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백성 - 변하지 않는 교회의 특권 4가지
존 R. 스토트 지음, 정지영 옮김 / 아바서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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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정지영 역, [한 백성], 아바서원, 2012. 

John R. W. Stott, [ONE PEOPLE], 1966.

 

  존 스토트는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 신학자요, 위대한 저술가이며, 20세기 최고의 설교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고, 내 책장에는 그의 저술이 몇 권 꽂혀 있기는 하나 부끄럽게도 인제야 그의 글을 제대로 읽게 되었다. [한 백성]은 '변하지 않는 교회의 특권 4가지'라는 부제와 함께 '교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전달하고 있다.

 

  에클레시아 - 그리스도인의 모임

  디아코니아 - 그리스도인의 사역

  마르투리아 - 그리스도인의 증거

  코이노니아 - 그리스도인의 친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엡 1:23),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엡 1:22), 교회는 건물을 말하기보다는 '부름 받은 사람의 모임'으로 에클레시아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 전통에서 교회와 관련된 신학 두 가지 정도를 기억하고 있는데... 하나는 교회의 5가지 역할이다. ① 케리그마(말씀 선포) ② 레이투르기아(예배) ③ 디다케(교육) ④ 코이노니아(친교) ⑤ 디아코니아(봉사)이다. 어느 곳에서 어떠한 상황이더라도 교회라면, 이 5가지 역할을 해야 진정한 교회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4가지 특성이다. ① 교회는 하나이고 ② 교회는 거룩하고 ③ 교회는 보편적이고 ④ 교회는 사도적이다. 이 말은 교회는 어떤 특정인을 대상으로 취미를 공유하는 모임이 아니라 그것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모임이라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영국 성공회 신부로 신학의 배경이 달라서일까? 장로교 전통의 신학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4가지를 통해서 교회를 말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순례하는 백성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기 위해 세상의 종말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고, 모든 사람을 하나 되게 하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시간의 끝을 향해 서둘러 가고 있는 순례하는 공동체다.(p.29)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런 더디고 민주적인 그리고 기독교적인 진행이 언제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문제가 심각할 때 사람들은 누구나 인내심을 잃고 어떤 식으로든 강제로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혹에 넘어가면 교회는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며 성령을 거슬러 그리스도에게 불순종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 문제에 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세상 지도자의 리더십이 지배와 권력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기독교 지도자의 리더십은 섬김과 종이라는 낮은 태도를 특징으로 합니다. 핸드릭 크래머는 이를 "권력과 지배욕이 섬기는 마음으로 바뀌었다"라며 명쾌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빌 2:7).(p.53-54)

 

  영국 성공회는 비상시에는 자격 있는 평신도 지도자가 성직자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핸드릭 크래머는 실레지아 지역이 폴란드로 합병되었을 당시 그곳의 루터교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실레지아 지역이 폴란드에 합병되었을 당시는 200명의 목사 중 198명이 피난을 간 상황이었습니다... 성공회 교회법 28조는 "적법하게 부르심을 받고 그것을 행하도록 보냄을 받기 전에는 아무나 공적 설교와 성례전을 회중에 시행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교리가 아니라 규정의 문제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목사와 평신도의 관계에 대한 이 규정 자체는 성경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p.67-68)

 

  성직자는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직자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분의 '일꾼'이며 '심부름꾼'입니다. 또한 성직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입니다(고후 4:5).(p.69)

 

  이 책이 쓰인 1960년대에는 세계 인권 문제가 대두하고 여성 운동이 확산하는 시기였고, 현재와는 다르게 평신도 사역이 많이 움츠러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배경에서 저자는 평신도를 동역자로 세우고 성직자와 같이 '한 백성'임을 강조한다. 과거와 비교하여 상황은 많이 바뀌었어도 성경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여전히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수십 년 전의 발언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역시 신앙의 대가의 글에는 아무런 거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교회가 가난한 시절에는 우리 모두 행복했는데... 오늘 교회는 부자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행복은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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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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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권영주 역, [Q&A], 비채, 2013. 

Onda Riku, [Q&A], 2004.

