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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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P.279)


취업에 목을 매던 대학교 4학년,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었다. 표면적으로는 야구 이야기였지만,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도도히 흐르는 프로정신을 비판한 소설이었다. 여기서 프로정신의 요체는 모든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환경에 확실히 적응하라는 것. 다시 말해 일하기 싫다고 놀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는 과거의 행동이 아마추어적인 행동이라면, 프로는 좀 더 합리적이고 체계체적인 노동 방식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슐라르란 철학자는 전(前)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프로 정신은 두 사회의 인식론적 단절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일종의 구호였던 셈이다. 뛰고 싶지 않을 때는 뛰지 않고, 잡고 싶지 않을 땐 잡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함에도, 프로정신은 우리에게 무조건 뛰고, 잡으라고 강조한다. 때문에 삼미슈퍼스타즈 선수들은 그렇게 지고도 야구를 즐겼지만, 프로에 진입한 우리들은 좋은 결과를 내고도 즐겁지 않다. 프로정신의 무력화, 바로 박민규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혁명적인 메시지였다.


‘보잘것없는 인간들에게 내면이 중요하니, 고귀한 영혼이 있다느니 말을 늘어놓는 건 선생님 자위를 하고 싶어 견딜수가 없어요, 하는 아이에게 그럼 공부에 집중해보지 않겠니? 자위가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지나친 자위는 건강에 해를 끼칠 수 있단다. 정 참지 못할 경우엔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기 바래 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221)

박민규의 신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역시 표면적으로는 연애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허점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들고 나온 소재는 외모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렇다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단순히 외모의 미추만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따분하고 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얼굴 못 생겨도 마음만 착하면 된다고 말하는 단세포적 사고를 조롱하고,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과 그에 대한 차별 뒤에 숨은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끄집어낸다. 그렇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개인의 도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구조에 관한 이야기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P.174)


부르디외는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에 허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심지어 허영은 너무나도 깊숙이 박혀있어서, 병사도, 요리사도, 인부도 찬양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허영심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구별하고자 한다. 이 때 구분의 도구인 ‘취향’이 등장한다. 수준 높은 취향, 수준 낮은 취향. 부르디외는 취향이야말로 계급을 구별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원리라고 설명한다. 결국 높은 취향의 사람은 낮은 취향을 무시하고, 낮은 취향의 사람은 높은 취향에 열등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높은 취향을 갖고자 노력한다. 다수는 소수가 만들어놓은 높은 취향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때문에 소수가 규정한 취향의 틀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이 틀이 무너지는 순간은 다수가 높은 취향에 도달했을 때다. 그 순간 다수가 도달한 높은 취향은 다시 낮은 취향이 되고, 상위계층은 또 다시 더 높은 취향을 만들어낸다. 이제 다수는 또 다시 더 높은 취향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부끄러워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허영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이제 남들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활발한 소비가 이뤄지고, 자본주의의 불빛은 더욱 화려하게 빛난다.


'외모는 돈보다 더 절대적이야....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P.219)


이제 다른 사람과 스스로를 '구별짓기(distinction)' 위해선 더 많은 소비라는 과시행위로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야 했고, 이 때 경제적 자본이 위력을 떨치게 된다. 하지만 구별짓기에서 경제적 자본만이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부르디외는 일차원적의 자본 외에도, 문화적 자본, 학력자본, 그리고 두 자본을 통해 발생하는 인맥 자본이 구별짓기에 활용된다고 봤다. 이러한 2차원적인 자본을'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이라 부른다.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요즘, 외모 역시 주요한 상징자본 중 하나다. 더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해 자본주의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끊임없이 확산한다.그 결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경제적 자본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하고, 타인과 자신을 구별짓게 해준다. 때문에 경제적 자본이 없는, 즉, 부르디외가 상징 자본이라 일컬은 문화적 자본과 학력 자본이 없는 사람일수록 외모 자본에 목을 맨다. 외모 자본은 자본의 힘이 곧 계급을 결정하는 시대에, 보잘 것없은 인간이 유일하게 매달릴 수 있는 자본인 셈이다.


