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브레스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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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 노진선 역, [레드브레스트], 비채, 2013. 

Jo Nesbo, [THE REDBREAST], 2000.

 

  [레드브레스트]는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자리한 입헌군주국인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흔히 북유럽 스릴러라고 하는데요.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아홉 권의 시리즈 중에서 세 번째 작품입니다. 국내에는 순서가 조금 바뀌어서 일곱 번째 [스노우맨](비채, 2012.)과 여덟 번째 [레오파드](비채, 2012.)가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시리즈는 각 권이 독립되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매력 있는 주인공과 주변 등장인물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고... 이야기의 진행과 분위기의 변화를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리즈를 대할 때에는 더 기대가 큽니다.

 

  유럽은 교육과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일까요?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의 국민작가이고, 인기 뮤지션으로 그리고 경제학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인 어머니와 책을 읽어주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매료되었고, 해마다 100여 회 이상의 공연을 하고 있으며, 저널리스트로도 꾸준한 기고를 한다고 하니... 이런저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인생을 제대로 즐기는 그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진홍가슴새의 90퍼센트는 남쪽으로 떠나죠. 말하자면, 극소수만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 남는 거에요... 중요한 사실은 만약 겨울이 따뜻하면, 다른 새들이 돌아오기 전에 최상의 둥지를 틀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산된 위험인 셈이죠. 잘 되면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거고, 아니면 완전 엿 먹는 거고요. 위험을 감수하느냐 마느냐. 괜히 도박을 했다가, 어느 날 밤 꽁꽁 얼어붙어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어요. 봄이 올 때까지 얼어 있는 거죠. 반면 겁이 나서 남쪽으로 갔다가 돌아와보면, 둥지 틀 곳이 없을 수도 있고요. 사실 이건 우리가 늘 대면하는 영원한 딜레마예요."(p.17-19)

 

  '레드브레스트'는 일반적으로 '개똥지빠귀'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작가의 의도를 살려 '진홍가슴새'로 번역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있는데요. 어떤 새로운 일을 하면서 결과를 예측하는 말인데, 아주 대박이거나 아니면 아주 쪽박일 것 같은 예감이 들 때에 사용합니다. 늦가을 겨울의 문턱에서 대부분은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떠나지만, 몇몇은 다른 선택을 하는 진홍가슴새를 통해서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남들과는 다른 평범하지 않은 선택을 한... 한 인간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이제 쓸모가 없어, 구드브란. 유럽을 봐.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엉망진창이었어. 실업자는 증가하고, 국민은 착취당했지. 현재 혼란으로 직행하는 유럽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단 둘뿐이야. 히틀러와 스탈린.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어. 형제국이냐 야만국이냐. 노르웨이를 먼저 점령한 게 스탈린의 백정이 아니라, 독일군이라는 게 우리로서는 얼마나 큰 행운인지 국민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아."(p.83)

 

  소설은 1999~2000년의 현재와 1942~1944년의 과거를 교차합니다. 아주 오래전의 사건이 발단이 되어 현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 구조입니다. 과거 우리는 일본에 의해 국권을 피탈, 식민 지배를 당한 뼈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항일 독립 투쟁을 하거나 아니면 일본에 동조하거나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위협 속에 있었습니다. 독일에 의해 침략을 당하자, 젊은이들은 왕실과 함께 영국으로 피난을 가거나 레지스탕스가 되어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몇몇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독일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에서 소련과 싸웠습니다.

 

  "독일군에 입대했던 사람들은 감옥에서 형을 마친 후에 다시 사회로 복귀했소. 대다수가 놀랄 만큼 성공했지.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었는데도 말이오.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전쟁 같은 위기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은 재능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으니까."(p.280)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독일에 조금이라도 협조했던 사람들은 매국노라는 딱지와 함께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정계나 재계의 요직으로 진출하는 길은 차단 되었지만, 형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지만, 한 남자의 분노는 아직 꺾이지 않았습니다.

