akiyoshi Rikako, [MUJINTO ROYALE], 2023.

무인도에 딱 세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 식량과 물과 약품을 준비하겠다는 현실적인 대답이 있을 수 있고, 고급 위스키와 값비싼 시가와 반려견을 데려가겠다는 개성 있는 답변이 있을 수 있다. 무엇을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품성과 성격, 성향과 기호를 확인할 수 있다. 도심에서 벗어난 동네의 작고 어두컴컴한 지하 술집 '아일랜드'에 모인 손님들은 무인도 여행에 관해서 대화를 나눈다. 왜 하필이면 무인도인가? 큰 소리로 음악을 들으며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좋은 위스키를 마시고 싶어서, 사람에게 치여 속 뒤집히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바다낚시와 스노클링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아니, 이건 처음부터 자기가 고른 세 가지 아이템으로 지낸다는 콘셉트니까."

"그렇지. 물론 지금처럼 9명이 함께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제조건에서 어긋나는 거지만 말이야. 원래는 무인도에 혼자 있다는 설정이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같이 가도 서로 나눠 쓰기는 없는 걸로."(p.37)

다 같이 무인도에 가 볼까? 술집 마스터와 한 쌍의 커플을 포함한 아홉 명은 뜬구름 같은 계획을 실행하기로 한다. 여행 기간은 알아서 하는 것으로 하고, 각자 세 가지 아이템을 준비한다. 기능이 있는 물건은 한 개의 아이템으로 취급한다. 혼자서 가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아이템은 공유하지 않는다. 본토에서 배로 6시간 떨어진 아름다운 섬, 마치 낙원에 온 것 같은 기분, 도착한 첫날은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 오무라 슈이치(30대 샐러리맨, 리리코의 약혼자) : 리리코, 에어 매트리스, 고기(차슈)

- 이시하라 리리코(부잣집 딸, 백수, 슈이치의 약혼자) : 슈이치, 선크림, 메이크업 박스

- 유우 고이치(30대 유튜버) : 스태빌라이저가 내장된 비디오카메라, 태양열 충전기가 달린 배낭, 서바이벌 나이프

- 가와카미 고로(30대 영업직, 럭비 선수 출신) : 낚싯대, 만능 나이프, 술(오니고로시 청주)

- 이츠키 다이스케(공무원, 서바이벌 게임 마니아) : 공기총, 모조 장검, 술(이이치코 보리소주)

- 요시다 노보루(35세 과학 학원 강사) : 스노클링 마스크, 오리발, 고기(로스트비프 덩어리)

- 스에히로 게이고(대학생, 캠프와 야외활동을 좋아함) : 서바이벌 나이프, 미니 오토바이, 술(블랙닛카 위스키)

- 아미노 마모루(40대 의사) : 쌍안경, 고기(로스트한 양고기), 술(야마자키 위스키)

- 마스터(술집 아일랜드의 주인, 상속받은 무인도의 소유자) : 술(보모어 위스키), 육포, 마른안주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술집 마스터와 타고 온 배가 사라진다. 그리고 유우의 카메라에 담긴 배틀 로열의 메시지를 보고 모두는 혼란에 빠진다. 무인도에서 서로를 죽이는 서바이벌 게임을 해야 한다. 상금은 10억 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만이 섬에서 나갈 수 있다. 여덟 명은 가지고 있는 아이템의 유용성으로 편을 가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은 무너지고 상금에 욕심을 부린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이어서가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이 그룹에 들어오지 못한 유우가 이츠키랑 한패가 되는 겁니다."

"아......!"(p.229)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서는 나이프와 낚시 도구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물건이 있고, 메이크업 박스처럼 불필요한 물건이 있다. 아웃도어 활동과 캠핑에 익숙한 사람이 있고, 자연과학과 의학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바다에는 독을 품은 물고기가 살고, 숲에서는 독버섯이 자란다. 공복과 탈수로 머리가 아프고, 극한 긴장과 수면 부족으로 피로한 상황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상대를 속이고 속는 심리전이 펼쳐진다.