‘인간은 기대를 걸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포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다. 신의 기대대로 살 순 없다 해도,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동물이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한은, 말이다.

외모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결국 화려한 소비다. 소비를 통해 남과 자신을 구분하고, 스스로 자율성의 쾌감을 만끽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영역이야말로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 나아가 소비자의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는 산업자본의 전략이 관철되는 중요한 공간이라고 보았다. 소비가 활발한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무한경쟁의 각축장으로 내몬다. 그 결과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계급이 형성되고, 사람들 사이의 평등한 공존은 쉽지 않게 된다. 취업 여부 하나로 친구들 사이의 계급이 구분되고, 경쟁에서 밀린 친구는 점점 더 낮은 계급으로 도태된다. 자본주의는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상대에게 대가 없이 무언가를 주는 치외법권 지역이 존재한다. 바로 사랑의 영역이다. 때문에 철학자 강신주는 ‘사랑이야 말로 자본주의로부터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런 감정’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보드리야식 표현대로라면 상품이 가치나 상품이 아닌, 상징으로 교환될 수 있는 공간이고 부르디외의 표현대로 끊임없는 구별짓기의 폭력 속에서 위안을 받은 수 있는 공간이다. 자본주의의 링 안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혈투, 그 속에서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 역시 상대방의 자본이 아닌,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본주의가 할퀴고 간 가슴 속의 상처를 보듬는다. 사랑이 있는 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그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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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mhee.han 2009-11-0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소설. 다시 읽고 있다. 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믿는 99%는 읽어봐야 함
 
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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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좋아하세요? 별로라고요? 왜요? 좋은 작품을 쓰는 훌륭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전 소설을 참 좋아해요. 김훈의 소설도 좋아하고 성석제나 김영하의 것도 좋아하고. 김훈이요? 처음엔 쉽게 읽히진 않았어요. 그런데 계속 그의 작품을 읽다보니 문장이란 한정된 공간에 깊은 사고를 빽빽하게 담아내는 그의 능력이 놀랍더라고요. 물론 성석제나 김영하처럼 타고난 이야기꾼은 아니지만요. 사실 이야기꾼하면 김탁환을 빼놓을 수는 없겠죠. <불멸의 이순신>, <리심>, <혜초> 등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능력이 대단하거든요. 요즘 나오는 신인작가들요? 전 별로에요. 얼마 전 여자 박민규란 평가를 받았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있죠? <무중력 증후군>인가? 기대가 컸는데 실망스러웠어요. 기술적으론 참 깔끔했는데 이야기에 담겨있는 생각의 깊이가 너무 얕더라고요. 나이요? 아네요. 나이의 문제는 아닐거에요. 서른이 안 된 김애란의 소설에선 노회한 철학가의 숨결이 느껴질 때가 많거든요. 최근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김중혁은 별로였어요. 오히려 박형서의 작품이 느낌은 비슷하면서도 훨씬매력적이었죠. 윤성희요? <감기>의 그 윤성희? 제 취향이 아니에요. 오히려 내공이 2% 부족한 이기호의 소설에 더 애착이가요.  

 

      그럼 어떤 소 설과 소설가를 좋아하냐고요? 음. 상당히 어려운 질문인데요. 소설을 고를 때 제가 제일 중시하는 기준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대신할게요. 전 이야기란 포장 뒤에 숨은작가의 철학을 가장 중시해요. 추상적이죠? 저도 더 구체적인 표현이 떠오르지 않네요. 이런거에요. 인간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는 소설. 이게 참 어려운거거든요. 왜냐면 삶과 세상이라는 것이 불투명한 껍질에 겹겹이 쌓여있거든요. 때문에 우리는 삶과 세상의 알맹이를 쉽사리 보지 못해요. 가끔은 알맹이를 둘러싼 포장지의 모습에 현혹되기도 하고요. 그럴 때 소설가란 영웅이 등장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계몽적으로 설파하는 철학자와 달리 소설가는 이야기란 은유를 통해우리에게 알맹이란 진실을 보여주죠. 전 그런진실을 보여주는 소설이 좋아요. 그런데 요즘 소설들을 보면 대부분이 삶의 표피에 대해서만 주절거리는 것 같아요. 소설가라면 표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한데 요즘 소설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말발만 세운다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제가 괜찮은 작가 하나를 소개하려고 해요. 이제 어느덧 중견작가네요. 김경욱. 최근에 그가 단편집을 냈어요. <위험한 독서>.