 

  개인적으로 동경하는 두 가지 삶이 있는데, 하나는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온종일 책을 읽으며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결합하여 책을 읽고 여행하고 사진을 찍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밥벌이의 책임감이 앞서는 현재로서는 꿈같은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러한 내 꿈을 실현하는 두 명의 여성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돈키호테의 발자취를 따라 스페인을 여행하는 서영은([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비채, 2013.) 작가와 두문불출하고 연간 200여 권이 넘는 책을 읽으며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는 온다 리쿠이다. 온다 리쿠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밤의 피크닉](북폴리오, 2005.)이다. 아직 일본소설이 익숙하지 않았던 때라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성이 헷갈려 3분의 1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다가 중간에 놓쳐버린 안타까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지금도 내 책상 위에는 언젠가 읽게 될 것을 기대하며 이 책이 놓여 있다). 그 후로 미스터리와 판타지, SF와 호러 ... 등의 다양한 장르로 다가왔으나 인제야 구체적인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하신 말씀은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질문에 대해 당신이 본 것, 느낀 것, 아는 것을 솔직하게, 마지막까지 성심껏 대답해주신다고 맹세하시겠습니까?(p.5)

 

  [Q&A]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르포르타주(Reportage) 스타일의 미스터리 소설이다. 어느 날, 도쿄 교외의 쇼핑센터 M에서 대형 참사가 일어난다.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집단으로 도망하고 빠져나오려다가 69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화재라는 속보가 뜨고 곧이어 독가스 테러라는 말이 나돌았지만, 사상자 대부분은 인파에 밀려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밟히고 압사당한 경우였다. 소설은 사건의 목격자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글쎄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 사건의 전체상을 파악하는 게 저희 주목적이라는 겁니다. 물론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의가 있겠습니다만, 실은 이번 조사에서 범인을 찾는 건 우선순위가 낮거든요. 그때 그 일이 어떤 식으로 발생했는지,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게 저희의 조사 목적입니다. 저희는 그게 뭐였는지 알고 싶은 겁니다.(p.109-110)

 

  사건 발생은 어떤 느낌이던가요?

  "제가 받은 인상으론 '돌연하다'란 말 한마디면 족하더군요. 화면에 찍힌 건 갑자기 뛰기 시작한 사람들뿐. 정말로 갑자기. 사람들이 뛴 원인은 찍혀 있지 않았습니다."(p.113)

 

  복수의 장소에서 군중이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는 것 말입니다.(p.122)

 

  사실도 거짓말을 한다?

  "응, 내 생각엔."

  그럼 어떻게 사실을 알아내야 하지?

  "글쎄. 사실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란 걸 인식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 눈의 수만큼 사실이 존재하는 거야."(p.151)

 

  "부조리하고 이유가 없는 대량 사망 사건."(p.162)

 

  "저희도 부상자 이송 중에 어떻게 된 일이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끈질기게 반복해서 물었습니다. 의식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였기도 합니다만. 그런데 다들 요령부득이더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도망치길래 자기도 도망쳤다. 불이 난 모양이다, 가스가 살포된 모양이다. 죄 그런 대답들뿐이었어요. 실제로 연기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몸을 써서 부상자를 밖으로 운반할 땐 오히려 괜찮았지만, 다들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원인은 뭐였던 거지?' '어째서 피해가 이렇게 커진 거지?' 하고 말이죠."(p.205-206)

 

  목격자의 인터뷰와 관련자의 질문과 대답은 총 1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자의 직업과 상황이 묘하게 연관되어 사건의 의문을 증폭시킨다. 맨 처음 신문 기자인 남자는 자신이 쇼핑센터 근처에서 본 것을 토대로 사건을 개괄 설명한다. 이어서 쇼핑센터 안에 있었던 여성, 노인, 초등학생 생존자는 각 층에서 자신이 목격하거나 경험한 것을 진술하는데, 여기에는 부부 사이의, 노년 부모와 자식 간의, 아동 청소년의 사회문제를 폭넓게 다룬다. 그리고 소방대원, 변호사, 작가 등의 전문직 종사자들은 군집의 패닉 현상이라든가, 지속한 지진으로 재난에 둔감해진 일본을, 정부의 신무기 실험 음모라든가, 보이지 않는 신의 개입으로 일어난 초자연적인 현상... 등 다양한 의견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언론의 보도 경쟁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더 힘들어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아이는 기적의 소녀가 되어 신흥종교를 만들어낸다. 도시 괴담을 좋아하는 몇몇은 사건 현장을 돈벌이로 이용하기도 하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공무원은 불의의 사고를 겪게 된다.

