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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매미 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하무로 린, 권영주 역, [저녁매미 일기], 비채, 2013.
Hamuro Rin, [HIGURASHINOKI], 2011.
제146회 나오키상
가장 기억에 남는 역사소설은 아주 오래전에 읽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창작과비평사, 1990.)이다. 최근에 리메이크되어 방영 중이고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드라마 <허준>(1999)의 원작이다. 원래는 춘, 하, 추, 동 4권으로 기획되었으나 집필 중에 갑작스러운 작가의 타계로 상, 중, 하 3권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 허준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서자로 태어나 신분의 차별을 겪으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의관이 되기로 하고 결국에는 어의에 오른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분 상승의 욕구로 의술을 익혔지만, 좋은 스승의 가르침으로 병자를 불쌍히 여기며 진정한 의술을 펼친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메시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후에 우리 역사와 관련된 몇 권의 소설을 더 읽었지만, 대부분은 억울한 누명으로 출생의 비밀을 가진 주인공이 신분을 숨기고 자라나 탁월한 능력으로 모진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가문의 원수를 갚거나 국가의 흥망성쇠에 깊이 관여한다는 패턴이 반복되어 별다른 감동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중함으로 일관된 문체는 글을 읽기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고... 그래서인지 내가 일본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재의 다양함과 독서의 가벼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단노 공,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고는 했으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죽음도 겁나지 않는다고 호언하는 것은 무사의 허세일 뿐, 나도 목숨이 아까워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합니다. 오십 년 뒤, 백 년 뒤에는 수명이 다하지요. 나는 그 기한이 삼 년 뒤로 정해진 것일 뿐. 하면 남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고 싶습니다."(p.26-27)
하무로 린의 [저녁매미 일기]는 처음으로 만나는 일본 역사(시대)소설이다. 제146회 나오키상을 받은 작품으로, 에도 시대에 할복을 예정하고 유폐 생활을 하는 어느 무사의 이야기이다. 에도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막부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이다. 무사 계급의 최고 지위에 있는 쇼군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여 전국을 통일 지배하였고, 엄격한 신분제로 무사 계급이 농민을 지배하며 연공(年貢)을 징수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배경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절망의 상황은 다소 진지할 수 있으나, 우려와는 다르게 작품은 수려한 문장과 매끄러운 전개로 끝까지 긴장과 재미를 놓치지 않고 있다.
"여름이 오면 이 부근에서 저녁매미가 많이 웁니다. 특히 가을기운이 완연해지면 여름이 끝나는 것을 슬퍼하는 울음소리로 들리지요. 나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몸으로 '하루살이'의 뜻을 담아 이름을 지었습니다."(p.30)
출신과 실력으로 앞날이 창창하던 도다 슈코쿠는 의문의 사건에 연류되어 번주로부터 '미우라 가보'의 편찬과 10년 뒤 할복을 명받는다. 그 후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단노 쇼자부로는 성 내에서 우발적인 실수를 저질러 그 벌로 무카이야마촌에 유폐 중인 슈코쿠에게 보내진다. 명분은 가보 편찬을 도우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감시하고 가보를 염탐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쇼자부로는 슈코쿠와 3년간의 동거를 시작한다.
"정당한 연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네. 농민의 입장에서 연공 따위 없는 편이 낫지. 허나 무사는 연공이 없으면 먹고 살수 없으니 말이네. 서로 살기 위해 먹을 것을 뺏고 빼앗기는 것이니 적대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쇼자부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세상의 원리라는 것 아닙니까."
"허나 시대가 바뀌면 원리가 바뀔지 모르는 일. 바로 그러하기에 이처럼 과거의 사적을 기록해두어야 하는 것이야.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후세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말이지."(p.53-54)
"충의란 주군이 가신을 믿어주기에 다할 수 있는 것이야. 주군이 의심을 품는다면 가신은 충의를 다하려야 다할 방도가 없네. 그러니 주군이 의심을 품고 있다면 가신은 의심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p.135)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모든 사람이 다 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으로 이어진다 함은 곧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준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p.192)
"허나 도다 님은 그같은 무사의 존재 방식과는 달리 농민들과 더불어 살려고 하시네. 나는 도다 님이 무사로 살아가는 방식에 감동했어. 때문에 도다 님을 지켜드리고 싶은 것이야."(p.220)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것을 피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이다. 하지만 쇼자부로의 눈에 비친 슈코쿠는 과연 죽음을 앞둔 사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강직하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고 맡겨진 가보 편찬에 성심을 다하는 무사의 올곧음에 서서히 매료된다. 그래서 사건의 진실을 찾아 그를 구명하기로 하는데...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가진 자는 힘 있는 자와 결탁하고 기득권과 안위를 지키기에 혈안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고 가지지 못한 자에게 떠넘겨진다. 허울뿐인 정책과 제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허점으로 부담은 가중된다. 이러한 때에 할복을 기다리는 무사는 자신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어야 하지만, 그는 타인의 대립과 갈등의 경계에 서 있는다. 착취하려는 무사와 봉기하려는 농민 사이에서, 역사를 감추려는 세력과 진실을 찾으려는 무리 사이에서, 죽음을 바라는 자와 이별을 슬퍼해야 하는 이 사이에서... 그는 막힌 벽을 허물고 더불어 살기를 원한다.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여름 한 철, 치열하게 노래하다가 사라지는 저녁매미처럼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무사로서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친구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애잔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생소한 소재를 가지고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와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만들어 낸 하무로 린이라는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