       예전에 <누가 커트코베인을 죽였는가>란 소설을 읽고 극찬을 한 적이 있었어요. 스토리가 참 흡입력이 있으면서도 이야기 뒤에 작가의 메시지가 은근하게 숨어있어요. 여기서 은근하다는 것이 중요한데, 때론 메시지에 집착하는 소설의 경우 등장인물이나 사건 등을 통해 너무대놓고 작가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럴 땐 소설의 매력이 반감되죠. 하지만 김경욱의 소설은 달라요. 그래서 전 그의 소설을 수수께끼 풀 듯 읽어요. 흥미로운 이야기를 음미하는 것 못지 않게 즐거운 일이라고나 할까요? 상징이라는 수수께끼 속에 그의 메시지가 숨어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위험한 독서>에 실린 단편하나를 살펴볼까요? ‘달팽이를 삼긴 사나이’는 경제적 어려움에 부인이 대리모를 하게 되는 젊은 부부가 나옵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아내가 대리모 역할을 하는 것에부정적이던 주인공이 자연스레 상황에 적응해가는 모습이 등장해요. 반면 막상 대리모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아내는 거부감을 느끼게 되고요. 근데 흥미로운건 이야기 중간 중간에 달팽이가 끊임없이 등장해요. 주인공은 달팽이를 잔인하게 죽이면서 이상하리만큼 달팽이 퇴치에 집착하죠. 누구든 달팽이 에피소드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어요. 전 헤밍웨이의 소설을 떠올렸어요. <무기여 잘있거라>에서 등장하는 개미씬있죠?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뜨거운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가던 개미에게 오버랩됐었는데요. 김경욱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렇게 김경욱의 소설엔 상징이 많이 숨어있어요. 그런점에서 그의 소설은 상당히 모더니즘적이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일부 독자는 상징이 불편할 수도 있어요. 이야기가 갑자기 끝나는 느낌이 들 수도있고, 직접적이지 않은 얘기 전달 방식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고요.

       쓸데 없이 말이 길었죠? 김경욱 소설의 강점은 또 있어요. 이야기가 상당히 디테일하고 흥미롭다는 얘기는 했죠? 근데 거기에 더해 스토리 중간 중간에 담긴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는데, 그 생각의 깊이가 놀라워요. 기본적으로 삶에 대해 실존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데, 그러한 사고를 문장으로 표현해내는 능력도 탁월하고요. 한 번 살펴볼까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의 방식뿐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죽음이야말로 상투적인 삶이 선사하는 유일한 미스터리였다. (중략) 사랑이야말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삶이 허락한 유일한 불꽃놀이였다.”” (황홀한 사춘기) // 문장이 위험하고 불결했다면 숫자는 뻔뻔하고 가증스러웠다. (게임의 규칙) // 늙어버리면 열정적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그녀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열정적 사랑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또 다른 죽음의 형식을 꿈꾸고 있었다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 어때요? 전 실존주의적 염세성을 듬뿍 담고 있는그의 문체가 참 좋아요. 어때요? 읽어보고싶은 마음이 드나요?

