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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김은국, 도정일 역, [순교자], 문학동네, 2010.
Richard E. Kim, [THE MARTYRED],1964.
한때 특정 종교에 심취하여 순교를 서약한 적이 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제대로 모르는 채 막연히 분위기에 휩쓸리는 치기 어린 결단이었지만, 나름대로 젊은 날의 순수한 열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가진 게 많아지며 지켜야 할 것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아니 그보다는 세상 사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 할까? 다시 신과의 만남에서는 순교를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내 심정이다.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는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저자가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작가로 활동하며 영어로 쓴 작품이다. 1964년에 출간하자마자 언론과 문단의 호평 속에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는 등,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념이 대립하는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실존의 고민이 여실히 담겨있는 이 책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길 건너 교회의 종이 뎅그렁 울렸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11월의 청백색 하늘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폐허의 비탈을 쓸어내리면서 여기저기 어지러운 눈가루를 뿜어 올려서는 총탄 자국으로 얼룩진 평양의 회색 건물들에게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자기네 집들의 무너져 내린 폐허를 파 헤집고 있던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자 일손을 멈추었다. 그들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비탈 위의 거의 다 망가져 폐허가 된 중앙교회를, 그리고 십자가를 꼭지에 이고 회색의 시체처럼 솟아 있는 종루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종소리가 전해주는 비밀의 메시지를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듯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든 여자 몇몇은 땅 위에 무릎을 꿇었고, 남자 노인들은 개가죽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였다.(p.14)
멀리 이국땅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일까?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은 마치 밀레의 '만종'을 보는 듯한 서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1950년 6월의 어느 이른 아침에 전쟁이 터졌고, 열세 속에서 유엔군의 참전으로 국군은 그해 10월 둘째 주에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한다.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에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이곳에서 14명의 무고한 목사가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괴뢰당에 납치 감금되어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리고 극적으로 2명의 목사가 생존했다고 하는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는 내 답변에 만족한 눈치였다. "좋아, 이제부터 자넨 그 살아남은 두 목사를 찾아가서 만나보고 우리 문제를 얘기하게. 신 목사와 한 목사야. 조심조심 다루어야 하네. 내가 기독교인들을 함부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으니까. 요즘 우리나라에선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대단해."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샌 기독교인 아닌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기독교도인 체하는 게 대유행이야. 대통령에서부터 장관, 장성, 영관급 장교들, 말단 사병에 이르기까지 말일세. 군대에 기독교 군목이라는 것까지 있잖아? 미군 고문관들을 즐겁게 해주느라고 말야. 자넨 내 어려운 입장을 알겠지?"(p.19-20)
작품 안에는 각기 다른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신 목사, 그는 12명의 목사가 죽은 진실을 종교적인 이유로 숨기고 있다. 이것을 조사하는 장 대령, 그는 뼛속까지 군인으로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한때는 평양의 목사였던 고 군목, 그는 자신의 교회와 성도를 버리고 월남한 죄책감으로 평양에 계속 남기를 원한다. 종교의 신념과는 상관없이 목사인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싶어하는 박 군(박인도)... 그리고 소설의 시점을 제공하는 나, 화자인 나는 어떠한 종교적, 정치적 개입 없이 사건의 진상을 사실대로 조사하기를 원한다.
"모두 몇 명이었습니까?"
"열네 명이었소."
"그중 두 사람은 살아남은 거죠?"
"어째서 우리 둘만 총살을 면했느냐는 얘깁니까?"
나는 그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신 목사의 답변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신의 개입이었소."
나는 침묵했다.
"당신은 신을 믿지 않지요?" 신 목사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운이 좋았다고 해둡시다." 목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p.33-34)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러나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목사님의 신 -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p.37)
"난 비폭력 저항이라는 생각에는 동조하지 않아요. 다른 쪽 뺨까지 돌려대면서 두 번씩이나 뺨을 맞을 생각은 없거든. 정말이지 그럴 생각은 없어. 미안한 얘기지만 난 초기 기독교도들이 로마 황제의 굶주린 사자 떼 앞에 나아가 조용히 기도나 하면서 잡아먹히기를 기다렸다는 얘기 같은 건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난 오히려 구약의 신을 더 숭배해요. 까놓고 말해서 죽은 열두 명 순교자들은 순교자라 불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오. 왜냐? 그 사람들은 빨갱이 박해 앞에서 저항의 손가락 한 번 든 적이 없는 사람들이오... 목사 열넷이 둘러앉아 그중 한 사람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오찬을 즐기고 있는데 빨갱이들이 덮쳐 몽땅 쓸어 담아 간 거지. 그리고 이유도 없이 열두 명을 쏴 죽인 겁니다. 살아남은 두 사람 중에 하나는 미쳐서 돌아왔고 하나는 자기도 죽어 순교자가 되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p.81)
"자넨 예수를 어떻게 판단하겠나?" 박 군이 절규하듯 말했다. "'내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고뇌에 찬 절규를 자넨 어떤 식으로 듣고 있나? 죽어가는 예수의 그 절규 - 창백하게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신성하게 미친 그 가련한 젊은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조롱과 미움의 대상이 되고 로마 병정의 창끝에 온몸을 찔리고, 적들의 시선 앞에서 그를 구해줄 기적 하나 없이 무력하게 헐떡이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고 있는 그 젊은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그 가련한 육신의 절규를? 그도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 필생의 사업이 허사로 돌아가는구나 싶은 무서운 의혹을 느꼈을지 누가 알겠어? 신의 아들 예수에게조차도 의혹의 순간은 있었던 거야!"(p.158)
"자넨 알고 있겠지. 기독교가 들어온 뒤로 한 번도 편한 날이 없었다는 것 말야.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여기 남아 있거든. 그들이 가진 이 수난의 능력, 아니 고난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그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들이 부르는 노랫소릴 좀 들어보게!"
"천국과 영원의 약속 때문이 아닐까요?"
"그뿐일까? 그 정도라면 누구나 약속할 수 있어, 이런저런 방식으로 말야. 불교, 일본의 신도, 공산주의, 힌두교, 그리고 그 밖에도."
"기독교 특유의 것이 하나 있죠, 대령님." 나는 말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죽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믿는 신의 아들이었고요."
"참 이상한 생각 아닌가, 희생이니 순교니 하는 것 말일세."(p.193)
"나의 희망? 될수록 많은 이들이 절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이 세상의 고난을 이겨내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평화와 믿음과 축복의 환상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 그게 내 희망이오."(p.272)
현대의 소설이 마치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라면, 소설 [순교자]는 잘 짜인 구성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다섯 명의 주요 등장인물은 종교적인 신념과 정치적인 신념이, 인간적인 관계와 이런저런 사정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그러면서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핵심 메시지가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 신학의 여러 쟁점을 치열하게 다루고 있다. 가령, 신은 신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을 알고 있는지? 구약 성경의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신이 신약 성경에서는 왜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인지? 그리고 교회 안에서 진실과는 무관하게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과연 신의 뜻인지?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지? ...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다시 후퇴하고 평양에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자신의 성도를 버릴 수 없는 목사, 자신의 환자를 버릴 수 없는 군의관, 자신의 부하를 버릴 수 없는 지휘관,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 대부분이 피난하는 가운데 몇몇은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과연 누가 진짜 순교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