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바위 바람 분들 푸른 나무 눈이 온들 - 춘향전 열네살에 다시보는 우리고전 3
고영 지음, 이윤엽 그림 / 북멘토(도서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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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내 사랑아, 네가 무엇을 먹으려느냐. 수박을 줄까, 참외를 줄까.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빵긋 웃어보아라, 내 사랑아... " 내 등에 업힌 기분이 어떠냐?" "한없이 좋지요" " 그럼 나도 업어 줘야지" " 아이구 기운 없는 내가 도련님을 어찌 업어요?" " 나는 그냥 네 어깨에 팔만 올려 놓을테니 넌 그냥 징검징검 걸어라".... 아하하하, 그야말로 유치찬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서 노는 장면이 머리속에 그려진다. 그냥 저절로 웃음이 난다. 사랑이라는 게 뭐 별거냐. 저렇게 아이처럼 노는거지. 어찌 춘향과 몽룡만 저렇게 놀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모두 공감할 만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저리도 좋았는데 왜? 사랑은 변하는 것일까? 아니, 아니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할뿐. 춘향을 보라, 사람이 변하지 않으니 사랑도 그 모습 그대로 그들의 곁에 남아 있어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귀가 닳도록 들어온 춘향전을 또 본다고? 어쩌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것이라해도 보는 관점에 따라, 보는 시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세계문학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때 그시절의 느낌과는 정말 다르게 다가왔던 것처럼. 그래서 궁금했다. 이 춘향전은 또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판소리사설을 긴요하게 참고삼았다는 말때문인지 내내 판소리 한마당을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리도 구수한지. 그러고보면 우리의 전통 문화는 벽이 너무 높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든다. 좀 더 쉽게 풀어서 대중과 함께 소통한다면 더 좋을텐데... 원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좀 더 편하게 다가오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만나고 싶다는 안타까움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춘향전을 통해 바라보는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흥미롭다. 남자들만의 세상속에서 존재감과 정체성을 잃어야 했던 여인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보인다. 하늘이 주신 재능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펼치지 못한 여인들의 이름이 스쳐지난다. 그러나 그 모든 폐단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는 여인도 있었으며, 춘향이처럼 그렇게 자신만의 의지로 항거를 하기도 했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그네들이 있었기에 한시대의 이야기가 하나씩 더 추가되었을 것이다. 열녀라는 것도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저 가문을 위해서, 혹은 남자들의 체면과 위신을 위해서 만들어졌던 경우도 허다했다. 사실 우리의 문화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화를 살펴보아도 만들어진 전통은 생각보다 많다. 몽룡의 어사출두와 같이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맞지 않는 모습을 파헤치는 모습도 깨알같은 재미를 준다.

 