 

  "넌 성경을 열심히 읽었으니까 다윗 왕의 이야기를 알 거야, 헬레나. 자기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했던 왕 말이야. 다윗은 장군들에게 밧세바의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라고 명령했지. 그리하여 남편은 죽었고, 덕분에 다윗은 성가신 방해꾼 없이 밧세바에게 구애할 수 있었어."(p.178-179)

 

  유다 왕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보내어 죽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죄를 범합니다. 권력을 소유한 남성에게는 항상 성적인 욕망이 뒤따르는 것일까요?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의사의 판단은 병사를 전장의 한가운데로도, 또는 안락한 병실의 침대로도 보낼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은 때로는 누군가의 생사를 정하는 힘을 갖기도 합니다. 소설은 성경을 모티브로 하여 권력의 일탈과 복수를 담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약혼자를 잃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이 있고, 국가를 향한 분노와 억울함으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 있습니다. 소설은 과거 나치에 동조했던 노르웨이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는데요. 이것은 실제로 작가의 아버지가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레닌그라드 외곽에서 싸운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민주주의가 붕괴하였고, 노르웨이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한 나라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특히 공산주의에 반감이 있는 젊은이들은 스탈린보다는 차라리 히틀러가 낫다고 판단하고 조국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독일 군복을 입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우리는 역사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당시로써는 이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소신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히틀러가 패하고 그들은 매국노가 되었고, 전운을 감지하고 막판에 잠깐 레지스탕스로 활약한 사람들은 영웅대접을 받습니다. 네스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가 오로지 승자의 처지에서만 쓰인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사건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여 실제로 해리 홀레 경위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리즈가 새로 나올수록 같이 나이를 먹고 인고의 주름이 깊어가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이번에는 더 젊어진 30대 초반의 국가정보국 & 강력반 형사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도록 스릴과 긴장의 끈은 아주 잘 유지되고 있고, 모든 의문과 의혹은 작은 단서들이 모여 마지막 장에 이르러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아직 미결된 살인사건(프린스)은 다음 권을 기대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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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 봄꿈
한승원 지음 / 비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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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겨울잠, 봄꿈], 비채, 2013. 

 

  아마도 작년 말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 인터넷 서점의 블로그에서 한승원 작가의 신작을 연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다는 것인데, 얼마 되지 않은 자료를 가지고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여 역사소설을 쓴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새삼스럽게 이것이 한평생 글을 써온 장인의 능력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아무튼, 한겨울의 노고와 열정은 고스란히 원고지로 옮겨졌고... 완연한 봄이 되어서 진노랑의 완성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국내 작가의 역사소설은 오랜만입니다. 역사는 하나의 사실(fact)을 두고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른 의미와 해석을 할 수 있어 흥미롭지만, 그만큼 책을 선택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더구나 역사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고, 개인적인 성향이 특유의 진지함과 무거움을 싫어해서 한동안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겨울잠, 봄꿈]은 실제 역사를 토대로 하고 있으나, 역사보다는 문학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오 척 일 촌(약 155센티미터)의 키와 아흔 근(54킬로그램)의 무게인 작달막한 전봉준의 몸뚱이에는 현상금 천 냥과 군수 벼슬이 걸려 있었다. 그의 얼굴로 날아드는 차가운 어둠 속의 눈발은 차가운 절망의 새까만 가루였다.(p.10)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고종 31, 1894년) 봉건 사회의 수탈은 극에 달했고, 결국 농민들은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부정부패의 척결과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대규모 항쟁을 일으킵니다. 그 중심에는 녹두장군이라 불리는 전봉준이 있었고요. 하지만 승승장구하며 한양으로 진격하던 동학은 공주 우금치에서 현대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게 대패하여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후에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인 저항을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전봉준에게는 천문학적인 현상금이 걸립니다. 소설은 이러한 절망 가운데 잠행으로 시작합니다.

