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어른이 읽는 동화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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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참 오랜만에 어른들만의 동화를 만난다. 책꽂이에서 조용한 시선으로 가끔씩은 나를 불러주는 동화.. 그냥 동화가 아니라 생각하는 동화라거나 어른이 읽는 동화라고 하면 뭔가 더 있을 것만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이기도 하지만 그 짧은 이야기가 담아내는 커다란 의미에 눌려 읽기를 멈춰야 할 때도 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글쓴이의 이름만 다를뿐이지 번복되어지는 내용이 많다는 거다. 대체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묻고 있다. 뻔한 답인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인지... 가끔씩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무엇을 잃었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자신의 시간에 대해 되새김질 할 만한 여유 한조각쯤 가져볼 일이다. 어쩌면 그런 여유 한조각 얻어볼까하여 이렇게 짧은 이야기를 만나러 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무엇이 필요할까?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도 역시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입만 열면 사랑을 말할까? 사랑에 웃고 운다는 흔한 말도 많다. 사랑에 목숨건다는 말도 많다. 도대체 그 사랑이 무엇이길래 우리의 삶속에서 그토록이나 강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일까?  참 어렵다. 아직 살아야 할 날은 많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쉬워보이는 일들이 더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이 있는 것들이 더 소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찾아헤매는 존재 또한 우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 그런건지.... 지금의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잃어버린 채 앞만 보고 달려가는지 이런 책을 읽으면서 한번쯤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어울림'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책속의 작은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그림속에서 그 '어울림'이라는 말을 찾아내게 되고, 또다시 나는 묻게 된다. 너는 얼만큼이나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렸느냐고.. 너는 얼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며 살았느냐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테마는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 흔한 사랑도 함께 하지 않는 한 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너를 인정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너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나만의 존재의식에 밀려다니며 그 흔한 사랑을 찾아 헤매이는 것은 아닌지... 몸은 하나였지만 머리가 둘 달린 '기파조'는 머리가 둘이었던 까닭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가슴은 하나인데 생각이 둘이라서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에 비해 '비목어'는 어떤가? 눈이 하나뿐인 이 물고기는 짝을 만나야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었다. 상대방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맑게 비친다면, 이라는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그것은 분명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이었다. 짝을 이루어 서로의 몸을 의지하고 서로의 눈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사람들의 말소리를 알아듣게 되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돌을 없애버릴까? 아냐, 가끔씩 앉아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에이, 밭을 가는데 귀찮기만 하잖아... 결국 바위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평화롭게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산 아래 마을의 골목 모퉁이에 쳐박혀버린 바위를 처음 찾아온 것은 개였고, 그 다음으로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한 짓은 겨우 오줌이나 똥을 누고 가는 것이었다. 더러워지기 시작한 자신의 몸과 함께 불안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점점 더 천덕꾸러기가 되어가던 바위에게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너무나 큰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어느날 무심코 지나가던 큰스님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큰스님에 의해 바위는 원래 살았던 산 중턱의 맞은편 쪽에 새로 짓는 산사의 대웅전을 받치는 주춧돌이 되었다. 그리고 몇 백년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무거운 지붕을 받치고 있었지만 조금도 무겁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존재의 기쁨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추춧돌>이라는 이야기의 내용이다. 짧은 이야기지만 너무나도 많은 울림을 갖고 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짚어볼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함께 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사랑일까? '어울림'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사랑일까?  어른을 위한 동화를 읽으며 또한번 생각거리를 찾아낸다. 역시 답은 늘 같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매번 전해받는 느낌이 다르다. 그것이 생각하는 동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살면서 날마다 던지는 화두, '사랑'.. 알 수 없는 그 무엇.. 그러나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그 무엇.. 곁에 두고서도 늘 찾아헤매는 그 무엇.. 가까이 있음에도 늘 멀리에 있을거라고 막연하게 생각되어지는 그 무엇.. 그 무엇이 바로 '사랑'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당신도 그 사랑 하나쯤 가슴에 품어보라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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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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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흩

나렸다. 싸락눈이었다.... 

