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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브레스트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평점 :
요 네스뵈, 노진선 역, [레드브레스트], 비채, 2013.
Jo Nesbo, [THE REDBREAST], 2000.
[레드브레스트]는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자리한 입헌군주국인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흔히 북유럽 스릴러라고 하는데요.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아홉 권의 시리즈 중에서 세 번째 작품입니다. 국내에는 순서가 조금 바뀌어서 일곱 번째 [스노우맨](비채, 2012.)과 여덟 번째 [레오파드](비채, 2012.)가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시리즈는 각 권이 독립되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매력 있는 주인공과 주변 등장인물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고... 이야기의 진행과 분위기의 변화를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리즈를 대할 때에는 더 기대가 큽니다.
유럽은 교육과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일까요?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의 국민작가이고, 인기 뮤지션으로 그리고 경제학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인 어머니와 책을 읽어주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매료되었고, 해마다 100여 회 이상의 공연을 하고 있으며, 저널리스트로도 꾸준한 기고를 한다고 하니... 이런저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인생을 제대로 즐기는 그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진홍가슴새의 90퍼센트는 남쪽으로 떠나죠. 말하자면, 극소수만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 남는 거에요... 중요한 사실은 만약 겨울이 따뜻하면, 다른 새들이 돌아오기 전에 최상의 둥지를 틀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산된 위험인 셈이죠. 잘 되면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거고, 아니면 완전 엿 먹는 거고요. 위험을 감수하느냐 마느냐. 괜히 도박을 했다가, 어느 날 밤 꽁꽁 얼어붙어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어요. 봄이 올 때까지 얼어 있는 거죠. 반면 겁이 나서 남쪽으로 갔다가 돌아와보면, 둥지 틀 곳이 없을 수도 있고요. 사실 이건 우리가 늘 대면하는 영원한 딜레마예요."(p.17-19)
'레드브레스트'는 일반적으로 '개똥지빠귀'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작가의 의도를 살려 '진홍가슴새'로 번역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있는데요. 어떤 새로운 일을 하면서 결과를 예측하는 말인데, 아주 대박이거나 아니면 아주 쪽박일 것 같은 예감이 들 때에 사용합니다. 늦가을 겨울의 문턱에서 대부분은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떠나지만, 몇몇은 다른 선택을 하는 진홍가슴새를 통해서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남들과는 다른 평범하지 않은 선택을 한... 한 인간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이제 쓸모가 없어, 구드브란. 유럽을 봐.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엉망진창이었어. 실업자는 증가하고, 국민은 착취당했지. 현재 혼란으로 직행하는 유럽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단 둘뿐이야. 히틀러와 스탈린.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어. 형제국이냐 야만국이냐. 노르웨이를 먼저 점령한 게 스탈린의 백정이 아니라, 독일군이라는 게 우리로서는 얼마나 큰 행운인지 국민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아."(p.83)
소설은 1999~2000년의 현재와 1942~1944년의 과거를 교차합니다. 아주 오래전의 사건이 발단이 되어 현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 구조입니다. 과거 우리는 일본에 의해 국권을 피탈, 식민 지배를 당한 뼈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항일 독립 투쟁을 하거나 아니면 일본에 동조하거나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위협 속에 있었습니다. 독일에 의해 침략을 당하자, 젊은이들은 왕실과 함께 영국으로 피난을 가거나 레지스탕스가 되어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몇몇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독일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에서 소련과 싸웠습니다.
"독일군에 입대했던 사람들은 감옥에서 형을 마친 후에 다시 사회로 복귀했소. 대다수가 놀랄 만큼 성공했지.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었는데도 말이오.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전쟁 같은 위기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은 재능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으니까."(p.280)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독일에 조금이라도 협조했던 사람들은 매국노라는 딱지와 함께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정계나 재계의 요직으로 진출하는 길은 차단 되었지만, 형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지만, 한 남자의 분노는 아직 꺾이지 않았습니다.
"넌 성경을 열심히 읽었으니까 다윗 왕의 이야기를 알 거야, 헬레나. 자기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했던 왕 말이야. 다윗은 장군들에게 밧세바의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라고 명령했지. 그리하여 남편은 죽었고, 덕분에 다윗은 성가신 방해꾼 없이 밧세바에게 구애할 수 있었어."(p.178-179)
유다 왕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보내어 죽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죄를 범합니다. 권력을 소유한 남성에게는 항상 성적인 욕망이 뒤따르는 것일까요?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의사의 판단은 병사를 전장의 한가운데로도, 또는 안락한 병실의 침대로도 보낼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은 때로는 누군가의 생사를 정하는 힘을 갖기도 합니다. 소설은 성경을 모티브로 하여 권력의 일탈과 복수를 담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약혼자를 잃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이 있고, 국가를 향한 분노와 억울함으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 있습니다. 소설은 과거 나치에 동조했던 노르웨이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는데요. 이것은 실제로 작가의 아버지가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레닌그라드 외곽에서 싸운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민주주의가 붕괴하였고, 노르웨이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한 나라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특히 공산주의에 반감이 있는 젊은이들은 스탈린보다는 차라리 히틀러가 낫다고 판단하고 조국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독일 군복을 입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우리는 역사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당시로써는 이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소신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히틀러가 패하고 그들은 매국노가 되었고, 전운을 감지하고 막판에 잠깐 레지스탕스로 활약한 사람들은 영웅대접을 받습니다. 네스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가 오로지 승자의 처지에서만 쓰인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사건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여 실제로 해리 홀레 경위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리즈가 새로 나올수록 같이 나이를 먹고 인고의 주름이 깊어가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이번에는 더 젊어진 30대 초반의 국가정보국 & 강력반 형사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도록 스릴과 긴장의 끈은 아주 잘 유지되고 있고, 모든 의문과 의혹은 작은 단서들이 모여 마지막 장에 이르러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아직 미결된 살인사건(프린스)은 다음 권을 기대하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