 

  민중들에게 구세의 희망이었던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에는, 스승인 예수를 팔아먹었다고 알려진 유다라는 제자가 있었다. 심신이 지친 데다, 하늘과 연계한 민중운동에 한계를 느낀 예수는 여느 때 자기와 은밀하게 속말을 나누곤 하던 유다에게 밀고를 하라고 명령했다. 유다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 명령에 따라 밀고했고, 그 대가로 사제와 원로들에게서 은돈 서른 닢을 받았다. 예수는 자기가 머지않아 빌라도의 공권력 속으로 잡혀 갈 것임을 제자들에게 예언하고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다... 그 결과, 머리에 쓴 가시관 때문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스스로 어깨에 짊어지고 올라간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청사에 기록된 바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순교한 성자가 되었는데, 유다는 스승을 팔아먹은 만고의 배신자가 되었다. 양해일은 전봉준이 김경천에게로 가겠다고 했을 때, 예수의 최후와 유다를 떠올렸다.(p.12-13)

 

  전봉준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는 순창 피로리로 김경천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일단 몸을 숨겨 지쳐있는 심신을 달래고 장정을 다시 모아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희망보다는, 잡으려 하는 자에게 잡혀주려는 것입니다. 잘린 그의 목이 종로 네거리에 걸리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피를 보여주기 위해... 명분 있게 잡혀 명분 있게 죽기 위함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옛 동지는 밀고자가 되어 새벽녘에 민보군을 이끌고 옵니다. 전봉준은 몽둥이질에 다리가 꺾이고 포승에 묶입니다. 동구 밖에서 매복해 있던 일본군이 몰려와 강제로 입을 벌리고 재갈을 물립니다. 그리고 몸뚱이를 가마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철동이, 을식이, 바우, 뒷방이는 전봉준을 태운 가마를 메고 밤길을 달렸다. 그들은 동학군으로 나갔다가 도망쳐 온 사실을 물시해준다는 것과, 백 냥씩의 돈이 생기게 된다는 즐거움으로 발을 땅에 딛지 않은 듯싶었다.(p.42)

 

  가마 안에 앉은 전봉준은 두 가지 고통에 시달렸다. 하나는 으깨진 발등과 부러진 정강뼈, 재갈 찬 입의 고통이요. 다른 하나는 사로잡힌 채 눈을 뻔히 뜨고, 일본군의 잔혹한 만행들을 보아야 하는 치욕과 분노의 고통이었다.(p.106)

 

  "사실은 제가 장군이 살아나실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구만이라우. 장군은 제 말대로만 하시면 되는 것이어라우. 장군에게 행운이 다가오고 있어라우. 제가 누군지 아시오? 저는 대일본제국 정계의 막강한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 각하의 양아들이어라우. 제 아버지 이름을 조선식으로 말한다면 이등박문이고, 이토 겐지라는 제 이름은 이등건차여라우."(p.90)

 

  순창 피로리에서 한양까지 천 리 길의 압송이 시작됩니다. 철동이, 을식이, 바우, 뒷방이는 평생을 억압 속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이름 없는 민중입니다. 잠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동학에 몸담기도 했지만, 이제는 돈 몇 냥에 팔려 가마꾼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가마를 멘 어깨가 짓눌리고 다리가 뻐드러져도 마을 앞 옥답 서 마지기가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호송 행렬은 담양, 나주, 광주, 하남, 장성, 정읍, 전주, 삼례를 지나 공주 우금치에 이릅니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글 선생을 하며 살아온 전봉준은 접주가 되고 농민군의 대장이 되어 동학을 이끌던 며칠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갑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십만 대군을 싹 쓸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수많은 백성의 죽음과 패전의 책임은 무력감으로 영혼을 짓누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마 안에서 멀미를 괴로워하고, 다친 다리와 묶인 팔의 욱신거림을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안을 명목으로 백성을 짓밟는 일본군의 만행에 치욕과 분노를 느낍니다.

  조선인 천종관이라는 국적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인 이토 겐지로 살아가는 남자... 그는 조선은 더러운 나라이고 희망이 없음을 말하며 전봉준에게 은밀한 제안을 해옵니다.