 

  매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는 작가는 이번에도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독특한 형식으로 기이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인터뷰는 깊이 있는 대화로 다양한 캐릭터를 등장시키는데,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설은 미스터리로 시작해서 사회과학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기도 하고, 후반에는 판타지와 스릴러로 마무리된다. 등장하는 인물의 연관성을 찾는 재미가 있고, 끝까지 사건의 원인을 찾으려는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명확함을 좋아하는 취향에서는 장편소설의 결말이 열려 있어서 살짝 아쉬움이 있다.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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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한국 작가, 한국 소설> 내가 사랑하는 한국 작가와 한국 소설은 이정명과 그의 팩션(팩트 픽션)입니다. 다른 작가와는 다르게 역사의 사실에서 시작하여 자신만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대한민국 팩션의 최고봉이라는 생각입니다.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는 신윤복과 김홍도의 선의 경쟁을 통하여 우리 전통 미술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소설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수고를 문학적으로 표현했으며,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윤동주와 그의 시 세계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토대로 우리의 이야기를 펼쳐낸다는 것, 더구나 작위적이지 않으면서 문학적인 완성도를 보인다는 것, 외국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팩션의 장르를 우리도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사랑하는 한국 작가와 한국 소설은 이정명과 그의 소설을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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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밀리언셀러 클럽 6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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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노 나쓰오, 김수현 역, [암보스 문도스], 황금가지, 2007. 

Kirino Natsuo, [AMBOS MUNDOS], 2005.

 

  가장 인상적인 일본 여류작가를 꼽는다면? 나는 여성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전후좌우 마치 톱니바퀴의 톱니가 딱 맞물린듯한 짜임새 있는 구성을 뽐내는 미나토 가나에를... 사회파 미스터리의 완성자로 불리며 에도시대 시리즈로 왕성한 집필을 하는 미야베 미유키를... 매번 새로운 장르로 독특한 시도를 선보이는 온다 리쿠를... 자극적인 막장 소재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누마타 마호카루를... (또 누가 있을까?) 모두 나름의 개성과 자신만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글솜씨를 보이는 이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단 한 권으로 오랫동안 '잔혹함'이라는 인상을 각인시킨 작가는 바로 기리노 나쓰오이다.

 

  식림

  루비

  괴물들의 야회

  사랑의 섬

  부도의 숲

  독동(毒童)

  암보스 문도스

 

  [잔학기](황금가지, 2007.)를 읽으셨는지? 처음으로 읽은 그녀의 작품으로, 10살 소녀의 유괴와 1년여간의 감금생활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잔혹하고 비열해 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소름과 일본 미스터리의 제대로 된 충격을 맛보았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항상 특별한 기대감이 뒤따른다. '암보스 문도스'는 쿠바에 실존하는 호텔로 '새로운 것과 낡은 것, 두 개의 세계'를 뜻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7개의 단편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다.

 

  하바나에서 저희가 묵은 숙소는 '암보스 문도스'라는 낡은 호텔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제가 이케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양쪽의 세계라는 의미야. 새롭고 낡은 두 개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지."(p.232)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작가는 정갈하고 질서정연한 이미지 뒤에 숨어있는 일본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인간 내면의 웅크린 욕망을 실험적인 성격의 단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식림'은 학창 시절의 따돌림이 학교를 벗어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루비'는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있는 노숙자들의 생활을 묘사하는데, 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은 공원에 모여 박스로 집을 만들어 살면서도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경쟁과 서열이 존재하고 있음을... '괴물들의 야회'는 진정한 사랑을 찾은듯싶었지만, 결국에는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붕괴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파멸로 달려가고 있음을... '사랑의 섬'은 일탈을 꿈꾸는 세 여자의 성적인 욕망을... '부도의 숲'은 저명한 작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복잡한 가정사로 결국에는 이런저런 책임이 뒤따르고 있음을... '독동'은 판타지 장르로 한집에 살면서 한 번도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누군가가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간을... '암보스 문도스'는 더는 순진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어린 학생들의 음모를... 이야기한다.

