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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남재일 지음 / 강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남재일 선생님은 늘 건들거리시며 수업에 임하셨다. 지압 슬리퍼를 신고, 빳빳하지 않은 남방을 걸치고 칠판 앞을 어슬렁거리시는 모습. 내 기억 속 선생님의 압도적인 이미지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발언도 많았다. 기자가 되겠다는 아이들을 가르치시면서도, 시사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는데? 나는 신문 안 봐”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신다든가, 오전 수업시간 내내 기다리게 해놓고 들어오셔서 “어제 요가를 심하게 해서 아침에 못 일어났어”라며 뻐근하게 목 운동을 하신다든가.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은 뻔뻔하거나 무심하셨고, 누구를 놀릴 때나 가끔 웃으셨다.
그런데 우리는 ‘남쌤’을 좋아했다. 겉은 건들거리셨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진지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현상에 대해 물으면 그 현상을 파고 들어가는 솜씨가 심상치 않았다. 파고, 또 파고 그래서 저 깊이 있던 무언가를 꼭 끄집어 내셨다. 우리는 그 ‘삽질’에 넋이 나가곤 했다. 간혹 나같이 지식이 얄팍한 학생들은 선생님의 빠르고 현학적인 언어가 인도하는 그 땅굴 속을 따라가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기도 했다. 영화나 만화에 보면 겉은 괴짜이나 속은 도인인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는데, 선생님이 그러한 인물일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스터디 하는데 들어와서 “니들은 하루에 방귀를 몇 번이나 뀌냐”하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셔도 무언가 인문학적 함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게 벌써 일년 전인가 보다. 선생님이 막 그리워지고 있던 차에, 책을 내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반가워서 냉큼 구입해 읽었다. 역시, 그 수업시간들을 기억나게 한다. 진지하지 못한 말장난에 '낚여' 낄낄 웃으며 끌려들어 가다보면 어느새 깊은 곳에 있던,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가령 이렇다. 가죽잠바를 벗어놓고 고기가 된 강아지 도꾸를 보여주더니 남루함에 대한 시선을 설명하고, 배꼽바지 입은 품행이 제로인 학생 이야기를 하다가 어둠 속에 가라앉는 피해자와 그를 외면하는 ‘우리’의 연대를 알려준다. 애마부인이 어떻고 그 부인을 몰고온 마부가 어떻고 하는 글이 있는데, 제목은 ‘기억의 주특기는 배신이다’다. 이 주제로 애마부인을 몰고 가는 것은, 선생님이 아니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사실 이건 남쌤이 언론사 논술 시험 합격을 위해 창안하신 ‘5단락 구성법’이다. (혹은 조금 더 자유로운 형태다.) 즉 말랑말랑한 '내 이야기'로 주목을 끌어, 독자를 글로 끌어들이는 전략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 효용성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그게 선생님의 의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책에서 말했다. ‘인간은 개인으로 홀로 설 때 진심으로 성찰한다’고. 그런 선생님의 권유가 형식에서부터 들어나는 게 아닌가 싶다. '집단의 일원으로서 사고하던 버릇을 버리고 '나'를 단위로 세상을 둘러봐라.' 어쨌든, 책을 읽으니까 더 남쌤 생각이 난다. 선생님의 수업을 다시한번 들으면 좋겠다.
2006.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