 

  "장군은 반드시 살아나야 혀라우. 살아나서 일본으로 건너가 제 아버지 이토 히로부미 각하를 만나가지고, 새 사람이 되어야 혀라우. 그래가지고, 제 아버지가 주선해주는 대로 영국이나 미국에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새로운 조선을 위해 진짜로 더 큰 일을 해야 혀라우."(p.131-132)

 

  "장군, 확실하게 일본으로 건너가시겠다는 마음을 굳히시고 마음속에서 흥선대원군이라는 존재와 동학군이라는 허깨비의 무리를 지우십시오.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이나 명분보다는 시적이고 감성적인 가슴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조선 땅의 동학군이 전멸해버리고, 일본군이 사실상 조선 땅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성적으로, 냉엄하게 받아들이십시오."(p.282)

 

  "제 아버지 이토 히로부미 각하가 말씀하셨어라우. 오래 사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인 것이라고라우. 조병갑이 같은 탐관오리들보다 오래 살아야 혀라우."(p.300)

 

  한양에 도착하면 반드시 죽게 될 전봉준에게 이토 겐지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해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력으로 사형을 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의 양아들이 되어 영국이나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정부 요직에서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새 조선을 만들라는...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지금 나 이렇게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혀를 물어 끊고 자결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죽어서는 안 된다. 지금 죽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그러면 살아 어찌할 것인가. 한양으로 가야 한다. 몇 천 냥씩에 벼슬을 팔아먹은 탐관오리들, 나라를 썩어 문드러지게 한 벼슬아치들의 얼굴에 내 피를 뿌려주어야 한다. 잘린 내 목을 종로 네거리 한복판에 내걸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해야 한다. 아니다. 이토의 말대로,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 되어야 한다. 영국이나 미국이나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새 문물을 공부하고, 전혀 새 사람이 되어 조선으로 되돌아와, 나라를 이 꼴로 썩어 문드러지게 해놓은 자들을 정치해야 한다.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려면 일본의 개가 되어야 한다. 일본의 개가 된 다음, 조선을 망하게 한 사람을 이토보다 더 잔인하게 물어뜯어야 한다.(p.220)

 

  잡히기 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전봉준은, 잡힌 후에는 세 가지 갈림길에서 고뇌합니다. 더러운 세상의 치욕을 뒤로하고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어 자결할 것인지, 아니면 한양으로 올라가 종로 네거리에 피를 뿌리며 명분 있게 죽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토의 제안대로 살아남아 일본의 정치적 앞잡이가 될 것인지... 끊임없는 이토의 회유와 살기 위한 본능의 몸부림 그리고 이성의 판단 사이에서 한 인간은 고뇌하고 고뇌하고 고뇌합니다.

  담에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길목에서 누군가 삶을 제안합니다. 유력한 정치가의 후원을 받을 수 있답니다. 신세계라고 여겨지는 곳으로 보내준다고 합니다. 다시 돌아와 복수할 기회를 준다고 하는데... 이것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전봉준은 역사의 전설로 남게 된 것 같습니다.

 

  [겨울잠, 봄꿈]을 읽으며 얼마 전에 읽은 하무로 린의 [저녁매미 일기](비채, 2013.)가 자꾸 연상되었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역사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역사소설이라는 것. 하나는 지나친 연공으로 봉기를 계획하는 농민을 설득하여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삼정의 문란으로 봉기하는 농민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 예정된 죽음을 기록했다는 유사함이 있으나, 하나는 정도의 삶을 살다가 할복을 명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을 꿈꾸다가 참수를 명받은 것.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애잔함이 전체를 지배하지만, 하나는 강인함과 의연함이 느껴지고, 다른 하나는 처절함과 한이 느껴진다는 것. 그리고 맛깔스러운 글맛이 일품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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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 몬스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8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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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이도 다케루, 권일영 역, [나니와 몬스터], 비채, 2013. 

Kaidou Takeru, [NANIWA MONSTER], 2011.