춘향전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성이성의 생가 '계서당'을 찾은 적이 있었다. 소설속의 존재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구나,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 기웃거렸던 생각이 난다. 몽룡이 어린시절에 타고 올라갔다던 뒷뜰의 나무 한그루를 바라보며 베시시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저 소설속의 인물에 불과했다고해도 그 존재감은 엄청났을 것 같다. 그만큼 우리의 의식속에 자리잡은 춘향전의 의미가 깊은 것일게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열네살에 다시보는 우리 고전> 시리즈를 응원한다. /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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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될 거라고 오키나와 In the Blue 19
이진주 지음 / 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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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먼 옛날도 아니지만 우리나라 남쪽 바다 끝으로 쭈욱 내려가면 류큐왕국이라고 있었다. 우리처럼 삼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통일하여 류큐국이 되었다. 작았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 동남아시아 등과의 중계무역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던 중 일본 에도시대에 쓰시마와 규슈 지역을 통치하던 쓰시마 번의 침공을 시작으로 결국 1879년에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어 멸망했다. 지금의 오키나와다. 그렇게 오래된 역사도 아니다. 일전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류큐왕국전을 했었는데 그제서야 류큐왕국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다. 영악했던 일본은 류큐왕국을 병합해놓고도 그 사실을 주변국에 숨겼다. 번성했던 류큐왕국의 무역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고보면 오키나와는 독립적인 국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병합된 것도 서러운데 거기다가 일본은 오키나와를 또다시 미국에게 내주었다. 오늘날에도 오키나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군들의 행태로 인해 오키나와인들의 불만은 엄청나다. 지금도 류큐공화국으로써의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오키나와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오랜 아픔의 역사를 안고 있는 오키나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일본, 가깝지만 먼 나라다. 그러나 꼭 한번은 가봐야 할 나라다. 가보고 싶은 나라가 아니라 가봐야 할 나라라고 말하는 이유는 거기에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생각은 있으나 아직까지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이런저런 핑게만 앞세우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여행을 할 수 밖에. 다, 잘, 될, 거라고. 오키나와... 라는 책의 제목이 이채로웠다. 뭐지? 보편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책과의 만남. 역시 그랬다. 이 책속에는 이러저러한 곳을 찾아갔다는 천편일률적인 여행지 소개가 보이지 않았다. 뭐, 사실 나도 그런 걸 원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오키나와가 어떤 곳인지, 어디 어디를 들러봐야 하는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는 문체, 왠지 글과는 맞지 않는듯한 사진.. 조금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던 순간들이었다. 여행서라기보다는 에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는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게 부러울 뿐이다. 그야말로 내려놓을 수 있었던 여행이 아니었나 싶어서. 조용하지만 따라가는 발걸음을 재촉할 수 없었다. 그저 동행했으니 함께 느끼고자 했고,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자신만의 느낌으로 꽉 채워진 공간들. 그 공간속에서 여행자는 밥을 먹었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골목길을 걸었으며, 시장엘 들렀고, 지나치는 모든 것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오키나와에는 산카페, 바다카페, 하늘카페가 있다는데 창을 열면 푸른 바다가 바로 앞에 펼쳐지는 바닷가에 자리했다는 바다카페에 앉아 소중한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싶어진다. 아니, 혼자라도 괜찮겠다. 그런 풍경이라면.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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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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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는 눈물이 났었다. 왜 눈물이 났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안타까웠고 그 마음에 충실한 몸의 움직임이 슬펐을 뿐이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또한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남을 믿기 이전에 과연 나는 나를 믿을 수 있는가? 나 자신도 믿지 못하면서 남을 이해하고 믿는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인지....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작가의 한마디가 나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이것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빛을 찾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그 '분노'를 책을 읽는 당신은 어떻게 느끼게 될지 궁금하다던 작가에게 자신있게 나는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 그것이 또한 서글퍼졌다. 아마도 그때문일 것이다. 끝내는 눈물이 흘러내렸던 이유가. 다시 묻고 싶다. 나는 과연 나를 얼만큼이나 믿어줄 수 있는가?

 

철저하게 자기 방어적이고,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인 현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다가오는 '말 한다디'의 존재감은 엄청나다. 너무 쉽게 소리가 되어 세상속으로 나오는 말. 그래서인지 너무 쉽게 망각되어져버리고 마는 말.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우리는 너무 쉽게 말을 한다. 그 참을 수 없도록 가벼운 말의 존재를 우리는 이렇게 표현하지, '영혼없는 말'이라고. 가만히 생각해보게 된다. 왜, 우리는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것일까? 어쩌면 자기 방어적인 형태가 아닐까? 자신에게 닥쳐 올 불행과 고통을 사전에 차단해보겠다는 어설픈 변명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마음 또한 그런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하는 보호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정 자기 자신으로 인한 갈등인지, 주변 상황에 의한 갈등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주변의 평판과 평가에 의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한다. 타인의 평가가 그토록이나 무서운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1년이 다되도록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어딘가로 숨어든 범인의 행적을 찾아 뒤를 쫓는 형사의 발길은 매번 허망함을 안고 돌아오지만, 이 책은 단순히 범인을 잡아야 끝나는 추리소설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묵직함을 안고 있는 듯하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세 남자의 행적을 좇으며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이 겪어야 하는 부조리함을 들어냈다. 아버지의 빚으로 인해 사채업자에게 쫓기며 자신의 이름조차 버리고 살아가는 한 남자가 있고, 남자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또 한명의 남자가 있고, 막노동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또 한 남자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는 범인과 동일한 표식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뉴스는 연일 살인범의 상황과 얼굴을 화면 밖으로 내보내고 동일한 표식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먼저 찾아 온 것은 '믿음'보다 '의심'의 눈초리였다. 닮았다는 이유로, 살인범과 같은 점이 얼굴에 있다는 이유로, 그들이 사랑하고자 했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게 되는 현실을 보면서 '메르스'라는 병원체가 들춰냈던 작금의 씁쓸한 우리의 민낯을 보지 않을수 없었다. 배려와 포용이 사라져버린 우리 시대의 서글픔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때문이야, 라고 말하기 이전에 솔직한 나의 마음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진리와 마주서게 된다.