이런 문장, 사실 내게는 좀 생소하다. 

다들, 먹고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별일 없이

별탈없이, 먹고산다면 나로선 그만이다..

역시 반복되는 이런 문장들, 처음엔 뭐지? 했었다. 도대체 무슨 효과를 노리는거야? 했다.
한참을 읽었으면서도 어떤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한참을 읽었으면서도 어떤때는 짜증이 밀려오기도 한다. sied A를 다 읽고 결국에는 작가의 말을 찾아간다. 가능한 객관적이라 볼 수 있는 사실들만 말하고 싶다,던 그의 말을 읽는다. 어느정도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또 어느정도는 이해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문득 신문에서 본 듯한 말이 떠오른다. 문제적 작가...  문제적 작가라는 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말을 찾아낸다. 어쩌면 자기안으로의 여행일거라는 말도... 그러면서 다시 읽어본 작가의 말은, 특색있다. 작가의 말조차도 자기자신에게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지구영웅전설』, 『카스테라』, 『핑퐁』,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까지 그가 쓴 작품은 꽤나 많았다. 그리고 그 작품의 이름들을 익히 들어본 바지만 나는 사실 박민규라는 작가의 글을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아니 읽어보고 싶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말일게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말을 보면서 박민규라는 작가에게는 어느정도의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알아보니 상도 참 많이 받았다. 한국소설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는 아이콘... 잘 모르겠만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현실적이라는 말을 떠올린 건 사실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글..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그의 몇몇 작품속에서 풍기는 환타지적인 분위기를 감당해내기엔 내가 너무 역부족이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속에 불편한 진실은 많다. 까발려지기보다는 숨겨야 더 아름답게 보여지는 것들도 참 많다. (아니 그렇게해야 아름다운거라고 생각하는것이겠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들이 참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할 때가 온다. 반드시... 그럴 때 우리의 기분은 어떨까? 감추고 싶었던 치부를 드러냈을 때의 기분과 똑같지 않을까?  수없이 출판계를 떠도는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현실직시라는 말을 떠올리곤 했었다.  피해가려 하지 않고 그 문제들을 담담히 글로써 엮어내는 타국의 글쟁이들이 부럽기까지 했던 적도 있었다. 우리는 왜 안될까? 하면서... 하지만 이미 우리에게도 그런 글을 쓰는 작가는 충분히 있었다. 단지 우리가 불편해 했을 뿐. 박민규라는 작가의 글을 처음으로 대하면서 가슴 한쪽 저 깊은 곳에서부터의 울림도 느껴보았다. 그럴 수 있어서 좋았다. 조금은 황당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던 글도 있었지만 말이다. 가면을 쓴 표지의 인물은 그일까? 그였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은유적인 표현으로 다가설 수도 있을 우리의 모습일수도 있겠다고...

누군가에게 선물로 쓰여졌다는 글들은 마치도 내가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든다. 소싯적의 꿈과 현실의 좌절은 같이 가는 평행선처럼 그려진다. 그 꿈들이 현실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우는 몇 퍼센트나 될까? <근처>라는 제목을 달고 가장 먼저 내게 물어왔던 것은 그것이었다. 이제는 발등의 불로 떨어져내린 노인들의 삶은 차마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십자가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누런 강 배 한 척>이나 <낮잠>을 통해 보여주던 노인들의 현실은 정말 참담했다.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살인을 하는 <루디>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마주칠 것 같은 존재였다. 그만큼 우리는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거라고... 상당히 도발적인 느낌을 전해주었던 그의 글들이 이상한 여운을 남긴다. 읽다가 다시 읽고,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 있기를 몇 번.. 거대한 이미지로 공중에 떠 있던 <아스피린>의 존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구급약은 아니었을지.. <비치보이스>나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속에서 묘하게 일그러진 청춘과 그 청춘들이 일궈냈던 가정이라는 테두리의 한 집단과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을 우리의 현실.. 슬그머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던 순간들이 많지 않았나 싶다. 모르겠다고 내팽개져버렸던 것들에게 슬며시 다시 다가가는 그런 느낌들은 생소하면서도 꽤나 스릴있었다.