 

  개성과 다양성의 존중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대한민국에서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즐긴다는 것은 아직도 조선 시대의 폐쇄적인 사고에 얽매여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함께 누려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는 학연의 끈이 없다는 이유로, 가장 많이 팔리는 작품은 순수문학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문단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문학상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도대체 왜 이러한 차별과 편 가르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르와 소재에서 우리보다 관용적이고 유연한 일본 문학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나니와 몬스터]는 오랜만에 만나는 가이도 다케루의 소설입니다. 메디컬 서스펜스, 메디컬 엔터테인먼트라고 불리는 그의 작품은 의학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과 기발한 상상력이 결합하여 의료계의 다양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의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예담, 2007.)에서는 대학병원을 배경으로 의료 시스템의 문제와 그로 말미암은 의료 종사자들의 고뇌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은행나무, 2008.)에서는 지역 산과 의료 체계의 모순과 출산 시스템의 붕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진화하여 폭넓은 범위에서 후생노동성의 의료 정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흐음. '신종 인플루엔자 유행 조짐'이라. 새, 돼지에 이어 이제 낙타인가? 기묘한 일이로군."(p.25)

 

  "첫째, 전염성이 강합니다. 인플루엔자 캐멀이 신종이고 국민 대부분이 면역력이 없어 감염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기초 질환이 있는 환자,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에게는 심각한 증세를 보일 가능성도 있습니다."(p.53-54)

 

  '나니와'는 오사카 지역을 가리키는 옛 이름입니다. 지금도 곧잘 사용하는 명칭인데, 여기에서는 거대한 행정 시스템을 갖춘 가상의 도시로 그려집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서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 캐멀은 점차 전 세계로 확산하여 위기감이 고조됩니다. 당국은 숨 가쁘게 공항을 중심으로 유입 차단 방역을 시행하고, 몇 개의 도시에 우선하여 진단 키트를 배포합니다. 하지만 방역에 구멍이 뚫린 것일까요? 해외 여행자가 아닌데도 감염의 증상이 나타나고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것을 집중적으로 보도합니다. 나니와는 심각한 사회 혼란을 초래하고 지역 경제는 마비되어 파산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진단 키트가 있는 도시에서만 질병이 보고되는 이상 현상이 감지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 개업의는 축구로 말하자면 골키퍼 같은 신세야. 잘해봤자 본전이고 실수하면 신문에 큼직하게 나오지. 그래도 골키퍼가 우리보다는 나아. 골키퍼는 페널티킥을 멋지게 막아내면 신문에 톱기사로 실리지만, 개업의는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해도 기자들이 전혀 기사를 쓰지 않잖아. 그러다가 실수하면 원수라도 진 듯이 기사를 써대고. 일할 맛이 나지 않아."(p.23)

 

  "기자 녀석들은 뭔가 실수가 없는지 그것만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니까.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것처럼 기사를 써대고. 하기야 월급쟁이 의사들보다 많이 버는 건 사실이지만, 회계 처리하고 손님 접대하고 설비투자 비용까지 다 계산에 넣으면 그리 많지도 않잖아. 게다가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한번에 훅 가는데, 그런 터무니없는 기사나 쓰다니."(p.38)

 

  "개업의는 수입이 많다고 언론에서 떠들지만 이런 경리 업무까지 혼자 처리해야 하고 그것도 자칫 실수하면 큰일나죠. 야구선수를 생각해보라죠.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녀석들이 그렇게 높은 연봉을 받아도 누구 하나 투덜거리지 않잖아요? 그런데 목숨을 구하는 의사가 수입이 좀 많으면 아우성치며 발목을 잡고 늘어지죠. 이 나라는 이상해요."(p.45)

 

  손에 든 무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변호사라면 이런 상담도 돈을 받는다. 원래 이런 상담 또한 전문 지식을 제공하는 일이니 의료 상담료를 청구해야 한다는 논의가 의사회 내부에서도 있다. 하지만 건강에 관한 문제를 그렇게 획일적으로 대응하면 사회 의료는 설 자리가 없다.(p.70)

 