       단점은 없냐고요? 음. 원래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위험한 독서>를 읽으면서-<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부터 본 그의 단편 소설이 다른 문학잡지를 포함해서 스무 편 가까이 되면서 느끼는건데-한 가지 아쉬운 점이 생겼어요. 너무 정제되어 있다고나 할까. 자기 만의틀이 너무 견고하게 잡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소재도 다양하고 글의 형식도 자유롭게 변주하고자 노력하는데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그만의 패턴이 읽혔어요. 그런 그를 평론가 서영채는 기계라고 표현했더군요. (참고로 서영채씨의 의도와는 180도 다른 의미로 제가인용한겁니다.)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에요. 소설쓰는 기계. 그는 오차가 없어요. 대부분의 단편이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으며, 구성이나 문체 모두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해요. 계몽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이성의 강력한 힘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때문에 그의 글에서 영국 신사의 냉철함은 느껴지지만 아프리카 원주민의 강렬함은 느껴지지 않아요. 실존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작가의 글에서 모더니즘의 정수를 느낀 것도 전부 이 때문이겠죠. 물론 서영채는 그를 ‘진화하는 소설기계’라 지칭했어요. 물론 진화는 하죠. ‘황홀한 사춘기’나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은 기존의 그의 소설집에선 절대 맛볼 수 없는 작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소설의 변화도 기계의 틀 안에서 이뤄져요. 때문에 그 진화가 새로움으로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죠. 전 진심으로 김경욱씨가 기계의 틀을 벗어나길 바라요. 물론 기계의 틀을 벗어나는 순간 소설의 질이 들쑥날쑥 할 수도 있겠고요. 군더더기가 있는 작품도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기존에 그가 써오던 작품을 훨씬 뛰어넘는 독특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는거에요. 기계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진화가 아닐까 싶어요.

       스펜서 호스트의 ‘얼룩말 이야기꾼’에 이런 우화가 나와요. 얼룩말의 세계에 얼룩말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샴고양이가 등장해요. 샴고양이는 그들의 언어로 얼룩말의 경계를 낮추고 그들을 쉽게 잡아먹죠. 겁에 질린 얼룩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며 두려워하죠. 이 때 얼룩말 이야기꾼이 등장해요. 그는 얼룩말 말을 할 줄 아는 샴고양이 이야기를 구성중이었죠. 그런 그에게 얼룩말의 언어를 구사하는 샴고양이가 나타났어요. 하지만 얼룩말 이야기꾼은 다른 얼룩말과 달리 속지 않았어요. 오히려 뒷발로 샴고양이를 죽입니다. 내용은 썰렁하죠. 근데 여기엔 제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역할이 잘 드러나있어요. 실제로 세상은 얼룩말의 말을 하는 샴고양이 만큼이나 우리를 현혹시키고 기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일반인들은 예상하기 힘든 기만의 세상을 맞닥뜨리다보면 유령이 나타났다고 두려워하는 얼룩말들처럼 부정확한 대응을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소설가가 얘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얼룩말의 외피 뒤에 숨어있는 샴고양이의 진실을 말이죠. 김경욱은 분명 그런 작가에요. 사회적 구조의 문제, 인간의 실존적 부조리 등에 천착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약간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답니다. 좋은 소설의 매력, 이제 조금 알겠어요? 그럼 다시 답해보세요. 어때요? 소설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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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틀키드 2009-10-3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어요~~감사합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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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곧 하나의 세계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세계는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즐겁고, 슬프고, 화나고, 유쾌한 일들은 오직 나만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다. 이를 두고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는 ‘인간은 하나의 섬’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차가운 철제 침대 위에 당신이 누워있다고 상상해보자. 두려움이 몰려온다. 수술실로 들어간다면 과연 어떤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까. 수술이 진행되고 마취가 서서히 풀린다. 생살을 도려낸 고통이 몸 전체로 퍼져간다. 하지만 수술과정에서 발생하는 두려움과 고통은 당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그 누구도 당신의 두려움과 고통을 완벽하게 느끼거나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어린 시절, 즉 나라는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뒤섞여 있었다. 자신만의 세계가 아직 형성되기 전이었기에, 하나의 세계 아래 함께 존재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 시절엔 고독이란 단어를 몰랐다. 고독과 외로움은 자신만의 세계가 형성되고,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은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때부터 인식되기 때문이다. 무수한 인파 사이에서도 뼈저린 외로움이 밀려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린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지는 간극 사이로 소통의 작은 불빛은 소멸해간다.