최후의 승자는 누구? 무인도를 배경으로 각자가 준비한 세 개의 아이템으로 생존 경쟁을 벌인다는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등장하는 인물은 직업과 취미적인 특성으로 개성을 잘 드러낸다. 여덟 사람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물리적인 대결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치열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편을 가르고, 배신하고, 아이템을 빼앗고, 함정을 파고, 지식과 능력을 활용해서 상대를 하나씩 제거하는 과정은 논리적이다. 복선을 좀 더 심어두었더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한여름에 가볍게 읽기에는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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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크라임 이판사판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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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도 아라타, 이규원 역, [젠더 크라임], 북스피어, 2025.

Tendo Arata, [GENDER CRIME], 2024.

몇 년 전에 대학생들하고 대화하면서... "남자가", "여자가"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성 역할을 규정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내가 살아온 세상하고 다른 세상에 사는 느낌이었다. 덴도 아라타의 소설 [젠더 크라임]은 성폭력 범죄를 수사하는 경찰 소설이고, 젠더 문제를 다루는 사회파 미스터리이다. 국내는 젠더 이슈를 넘어서 갈등으로 번지는 상황이라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인데, 일본은 우리하고 사정이 많이 다른가 보다. 성범죄의 인식과 경각심이 부족하고, 여전히 차별적인 요소가 만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코스라면, 기수대에서 본청 수사 1과로 가는 거?"

시노자키는 다테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백미러로 보고, "여자는 현실적으로 힘들걸. 관할서 형사과라면 몰라도 본청에서는 수사본부가 설치되면 도장에서 칼잠 자야 하고, 한 달 정도는 귀가하지 못하는 세계니까."

구라오카가 어깨너머로 돌아보니 다테하나는 분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p.41)

경찰 조직에서... 강력계는 일의 특성상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여성의 진입 장벽이 높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 경관을 부경(婦警)이라 부르기도 하고, 회식 자리에서 술을 따르지 않는다고 철벽녀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하치오지 남서 경찰서의 구라오카 나오야는 경부보로 젊었을 때 올림픽 유도 선발전에 나갔을 정도로 박력 넘치는 형사이다. 본청 수사 1과에서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어떤 이유로 좌천되어 관할서 형사로 근무하고 있다. 관내에서 나체 상태의 시신이 발견되는데, 양손이 뒤로 결박된 중년 남자이다.

시바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알몸이면 당연한 절차죠. 말하자면 관례입니다. 그런데 남자 사체일 경우에는 왜 그 방향으로 조사하지 않을까요. 강간 여부를 의심하기는커녕 의식하지도 않았겠죠. 치한이니 강간이니 하면 일단 여성이 피해자일 거라고 단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인데, 젠더 바이어스(성 역할에 대한 편견)의 전형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남성도 치한한테 당하고 강간 피해도 있고...... 그렇죠, 구라오카 경부보?"(p.53)

수면제로 재우고 교살한 사건... 즉시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본청 수사 1과 형사와 관할서 형사가 짝을 이룬다. 구라오카는 시바 린리라는 젊은 경부보와 조를 이루는데, 그는 상부의 수사 방침과는 상관없이 자기 추리를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매번 그가 지목한 용의자가 진범으로 검거되어 똑똑하지만, 조직에서 미움받는 괴짜이다. 법의학교실 해부실에서 알몸으로 발견된 중년 남자의 시신을 부검할 때 강간 검사를 요구한다. 그리고 항문에서 "눈에는 눈"이라고 적힌 쪽지를 발견한다.

피해자를 저항할 수 없는 상태, 혹은 의식을 잃은 상태로 만들어 놓고 성교나 외설적 행위를 저지르는 범죄는 비친고죄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고소가 없어도 체포하고 기소할 수 있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하고 피해자가 재판에서 증언하지 않으면 검찰로서도 기소를 망설이게 된다.

