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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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을 그리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이 조금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선의 여인이 어디 난설헌 하나뿐일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의 연보를 보니 노년의 나이다. 어쩌면 그동안 감춰두고 살았던 자신의 속내를 은근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부모님 세대까지는 어쩔 수 없는 형식의 굴레안에서 살아야했을테니 하는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 형식의 굴레에 묶여 허덕이는 여인의 모습이 너무도 안스럽게 그려져 있다. 난설헌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조금은 지나치게 느껴져 아쉬웠다. 사실 조선은 여인에 대해 그다지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 여인을 옭아매기 위한 말도 너무나 많았다. 오죽했으면 三從之道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이며 깊게는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가 바로 조선이었다는 말이다. 그토록이나 많은 인물이 나왔다는 선조代에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허엽도 있었다. 남존여비사상이 조금씩 고개를 들던 시기였으니 허엽이 자신의 딸에게 당당하게 학문을 익힐 수 있게 해 주었던 일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기안으로만 파고들던 난설헌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난설헌은 그의 이름보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라는 것으로 더 유명한 듯 하다. 그래서그런지 허균만큼이나 글을 잘 지을 것 같다는 어설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한 줌의 재로 남을 뻔했던 그녀의 시가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져 있다고 하니 그녀가 살았던 고집스러운 세월에 대한 어느정도의 보상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서는 그녀의 학문적인 소양이나 소질을 말하기보다 일상적인 여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16세기 조선의 풍속사 또한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시집가는 날 비가 오면 어떻다더라 하는 식의 미신에 가까운 의식도 그렇고 함이 들어오는 날의 풍경이라거나  전통적인 혼례식 장면, 시집으로 들어가는 신행길과 같은 풍경이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그려진다.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는 그녀는 이미 여덟살에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거기다가 백옥같은 용모까지 가졌다. 재주있는 여자가 아름다운 용모까지 가졌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을까?  요즘과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그것은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을테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불행이라면 불행이었을 것이다. 후대의 실학자 박지원마저 여자가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아 재주있는 여자들은 난설헌의 삶을 경종으로 삼으라는 말을 했다는 것만 보아도 여성의 재주는 그다지 환영받을 수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을 살아낸다는 게 그리 녹녹치 않은 것이다. 조금의 타협도 찾아볼 수 없었던 팍팍한 그녀의 현실이 닫힌 문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자신의 뜻을 맘대로 펼칠 수 없다는 답답함과 너그럽지 않은 주변의 시선들은 그녀의 삶을 조여오는 올무와도 같았을테니 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 얘기하듯이 남편 김성립이 급제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지만 가정에서 편안함을 찾지 못하고 밖으로만 돌았다고 한다. 조금만 타협했더라면, 자신의 아픔을 바라보듯이 주변의 소리를 조금더 열린 가슴으로 들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이, 아버지의 객사와 오빠와 동생의 귀양과 같은 친정의 슬픔, 감싸주지 못하는 남편의 사랑, 좋지않은 고부간의 갈등등이 그녀를 외롭게 하여 끝내는 밀쳐두었던 서안을 가까이할 수 밖에는 없었겠지만, 그런 연유로 하여 멋진글이 탄생할 수있었다는 것은 정말 역설적이다.  어쩌자고 가슴에 촛불을 밝혔느냐던 친정어머니의 애타는 심정이 느껴진다. 그 촛불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결혼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던 그녀의 절규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그리워했던 최순치라는 남자의 이름앞에서도 변함이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걸 어쩔 수가 없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며 사는 것만이 옳다는 건 아니다. 난설헌의 삶을 통해 여인들의 지독한 고통만을 그려냈기에 하는 말이다. 가슴아픈 소설이었다. 한여인의 삶을 통해 이렇게나 절절한 느낌을 전해받을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버려진 이름, 버려질 수 밖에 없었던 이름이었으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또다른 의미로 그녀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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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마르탱 파주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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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존재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지금 내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일까? 이따위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왜 사는 것일까? ... 짜맞춘듯한 지성이 싫어서,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되어지는 인격이 싫어서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탈출시키고자 하는 한 남자가 있다.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그가 처음 선택했던 알코올 중독자되기는 맥주 반잔에도 알코올 과민반응을 보이는 육체적인 한계에 부딪혀 포기해야 했고, 두번째로 선택했던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들었던 자살강의는 어떻게 자살할 것인가를 확실하게 알게 해주긴 했으나 자살에 대한 생각을 없애버리고 말았다. 살고 싶지 않았지만 죽고 싶은 마음도 없던 그가 바보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앙투안...
 