무언지 모를 새로운 경험을 한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작가의 글을 다시 읽고 싶다는 욕심은 생기지 않는다. 나의 역부족을 인정하기에... 그러면서도 기존의 작품 중 한 두편 정도는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것은 왜일까?  처음 접해본 그의 글들은 생소함과 낯설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상당한 흡입력을 가진 게 분명한 듯 하다. 그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다음작품에 대한 목마름이 꽤나 심각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그는 열심히 글을 쓸게 분명하다. 작가의 말에서처럼. 책을 내면서 약력이며 추천사, 또 해설같은 것을 모두 걷어낸 것이 나와도, 그와도 무관한 일들이기 때문이라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열심히 쓰는 일 뿐일테니 말이다. 앞으로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을 그의 글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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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그 천년의 이야기 - 상식으로 꼭 알아야
김동훈 지음 / 삼양미디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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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도대체 그 건축이라는 게 무엇일까? 그저 바라보기에 멋지고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주목할만한 꺼리가 된다. 그 건물을 어떻게 지었는지,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 지붕은 어떤 구조를 하고 있는지, 장식은 또 어떤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단순히 생긴것만을 보지 말라고. 그 건축물이 안고 있는 시대와 역사를 함께 봐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설계하고 만든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살았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굳이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아도 국내의 건축물중에서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건물은 많다. 거기다가 제가각 다른 형식을 띠고 있는 모습도 볼 수가 있다.  건축용어도 사실은 어렵다. 낯선 낱말들을 풀어 헤쳐놓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아무리 설명해봐야 잘 들리지도 않는다는 게 솔직한 말일 게다.  답사를 시작하면서 듣게 되었던 우진각 지붕이니 팔작지붕이니, 다포식이니 주심포양식이니 했을 때의 생소함을 떠올린다. 살펴보자고 들면 끝도없는 것이 또한 건축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그렇게 복잡한 건축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건축물들을 보여주면서. 건축이 발달하게 되는 요인과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혹은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건축물의 변화무쌍함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예루살렘 성전을 보여주면서 고대 건축물을 읽으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을 통해 고전 건축이 시작되었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사진으로 보여주는 수도원이나 교회를 통한 중세 기독교 건축은 실로 웅장하게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뾰족한 첨탑 두개가 위용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은 정말 끝내준다. 두개의 첨탑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세워졌기에 같은 건물에 붙어 있으면서도 다른 모양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데 왕의 문을 장악하고 있는 조각들은 정말 압권이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조각 작품 하나마다 다른 동작과 표정들이 정교하게 세겨져있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흔히 들어왔던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양식이 바로 그 뒤를 잇는다. 로코코는 프랑스 귀족 사회의 생활을 미화하기 위한 장식같은 것에 대하여 쓰인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인 생활위주의 소규모 공간을 창출하는 건축이 되었고, 카톨릭 교회의 부흥과 절대 왕권을 옹호하기 위해 발달했던 바로크 양식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긴다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면 정말 여성적이라는 생각이 들까?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곳의 장식들은 정말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마리 앙뜨와네트를 위해 완성했다는 프티트리아농은 한번쯤 가보고 싶다. 작은 농촌마을로 만들어진 그곳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러시아의 크렘린궁이나  붉은 광장의 성바실리성당의 양파모양 지붕은 마치 동화속 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갖게 해준다. 책장을 넘기다가 체코의 성요한 순례성당을 보는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별 모양의 예배당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을 보면서 나는 우리 역사속의 궁궐을 떠올렸다. 지금은 회랑의 존재조차 의심할 정도로 찾기 힘든 우리궁궐의 모습...  옛기록을 찾아보면 회랑으로 연결지어진 모습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른 건축물들에서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은 홈들을 찾아보기 바란다. 순교자 성요한 네모무키의 무덤위에 세워졌다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성요한 네모무키를 하늘로 인도한다는 천사들의 무리 조각이 환상적이다. 성당을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5개의 작은 예배당이 서로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한편의 스릴러물이나 추리극을 잉태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웃어보기도 한다.

