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제국 2
우영수 지음 / 판테온하우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백제와 관련있는 전투를 찾아보면 관산성 전투, 황산벌 전투, 백강 전투 이렇게 세가지를 보여준다. 신라와 함께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신라 진흥왕이 다시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의 한강 유역까지 빼앗았던 싸움이 바로 관산성 전투다. 그 싸움으로 인해 백제의 부여시대를 열었던 성왕이 죽게 된다. 그 때가 554년이다. 그리고 660년에 백제와 신라는 황산벌에서 다시 만난다. 의자왕이 신라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함락하자 이에 놀란 신라가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백제를 공격하게 된것이 황산벌 전투의 원인이라면 원인일 것이다. 그 당시 의자왕이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압박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토록 잘 나가던 백제가 왜 망했을까? 실제 인구도 고구려나 신라에 못지 않았고,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어 나라살림도 어렵지 않았었다. 그것뿐일까? 바닷길을 이용하여 중국쪽과도 교류을 하였음은 물론이고 이 책에서 보여주듯이 일본과도 상당히 밀접한 관계였었다. 그런데 왜? 그것은 간단하다. 의자왕 후반기에 왕권강화를 위해 무리수를 두었던 탓이기도 했지만, 귀족간의 정치적 분쟁이 절대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는 게 백강전투다. 백강이라 함은 지금의 금강 유역을 말한다.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벌였던 전투가 백강 전투인데 백제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6,7세기의 한반도는 삼국시대였다. 뺏고 뺏기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 상황은 중국쪽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의 싸움속을 들여다보면 묘하게도 대륙(중국쪽)의 힘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앞서 말했던 관산성 전투 이후의 상황을 이 책의 배경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중요한 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백제의 흔적이 많지 않다는 거다. 나당 연합군에게 밀려 멸망했으면서도 끝까지 백제 부흥을 꿈꿨다던 백제의 유민들... 그랬기에 백제에 대한 관심과 상상이 날로 더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흐름처럼 언론지상에서 삼국시대를 오가는 이야기들을 보게 된다. 일전에 읽었던  <잃어버린 왕국, 대백제>와 <일본에 고함>이라는 책의 내용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버랩되었다. <잃어버린 왕국>이나 <일본에 고함>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듯이 쉽게 찾을 수 없는 백제의 흔적을 우리보다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는 <일본서기>가 한층 더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냈다는 <일본서기>가 비록 사료로서의 신뢰성이 적고 의도적으로 조작되었을 확률이 많다고는 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게 솔직한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동안 백제의 패망에 대한 변명조차도 할 수 없었던 의자왕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고.. 백제의 흔적은 대륙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일본 열도속에 숨겨진 백제의 수많은 흔적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게 아니냐고.. 1,400년동안 중국의 북망산에 묻혀있는 의자왕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는 저자의 말에 왠지 숙연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그랬기에 일본의 도발이 끊임없이 이어져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무리일까? 속내를 들춰내어 우리로부터 비롯되어진 그들만의 역사를 인정하기 싫은 까닭은 아닐까 하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알기만 해서는 안된다.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와 같은 이들의 노력을 허투루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의자왕의 아버지 아좌태자로부터 시작되어지는 <태양의 제국>은 흥미로웠다. 새로운 각도로 다시 바라보게 된 의자왕의 일생은 험난했다. 백제의 역사속에서 잠깐 등장했던 계백보다도 적은 분량으로 그다지 명예롭지 못했던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 義 의롭고, 慈 자애로운 왕이라는 해석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퍼즐맞추기를 끝낸 느낌이다. 흩어져 있던 백제의 조각들을 끌어와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 흩어놓은 퍼즐조각을 찾아 이리저리 맞춰보다가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 듯한 그런 느낌말이다. 책의 말미에 <일본서기>의 기록에 대하여 잠깐 언급되어져 있다. "<일본서기>로 연구하기 이전에 <일본서기>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말이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대륙의 백제가 망하고 열도에서 다시 태어나는 백제.. 