 

결국, 그 '분노'는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또다른 '분노'와 맞짱떠야 할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누군가에 의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감정이 미워서. 의심을 받았던 세 남자의 주변인들이 그랬듯이. '사랑'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이쪽과 저쪽의 마음이 같아야 그 공식은 성립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감추고 싶은 우리의 속내를 드러낸 까닭인지 마음을 졸이며 책장을 넘겼다. 어쩌면 자기 자신까지 속이며 살아가고 있을 현대인의 모습. 서글픈 자화상을 보았다. 강한 펀치 한방을 맞은 것처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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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찍고 싶은 사진 - 대한민국 사진 고수들에게서 발견한 좋은 사진의 비밀
윤광준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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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참 매력적인 것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작가 아닌 사람이 없고, 사진가 아닌 사람이 없고, 요리사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로 뭔가를 추구하는 사람이 엄청 많다. 꾸준한 도전으로 자신만의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는 건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다. 나? 나도 사진찍는 걸 좋아한다. 처음에는 산에 오르며 수줍게 피어있는 들꽃이 좋아서였다. 답사를 시작하면서 내가 다녀온 곳을 좀 더 오래 기억속에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만 사진에 관한 사전 정보 하나없이 시작한 일이다보니 그저 내 맘대로 찍을뿐이다. 남들처럼 좋은 카메라를 가진 것도 아니다. 남들처럼 멋진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휴대하기 좋아서 작은 디카를 가지고 다니지만 내게는 둘도없는 친구다. 이 책을 보면서 나도 묻게 된다.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은 어떤 걸까?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여러 사람의 사진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많은 사진중에서도 '겨울비' 라는 사진은 내게 상당히 강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흑백으로 처리된 때문일까? 길이 만들어낸 건물인지, 건물이 만들어낸 길인지 묘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단절된 듯한 껄끄러움을 날줄과 씨줄처럼 어지러운 전선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주고 있는 동네,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을 보면서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짐작할 뿐이다. 저 멀리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건물들 사이의 길은 왠지 가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다. 뭔가 알 수 없는 서러움과 서글픔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가 보여 깜짝 놀랬다. 사진 한장만으로도 이렇게나 많은 것을 말 할 수 있구나 싶어서.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보이는 사진 잘 찍는 Tip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렸다. 누군들 사진을 잘 찍고 싶지 않을까? 인물부터 풍경, 거리, 하늘, 순간포착과 같은 주제로 많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역시 사진은 자신만의 색깔과 담고자 하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크고 좋은 카메라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설픈 흉내를 내는것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함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좀 더 가까이 밀착하라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포토샵의 기능을 빌려와도 괜찮다! 이 세상에 만능 카메라란 없다! 모든 카메라는 장단점이 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말들을 통해 어쩌면 위안을 얻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7년을 사용했는데 여기저기 아프다고 징징거려서 병원엘 가보니 수술비가 비싸다. 무슨 얘기냐고? 나의 그 조그만 디카녀석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사용하고 있었는데 얼마전에 남편이 카메라를 바꿔주었다. 보기에 안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석은 여전히 내 가방속 자신의 자리에 들어앉아 있다. 살짝 덩치가 커진 새 카메라와 아직 정이 들지 않은 까닭이다. 카메라를 바꿨다고 내 사진이 더 좋아질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찍는 것이 아니니 어떤 기교를 부릴 필요도 없고, 좀 더 멋진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내겐 없다. 나는 그저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을 찍을 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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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는 숫자의 교묘한 거짓말
로렌조 피오라몬티 지음, 박지훈 옮김 / 더좋은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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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는 숫자의 교묘한 거짓말' 이란 부제에서 보듯이 숫자가 내포하고 있는 거짓이나 위험성에 대한 고발서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을 맴돌며 올가미처럼 우리를 옥죄는 것이 숫자만은 아니다. 만들어진 모든 것이 우리의 숨통을 조인다. 세상이 온통 제 잇속챙기기에만 바쁘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든, 어떻게 되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따진다. 모든 논리의 끝은 '이익'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끝없을 것만 같은 대지위에서 막대한 양의 식량을 생산해내고 있는 아프리카의 굶주림과 같이 힘있는 자의 논리에 의해 힘없는 자들의 삶은 좌우된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숫자로 말하는 교묘한 속임수인지도 모를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모든 것에는 통계치라거나 평균치라거나 하는 숫자로 된 개념들이 수도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우리는 흔들린다. 세상을 그다지 믿지 않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빼앗기게 되고 무시할 수 없는, 무시해서도 안되는 숫자의 마력앞에 힘없이 주저앉을 때가 많다. 이런 책을 읽게 되면 슬그머니 저 안쪽으로부터 분노가 스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한다. 뭐야, 나를 바보로 아는거냐? 싶은 마음에. 그러나 나는 여지없이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인정하게 된다, 그 사실을. 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던 까닭이다. 누구나 할 것없이 교육이라는 틀에 맞춰져서 그들이 원하는 사고를 하게 만드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 까닭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구체적인 경험이나 개인적인 판단보다는 정형화된 기술에 의지하는 것이 수많은 전문가들의 속성이라고 책의 서론쯤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 아닐수가 없다. 현실적인 여건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몇몇의 이론적인 가설로 뽑아낸 수치에 의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도 위험한 짓인가 말이다.

