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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경제기적 - 프란츠 알트의
프란츠 알트 지음, 박진희 옮김 / 양문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에서 프란츠 알트는 성장을 얘기했다. 마치 경제발전론자가 신주단지 모시듯 말하는 경제성장을 열변했다. 프란츠 알트는 성장하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했다. 이 책을 읽고난 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가 여느 경제성장론자와 다르다면 환경파괴적인 경제성장이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경제성장을 논한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의 환경단체의 확신적인 주장과는 달리 그는 기술과 환경은 조화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매우 희망적이다. 과격한 환경운동론자의 전형적인 운동방식인 All or Nothing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생태’와 ‘경제기적’이라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에 프란츠 알트는 ‘생태’에 ‘적’이라는 연결단어를 하나 첨가해서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경제성장론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 또한 희망적이다.
이 책은 예사롭지 않다.
노동에 대해서 묻는다. 노동이 무엇이냐. 일하기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살기위해서 일하느냐를 묻는다. 자칫 배부른 부르주아지가 하루하루 연명하기에 급급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에 대해서 경멸하며 묻는 듯한 오만방자한 물음일 수도 있다.
태양과 갈대, 바람은 인간의 모든 에너지 생활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차고속이나 도로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를 혐오한다. 더 나아가 농부는 사업자로서 미래 에너지 생산주체로서 격상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게다가 자연은 완전고용을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절대신이라 한다.
그가 열변하는 것은 어느 하나 틀린 말은 없는 듯하다. 다양한 실전모델을 제시하면서 비교적 설득력있게 논변한다. 가슴속 답답한 것을 속 시원하게 긁어준다. 이 책에 쓰여 있는 대로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공해없는 에너지, 재생가능한 에너지, 완전고용이 가능한 생태에너지산업....
하지만 너무 이상적이기 때문에 독일 또는 유럽에서는 몰라도 과연 우리나라에서는 적용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나의 의식 속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제기했던 토마스 홉스의 성악설이 자리잡고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당위가 현실에 항상 저만치 앞서 있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일까..? 현재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사회에서나 또 과거의 역사 어느 사회에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현실은 당위를 쫓아다니다가도 늘 지쳐버리곤 하지 않았는가?
석유와 같은 화석에너지는 틀림없이 고갈된다. 중국과 일본이 역사문제로 포장된 석유가스광구쟁탈전을 벌이든, 구소련의 아르메니아공화국이나 체첸공화국 석유를 가지고 서방세계와 러시아가 치고 박고 싸우든, 동아시아 어떤 나라에 석유가 얼마 매장되어 있든 확실한 것은 화석에너지의 생명은 이제 풍전등화라는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석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개발하여야 한다. 이것은 당위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세녹스'라는 유사휘발유의 사례와 같이 기존의 석유유통시장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이유로 판매금지를 당했다. 이것은 대체에너지측에는 끼지도 못하는 세녹스가 휘발유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 사례를 비추어 봤을 때 기존의 이해관계인들은 아무리 바람직한 에너지정책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하게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그 친족의 미래외 다른 사람들의 미래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의 본모습이 아닐까..?
프란츠 알트의 말대로 바이오매스 에너지, 태양에너지로 자동차를 굴리든 전기를 공급하든 이러한 대체에너지개발에 대해 과연 기존의 이해관계인들, 즉 정유회사, 석유관련제품판매회사, 막대한 세금을 거두고 있는 정부부처들은 과연 이러한 사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까? 아마도 추측컨대 별 해괴한 논리를 들이대며 방해작전을 펼칠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닐까..?
당위와 역방향으로 주행하는 현실은 결국은 모든 사람을 파멸시킬 것이다. 선각자인 우리나라의 환경단체들은 투철하게 원자력발전소 신설을 반대하고 저지하기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에게 에너지문제의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한다. 환경단체의 운동은 분명 당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환경단체들은 문제는 제기하지만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 것 같다.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노련한 프란츠 알트도 분명 이 점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재 절정기를 맞고 있는 환경운동은 사람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거나 단념과 포기를 설교하기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주장을 하고, 좀 더 나은 생활을 이야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아닐까...? 자동차배기가스가 환경을 파괴하므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 말자라는 과격한 구호를 내세우기 전에 산소를 발생시키는 연료를 개발하라는 구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환경단체와 경제단체가 대립각을 세우면서 서로 앙숙이 되기보다는 서로를 격려해주는 공생과 협력관계를 설정시켜야 하지 않을까..? 환경단체물품을 경제단체가 사줄 것을 구걸하는 관계가 아닌.....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불과 200년만에 지구의 환경이 엉망이 되었는데, 이에 대한 책임의 소재에 대해서 프란츠 알트는 왜 언급이 없었을까? 미래에 대한 비전은 과거를 되돌아 봄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잠시 잊은 것은 아닐까?
그 책임에 대해 그의 모국 독일이나 유럽을 포함해서 선진공업국들은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을까? 선진국들은 여태까지 전세계의 공통자산인 환경소비에 대한 대가를 후진국들에게 톡톡히 치러야 한다. 무엇보다도 선진국들의 환경단체는 이 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성을 자국에 대해서 촉구해야 하지 않을까? 오존구멍이 커진 것이 아프리카의 저개발국들의 잘못인가? 아시아 저개발국들에게 북극해의 빙하를 녹인 책임이 있는가?
대체에너지 기술의 선진국 독점현상이 생길 것이라는 것은 뻔할 것이고,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의 모습으로 가지 않을까? 그의 말처럼 태양은 청구서를 우리에게 보내지는 않겠지만, 선진국은 후진국에게 청구서를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