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 - 채식주의자가 된 미국 최대 축산업자의 양심 고백
하워드 F. 리먼 지음, 김이숙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중요한 결정은 의외로 쉽다. 나의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목표 설정도 그랬다. 지난주 회사에서 1박 2일로 연수를 갔다. 단체활동에 투입되었을 때 나의 목표는 하나다. 빠지는 것. 그런 목표를 가지고 단체 활동에 불참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귀찮아 빠지긴 했으나 뾰족히 할 일도 없다. 나는 그런 상황이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연수를 갈 때 한겨레21을 챙겼다.  

아니나 다를까. 강의시간을 땡땡이로 인해 잡지를 읽을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졌다. 그곳에 게재된 한 개의 기사가 나를 결심하게 했다. '눈뜨고 보기 힘든 소들의 킬링필드.' 기사에 의하면 미국의 '공장형 축산시설'의 소들은 돼지, 개, 닭의 시체를 갈아만든 사료를 먹고, 동료들의 시체 냄새를 맡으면서 생활하며, 자신들의 배설물 위에서 잠을 잔다. 그렇게 기르는 게 '효율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생산물화! 야만적인 '문명'이 아닌가. 그날 점심 먹으러 가서 선배에게 말했다. 채식주의자가 될까봐요. 니가? 선배는 쳐다도 안보고 비웃으셨다. (니가?라는 말 앞에 "삼겹살 앞에서 그렇게 떠나지 않는 웃음을 짓고 점심메뉴 추천하라고 하면 갈비탕만 먹으러 가자고 하는"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진정성을 나타내기 위해 아까 본 기사를 설명할 까 하다가 메뉴가 하필이면 갈비탕이라 민폐가 될 거 같아 그만두었다. 

사실 채식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은 이전부터 있었다. 남의 살을 뜯어먹는 다는 것, 얼마나 피곤하고 가혹한 짓거리인가. 하지만 기린, 사슴, 얼룩말 뭐 그런 초식동물들을 보라. 지천으로 널린 풀들이 다 제 것이니만큼 피곤하지 않고, 풀은 피도 흘리지 않고 소리도 지르지 않으니까 가혹하지도 않다. 채식을 하면 초식동물처럼 고상하고 유유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감정적인 호의가 있던 중에, 땡땡이 치면서 본 한겨레21의 기사는 나에게 이성적인 정당성을 심어주었다. 소고기가 불결하고 불순하다는 것을 안 이상 더이상 먹을 필요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물론 나는 돼지와 한우, 호주산 청적육도 안 먹을 계획이나 그것들마저 공장형 축산시설에서 자란다는 건 아니다. 사실 모르겠다.)  

일단 붉은 고기(소와 돼지)부터 안 먹는 단계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향후에는 닭과 생선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잘 된다면, 내가 연수를 땡땡이 치고 잡지를 본 덕분에 소6마리, 돼지 30마리가 생명을 건지고 나아가 닭 780마리도 죽지않고 살 수 있다. 더 잘 된다면 내가 먹지 않기에 태어날 필요가 없는 소가, 태어나지 않았기에 먹지 않아도 될 음식으로, 396명의 기아를 살릴 수 있으며, (계산 불가능하지만 돼지는 더할 것) 열대우림 파괴와 수질/토양오염 및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의미있는 결정이 아닌가. 25세 되던 해, 회사 연수에 가서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하다!  

(아, 책에 대해 쓴다는 게 내 얘기만 했네. 사실 다 안 읽었다. 아마 다 안 읽을 것 같다. 소고기에 '생산'에 대한 미국의 악덕한 행태를 보려면 "KBS 스페셜 - 광우병, 미국 쇠고기에 대한 보고서"를 보시길. 그게 훨씬 낫다. 그래도 채식을 결심한 시점에, 그 결심의 증거로 책 한권 사서 전시해놓고 싶으시다면 구입하셔도 좋겠다. 사실 나는 그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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