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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이 조금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선의 여인이 어디 난설헌 하나뿐일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의 연보를 보니 노년의 나이다. 어쩌면 그동안 감춰두고 살았던 자신의 속내를 은근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부모님 세대까지는 어쩔 수 없는 형식의 굴레안에서 살아야했을테니 하는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 형식의 굴레에 묶여 허덕이는 여인의 모습이 너무도 안스럽게 그려져 있다. 난설헌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조금은 지나치게 느껴져 아쉬웠다. 사실 조선은 여인에 대해 그다지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 여인을 옭아매기 위한 말도 너무나 많았다. 오죽했으면 三從之道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이며 깊게는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가 바로 조선이었다는 말이다. 그토록이나 많은 인물이 나왔다는 선조代에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허엽도 있었다. 남존여비사상이 조금씩 고개를 들던 시기였으니 허엽이 자신의 딸에게 당당하게 학문을 익힐 수 있게 해 주었던 일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기안으로만 파고들던 난설헌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난설헌은 그의 이름보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라는 것으로 더 유명한 듯 하다. 그래서그런지 허균만큼이나 글을 잘 지을 것 같다는 어설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한 줌의 재로 남을 뻔했던 그녀의 시가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져 있다고 하니 그녀가 살았던 고집스러운 세월에 대한 어느정도의 보상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서는 그녀의 학문적인 소양이나 소질을 말하기보다 일상적인 여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16세기 조선의 풍속사 또한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시집가는 날 비가 오면 어떻다더라 하는 식의 미신에 가까운 의식도 그렇고 함이 들어오는 날의 풍경이라거나 전통적인 혼례식 장면, 시집으로 들어가는 신행길과 같은 풍경이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그려진다.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는 그녀는 이미 여덟살에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거기다가 백옥같은 용모까지 가졌다. 재주있는 여자가 아름다운 용모까지 가졌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을까? 요즘과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그것은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을테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불행이라면 불행이었을 것이다. 후대의 실학자 박지원마저 여자가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아 재주있는 여자들은 난설헌의 삶을 경종으로 삼으라는 말을 했다는 것만 보아도 여성의 재주는 그다지 환영받을 수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을 살아낸다는 게 그리 녹녹치 않은 것이다. 조금의 타협도 찾아볼 수 없었던 팍팍한 그녀의 현실이 닫힌 문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자신의 뜻을 맘대로 펼칠 수 없다는 답답함과 너그럽지 않은 주변의 시선들은 그녀의 삶을 조여오는 올무와도 같았을테니 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 얘기하듯이 남편 김성립이 급제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지만 가정에서 편안함을 찾지 못하고 밖으로만 돌았다고 한다. 조금만 타협했더라면, 자신의 아픔을 바라보듯이 주변의 소리를 조금더 열린 가슴으로 들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이, 아버지의 객사와 오빠와 동생의 귀양과 같은 친정의 슬픔, 감싸주지 못하는 남편의 사랑, 좋지않은 고부간의 갈등등이 그녀를 외롭게 하여 끝내는 밀쳐두었던 서안을 가까이할 수 밖에는 없었겠지만, 그런 연유로 하여 멋진글이 탄생할 수있었다는 것은 정말 역설적이다. 어쩌자고 가슴에 촛불을 밝혔느냐던 친정어머니의 애타는 심정이 느껴진다. 그 촛불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결혼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던 그녀의 절규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그리워했던 최순치라는 남자의 이름앞에서도 변함이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걸 어쩔 수가 없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며 사는 것만이 옳다는 건 아니다. 난설헌의 삶을 통해 여인들의 지독한 고통만을 그려냈기에 하는 말이다. 가슴아픈 소설이었다. 한여인의 삶을 통해 이렇게나 절절한 느낌을 전해받을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버려진 이름, 버려질 수 밖에 없었던 이름이었으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또다른 의미로 그녀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