  어찌 보면 언론은 치밀하게 사회 감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의학을 전공한 작가의 시선은 그보다는 개업의의 고충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사의 호들갑으로 부정확한 공포가 전달되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관료는 법을 잘 안다. 좋게 이야기하면 유연하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법을 즉흥적으로 적용한다. 검찰이 정의를 들이밀어도 속으로는 웃고 있다. 그런 녀석들이 조직 방어를 위해 일치단결하여 자기 정당화에 매진하면 만만치가 않다. 관료는 자기들 이익을 위해 법률 조항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변경하여 법에 담긴 참뜻을 제거한다.(p.338)

 

  사법의 정의를 집행하는 기관인 검찰. 그건 좋다. 하지만 그 검찰이 조직적인 부정행위를 저질렀을 때는 대체 누가 처단하는가...

  검찰은 누구에게도 감시를 받지 않는다. 검찰이야말로 사회의 최고 권력이라는 이야기다.(p.339)

 

  "사법과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치는 품성이 형편없고 약점이 너무 많아서 상대를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힘이 없는 반란군인 셈입니다. 제3의 권력인 언론은 여기저기 펼쳐진 검찰의 보이지 않는 손 안에 있습니다. 그들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한다면 검찰의 폭주를 억제할 수 있지만 그들은 이빨 부러진 늙은 개가 되어 주인에게 꼬리나 칠 뿐입니다."

  ...

  "그럼 지금 대체 누가 사법을 제어할 수 있을까요?"

  ...

  "제어할 수 있는 존재는 의료뿐입니다."(p.440)

 

  작가는 국가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의료를 담당하는 의사와 언론을 담당하는 기자의 팽팽한 긴장 관계뿐만 아니라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와 사법을 담당하는 검찰의 날 선 신경전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조금은 과장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료를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의사와 기자, 검사와 관료, 의사와 검사, 그리고 의사와 관료 사이의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구조가 매우 흥미롭네요.

 

  인적으로 다른 사회파 미스터리와 비교하여 가이도 다케루의 작품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사회(의료)의 부조리를 고발하여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가상의 도시 나니와를 의료 행정, 의료 공화국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현실에서의 의료 입국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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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를 쓰는 방법
미국추리작가협회 지음, 로렌스 트리트 엮음, 정찬형.오연희 옮김 / 모비딕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로렌스 트리트, 정찬형, 오연희 역,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 모비딕, 2013. 

Lawrence Treat, Mystery Writer's of America, [MYSTERY WRITER'S HANDBOOK], 1976.

 

  남이 쓴 글을 읽고 하는 날카로운 비평과는 다르게 막상 내가 글을 쓰려고 하면 수많은 난관에 부딪힙니다. 좋은 글을 쓰는 요령, 특히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일까요? 글쓰기와 연관된 책은 오래전에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해냄, 2007.)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좋은 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연습을 통해야 한다는 평범하면서도 절대적인 진리를 말했던 것 같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이나 탁월한 능력을 타고나지 않는 이상 창작의 과정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땀과 눈물의 결실이라는 생각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재인, 2010.)을 읽을 때였습니다. 목차를 보면 아시겠지만,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12가지 패턴과 탐정이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약간 비틀어서 나름의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쓴 소설입니다. 문득 작가는 독자들이 알지 못하는 추리소설의 어떤 법칙이나 작법을 이미 통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추리소설을 쓰는 어떤 규칙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아주 특별한 책 한 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수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수개월에 걸친 시행착오를 덜 수 있는 지름길과 암시, 그리고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작가가 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과 규칙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종국에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좌절과 희망을 반복하다가 드디어 전업 작가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 길을 걸어가건 삶의 내용이 풍성해진다는 건 마찬가지다. 이 책을 꼼꼼히 읽은 독자라면 앞으로 이전보다 글을 비판적으로 읽고, 좀 더 잘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p.8-9)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은 미국추리작가협회(MWA, Mystery Writer's of America)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회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 응답을 토대로 1976년에 발표한 내용입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1800년대의 에드거 앨런 포나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고, 1950~60년대의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의미는 절대로 퇴색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추리작가들이 공개한 글쓰기의 노하우는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읽고 감상하는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1) 왜, 글을, 그것도 추리소설을 쓰는가?(p.19)