때문에 피고의 부모나 관계자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피해자 측에 합의금을 제시하고, 만약 재판까지 가면 폭행당한 전후 상황을 낱낱이 재현해야 한다느니,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비난 여론이 일어날 거라느니 위협한다. 공개재판인 데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쉽게 비방과 중상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정신적인 부담이 크고 2차 피해의 리스크가 있지만, 설사 피고가 유죄가 되더라도 초범이면 대개는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합의금 받고 재판을 피한 후 해외여행이라도 하면서 상처를 씻어내는 게 어떠냐는 식으로 압박하는 것이다.(p.107-108)

함무라비 법전의 인과응보 메시지... 피해자 가족을 조사하니 아들이 준강간 혐의로 집행유예 상태이다. 남자 대학생 네 명이 여자 대학생 한 명을 노래방에서 성폭행한 사건, 가해자는 전부 기소되지 않았다. 변호사의 합의 강요와 경찰의 2차 가해, 더구나 정치권까지 뒷배로 작용해서 한 인생과 가정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다. 피해자는 계속해서 사죄를 요구하며 가해자를 협박한 정황이 있고, 가해자는 아무런 사과 없이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다. 결국 합의금 몇 푼으로 피해자의 의지가 꺾이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친한 정치가의 청탁이 있었다지만, 국가 최고 지도자를 생각해 알아서 처신한 거라고 해도, 자기 장래도 돌보지 않고 그런 청탁을 들어주고 말았을까...... 그것은 여자라는 성을 무의식중에 낮춰보기 때문이겠죠. 성범죄라고 해도, 겨우 그것쯤이야,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살인사건이었다면 체포영장 집행을 중지시켰겠습니까?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영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라는 생각을 했다면 최소한 체포는 진행했을 것이고, 그 뒤는 제대로 된 경찰의 역할대로 검찰과 재판에 맡겼겠지요. 이것은 부장님만이 아니고 정치가만도 아니고 이 나라의 바탕에 있는 우리의......"

구라오카는 제 가슴을 쳤다. "우리의, 죄입니다."(p.283)

성격이 상반된 두 형사... 헛심이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강한 구라오카와 합리적이지 않은 낭비를 줄이고 방향 전환이 빠른 시바는 곳곳에서 티격태격이지만, 결국 서로를 보완하고 협력해서 사건의 진실에 다가선다. 여성과 여성의 성을 무의식중에 낮춰보는 사회적 분위기, 성범죄 피해자의 헤아릴 수 없는 고통, 범죄자의 파렴치함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큰 줄기의 사건 외에 곁가지가 많아서 아쉬움이 있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건과 성격이 다른 두 주인공은 매력적이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젠더 감수성에 관한 메시지는 좋지만, 이렇게 저렇게 덧붙인 이야기가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 10년 전에 책이 나왔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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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 - 뱃님 오시는 날
요시무라 아키라 지음, 송영경 옮김 / 북로드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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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무라 아키라, 송영경 역, [파선, 뱃님 오시는 날], 북로드, 2025.

Yoshimura Akira, [HASEN], 1982.

원작은 1982년에 출간한 오래된 소설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요시무라 아키라는 기록문학과 역사문학의 대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번역 출간을 하면서 호러에 초점을 두고 홍보(?) 하기보다는 근대 이전의 일본 어촌을 조명한 기록문학이라는 것을 강조하면 어땠을까? 공포 소설의 재미를 넘어서는데, 글 솜씨와 구성이 아주 좋다. 가난한 어촌에서 아홉 살 소년 이사쿠의 눈으로 본 세상은 생의 투쟁으로 치열하고 광기 어린 집착이 있다.

사나워진 바다는 때로 마을에 생각지 못한 은혜를 베푼다. 이는 척박한 밭이나 갯바위에서 얻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하여 수년간 마을에서 고용 하인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은혜는 매우 드물게 찾아오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고 산다. 단풍은 바다의 축복이 마을에 임할 가능성이 높은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p.17)

남쪽은 해안 절벽이고, 북쪽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가로막힌 고립된 마을의 열일곱 가구, 매화꽃이 피면 남자들은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는다. 계절에 따라 정어리, 오징어, 꽁치, 문어를 수확하고... 여자들은 잡아온 생선을 말리고, 갯바위에 나가 조개와 해초를 채취한다. 산비탈을 개간해서 곡식을 심지만, 늘 먹을 것이 부족하다. 병자의 죽음을 입 하나 더는 것으로 여길 정도이니... 그래서 장성한 남자와 여자는 항구의 고용 하인으로 팔려가는데, 그러면 남은 가족은 잠시나마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거친 바다의 은혜! 산이 단풍으로 물들면, 어민들은 하나같이 뱃님을 기다린다.