그의 바보선언문을 살펴보자. 단순한 사람은 행복하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작용이 아니다, 장수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은 전혀 지적이지 않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회적인 자살이다 왜냐하면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까발려지고 벗겨져 종종 그것을 죽이게 되기 때문이다, 지성은 곧 질병이다 왜냐하면 생각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까닭이다... 이 바보선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정도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한 사람은 복잡한 사람에 비해 행복하다는 그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는 약간 정신을 놓고 원인이나 진실, 현실따위를 모른채로 살고 싶어 했다. 현실을 모른 채 그냥 살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건 현실도피가 아닐까? 세상의 편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고, 매사를 분석하고 껍질을 벗겨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기를 바랬다. 다시한번 들여다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주제가 아닐까 싶어서.
 
사실 바보가 되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만들어진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면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삶이야 말로 바보스러운,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바보처럼 산다는 말에 왠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지금의 현실은 너무나도 각박하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것들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말일 게다. 때로는 바보스럽게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여기 이 책속의 남자 앙투안이 꿈꾸는 삶이 어쩌면 그 자연스러움의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이들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유령놀이가 어쩌면 우리에게도 필요한건 아닐까? 다른 사람의 판단이 나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버튼이라고 말한다면 억지일까? 바보가 된다는 것은 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앙투안이 꿈꾸었던 바보는 남에 의한 내가 아니라, 나에 의한 나로써 살고 싶어했던 욕심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끝없이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면서도 현실은 몰개성화 되어가고 있는 아이러니라니...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진정한 바보가 될 수있다면 오히려 행복한 삶에 한발짝 다가가는 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하지만 책속의 말이 나의 생각에 비수를 꽂는다. 인생은 수표와 신용카드를 먹고 사는 동물이다(-134쪽), 가장 쉽게 부패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임을(- 151쪽)..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던 앙투안은 그 뒤로 별탈없이 행복하게 살았을까?
 
마르탱 파주의 <완벽한 하루>를 읽고 색다른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한번 더 그의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은 쉽게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는 게 더뎠다. 이제 막 글을 배운 사람처럼 더듬거렸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도 '난해하다'라는 말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수도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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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풍수 인테리어 - 복과 행운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Mr. 류 지음, 김소라 옮김, 곽민석.김윤곤 감수 / 황금부엉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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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水地理 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땅의 생김새나 방향을 사람의  吉凶禍福과 연결시키는 것인데,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경우가 집을 짓거나 무덤을 정할 때가 아닌가 싶다. 옛날에만 풍수사상의 지배력이 컸던 건 아니다. 말은 안해도 은근하게 따진다는 풍수... 그런데 실내장식을 하는데도 풍수를 따져야 한다니 궁금하기는 하다. 대체적으로 풍수사상을 말하다보면 음양오행설이 함께 따라 나온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처럼 말이다. 가까운 고궁엘 가보아도 건물 하나하나를 그냥 세우지 않았다는 걸 알 수가 있는데 그것도 음양오행설과 풍수가 함께 아우른 결과물일 것이다. 좋다하면 뭔들 못하겠나 싶으면서도 가구 하나도 내 맘대로 놓을 수 없는거냐는 반발심도 은근하게 생겨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돈이 들어오고 저렇게 하면 아프지 않고 그렇게 하면 출세를 한다고 하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사람의 심리일테다.

이 책에서 다루어주는 건 현관풍수다. 모든 집의 첫관문인 현관.. 그 집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곳이 바로 현관이라는 말도 있듯이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현관이 사실 보기좋은 건 아니다. 풍수를 떠나서 현관만큼은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며 사는 습관을 갖는다면 아마도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정리정돈을 그냥 하지말고 풍수를 생각하며 하라고 한다. 현관의 방향에 따라  배치해야하는 것들도 달라진다는 말이다. 우측에는 무엇을 두면 좋은지, 좌측으로는 무슨 그림을 걸어두어야 좋은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어떤 장식품을 놓아야 행운을 불러 들일수 있는지.. 또한 색도 서로 궁합을 맞춰준다면 금상첨화란다. 자신에게 맞는 색이 어떤 색인지 알 수 없으니 그것조차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현관은 吉凶禍福이 동시에 들고나는 곳이다. 기왕이면 복이 들어오게 하고 들어온 복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현관풍수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함께 있으니 물론 나쁜기운도 함께 들어온다. 그렇다면 그 기운을 어떻게 하면 약하게 할 수 있는가를 따져 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이 말하는 현관풍수의 일부분에 속한다.