18C 말에 이르러 겉으로 치장된 모습보다는 절대적인 순수미를 추구하였다는 근현대 건축물의 시기가 왔다. 그런데 그들이 눈을 돌린 것은 공교롭게도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신고전주의 건축'이 생겨났고, 일정한 양식에 구애받지않고 모든 양식을 절충한 '절충주의 건축'이 유행하기도 했다. 19C 말에는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새로운 재료들로 에펠탑과 같이 철근 구조를 이용한 건축양식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자연형태에서 표현을 얻고자 했다던 '아루누보건축'은 아이러니하게도 철과 유리를 재료로 이용했다. 콘크리트를 실험적으로 이용했다는 암스테르담 방어선은 현재까지도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주변환경과 어울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라고 하지만 이 멋진 세계문화유산도 지구온난화가 계속 진행된다면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곳이라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일전에 읽었던 <일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라는 책에서 가우디라는 건축가의 이름과 그의 작품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한지라 그의 이름을 보게 되니 반갑기까지 하다. 초현실적이고 신비로운 특징을 담고 있다는 구엘 공원은 안토니오 가우디의 생애 최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빛의 저택이라고도 한다는 구엘 저택은 사진만 보아도 정말 멋지고 황홀하다. 가우디의 건축에서만 볼 수 있다는 우물같은 안뜰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우리 전통가옥의 안뜰에서 올려다 본 하늘과 닮았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연의 숨결을 거스르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공통점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다음장에서 펼쳐지는 바우하우스는 왠지 좀 낯설게 다가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적인 것들이 투영된 듯 한 느낌을 준다. 왠지 정이 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그렇다면 동양의 건축은 어떨까? 동아시아의 건축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서양건축, 이슬람건축과 함께 세계3대 건축의 하나로 인정받는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 중국 건축. 당연히 우리도 그 영향을 받았음이다. 궁궐이나 사찰 건축, 능묘건축을 보더라도 중국색깔이 짙게 베인 것을 어쩔 수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바깥쪽으로 살짝 치켜올라 갔든 그냥 내려왔든 처마가 주는 아름다움은 내게 있어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음양사상을 담았다는 사찰건축이 주는 안정감은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며, 영혼불멸의 사상으로 인해 발달하게 된 능묘문화 역시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걸작임에 분명하다.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까닭에 한국, 중국, 일본 세나라의 건축물은 외형적으로 보면 비슷하기는 하다. 하지만 각각의 독특한 멋을 찾아낸다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게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저마다의 특징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중국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는 고구려의 유적이 남아있지 않음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처마를 받쳐주는 공포와 단청의 화려함은 스쳐지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는 말에 백번 공감한다. 그런데 똑같이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도나 동남아시아의 사찰 건축물은 우리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주종교로써 오래 지탱하지 못한 채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밀려났다는 이유가 있기는해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이나 자바섬의 보로부두르불교사원, 미얀마의 아난다 사원의 건축양식을 보면 정말 특이한 느낌을 전해받는다. 알함브라 궁전이나 타지마할 역시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눈이 호강했다!! 잉카도시 마추픽추도 보았고 또다른 피라미드가 있는 마야문명의 욱스말도 보았다. 세계문화유산은 전세계 151개국이 보유하고 있는 911점에 이른다. 그 중에서 그토록이나 아름답다는 건축문화를 돌아 보았으니 언제 또 이렇게 눈이 호강을 할 수 있을까? 몸과 마음도 함께 호강할 수 있는 그 순간을 그려본다. 세계문화유산을 살펴보면 문화유산이 704점, 자연유산이 180점, 복합유산이 27점이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는 문화유산이 9점으로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화성, 창덕궁,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이며, 제주 화산섬및 용암동굴이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한번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진다고해서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문화유산을 지속적으로 잘 관리하고 보존해야만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번 등록된 문화유산이 취소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남는다. 그러자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외형만 슬쩍 보고 지나치지 말고 그 문화유산들이 안고 있는 내면을 볼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풀리지않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답은 역사속에 있다던 극작가 신봉승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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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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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은 역사와 문학을 뛰어넘는 인간 내면의 기록이다... 

