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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ㅣ 밀리언셀러 클럽 6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기리노 나쓰오, 김수현 역, [암보스 문도스], 황금가지, 2007.
Kirino Natsuo, [AMBOS MUNDOS], 2005.
가장 인상적인 일본 여류작가를 꼽는다면? 나는 여성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전후좌우 마치 톱니바퀴의 톱니가 딱 맞물린듯한 짜임새 있는 구성을 뽐내는 미나토 가나에를... 사회파 미스터리의 완성자로 불리며 에도시대 시리즈로 왕성한 집필을 하는 미야베 미유키를... 매번 새로운 장르로 독특한 시도를 선보이는 온다 리쿠를... 자극적인 막장 소재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누마타 마호카루를... (또 누가 있을까?) 모두 나름의 개성과 자신만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글솜씨를 보이는 이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단 한 권으로 오랫동안 '잔혹함'이라는 인상을 각인시킨 작가는 바로 기리노 나쓰오이다.
식림
루비
괴물들의 야회
사랑의 섬
부도의 숲
독동(毒童)
암보스 문도스
[잔학기](황금가지, 2007.)를 읽으셨는지? 처음으로 읽은 그녀의 작품으로, 10살 소녀의 유괴와 1년여간의 감금생활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잔혹하고 비열해 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소름과 일본 미스터리의 제대로 된 충격을 맛보았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항상 특별한 기대감이 뒤따른다. '암보스 문도스'는 쿠바에 실존하는 호텔로 '새로운 것과 낡은 것, 두 개의 세계'를 뜻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7개의 단편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다.
하바나에서 저희가 묵은 숙소는 '암보스 문도스'라는 낡은 호텔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제가 이케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양쪽의 세계라는 의미야. 새롭고 낡은 두 개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지."(p.232)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작가는 정갈하고 질서정연한 이미지 뒤에 숨어있는 일본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인간 내면의 웅크린 욕망을 실험적인 성격의 단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식림'은 학창 시절의 따돌림이 학교를 벗어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루비'는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있는 노숙자들의 생활을 묘사하는데, 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은 공원에 모여 박스로 집을 만들어 살면서도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경쟁과 서열이 존재하고 있음을... '괴물들의 야회'는 진정한 사랑을 찾은듯싶었지만, 결국에는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붕괴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파멸로 달려가고 있음을... '사랑의 섬'은 일탈을 꿈꾸는 세 여자의 성적인 욕망을... '부도의 숲'은 저명한 작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복잡한 가정사로 결국에는 이런저런 책임이 뒤따르고 있음을... '독동'은 판타지 장르로 한집에 살면서 한 번도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누군가가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간을... '암보스 문도스'는 더는 순진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어린 학생들의 음모를... 이야기한다.
아이코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결국은 시인, 시인은 청렴하니까. 소설을 쓰려면 악인이어야만 하지." 하고 껄껄 웃어대던 기타무라의 얼굴이 떠올랐다.(p.150)
밑 없는 늪 위에 뜬 두터운 토탄 부유체. 한난 양성의 식물이 함께 자라는 숲이 있는 찾아보기 힘든 부도. 세찬 바람이 불면 섬이 움직이고, 수량에 따라 높이도 바뀐다고 합니다. 제가 이 '부도의 숲'과 아이코 씨가 닮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씀드리면 실례가 될까요.(p.184.)
일곱 개의 단편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각각의 개성으로, 다양한 형식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일관된 맥락은 인간 내면의 은밀한 욕망을 거침없이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비밀, 섹스, 음모, 배신, 추억, 소외, 사랑... 예리한 시선과 날카로운 글쓰기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결국 스스로 억압당하는 인간 본성의 사악함과 무지함을 적나라에 드러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몰입도도 충분하고... 하지만 단편의 짧은 호흡이 아쉬움이랄까?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풀어서 장편으로 해도 손색이 없는 좋은 구성인데, 소설을 읽다가 중간에서 갑자기 멈춘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 걸음 조금만 더 길게 나아갔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