책의 이야기처럼 정말 일본은 그렇게 생겨난 것일까? 하지만 일본천황이 백제의 후손임을 인정했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굳이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를 끌어오지 않아도 백제의 유민들이 건너가고 일찍부터 망명한 사람이 많았으니 역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일본을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던 백제의 흔적이 어쩌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일이니... 남겨진 기록이 많지 않다하여 수많은 상상을 불러 올 수도 있었던 백제라는 주제가 흥미로웠다. 저자의 상상이 어디까지일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책을 덮으며 어설픈 상상보다는 차라리 역사의 흔적을 쫓아가 준 것이 어쩌면 더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신라가 아닌 고구려나 백제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그랬다면, 너무나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말 그랬다면... 어찌되었든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한번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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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제국 1
우영수 지음 / 판테온하우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백제와 관련있는 전투를 찾아보면 관산성 전투, 황산벌 전투, 백강 전투 이렇게 세가지를 보여준다. 신라와 함께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신라 진흥왕이 다시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의 한강 유역까지 빼앗았던 싸움이 바로 관산성 전투다. 그 싸움으로 인해 백제의 부여시대를 열었던 성왕이 죽게 된다. 그 때가 554년이다. 그리고 660년에 백제와 신라는 황산벌에서 다시 만난다. 의자왕이 신라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함락하자 이에 놀란 신라가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백제를 공격하게 된것이 황산벌 전투의 원인이라면 원인일 것이다. 그 당시 의자왕이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압박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토록 잘 나가던 백제가 왜 망했을까? 실제 인구도 고구려나 신라에 못지 않았고,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어 나라살림도 어렵지 않았었다. 그것뿐일까? 바닷길을 이용하여 중국쪽과도 교류을 하였음은 물론이고 이 책에서 보여주듯이 일본과도 상당히 밀접한 관계였었다. 그런데 왜? 그것은 간단하다. 의자왕 후반기에 왕권강화를 위해 무리수를 두었던 탓이기도 했지만, 귀족간의 정치적 분쟁이 절대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는 게 백강전투다. 백강이라 함은 지금의 금강 유역을 말한다.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벌였던 전투가 백강 전투인데 백제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6,7세기의 한반도는 삼국시대였다. 뺏고 뺏기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 상황은 중국쪽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의 싸움속을 들여다보면 묘하게도 대륙(중국쪽)의 힘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앞서 말했던 관산성 전투 이후의 상황을 이 책의 배경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중요한 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백제의 흔적이 많지 않다는 거다. 나당 연합군에게 밀려 멸망했으면서도 끝까지 백제 부흥을 꿈꿨다던 백제의 유민들... 그랬기에 백제에 대한 관심과 상상이 날로 더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흐름처럼 언론지상에서 삼국시대를 오가는 이야기들을 보게 된다. 일전에 읽었던  <잃어버린 왕국, 대백제>와 <일본에 고함>이라는 책의 내용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버랩되었다. <잃어버린 왕국>이나 <일본에 고함>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듯이 쉽게 찾을 수 없는 백제의 흔적을 우리보다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는 <일본서기>가 한층 더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냈다는 <일본서기>가 비록 사료로서의 신뢰성이 적고 의도적으로 조작되었을 확률이 많다고는 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게 솔직한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동안 백제의 패망에 대한 변명조차도 할 수 없었던 의자왕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고.. 백제의 흔적은 대륙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일본 열도속에 숨겨진 백제의 수많은 흔적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게 아니냐고.. 1,400년동안 중국의 북망산에 묻혀있는 의자왕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는 저자의 말에 왠지 숙연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그랬기에 일본의 도발이 끊임없이 이어져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무리일까? 