혜경궁은 1735년 6월 18일에 태어나 1815년 12월 15일에 죽었다. 팔십 평생의 긴 세월을 살았다. 온갖 사건에 휘말리며 몇 번씩이나 죽을 결심을 하고 몇 번씩이나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다. 참 질긴 삶을 살았던 여인이 바로 혜경궁 홍씨인 것이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불과 아홉 살에 세자빈에 뽑힌 혜경궁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숨 막히는 궁중으로 들어갔다. 자기보다 겨우 몇 달 일찍 태어난 동갑나기 남편 사도세자와 함께 지내야 했던 궁중생활은 시작부터 평탄치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혜경궁의 시아버지인 영조의 성격을 파악하게 된다.  영조의 그 까다로운 성격이 부자간의 도타운 정을 쌓기에는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원래 마음에 차지 않는 자식을 앞에 둔 아비의 심정은 탐탁치않은 자식의 모습을 자꾸 탓하게 되어있는 법이다. 그러다보니 천성적으로 우직하고 느렸던 사도세자는 가뜩이나 정을 느낄 수 없는 아비앞에서 당연히 주눅들어 있을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고, 아비는 그런 자식이 점점 더 마음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런지 나는 이상하게 사도세자를 생각하면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를 떠올리게 된다.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일컬어 조선왕조의 비운의 왕세자라고 한다던가?  왕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주인공들.. 그래서일까 나는 자식을 기르는 어미의 심정으로 이 책을 읽었던 듯 하다.
 
그 당시의 수명으로 볼 때 팔십평생을 살다간 혜경궁은 장수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지켜보았던 일들을 적은 것이 바로 '한중록'인 것이다. 물론 손자인 순조내외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겠지만 어찌보면 자신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친정붙이들에 대한 마음이 더 애틋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고로 이 책은 남편 세도세자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자기 이야기와 친정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다. 바깥 사람들이 그 날 일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다 맹랑하고 근거없는 말이니 이 기록을 보면 그 날 일의 시종을 분명히 알 것이라... 라고 했던 혜경궁의 말처럼 다른 사람이라면 감히 쓸 수 없었던 내용까지도 상세하게 적어내고 있음이다. 그녀가 평민이 아닌 탓이기도 했지만 비록 왕비는 되지 못했으나  왕을 낳은 왕의 어머니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중록'을 쓸 당시의 혜경궁에게는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남편도, 시아버지도, 자식도 이미 없었으니 하는 말이다. 그리고 망해가는 친정의 일가를 위해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지병을 앓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심정, 부친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들과 그에 비해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며느리로써의 심정, 아버지를 여의게 되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 한 여자가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그런 것들이 나는 궁금했다. 어쩌면 영조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 아들이 더 잘하기를 바랬고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비로써 어찌 아들을 뒤주에 갇혀 죽게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영조의 아들 세도세자는 아비와 마찬가지로 적장자가 아니었다. 서자였으며 그 어미 또한 궁인의 신분이었다! 자신의 과거가 그토록이나 힘겨웠기에 그 과거를 용납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들보다도 그 자신의 과거를 뒤주속에 가두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번 생각해보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정조이후의 왕조가문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있어 좋았다. 복잡한 왕조의 혈통을 따져보는 게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 역사속에는 사건이 있고 그 사건속에는 자의건 타의건 왕족이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은 결혼하면 궁 밖으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악귀는 궁 밖의 왕자들을 더 이용하기 좋은 존재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책 속에서 드러나는 당파싸움의 언저리를 빙빙 돌며 그간 잘 정리되지 않았던 것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왕자들이 궁 밖을 쫓겨나 죽임을 당하고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후대의  왕들을 다시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흥선 대원군 역시 그런 왕족이었다는 말이니 고종의 출신성분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또한 책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듯 하다.