  2) 한 편의 이야기로 꽃피울 수 있도록 씨앗이나 싹을 제공한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는가?(p.41)

  3) 언제, 어떻게 글을 쓰는가? 당신의 작업 방법을 개략적으로 알려 달라.(p.94)

  4) 현재 추리소설에서 나타나는 상투성 중에 가장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p.267)

  5) 글을 쓸 때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이 있거나 부분적으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p.275)

  6) 추리소설가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터득한 최고의 비결은 무엇인가?(p.305)

 

  설문은 여섯 개의 질문으로 되어 있는데, 수백 통이 넘는 회신 중에서 엄선된 내용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좋아하는 일이고 자신의 삶이라는 응답과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이고 그 과정은 심히 고되다는 진솔한 고백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중요시하고 신문기사를 모으거나 꿈을 기록하는 일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일상입니다. 제목을 정하고 글을 쓸 수도 있지만, 결론이나 주제를 먼저 정하고 글을 쓰기도 합니다.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데, 한 가지 공통점은 대부분 글을 쓰는 일을 규칙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작가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플롯이라면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대단원까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대단원이 마련되어 있어야만 각 사건들과 분위기를 정해진 의도대로 끌고 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좋은 플롯에 필수인 적절한 결말이나 인과관계를 갖출 수 있다.(p.68)

 

  기발한 아이디어로 남들과 다른 플롯과 이야기 구조를 세울 수 있다면, 장르와 시리즈를 정하고 편집자를 사로잡는 개요를 작성할 수 있다면, 적절한 시점으로 독자의 시선을 끄는 실감 나는 인물이 등장한다면, 배경과 분위기가 무르익어 서스펜스를 자아내고 수려한 문체로 작품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면, 상투적인 함정을 피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맥락으로 논리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것은 우연이 아닌, 작가의 의도이고 치밀한 계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여기에 유익한 세부적인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미스터리와 스릴러는 순수문학과 비교하여 오락성을 추구한다는 생각에 상대적으로 문학성이나 작품성과는 연관이 없다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추리소설은 단순히 사건의 수수께끼를 푸는 퍼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다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의 양상, 특히 인간의 내면세계를 매우 잘 반영하기에 항상 흥미진진합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죄악의 문제를 다루기에 전혀 가볍지 않은 장르입니다. 추리소설을 쓰기에는 아직 이르나 추리소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눈을 뜨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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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매미 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하무로 린, 권영주 역, [저녁매미 일기], 비채, 2013. 

Hamuro Rin, [HIGURASHINOKI], 2011.

제146회 나오키상

 

  가장 기억에 남는 역사소설은 아주 오래전에 읽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창작과비평사, 1990.)이다. 최근에 리메이크되어 방영 중이고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드라마 <허준>(1999)의 원작이다. 원래는 춘, 하, 추, 동 4권으로 기획되었으나 집필 중에 갑작스러운 작가의 타계로 상, 중, 하 3권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 허준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서자로 태어나 신분의 차별을 겪으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의관이 되기로 하고 결국에는 어의에 오른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분 상승의 욕구로 의술을 익혔지만, 좋은 스승의 가르침으로 병자를 불쌍히 여기며 진정한 의술을 펼친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메시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후에 우리 역사와 관련된 몇 권의 소설을 더 읽었지만, 대부분은 억울한 누명으로 출생의 비밀을 가진 주인공이 신분을 숨기고 자라나 탁월한 능력으로 모진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가문의 원수를 갚거나 국가의 흥망성쇠에 깊이 관여한다는 패턴이 반복되어 별다른 감동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중함으로 일관된 문체는 글을 읽기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고... 그래서인지 내가 일본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재의 다양함과 독서의 가벼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단노 공,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고는 했으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죽음도 겁나지 않는다고 호언하는 것은 무사의 허세일 뿐, 나도 목숨이 아까워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합니다. 오십 년 뒤, 백 년 뒤에는 수명이 다하지요. 나는 그 기한이 삼 년 뒤로 정해진 것일 뿐. 하면 남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고 싶습니다."(p.26-27)