사헤이에 따르면 뱃님은 마을 앞 암초가 많은 바다에서 좌초한 배를 말한다. 뱃님에는 보통 음식, 집기, 기호품, 천 등이 잔뜩 실려 있고, 이 물건들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충분히 윤택하게 해준다. 또한 암초와 파도에 부딪혀 바닷가로 밀려온 파선의 목재는 집을 수리하거나 가구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겨울을 앞두고 열리는 마을 의식은 항해하는 배가 암초에 좌초되어 부서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한다.(p.19-20)

파선으로 떠내려온 배, 마을 앞 바다에 좌초된 상선... 그 안에는 쌀을 비롯해서 평생 누려보지 못한 것이 들어 있다. 몇 년간은 굶주리지 않아도 되고, 가족 중 누군가가 팔려가는 일도 생기지 않는다. 겨울이 오고 북서풍이 불면, 파도는 높아지고 파선의 기회는 온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뱃님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르고, 소금 굽기를 시작한다. 파선은 뱃님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고립된 마을의 비밀로 자리 잡았다.

"소금 굽기는 뱃님이 해변 가까이 다가오시라고 기원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사쿠는 다시 캐물었다.

"기원만 하는 게 아니야.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해변으로 유인하기 위해서지."(p.38)

이사쿠의 아버지는 3년 계약으로 팔려 갔고,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와 두 동생을 돌봐야 한다. 그는 마을의 관습대로 해변에서 소금 굽기를 하는데, 일을 배우면서 한겨울의 소금 굽기는 해변의 암초로 배를 유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센 파도에 휩싸인 배는 소금 굽는 불빛을 보고 해변으로 배를 돌리지만, 결국 좌초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불행이 행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뱃님맞이는 이 마을에는 최고의 경사인 반면 이웃 마을을 비롯한 다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극형을 받아 마땅한 악행인 것 같다. 만일 뱃님이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마을은 소멸해서 암초투성이 바다에 면한 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뱃님이 존재하기에 대대로 선조들이 이 땅에 살았고 자신들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p.150-151)

축복이 악행으로 여겨지는... 파선으로 뱃님이 오고, 마을은 잠시 풍요롭게 된다. 집집마다 들뜬 분위기, 험상궂은 표정은 사라지고 눈빛마저 온화해진다. 이사쿠는 이러한 마을의 오랜 관습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굶주림과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윤리 의식이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뱃님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뱃님이 없었으면 진작에 사라졌을 마을과 사람들... 또다시 뱃님이 오고,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불행을 맞이한다.

기록문학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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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온 택배
히이라기 사나카 지음, 김지연 옮김 / 모모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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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이라기 사나카, 김지연 역, [천국에서 온 택배], 모모, 2024.

Hiiragi Sanaka, [TENGOKUKARA NO TAKUHAIBIN], 2022.

소재의 다양성, 기발한 전개, 가벼운 내용으로 일본의 힐링 소설을 좋아한다. 어느 순간 감동은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미스터리의 긴장감도 매 순간일 수 없기에 편견을 두지 않고 읽는다. 히이라기 사나카의 소설 [천국에서 온 택배]는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듯이... 고인이 보낸 택배라는 소재로 받는 사람과 독자에게 전하는 행복 메시지이다. 과거의 앙금을 떨쳐내고 새로운 희망을 선물하는 4개의 단편 모음이다.