내가 태어난 출생연도에 따라 좋은 방위나 좋은 색은 달라진다. 심심풀이 삼아 한번쯤은 뒤적거려봐도 괜찮을 것 같다. 밑져야 본전이다. 각설하고, 이 책에서 다루어주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한번 살펴보자면 이렇다. 돈이 모이는 현관 만들기도 보이고 항상 건강한 현관을 만드는 방법도 보인다. 氣의 성질을 알고 액운을 떨쳐낼 수 있도록 가구 배치를 한다거나 방을 배치하는 방법등도 말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청소하기가 아닐까 싶다. 일단은 깨끗하게 정리하는 결과를 가져오니 굳이 풍수를 미리 따지지 않아도 늘 개운하게 청소하는 습관을 갖는다는 건 좋은 일임에 분명하다. 깨끗한 것이 운기를 향상시킨다고 하니 명심할 일이다. 오래전에 현관에서 바로 부엌이나 화장실이 보이는 구조는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상적으로 우리 곁을 맴도는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식의 말은 많지만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는건지를 알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정말 그럴까 싶은 말도 있었지만 모든 건 자신이 할 탓이다. 현관이 행복하면 왜 행복해지는 건지 머리말에서 이야기하고 넘어갔듯이 우리가 조금만 더 몸을 움직여 주변을 항상 깨끗하게 유지한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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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길 1 - 노몬한의 조선인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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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으로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니 궁금하기는 하다. 하지만 오래전에 TV를 통해 방영되었던 <여명의 눈동자> 가 오버랩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얼마나 가슴 졸이며 그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지금까지도 여운이 남는 드라마중 몇 안되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책 장을 덮으면서 두가지의 의문이 나를 찾아왔다.  '전쟁은 왜 해야만 하는 것일까? '가 그 하나였고, '아버지란 의미는 무엇일까?' 가 남은 또하나의 의문이었다. 전쟁이야 욕심을 버리지 못하거나 살기 위해 벌이는 영역다툼이라고 한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녹아들던 아버지란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 아버지 김길수는 영역다툼을 벌이기 위해 전쟁속에 뛰어든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전쟁은 필연적으로 묶여져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쉽게 읽혔다. 이미 알고 있는 길을 따라간다는 게 어쩌면 밋밋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전쟁속에서 한포기의 들꽃처럼 질기게 피어오르던 짧은 情의 행렬들... 같이 있다는 건 누구나에게 평온함을 안겨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왜 전쟁을 하는가?
에필로그에서 물었던 작가의 질문이다. 탐욕때문일까? 파괴본능 때문일까? 무기와 군사물자의 소비를 위한 경제적 논리를 적용시키기 위해서?  모든 답을 제시해놓고도 답을 찾기 어렵다고 말한 건 아마도  그 전쟁으로 인한 많은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일 것이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김길수라는 한 남자의 발길을 따라가다보면 우리가 배워 익히 알고 있는 전쟁들이 총망라된다. 기대했던 아버지와 아들의 애틋함도 없다. 남편과 아내의 절절함도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은 끝까지 그 남자의 여정속에 머물고 있다. 안개속에 가리워져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언제 달려들지 모를 얼굴을 하고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기적같은 생존의 순간들은 또다른 전쟁을 만들어낸다. 원하지 않았으나 주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끝까지 살아 남았으나 끝내는 돌아오지 못하는 남자의 여정과 함께 전쟁도 끝났다.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질긴 생존의 순간들마다 아들을 향한 마음이 있었다. 돌아가리라던 그 약속이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약속이라는 말은 왜 그리도 애절함을 안고 다가오는지...
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 의미야 어찌되었든 책을 읽는 내내 내 곁을 맴돌던 싯구절이 애처롭다. 

