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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어이, 호어스트, 자네 왠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참! 그런가? 하지만 그럼 안 되나? 어차피 내 시간인데."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이 아니지 中
의료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긴 연휴 내내 집에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고 자고, 영화보다가 책보다가, 만화책을 보고, 심지어 온라인 게임에까지 손을 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주일이 넘도록 이런 식으로 빈둥거린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내 나름대로 부지런해지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래서 학교도 될 수 있으면 일찍 갔으며, 지하철 같은 데서도 짬이 나면 무조건 책이나 신문이나 수업 필기 등을 읽곤 했다. 친구를 만나도 생산적인 무언가가 없다면 마음이 불편했다. 심지어 지하철을 친구와 같이 타느니 신문을 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일주일간 빈둥거리면서, 이 게으름과 내가 맞바꾼 게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부지런'해진 덕분에 나는 2점대에서 비실거리던 평균 성적을 3점대로 올리는 기염을 토했으며 심지어 장학금도 몇 번 받았다. 그렇게 4~5년을 사니까 취직도 했다.(몇 번 실패하긴 했었지만) 잃어버린 것은? 글쎄 겉으로 들어나지 않는다. 성격이 조금은 더 모나게 된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친했던 친구들과 조금은 멀어진 것 같기도 하다. 못 보고 지나쳤을 재미있는 영화와 만화 소설들이 있을 것이다. 혼자 공상하던 버릇도 어느새 사라졌다. 그러고보니 "적당한 게으름은 창의력에 좋다"고 하는데 왠지 예전보다 재미없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주인공 호어스트가 드라마를 다 보고 난 후 시간이 남자, '새로산 연필심이 다 닳아 없어지게 하려면 줄을 몇 번이나 그어야 하는가'를 실험하는 도중, 17,239개 째 줄을 긋고 나서 마음 속의 목소리와 주고받은 대화다. 엄청나게 '무의미한' 행동을 추궁하는 목소리에게 "그럼 안되나? 어차피 내 시간인데."라고 대답하는 뻔뻔함을 보고,(책 안의 다른 부분은 더 심하다) 예전의 내가 가졌던, '흘려보내는 시간에 대한 죄책감'을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추석연휴라는 닭털같이 많은 시간을 마주대했기 때문에 5년만에 극도의 빈둥거림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것이 책과 나의 인연이고 운명일까. 어쨌든 극도로 게으른 저자의 삶이 바쁜 현대인의 판타지가 되든, 아니면 현실이 되든, 그것은 읽은 이의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