2

또래에 비해 일찍 결혼한 나는 종종 ‘결혼하니까 좋아?’란 질문을 자주 받는다. 보통 ‘응 좋아’라고 얼버무리는 데, 간혹 ‘뭐가 좋은데’라며 호기심을 보이는 친구들이 있다. 그럴 때면 참 곤란하다. ‘응 밤에 누군가와 함께 자는 게 좋더라.’ 또는 ‘아침밥을 꼬박 챙겨먹을 수 있어서 좋아’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좋긴 좋은데 뭐가 좋은지 간단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인간은 외부와 고립된 하나의 세계란 점에서, 결혼은 표면적으로 두 세계가 결합되는 순간이다. 만약 ‘나’라는 세계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결혼은 맨 첫 장에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일 테고, 향후 ‘나’라는 세계가 나아가는 데에도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될 것이란 건 확실하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두 국가의 수평적 통합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물론 결혼이라는 두 세계의 통합으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만의 고립된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 채, 두 세계가 강력한 끈으로 묶이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결혼은 화학적 반응이라기보다는 물리적 반응에 가깝다. 때문에 결혼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이 완벽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두 명의 외로운 영혼이 함께 손을 잡고 같이 외로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혼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제도다.

3

‘나’라는 세계 주변엔 높은 담이 세워져 있다. 겉에서 보면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된, 하나의 굳건한 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는 쉽게 붕괴될 정도로 취약하다. 붕괴는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된다. 때론 우연적 사고가 발생해서, 때론 우연처럼 보이지만 톱니바퀴처럼 여러 단계의 인과관계 속에 벌어진 사고로, 각각의 세계는 붕괴하고 만다.(다시 말해 우연처럼 보인다고 전부 우연은 아니라는 말이다.) 갑작스런 아내/애인의 이별 통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같은 상실, 또는 계획했던 시험의 낙방이나 해고, 부도와 같은 실패는 지구 위에서 끊임없이 벌어진다. 각각의 상실과 실패는 수많은 세계를 붕괴시킨다. 한 때 잘나가던 샐러리맨이 한 순간에 서울역의 노숙자로 전락하고, 전도유망한 사업가가 한 순간에 치정 살인의 주인공이 된다. 지구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세계를 붕괴시키는 상실과 실패의 움직임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라는 세계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미국의 시인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en Poe)는 세계를 붕괴시키는 움직임을 두고 ‘어둠의 힘(power of blackness)’이라고 불렀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를 ‘부조리(l'absurde)라고 명명했다. 소설가 김연수는 세계의 붕괴를 두고 ‘서사’, 다시 말해 이야기의 붕괴라고 설명한다. 내가 좋은 대학에 가서 대기업에 취업을 한 뒤, 아름다운 애인을 만나 결혼하고,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곳까지는 이야기의 전개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샐러리맨이 노숙자가 된 사연을 설명해내지 못한다. ‘도대체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바로 이야기가 붕괴되는 지점에 세계의 붕괴가 숨어있다.

4

너무나 허무한 구조다. 견고한 세계 위에서도 인간은 온갖 고독과 외로움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세계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니. 때문에 개인의 세계로 구성된 세상은 거대한 암흑이다. 하지만 암흑 속에는 작은 불빛이 있다. 인간은 희미한 빛을 비춰도 금세 모이는 플랑크톤처럼, 빛을 따라가고자 하는 주광성이 있다. 때문에 불빛의 강도가 희미할지라도, 작은 불빛을 바라보며 붕괴된 세상을 재건하고,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가고, 삶은 계속된다. 밤하늘을 수놓은 작은 불빛 한 곳에 결혼이 살고 있다.(물론 여기서 결혼이라 함은 단순한 사회학적 결합이 아닌, 사랑을 매개로 이어진 관계를 의미한다.) 저마다의 굳건한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이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완벽한 이해 위에 이뤄지는 소통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요원하다. 하지만 결혼은 불가능한 임무를 위한 첫걸음이다. 결혼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다짐 위에 이뤄진다. 상대방의 세계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서로의 세계가 편찬한 국사책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서로의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상상해본다. 실재하는 상대의 세계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비슷해질수록, 이해도는 높아져 간다. 상대의 고통과 즐거움을 최대한 짐작하게 될 때, 소통의 첫 걸음이 시작된다.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메리올리버, <기러기>)’ 세계가 붕괴되더라도, 소통이 살아 숨 쉰다면 세계는 다시 재건될 수 있다. 여기에 결혼이 쏟아내는 작은 빛이 숨어있다.