 

  아이코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결국은 시인, 시인은 청렴하니까. 소설을 쓰려면 악인이어야만 하지." 하고 껄껄 웃어대던 기타무라의 얼굴이 떠올랐다.(p.150)

 

  밑 없는 늪 위에 뜬 두터운 토탄 부유체. 한난 양성의 식물이 함께 자라는 숲이 있는 찾아보기 힘든 부도. 세찬 바람이 불면 섬이 움직이고, 수량에 따라 높이도 바뀐다고 합니다. 제가 이 '부도의 숲'과 아이코 씨가 닮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씀드리면 실례가 될까요.(p.184.)

 

  일곱 개의 단편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각각의 개성으로, 다양한 형식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일관된 맥락은 인간 내면의 은밀한 욕망을 거침없이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비밀, 섹스, 음모, 배신, 추억, 소외, 사랑... 예리한 시선과 날카로운 글쓰기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결국 스스로 억압당하는 인간 본성의 사악함과 무지함을 적나라에 드러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몰입도도 충분하고... 하지만 단편의 짧은 호흡이 아쉬움이랄까?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풀어서 장편으로 해도 손색이 없는 좋은 구성인데, 소설을 읽다가 중간에서 갑자기 멈춘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 걸음 조금만 더 길게 나아갔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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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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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국, 도정일 역, [순교자], 문학동네, 2010. 

Richard E. Kim, [THE MARTYRED],1964.

 

  한때 특정 종교에 심취하여 순교를 서약한 적이 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제대로 모르는 채 막연히 분위기에 휩쓸리는 치기 어린 결단이었지만, 나름대로 젊은 날의 순수한 열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가진 게 많아지며 지켜야 할 것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아니 그보다는 세상 사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 할까? 다시 신과의 만남에서는 순교를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내 심정이다.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는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저자가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작가로 활동하며 영어로 쓴 작품이다. 1964년에 출간하자마자 언론과 문단의 호평 속에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는 등,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념이 대립하는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실존의 고민이 여실히 담겨있는 이 책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길 건너 교회의 종이 뎅그렁 울렸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11월의 청백색 하늘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폐허의 비탈을 쓸어내리면서 여기저기 어지러운 눈가루를 뿜어 올려서는 총탄 자국으로 얼룩진 평양의 회색 건물들에게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자기네 집들의 무너져 내린 폐허를 파 헤집고 있던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자 일손을 멈추었다. 그들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비탈 위의 거의 다 망가져 폐허가 된 중앙교회를, 그리고 십자가를 꼭지에 이고 회색의 시체처럼 솟아 있는 종루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종소리가 전해주는 비밀의 메시지를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듯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든 여자 몇몇은 땅 위에 무릎을 꿇었고, 남자 노인들은 개가죽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였다.(p.14)

 

  멀리 이국땅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일까?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은 마치 밀레의 '만종'을 보는 듯한 서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1950년 6월의 어느 이른 아침에 전쟁이 터졌고, 열세 속에서 유엔군의 참전으로 국군은 그해 10월 둘째 주에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한다.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에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이곳에서 14명의 무고한 목사가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괴뢰당에 납치 감금되어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리고 극적으로 2명의 목사가 생존했다고 하는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는 내 답변에 만족한 눈치였다. "좋아, 이제부터 자넨 그 살아남은 두 목사를 찾아가서 만나보고 우리 문제를 얘기하게. 신 목사와 한 목사야. 조심조심 다루어야 하네. 내가 기독교인들을 함부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으니까. 요즘 우리나라에선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대단해."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샌 기독교인 아닌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기독교도인 체하는 게 대유행이야. 대통령에서부터 장관, 장성, 영관급 장교들, 말단 사병에 이르기까지 말일세. 군대에 기독교 군목이라는 것까지 있잖아? 미군 고문관들을 즐겁게 해주느라고 말야. 자넨 내 어려운 입장을 알겠지?"(p.19-20)

 

  작품 안에는 각기 다른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신 목사, 그는 12명의 목사가 죽은 진실을 종교적인 이유로 숨기고 있다. 이것을 조사하는 장 대령, 그는 뼛속까지 군인으로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한때는 평양의 목사였던 고 군목, 그는 자신의 교회와 성도를 버리고 월남한 죄책감으로 평양에 계속 남기를 원한다. 종교의 신념과는 상관없이 목사인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싶어하는 박 군(박인도)... 그리고 소설의 시점을 제공하는 나, 화자인 나는 어떠한 종교적, 정치적 개입 없이 사건의 진상을 사실대로 조사하기를 원한다.