오래전부터 한번은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 '한중록'이었다. 단순히 왕가의 여인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글은 아닐까 지레 짐작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딸로, 누이로, 아내로, 어미로, 시누이로, 며느리로, ... 그 많은 역할을 해내야 했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혜경궁 홍씨였다. 어쩌면 우리 어머니들의 일생일런지도 모르겠다.  혜경궁 홍씨.. 세자빈이었으나 중전이 되지 못하고 왕의 어미였으나 대왕대비가 되지 못했던 여인.. 그 마음속의 전부를 다 내어 보여주지는 않았을 테지만 모진 풍파를 겪어내야 했던 한 여인의 마음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많았다. 옛사람의 이야기로만 치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생겨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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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허균 지음 / 돌베개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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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가면 나는 무엇을 보는가? 들어서는 입구의 일주문을 보고,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상을 보고, 사천왕상을 지나 불이문을 보고,  불이문을 지나 대웅전앞에 머무는 것이 다는 아니었을진데... 사찰에 가면 내 눈에 띄는 것이 무엇인가? 물어보니 답은 간단하다. 유적지를 돌며 답사를 한답시고 시답잖게 돌아다니기를 반복하면서도 과연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를 새삼 다시 묻게 되었던 책이다. 한편으로는 늘 궁금했었던 그 뒷이야기들을 이 책을 통해 알고 싶다는 욕심도 부려보았었다. 전등사의 나목상이 사실은 벌거벗은 여인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그 충격은 내게있어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범종루를 바라보면서도, 오래된 부도를 살펴보면서도 그안에 들어있음직한 의미를 단 한번도 헤아려보려 하지 않았었다. 그 화려한 공포의 단청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시한번 돌아보게 된다. 불전에 들러 참배를 하면서도 그 불상들을 유심히 바라보지 못했다. 기웃거리며 찾아내는 것이 고작 탑과 부도... 그 탑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 형식을 취했는지 그저 보여지는 형식만 따지고 들었을 뿐이다. 법당 전면의 용두를 보면서 그것이 왜 거기에 있는 것인지 진즉에 한번쯤은 눈치챘어야 했다.  그 수많은 장식들이 저마다 안고 있을 상징성에 대해서,  전각마다 걸려있던 편액의 글자들이 무슨 뜻을 안고 있는지를 진즉에 한번쯤은 생각을 했어야 했다...

오채라고 하는 청(靑)·황(黃)·홍(紅)·백(白)·흑(黑)의 다섯 가지 색을 쓴다는 단청이 장식의 의미뿐만 아니라 비바람에 나무가 썩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쯤은 왠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색이 음양오행을 의미한다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온 사상이지만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찰이나 궁궐의 단청을 오방색이 방위에 맞게 잘 조화되도록 꾸민 것을 볼 수가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단청은 오방정색이라고 하여 황(), 청(), 백(), 적(), 흑()의 5가지 색을 말한다고 한다. 홍(紅)색과 적(赤)색의 구분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장식들이나 전각들 모두가 다들 화려한 단청으로 칠해져있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큰 사찰은 대개 삼문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절입구의 일주문과 중간쯤에 있는 사천왕문, 그리고 참배장소로 들어가지 직전에 있는 불이문이다. 불이문이란 흔히 말하는 해탈문이기도 하다.  일주문은 절대적인 진리, 즉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를 상징한다. 사천왕문은 각 방위별로 칼을 들고 있는 동방의 지국천, 비파를 들고 있는 서방의 광목천, 용과 여의주를 들고있는 남방의 증장천, 탑을 들고 있는 북방의 다문천을 말하는데 이들은 덩치도 큰데다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어 무섭다고 하는 이들이 꽤나 많다. 하지만 그 사천왕의 얼굴이 그토록이나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불이문은 생사가 둘이 아니며 유무(有無) 또한 서로 다르지 않고, 현재와 미래가 둘이 아니라는 절대 평등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하니 가히 해탈문이라 할 만 하다.