5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보며 소통의 희망을 떠올려본다. 김연수가 바라 본 세상은 단순히 우연의 산물만은 아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작은 인과들이 맞물리면서 개인과 세계가 형성된다. 무수한 인과가 숨어있다는 점에서 각각의 세계는 긴 이야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세계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모른다. 이야기가 배제된 상태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타인의 세계를 지탱하는 이야기를 하나씩 알아가며 진정한 소통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소통을 시도하는 일. 이것이야 말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네 옆에 사랑하는 누군가만 있다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넌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메리올리버,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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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하준 교수가 또 책을 들고 나왔다. 여기서 '또' 란 의미는 '촘스키가 또 새로운 책을 냈다' 에 사용된 '또'와 비슷하다. 기존의 주장을 더욱 정교하게 포장해 들고 왔다는 의미다. 실제로 장하준 교수의 신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전작 <사다리 걷어차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다리를 걷어차던 사람들이 나쁜 사마리아 인으로 바뀌었을 뿐, 그의 주장은 한결같다. 보호무역으로 성장한 선진국들이 국가 성장에 적합하지 않은 신자유주의 전략을 개발도상국에게 강요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나쁜 사마리아인>은 보다 심도 있는 비판을 가한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주요 비판 근거가 역사적 사례였다면(영국도, 독일도, 미국도 초창기에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다양한 정책들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 이번에는 논리적인 이론을 근거로 신자유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사다리 걷어차기>가 장하준 교수 이론의 윤곽을 드러냈다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드러난 윤곽의 눈, 코, 입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의 문제점은 이미 만천하에 공개됐다. 다만 이론의 허점을 현실 세계의 힘이 막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허점은 쉽게 발견된다. 얼마 전 말라위의 식량난 극복 사례가 국제적으로 화제가 됐었다. 2년 전만 해도 인구의 1/3이 굶던 말라위가 옥수수 몇 십만 톤을 외국에 수출한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정부가 보조금을 제공해 비료의 공급을 늘렸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이미 10여년 전, 두 차례에 걸쳐 말라위의 비료 보조금 정책을 폐지시켰다. 말라위는 옥수수가 아닌, 수익성 작물 생산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비료 보조금 폐지로 비료 값은 폭등했고,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말라위의 농업생산량은 감소해갔다. 결국 최근 세계은행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미시간 주립대학은 최근 보고서에서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경멸하는 보조금 정책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진단했다. 제프리 삭스 교수도 "지원을 한다고 나선 이들이 정부의 역할을 빼앗아 재앙이 닥쳤다" 며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이런 사례는 찾으면 무수하게 나오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결코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에는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장하준 교수가 지적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한계도 한 두 개가 아니다. 우선 신자유주의는 실제로 '자유롭지' 못하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경쟁이 이뤄질 만한 토대가 마련돼있지 않다. 장하준 교수는 이를 '기울어진 경기장' 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관세 철폐의 경우 개발도상국의 타격이 훨씬 크다. (미국의 관세는 WTO 이후 7%에서 3%로 줄어들었다. 반면 인도는 71%에서 32%로 감소했다.)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도 특허가 거의 없는 개발도상국에게 큰 이득이 없는 조항이다. (게다가 보호 기간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기업규제가 완화되면서 선진국의 기업들은 활개를 치겠지만, 개발도상국은 활개 칠 기업조차 갖고 있지 않다. 금융자유화도 마찬가지다. 개발도상국으로 들어오는 금융자본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만큼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자본의 유동성 위험-외국 자본이 한 번에 빠져나갈 위험- 은 둘째치고, 외국인 직접투자의 경우도 인클레이브 시설투자-해당 지역 노동자들에게 단순 조립 업무만 맡기는 방식의 투자-로 인해 파급 효과가 미미한 경우가 많다.) 민영화도 국영화 오류의 해답이 될 수 없다. 독점 민영화 기업이나 정부의 보조를 받는 민영 기업의 경우 국영 기업의 모순을 그대로 지닐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민영화/국영화 구분의 소유 방식이 아니란 의미다. 공기업의 문제점은 민영화가 아닌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공기업인 르노는 민간기업인 푸조-시트로엥과 직접 경쟁을 벌여 공기업의 폐해를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하지만 비판이 지나치게 강해서 일까. 논리의 과정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계은행이 주장하는 재정균형강조가 지나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재정불균형은 국가 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 국가 부도는 인근 국가의 경제 침체를 연쇄적으로 불러 온다. 때문에 재정불균형에 대한 경계는 엄격해야 한다. 물론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가 20년 재정 미래를 계산해, 당장의 재정 불균형을 14년 뒤의 재정 흑자로 채울 계획을 갖고 있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대부분 당장의 인기에 급급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뚜렷한 대책 없이 부도를 맞은 경우가 그 동안 허다하지 않았던가. 또한 뛰어난 경영인이 국가 도움을 받아 설탕에서 번 돈으로 20년 째 적자를 보는 반도체 사업에 돈을 투자해 국가 기반 사업으로 발전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반도체에서 번 돈으로 자동차 산업에 돈을 투여해 10년 넘게 적자를 보다가, 영영 그 돈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뛰어나고 현명한 공무원들이라면 국가 주도 하에 현명한 경제 계획을 짜겠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의 결과는 너무 참혹하다. (우리나라도 공적 자금을 얼마나 낭비했던가.) 바꿔 말해 뛰어난 리더가 나타난다면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이 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무능한 리더가 이끄는 국가의 경우 그 국가의 경제 구성원들이 져야 할 짐이 너무 무겁다.