 

중요한 것은 숫자와 계산이 많아진다고 반드시 신뢰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43), 라는 말이 시선을 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가! 그것이 정확할 것이라고 믿는다. 숫자가 지배하는 사회는 점차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간다, 는 말로 엄청난 숫자의 위력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공감하기에는 너무 먼 정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앞서는 이유는 뭘까? 놀라운 것은 기후변화의 상태마저도 상품화시킨다는 말이었는데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기보다는 경제 발전의 방해물로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문제화시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방안이라고 내놓은 것들이 실로 무서울 따름이다. 자연의 가치를 측정한다고? 누가? 어떻게? 무엇을 기준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환경문제조차도 누군가에게는 '부의 가치'로 전락할 뿐이라는 사실이. '부의 측정'을 위해 생태계를 평가한다는 말에 입이 벌어질 뿐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건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미 복잡함을 싫어하는 생활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자연의 가치에 가격을 매기고 인간에게 맞춘 인위적인 자연을 우리의 삶속에 끌어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불공평한 분배 문제는 모르는 척 외면하며 살아가고 '지구촌'이라는 달콤한 말로 세상을 움직이려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부당함과 부조리함을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실로 서글픈 일이다.

 

숫자는 빙산의 일각만을 강조하며,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케케묵은 정치 경제구조를 외면하기 때문이다.(-264) 숫자는 조작될 수 있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보여지는 통계나 평균과 같은 숫자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싶어하거나 보여줘야할 사람들에게 맞춰서 충분히 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서 그것이 마치 모두를 말하는 것인양 보여지는 숫자에 의해 흔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만의 생각, 자신만의 주장이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그게 아니라면 자신만의 생각, 자신만의 주장이 너무 많을수도 있다). 조작할 수 있는 건 숫자만이 아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기억하자. 숫자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293) 중요한 것은 그 숫자속에 감춰둔 진실을 알 수 없으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지 숫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숫자가 없는 세상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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