 

  하무로 린의 [저녁매미 일기]는 처음으로 만나는 일본 역사(시대)소설이다. 제146회 나오키상을 받은 작품으로, 에도 시대에 할복을 예정하고 유폐 생활을 하는 어느 무사의 이야기이다. 에도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막부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이다. 무사 계급의 최고 지위에 있는 쇼군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여 전국을 통일 지배하였고, 엄격한 신분제로 무사 계급이 농민을 지배하며 연공(年貢)을 징수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배경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절망의 상황은 다소 진지할 수 있으나, 우려와는 다르게 작품은 수려한 문장과 매끄러운 전개로 끝까지 긴장과 재미를 놓치지 않고 있다.

 

  "여름이 오면 이 부근에서 저녁매미가 많이 웁니다. 특히 가을기운이 완연해지면 여름이 끝나는 것을 슬퍼하는 울음소리로 들리지요. 나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몸으로 '하루살이'의 뜻을 담아 이름을 지었습니다."(p.30)

 

  출신과 실력으로 앞날이 창창하던 도다 슈코쿠는 의문의 사건에 연류되어 번주로부터 '미우라 가보'의 편찬과 10년 뒤 할복을 명받는다. 그 후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단노 쇼자부로는 성 내에서 우발적인 실수를 저질러 그 벌로 무카이야마촌에 유폐 중인 슈코쿠에게 보내진다. 명분은 가보 편찬을 도우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감시하고 가보를 염탐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쇼자부로는 슈코쿠와 3년간의 동거를 시작한다.

 

  "정당한 연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네. 농민의 입장에서 연공 따위 없는 편이 낫지. 허나 무사는 연공이 없으면 먹고 살수 없으니 말이네. 서로 살기 위해 먹을 것을 뺏고 빼앗기는 것이니 적대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쇼자부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세상의 원리라는 것 아닙니까."

  "허나 시대가 바뀌면 원리가 바뀔지 모르는 일. 바로 그러하기에 이처럼 과거의 사적을 기록해두어야 하는 것이야.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후세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말이지."(p.53-54)

 

  "충의란 주군이 가신을 믿어주기에 다할 수 있는 것이야. 주군이 의심을 품는다면 가신은 충의를 다하려야 다할 방도가 없네. 그러니 주군이 의심을 품고 있다면 가신은 의심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p.135)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모든 사람이 다 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으로 이어진다 함은 곧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준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p.192)

 

  "허나 도다 님은 그같은 무사의 존재 방식과는 달리 농민들과 더불어 살려고 하시네. 나는 도다 님이 무사로 살아가는 방식에 감동했어. 때문에 도다 님을 지켜드리고 싶은 것이야."(p.220)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것을 피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이다. 하지만 쇼자부로의 눈에 비친 슈코쿠는 과연 죽음을 앞둔 사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강직하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고 맡겨진 가보 편찬에 성심을 다하는 무사의 올곧음에 서서히 매료된다. 그래서 사건의 진실을 찾아 그를 구명하기로 하는데...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가진 자는 힘 있는 자와 결탁하고 기득권과 안위를 지키기에 혈안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고 가지지 못한 자에게 떠넘겨진다. 허울뿐인 정책과 제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허점으로 부담은 가중된다. 이러한 때에 할복을 기다리는 무사는 자신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어야 하지만, 그는 타인의 대립과 갈등의 경계에 서 있는다. 착취하려는 무사와 봉기하려는 농민 사이에서, 역사를 감추려는 세력과 진실을 찾으려는 무리 사이에서, 죽음을 바라는 자와 이별을 슬퍼해야 하는 이 사이에서... 그는 막힌 벽을 허물고 더불어 살기를 원한다.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여름 한 철, 치열하게 노래하다가 사라지는 저녁매미처럼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무사로서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친구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애잔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생소한 소재를 가지고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와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만들어 낸 하무로 린이라는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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