       재벌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은 재벌이 국가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나타났듯, 재벌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뒤흔들기도 한다. 장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재벌의 원활한 경영활동을 위해 금산분리나 순환출자금지 등은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업 소유자가 소수의 지분을 이용해 기업 전체를 지배하는 방식은 소유자가 유능한 경우에만 긍정적인 결과를 나을 수 있다. 반대의 경우 계열사 전체의 동시 몰락을 가져올 수 있다. (동시에 소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경우 경영권 불법 승계의 위험에도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6살짜리 아이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다려 줘야 한다는 주장(개발도상국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보호무역을 인정하자는 이야기)도 맞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 보조금을 무조건 부정할 수도 없지만 언제까지 인정해줘야 할지도 애매하다.(현재도 보조금 유예기간은 있다.) 이런 대목은 대안이 없는 비판 같다는 인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만약 모든 국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지하고 보호무역을 펼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한국은 여전히 6.25의 폐허더미를 부여잡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외국 기업의 투자가 끊어지면 방글라데시의 한 소녀는 나이키 공장에서 신발 밑창을 붙여서 벌던 작은 돈도 그 나마 잃게 된다. 모든 국가가 무시무시한 관세를 붙이기 시작한다면, 독일 보다 베트남이 더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가 신자유주의의 문제 해결의 답은 아니다. 장하준 교수도 신자유주의 비판을 통해 모두가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가자고 말하진 않는다. 우선 장하준 교수는 선진국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파헤쳐 그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이 과정을 통해 선진국에게 자신들이 사다리를 올라갔듯, 후발 주자들이 사다리에 올라올 동안 기다려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 번째 과정은 그의 날카로운 논리력으로 충분한 성과를 얻은 듯 하다. 하지만 두 번째 그의 메시지는 매우 정확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현실 세계에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나쁜 사마리아인>을 보고 나니, 현실의 모순을 보면서도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더욱 마음만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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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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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프랑스인의 삶만큼이나 자유분방하다. 딱히 정해진 주제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도 없다. 가끔 주제가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지만, 정해진 틀이 없는 만큼 대화의 내용은 훨씬 풍부하다. 보통 술자리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 때 주로 사용되는 접속사는 ‘근데’다. 디스트릭트 봤냐. 진짜 재밌더라’ ‘근데 그 영화 피터 잭슨이 제작한 거래.’ ‘근데 원래 피터 잭슨이 B급 영화 감독 출신이라며.’ ‘근데 내가 옛날에 본 B급 영화엔 브래드 피트가 나왔었어.' '근데 브래드피트랑 졸리는 여전히 잘 살고 있냐' 등등. 이야기는 ‘근데’를 매개로 변형되고 확장된다. 영화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스포츠와 최신 인기 여성그룹을 지나 연애 문제까지 뻗어나간다. 꼬리에 꼬리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딱딱한 회의나 토론회에서보다 더 기발하고 창의적인 내용이 쏟아지기도 한다.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술자리 대화 같은 책이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미술 이야기에서 시작해, 철학, 역사, 사회적인 내용을 거쳐 다시 미술로 돌아온다. 표면적으로는 미술 관련 서적이지만, 내용은 인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방위적 인문학 담론을 펼쳐내는 것이다. 