속내를 들춰내어 우리로부터 비롯되어진 그들만의 역사를 인정하기 싫은 까닭은 아닐까 하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알기만 해서는 안된다.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와 같은 이들의 노력을 허투루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의자왕의 아버지 아좌태자로부터 시작되어지는 <태양의 제국>은 흥미로웠다. 새로운 각도로 다시 바라보게 된 의자왕의 일생은 험난했다. 백제의 역사속에서 잠깐 등장했던 계백보다도 적은 분량으로 그다지 명예롭지 못했던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 義 의롭고, 慈 자애로운 왕이라는 해석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퍼즐맞추기를 끝낸 느낌이다. 흩어져 있던 백제의 조각들을 끌어와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 흩어놓은 퍼즐조각을 찾아 이리저리 맞춰보다가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 듯한 그런 느낌말이다. 책의 말미에 <일본서기>의 기록에 대하여 잠깐 언급되어져 있다. "<일본서기>로 연구하기 이전에 <일본서기>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말이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대륙의 백제가 망하고 열도에서 다시 태어나는 백제.. 책의 이야기처럼 정말 일본은 그렇게 생겨난 것일까? 하지만 일본천황이 백제의 후손임을 인정했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굳이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를 끌어오지 않아도 백제의 유민들이 건너가고 일찍부터 망명한 사람이 많았으니 역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일본을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던 백제의 흔적이 어쩌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일이니... 남겨진 기록이 많지 않다하여 수많은 상상을 불러 올 수도 있었던 백제라는 주제가 흥미로웠다. 저자의 상상이 어디까지일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책을 덮으며 어설픈 상상보다는 차라리 역사의 흔적을 쫓아가 준 것이 어쩌면 더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신라가 아닌 고구려나 백제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그랬다면, 너무나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말 그랬다면... 어찌되었든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한번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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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생물 콘서트 - 사진으로 보는 생태다큐멘터리
한영식 지음 / 동아시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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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율스님이었던가?  그 분때문에 유명해진 천성산 도룡뇽의 안부를 묻는다. 답은 안녕하시다, 였다. 산을 관통하는 터널때문에 우리의 자연이 훼손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우여곡절 끝에 터널은 완성되었고 그 후 언론지상에서는 더 많아진 개체수가 어쩌고 저쩌고, 반은 비난성의 글을 올린걸 본 적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중요한 걸 놓치고 말았다. 단지 천성산 도룡뇽만을 살리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이 나라의 안하무인 격인 개발이 오죽했으면 그런 결단을 내려야 했는가를 다시한번 생각해야만 한다. 길을 잘못들어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던 천성산 터널은 정말 길었다. 그 긴 터널 공사로 인한 자연의 스트레스는 엄청났을 것이다. 얼마전 지켜보는 사람들의 귀를 의심하게 했던 단 한마디를 떠올린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수고에 대해 우리는 아낌없이 박수를 쳐 주었었다. 하지만 그 뒤로 들려오던 슬픈 소식에는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바로 가리왕산의 원시림을 훼손시킨다는... 세계의 허파가 아마존이라면 우리의 허파는 바로 그곳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옛선조들조차도 지켜내기 위해 애를 썼던 그곳을 단한번의 반짝 효과를 얻기 위해 파괴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너 알아서 하라는 식이니 분통 터질 일이다. 일부 환경가들의 목소리만으로는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숲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까마득하다. 개발에 앞서 환경오염이나 생태보존을 먼저 생각해야 함에도 숲의 중요성은 전혀 인정하려 들지를 않는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척 외면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미 전세계적으로 숲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환경오염이나 생태파괴가 이젠 한계에 도달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은 이 책이 보여주는 생물들이 만들어 준다. 