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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
오다 마사쿠니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어느날,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잠이 들자 책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책속에서 스멀스멀 무언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내 방안이 온통 책속의 존재들로 북적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생긴, 사람도 아닌, 동물도 아닌, 생물도 아닌, 무생물도 아닌...
뭐 이런 신비로운 존재들이 책속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무심결에 잠이 깬 나는 그 존재들을 보고 놀라 이건 분명히 꿈일거야, 라며 다시 잠을
재촉한다. 어떻게 책속의 존재들이 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때의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었는가이다. 만약 무서운 책을
읽고 있었다고 가정해보라. 얼마나 끔찍한 공포였겠는가! ... 무슨 꿈같은 말이냐고? 책을 읽다가 幻書라는 말을 듣고 불현듯이 머리속에
그려진 이미지다. 幻想 이란 말이 있다.
찾아보면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라고 나온다. 책의 제목에서 보이듯이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기발한지... 솔직하게 말해
한번쯤은 나도 그런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오래전에 그림이나 책속에서 무언가 쏟아져나온다거나, 그림이나 책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그런 영화도 있긴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또 이것만큼 흥미로운 공상도 없는 듯 싶다.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니는 책을 본 주인공의 이야기. 그러나 책을
너무도 사랑했던 어느 애서가의 이야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있다.
이야기는
요지로라는 애서가의 외손자 히로시가 자신의 아들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래서인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면이 껄끄럽지 않게 다가왔다.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적어놓은 책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가끔은 자신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사람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어떻게 환서를 보게 되었는지, 그 환서의 존재를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상황의 변화가 다소 장황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런대로 흥미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다고 환상적인 어떤
것만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현실속에서 자신의 삶과 연결지어진 어떤 우연처럼 그렇게 환상은 우리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쉿,
이건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할아버지
요지로에게는 책의 위치를 함부로 바꿔서는 안된다는 법칙이 있다. 책에도 암수가 있어서 그 사이에서 책이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지로 할아버지의 말처럼 우리도 그런 순간을 경험할 때가 종종 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문득, '어라? 이런 책도 있었어?'
라거나 '이 책은 내가 산 것 같지 않은데 도대체 어디서 나온거야?' 했던 순간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요지로의 말에 찰나지만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금기를 어겨버린 히로시는 결국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니는 책을 보게 되고, 오래된 요지로 할아버지의 비밀과 만나게
된다.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현실과 환상속을 넘나들며 묘한 세상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다가는 실실 웃으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할아버지가 환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들은 살짝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흥미롭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 느닷없이 일전에 보았던 Death Note
라는 일본영화가 생각난다. 그 노트에 이름이 적힌 자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죽음의 노트. 그 노트를 이용해
세상의 범죄자들을 죽여나가지만 그것으로 인해 세상의 흐름은 비뚤어지기 시작한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였는데 상당히 이채로운 느낌을 주었던 영화였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것은 어딘가에서
고장나고야 말지. 그러니 이 세상에는 환서따위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비밀이란 말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황당한 주제임에도
일본소설답게 현실적인 문제를 놓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시대를 초월한 가족애의 끈끈함이 꽤나 괜찮았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상한 책보다는 그 책과 얽힌 가족사가 주제인
것이다. 더구나 이 소설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커다란 사건들이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각색한 것이라고 하니 그저 환타지라고 치부한다면
왠지 미안해질 것 같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