하나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의 주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변환될 때마다 지적 유희의 쾌감은 극대화된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진중권이 좋아하는 12개의 그림 이야기다. 물론 여기서 좋아한다는 의미는 그 그림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거나 행복감이 몰려왔다는 말이 아니다. 관객은 보통 작품을 보고 정서적 감동을 받거나, 지각적 쾌감을 얻거나, 지성적 자극을 받거나, 영성적 울림을 받는다고 한다. 네 가지의 감상 방법 중, 저자는 그림을 보며 지성적 자극에 많이 끌리는 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교수대 위의 까치>가 난해한 그림을 설명해주는, 또는 그림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때문에 책에는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 읽기’부제가 달려있다.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가 있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른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바로 회화의 푼크툼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프리 안젤리코의 ‘조롱당하는 예수’를 통해 초현실주의 사상과 맞닿아 있는 중세의 상상력을 설명한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수난의 잔혹한 묘사는 화면에서 사라진다. 반면 르네상스로 내려올수록 수난의 잔혹함은 점점 더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중세엔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중세만의 상징이 존재했다. 그리스도의 성흔을 마치 여성의 입술처럼 그리거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적인 고문 도구만으로 표현한다. 암흑시대로 알려진 중세이지만,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숭어떼처럼 펄떡였다. 히에로니모스 보슈의 ‘광우의 돌’과 브뤼헐의 ‘교수대위의까치’에서 20세기 현대 철학과 맞닿아 있는 사상적 배경을 살핀다면, 조반니 프란체스코 카로토의 ‘그림을 든 빨간 머리 소녀’와 요하네스 굼프의 ‘자화상’은 아동화와 자화상이라는 회화 장르 자체를 깊게 파고든다. 가스브레히츠의 ‘뒤집어진 캔버스’는 눈속임 그림을 뜻하는 트롱프뢰유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트롱프뢰유에 내재한 현대 미술의 요소들을 짚어본다. 조르조네의 ‘폭풍우’나 티치아노의 ‘신중함의 알레고리’는 그림 자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그림 해석이 갖는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한정된 분량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교수대 위의 까치>를 보며 마르지 않는 진중권이란 샘도 서서히 바닥이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미술에 관한 그의 모든 책을 사서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레퍼토리도 서서히 한계에 도달한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진중권도 신이 아닌 이상에야 모든 책에 새로운 내용을 채워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엇 이건 어디서 본 내용 같은데’란 생각이 예전에 비해 많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 히트곡과 함께 두 세 개의 신곡을 첨가한 유명 가수의 베스트 앨범을 구입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진중권을 잘 모르는 사람에겐 재밌고 흥미로운 알맹이로 독자의 지적 욕구를 자극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그를 잘 아는 팬의 입장에겐 신선함이 조금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정 주제를 정해놓은 것이 아닌, 12개의 그림을 두고 술자리에서처럼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책의 형식도 열독자의 기시감을 부채질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방대한 지식을 술자리에서 농담 따먹기 하듯 쉽게 설명하는 진중권의 능력은 언제 봐도 대단하다. 지하철에서, 잠들기 전, 시끄러운 카페에서, 어디서든 그의 글은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책을 덮고 난 뒤, 강의실이 아닌 호프집에서 시원한 맥주를 시켜놓고 신나게 이야기하는 만담꾼이 떠올랐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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