어쩌면 이 지구의 주인은 인간보다도 저 많은 생물이 함께 공존하는 자연일 것이다. 책의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이 책을 통해 소개되어지는 생물은 우리땅에서 살아가고 있거나, 살았던 것들이다. 생물다양성이 부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21세기.. 선진국에서는 이미 멸종위기의 생물을 복원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복원한다고 모두 성공할까? 그것보다는 그들이 살수있는 환경을 보전해주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은데..... 지금 살고 있는 생물들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최우선이라는 말이다. 이 책에서처럼 굳이 생물들이 우리에게 주는 고마운 현상을 들춰내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속에서 자연환경으로 인해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이미 알고 있을테다.  생물의 종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머물 수 있는 환경이 파괴되었다는 말과 같다. 숲과 나무는, 그들이 살 수 있는 깨끗한 물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인간으로 인해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까지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한번 길을 내면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살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로지 인간만을 위한 환경조성이 불러온 끔찍한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 어릴 적의 쥐잡기 운동과 같은 인간 위주의 행정이 불러온 폐해는 엄청났다. 농약이나 제초제로 인해 멸종위기에 놓인 생물들도 많아졌고 예전에는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개체도 많다. 만약 평창 동계올림픽만을 위해 가리왕산의 원시림을 훼손시킨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다른데로 옮기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내뱉은 무책임한 말이다. 원시림이 있었기에 그곳에서 생물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걸 그들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시림을 훼손시키면서 옮겨진 생물들이 잘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니 속내를 감춘 위선자들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을 위해서 이 지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들이 살아남을 수 없으면 인간도 더 이상은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명심해야만 한다.

2000년 7월 금개구리 서식지 보호를 위해 올림픽주경기장을 다른 곳에 짓기로 결정했다는 호주.. 우리나라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금개구리는 아닐지라도 나 어릴적에는 자주 보았던 청개구리나 참개구리, 땅강아지같은 생물들을 이제는 볼 수가 없다. 인공 수족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생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봄이면 나물 뜯는다고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쏘다니고, 가을이면 도토리나 밤을 줍는다고 또한번 들쑤신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잘못된 언론의 비중이 크다. 좋다는 말만 하기에 바쁘다. 거기에 가면 그렇게 좋은 것이 있으니 어서가서 당신도 한몫 챙기라는 말처럼 들린다.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래놓고는 아주 가끔씩 다큐나 스페셜이라는 포장을 씌워 희귀생물에 대한 방송을 내보낸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우리나라 매스컴의 가벼움은 정말 심각하다는 게 나만의 생각일까? 속은 없고 껍데기뿐인 존재들이 너무 많다.

미국으로 건너간 우리나라의 칡도 마찬가지로 문제를 일으켰다는데, 우리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종의 침입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외래종만을 탓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 생겨난 일인데도. 일전에 읽었던 《풀들의 전략》에서 자신의 고향을 떠난 외래종이 왜 그토록이나 강해질 수 밖에 없는가를 알게 되었다. 인간도 낯선곳에 가면 적응하기 위해 더 강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하물며 식물이라고 다르겠는가 말이다. 식물뿐만이 아니다. 애완용으로 들여왔다는 붉은귀거북, 식용과 해부용으로 들여왔다는 황소개구리,육용과 모피용으로 브라질에서 들여왔다는 뉴트리아, 블루길과 배스, 사향쥐.... 그런데 모든 게 인간의 욕심으로 일어난 일들임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익을 위해 들여온 것들이 생각처럼 이익을 내지 못한다고 아무 생각없이 방사했던 결과가 생태계 파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숲과 하천만의 위기가 아니다. 갯벌 역시 빠르게 오염되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간척사업, 기름유출, 강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오염물질로 인한 심각함은 날로 심해져만 간다.