불전을 살펴보자면 대웅전이라 하기도 하고 대웅보전이라 하기도 한다. 대웅전이라 함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모시는 전각을 말함이고 대웅보전이라 함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협시불로 모시는 전각을 말함이다. 우리나라 대웅전에서는 선종의 삼신설을 따라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전각을 비로전이나 대적광전 또는 화엄전이라 하고,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을 약사전 또는 유리광전이라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극락전이나 아미타전 혹은 무량수전이라 불리는 곳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전각이라고 보면 된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신다. 관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을 관음전이나 원통전이라 하고,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전 혹은 용화전, 지장보살을 모시는 지장전, 문수보살을 모시는 문수전등을 볼 수가 있다. 이 중에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의 중생을 교화하도록 부처의 명을 받았다는 지장보살은 염라대왕의 화신이라고도 하여 십대왕등 명부의 권속들과 함께 명부전에 모시기도 한다.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으로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갖춘 곳을 적멸보궁이라 하는데  양산 통도사, 평창 오대산 중대의 적멸보궁, 인제 설악산 봉정암,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의 적멸보궁이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이다. 불상의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를 봉안하고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그린 8폭의 <팔상탱화>를 봉안하는 영산전과 팔상전도 있다. 그 밖에도 치성광대제 즉 북두칠성을 모시는 곳을 칠성각, 토속신인 산신을 모시는 곳을 산신각, 말세 중생에게 복을 베푸는 나반존자를 모신 곳을 독성각이라 하는데 이 세분을 함께 모실 경우 삼성각이라 하기도 한다. 승려들이 좌선, 정진하는 승당으로 심검당이나 수선당, 선불장이라는 편액을 걸고있는 곳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요사채와는 구별된다. 

책속의 내용은 아니지만 일단 사찰을 가게 되면 반드시 보게 되는 대웅전이 있다. 그곳에 모셔진 부처를 삼세불(삼존불) 또는 삼신불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삼세불은 과거불과 현재불. 미래불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과거불은 연등불이라 하고 현세불은 석가모니불을 말하며 미래불은 미륵불이다. 삼신불은 부처의 몸을 셋으로 나누어 부르는 말로 법신불과 보신불, 응신불(화신불)을 한꺼번에 이르는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부처의 몸이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법신불이라 함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우주의 진리를 인격화하여 부른다고 보면 된다.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다. 비로자나불을 가리킨다. 보신불은 오랜 수행을 거친 부처로 성불한 아미타불을 이른다. 마지막으로 응신불 즉 화신불은 직접 현세에 나타난 부처를 말한다. 석가모니불이다. 

그렇게나 많은 불,보살상들이 사찰안에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기도 하지만 이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볼수록 놀라는 것은 단연코 닫집이 아닐까 싶다. 닫집을 천개라고도 하는데 하늘덮개라는 뜻이다.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닫집의 지붕은 그 자체가 아무런 무게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그 형식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둥은 있지만 보통의 경우처럼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그저 아래로 내려왔을 뿐이다. 도대체 저런 집을 왜 전각안에 그것도 가장 중심이 되는 대웅전에 만들어둔 것일까?  '따로 지어진 또 하나의 집'이라는 이름 그대로 작은 집의 형상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뜻하는 의미는 상당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극락정토, 즉 열반의 세계를 현실화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는 걸 알고 그 작은 집이 왜 거기에 존재하는 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사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닫집과 후불탱화쯤은 한번쯤 눈여겨 볼만한 장식이 아닐까 싶다.

사찰에 숨겨진 그 많은 장식들의 의미를 다 새기며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평소 많이 궁금했었던 장식들의 의미를 알 수 있어 좋았고, 내가 그냥 지나쳤던 것들에게서 찾아낸 상징성은 정말 놀라웠다. 나에게 불화에 대해, 그리고 사찰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 주었던 심우도.. 그 심우도의 뜻을 이제사 기억속에 담게 되었다. 사찰의 전각을 배치하는 것조차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파랑새의 전설을 가진 무위사의 벽화가 생각난다. 내가 좀 더 일찍 이런 공부를 할 수 있었더라면 그토록이나 소중하고 귀한 벽화들을 마음으로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 안타까움이 찾아든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한번 찾아가 보고 싶은 무위사 벽화와 개암사의 닫집을 떠올리며 책장을 덮기로 한다. 아직은 한참을 가야 할 나의 길이 아득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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