아버지.. 그 이름을 다시 불러봅니다.
어머니라는 말과 아버지라는 말이 내게 주는 의미가 새삼스럽다. 지금까지 절절한 부정을 그린 책은 많다. 어린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보여주었던 조창인의 <가시고기> 아버지가 있었고, 췌장암 선고를 받고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던  김정현의 <아버지>가 있었고, 외롭고 힘겨웠던 시간속에서도  <고향사진관>을 지켜내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이제는 우리가 한번쯤은 아버지의 존재를 보듬어 안아줄 때가 되었다고 말하던 김정현의 또다른 아버지가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그 아버지란 말이 왜 이토록이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지... 어린 아들을 두고 징병트럭에 태워져야 했던 한 남자 또한 아버지였다. 그에게 아들은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보여지던 작은 불빛같은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많은 것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先代에게는 뼈아픈 일이었을 우리의 전쟁, 아니 그들의 전쟁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감상적인 말일까?  조금은 길었던 아버지의 길이 끝나던 거기에는 단지 기억만이 남아있었다. 끝내는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존재를 가슴에 품고 살았을 그 아들의 기억이 내게는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다. 실화를 바탕으로 생겨난 이야기여서가 아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그 장면들이 찔끔 눈을 감게 만들었다. 책표지의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길이 끝나기는 할까?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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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 조선 오백년 집권의 비밀
도현신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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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왕의 시간표를 살펴보자. 새벽 4~5시경에 일어나서 6시경이면 왕실 웃어른께 아침 문안을 드린다. 7시경에 아침을 먹고 8시경부터 아침공부를 시작한다. 10시경에 조참朝參 또는 상참常參과 같은 아침 조회를 한다. 여기서 조참이라 함은 중앙의 문무백관이 한 달에 네 번 정전에 모여 임금께 문안을 드린 후 정사를 논하던 일을 말함이고, 상참이라 함은 중신과 시종관이 매일 편전에서 임금에게 정사를 아뢰던 일로 일종의 약식 조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1시경부터 오전 업무를 보는데 이 때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신하들과의 접견이 있었다. 정오부터 오후 1시경에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에 낮공부를 한다. 오후 3시경에 다시 신료 접견을 하고, 오후 5시경에 내의 야간 숙직자를 확인한다. 오후 6시경에 저녁공부를 하는데, 아침공부는 조강, 낮공부는 주강, 저녁공부는 석강이라 한다. 오후 7시경에 저녁을 먹고 8시경이면 다시 왕실 웃어른께 저녁 문안을 올린다. 밤 10시경에 상소문을 읽고 11시경에 잠자리에 든다. 가만히 따져보면 정말 놀 틈이 없다. 속된 말로 정말 빡세다.저런 시간표를 받아들고 딴짓할 틈이 있었을까?  아마도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왕이 좀 시끄러웠던 게 아닐까 싶다.

'전인적 공부법'이란 제목을 보면서 문득 인성교육이란 말을 떠올렸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말하는 인성교육.. 도대체 무엇이 인성교육인 것일까? 인성이라는 건 인간됨이나 인간다움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이 인간으로써 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인데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오질 않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추상적인 느낌이라서 그럴까? 그래서 全人的이라는 말을 찾아보았더니 知, 情, 意를 모두 갖춘... 뭐 이렇다. 공부를 함으로써 뜻을 정하고 가치관을 세우고,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일까?  그래서 인성교육에 대해 다시한번 찾아보니 인간이 가야할 올바른 길을 인도하며 나아가 全人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정말 어렵다.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며 산다는 게 그리 쉽진 않다는 말일게다.

어찌되었든 왕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계에 서연, 경연, 종학이 있었다. 서연은 왕이 되기 위한 공부를 말한다. 출생과 동시에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경연은 왕이 되고 나서 하는 공부를 말하며, 왕실의 종친 관리를 위한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종학이라 했다. 종학이라는 게 왕족만을 위한 공부이기도 했겠지만 왕이 되어 종친들로 인한 문제를 다루기 위한 일종의 처세를 가르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智,德,體를 강조 했다는 서연은 정말 대단하다. 일찌감찌 유아교육에 눈을 뜬 셈이다. 회강과 고강으로 복습을 하거나 시험을 치르기도 했으니 쟁쟁한 선생들에게 합격점을 받기가 녹녹치 않았을 테다. 왕이 되고나서도 경연을 통해 역사와 시사를 배워야 했다는 건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시 현실의 문제에 대한 답은 역사속에 있다는 말을 다시한번 인정하게 된다.

문답식과 토론식 공부를 했다는 것을 왜 우리의 교육 현실은 잊었던 것일까? 논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며 신하들의 논쟁조차도 허용했다는 왕의 열린 마음이 대체적으로 조선을 만들어낸 왕의 마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조선 왕들의 재위기간과 경연 횟수를 비교해 본 표가 재미있다. 물론 재위기간이 길어 경연의 횟수도 많을 수 있겠지만 재위기간과는 다르게 학문에 열중했던 왕의 모습도 보인다. 문종의 경우 2년이라는 재위기간동안 155번이나 경연에 참가했지만 철종의 경우 14년동안 4번밖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물론 상황에 따라 어느정도는 변수가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세종이나 성종, 중종, 숙종,영조와 같이 치세를 이룬 왕들만 보더라도 경연의 의미가 상당히 컸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당시부터 우리는 이미 선진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이었음에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점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나마 일방적인 주입식을 벗어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창의적 교육을 운운하며 내세운 교육이념이 오히려 논술이라는 파행을 불러오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해도 우리의 옛 선조들이 행했던 문답식과 토론식 교육을 갈고 다듬어 이 시대 혼란스러운 교육을 이끌어가는 이정표로 삼아주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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