우리들의 작은 집

오셀로의 여왕

밤 10시의 숨바꼭질

마지막 과외 활동

에필로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해마다 생일 선물을 보내 달라는 엄마, 연을 끊은 딸에게 귀금속을 유품으로 남기려는 어머니... 사연은 각양각색이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은 천국택배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마지막 택배를 보낸다. 여기에는 무한한 사랑이 있고, 아직 풀지 못한 오해가 있다. 천국택배의 나나호시는 의뢰인이 생전에 지정한 사람에게 유품을 배달한다.

자신이 이 집에 혼자 남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좋네요. 친구들끼리 살면 정말 재밌을 거 같아요."

"말해 뭐 해. 나이가 들면 알 거야.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나는 그때까지 살아왔던 시간보다 예순이 돼서 친구들과 이 집에서 살았던 10년이 훨씬 행복했어. 살면서 제일 즐거운 시기였지. 언제가 청춘이냐고 묻는다면, 난 육십 대라고 대답할 거야."(p.30)

아라가키 유코는 쓰레기 더미에서 산다. 주위에서 저주받은 집, 불길한 집, 마귀할멈으로 불리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같이 살던 덴코와 가나는 일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셋은 노년에 이르러 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 '우리들의 작은 집'이라고 이름 짓고, 정원을 꾸미고, 노래를 부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유코 혼자 남아 쓸쓸히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 천국택배는 그녀에게 두 친구가 남긴 카세트와 녹음된 테이프를 배달한다.

나쁜 손녀라는 자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야에가 자기 인생의 훼방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이 집이 마음에 안 들면, 한번 해봐.

할 거야. 절대 포기 안 해.(p.83)

스미이 후미카는 시골에서 산다. 맛있는 음식, 깨끗한 공기,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이지만, 도시에서 태어났더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한번 해봐"라는 할머니 야에의 목소리... 열심히 해보라는 응원이 아니라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느냐는 비아냥을 들으며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고향에서 취직하고, 같은 지역의 사람과 결혼해 본가 근처에서 사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폐쇄적인 분위기가 싫었다. 할머니가 인생의 훼방꾼이라는 생각, 후미카는 어떻게든 대학은 도쿄에서 다니기로 결심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천국택배는 그녀에게 휴대용 게임기를 배달한다.

그날 밤 숨바꼭질에서 진 내 잘못이다. 바로 옆을 살펴보지 않았던 내가 나빴다. 그토록 가까이 있었는데.(p.129)

도모야마 유와 미키다 마호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둘은 숨바꼭질을 하면서 놀았는데, 유가 술래를 할 때는 숨은 마호를 절대로 찾지 못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가서도 둘의 숨바꼭질 놀이는 계속되었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좋아했지만, 전하지 못한 마음... 뒤늦게 마호를 찾았을 때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사십 대가 되었고, 유는 매일 저녁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고 늦게 돌아간다. 천국택배는 그에게 마호가 남긴 편지를 배달한다.

스무 살이 되면 서로 축하하면서 다 같이 제방에 모여 야외 수업을 하자던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너희끼리 한번 모였으면 좋겠다.(p.177)

고등학교 때 과학부를 지도했던 사나다 미쓰히코 선생님의 편지가 천국택배를 통해서 전해진다. 사고뭉치, 천덕꾸러기, 형편없는 얘들이 모여 대충 활동했던 과학부 동아리... 부장이었던 오사베는 설탕 1kg을, 말이 많은 구로세는 어린이용 비닐 풀장을, 부모의 지나친 간섭을 받는 이케다는 대형 연을, 폭력 사건에 휘말렸던 후쿠이에는 카메라와 삼각대를, 야구를 하다가 그만둔 와카마쓰는 장갑을 준비해서 3월 20일 모교 근처의 제방에서 모임을 가지라는 내용이다. 이상한 준비물, 선생님이 남긴 수수께끼의 답은 무엇일까?

고인이 남긴 유품을 택배로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제일 먼저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가 그립고, 애증의 관계였던 할머니가 그립고,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이성이 그립고, 그냥 그 시절이 그립다. 생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를 위로하고, 듣지 못했던 대답을 들려주는데... 천국택배를 받는 주인공은 전부 누군가가 나를 아끼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존감을 회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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