 

  "모두 몇 명이었습니까?"

  "열네 명이었소."

  "그중 두 사람은 살아남은 거죠?"

  "어째서 우리 둘만 총살을 면했느냐는 얘깁니까?"

  나는 그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신 목사의 답변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신의 개입이었소."

  나는 침묵했다.

  "당신은 신을 믿지 않지요?" 신 목사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운이 좋았다고 해둡시다." 목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p.33-34)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러나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목사님의 신 -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p.37)

 

  "난 비폭력 저항이라는 생각에는 동조하지 않아요. 다른 쪽 뺨까지 돌려대면서 두 번씩이나 뺨을 맞을 생각은 없거든. 정말이지 그럴 생각은 없어. 미안한 얘기지만 난 초기 기독교도들이 로마 황제의 굶주린 사자 떼 앞에 나아가 조용히 기도나 하면서 잡아먹히기를 기다렸다는 얘기 같은 건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난 오히려 구약의 신을 더 숭배해요. 까놓고 말해서 죽은 열두 명 순교자들은 순교자라 불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오. 왜냐? 그 사람들은 빨갱이 박해 앞에서 저항의 손가락 한 번 든 적이 없는 사람들이오... 목사 열넷이 둘러앉아 그중 한 사람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오찬을 즐기고 있는데 빨갱이들이 덮쳐 몽땅 쓸어 담아 간 거지. 그리고 이유도 없이 열두 명을 쏴 죽인 겁니다. 살아남은 두 사람 중에 하나는 미쳐서 돌아왔고 하나는 자기도 죽어 순교자가 되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p.81)

 

  "자넨 예수를 어떻게 판단하겠나?" 박 군이 절규하듯 말했다. "'내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고뇌에 찬 절규를 자넨 어떤 식으로 듣고 있나? 죽어가는 예수의 그 절규 - 창백하게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신성하게 미친 그 가련한 젊은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조롱과 미움의 대상이 되고 로마 병정의 창끝에 온몸을 찔리고, 적들의 시선 앞에서 그를 구해줄 기적 하나 없이 무력하게 헐떡이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고 있는 그 젊은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그 가련한 육신의 절규를? 그도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 필생의 사업이 허사로 돌아가는구나 싶은 무서운 의혹을 느꼈을지 누가 알겠어? 신의 아들 예수에게조차도 의혹의 순간은 있었던 거야!"(p.158)

 

  "자넨 알고 있겠지. 기독교가 들어온 뒤로 한 번도 편한 날이 없었다는 것 말야.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여기 남아 있거든. 그들이 가진 이 수난의 능력, 아니 고난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그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들이 부르는 노랫소릴 좀 들어보게!"

  "천국과 영원의 약속 때문이 아닐까요?"

  "그뿐일까? 그 정도라면 누구나 약속할 수 있어, 이런저런 방식으로 말야. 불교, 일본의 신도, 공산주의, 힌두교, 그리고 그 밖에도."

  "기독교 특유의 것이 하나 있죠, 대령님." 나는 말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죽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믿는 신의 아들이었고요."

  "참 이상한 생각 아닌가, 희생이니 순교니 하는 것 말일세."(p.193)

 

  "나의 희망? 될수록 많은 이들이 절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이 세상의 고난을 이겨내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평화와 믿음과 축복의 환상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 그게 내 희망이오."(p.272)

 

  현대의 소설이 마치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라면, 소설 [순교자]는 잘 짜인 구성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다섯 명의 주요 등장인물은 종교적인 신념과 정치적인 신념이, 인간적인 관계와 이런저런 사정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그러면서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핵심 메시지가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 신학의 여러 쟁점을 치열하게 다루고 있다. 가령, 신은 신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을 알고 있는지? 구약 성경의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신이 신약 성경에서는 왜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인지? 그리고 교회 안에서 진실과는 무관하게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과연 신의 뜻인지?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지? ...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다시 후퇴하고 평양에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자신의 성도를 버릴 수 없는 목사, 자신의 환자를 버릴 수 없는 군의관, 자신의 부하를 버릴 수 없는 지휘관,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 대부분이 피난하는 가운데 몇몇은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과연 누가 진짜 순교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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