책을 읽다보니 잘못 알고 있던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는 하루살이가 물속에서 1~2년을 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은 단지 종족보존을 위한 그들의 춤사위였을 뿐이라는 걸.. 또한 모기유충이 물속에 유입되는 유기물질을 분해하여 수질을 깨끗하게 정화한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꽃매미와 같은 해충 역시 특정식물을 대단위로 심는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소나무재선충이 외래유충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천적이 없어 고민중이었는데 우리나라 무당거미와 같은 토종 천적들이 꽃매미를 잡아먹는다는 고마운 소식도 들려주었다. 인간에게는 좋다는 피톤치드가 다른 동식물에게는 피해를 끼친다는 걸 알고 있는지? 그렇듯 자연은 제 스스로 부조화를 조화롭게 맞춰가는 능력이 있다. 천이현상(-자연 스스로 균형을 맞추는-)으로 인해 찾아오는 변화라면 썩 좋은 일이겠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에 의한 인공조림정책이 또하나의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저자의 말처럼 생물을 배려하는 넉넉한 마음자세가 필요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채 개발만을 능사로 친다면 자연이 우리에게 줄 것은 딱 한가지 뿐이니 명심, 또 명심해야 할 일이다.

골프장이나 스키장, 신도시 개발이나 도시정비와 같은 인간만을 위한 일에서 한발 물러서야 한다. 두더지나 땅강아지같은 토양생물이 사라져 낙엽조차도 썩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들이 낙엽을 흙으로 분해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까닭이다. 생물다양성의 파괴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지렁이처럼 흙을 숨쉬게 만들어주는 토양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좀 더 양보를 해야만 한다. 멧돼지가 출몰하고 고라니가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것도 인간의 욕심이 원인이었다. 새들이 전봇대에 둥지를 틀어 정전사고를 일으키게 된 원인도 인간에게 있다. 올레길 둘레길이 아무리 좋다한들 자연스럽게 생겨난 산길만 할까? 비록 다듬어지지 않아 울퉁불퉁하다 해도 사람에게도 생물에게도 모두 좋다는 흙길만은 못할 것이다. 산을 오를 때마다 새로 생겨나는 샛길을 보게 된다. 그걸 보면서 사람이 사람과 마주치는 게 싫다는 이기심때문에 그런거라고 나는 말하곤 했지만 서글픈 일이다. 지구 최대의 적이라는 인간.. 그 인간이 이제는 너무 많아져서 서로를 보면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로지 나 하나만의 편리를 위하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인류의 멸망은 이미 정해진 수순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비생각 

도대체 꿀벌은 왜 사라진걸까? 인간이 자꾸 지구 생태계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서일까? 아니면 생태계의 주인이라며 간섭을 해서일까? 앞으로 꿀벌뿐 아니라 또 어떤 생물 종이 우리 곁을 갑자기 떠날지 모른다. 인간이 계속 이기주의적인 태도로 생태계를 대하면 점점 더 많은 생물종이 사라질 건 분명하다. 우리가 쏜 화살은 언제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모든 건 지구의 운영자 인간이 자연환경을 무시한 채 편의만 축구한 결과다. (-157쪽)

꿀벌 실종은 생태계에 위험이 닥쳤다는 경고의 신호탄이다. 다음에는 어떤 해일이 덮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자연에 아주 심각한 병이 발생했지만 인간들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인간도 생태계의 일원이라는 걸 망각한 채 말이다, (-160쪽)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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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고함 - 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제작팀 지음 / 시루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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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웃을 잘 만나는 것도 복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윗층 이웃은 말도없이 내 것을 제 것이라 우겨대고, 아래층 이웃은 대놓고 내 것을 제 것이라 말하며 심심하면 뗑깡부리기가 일쑤다. 그것도 모자라 한지붕 밑에 사는 형제조차도 잡아먹지 못해 볼 때마다 으르렁거린다. 그런데 문제는 제 것을 두고 여기저기서 내 것이다, 내놔라 생떼를 쓰는데도 정작 주인은 한마디 말도 못하고 맨날 얻어맞기만 하니 그거 속터질 일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웃들의 횡포가 이해되기도 한다. 제것이면서도 제것이라 주장하지 못하는 바보를 그냥 두는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제것이면서도 제것이라 큰소리치지 못하는 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숨만 나온다. 누구 얘기냐?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의 얘기다. 한국과 중국, 일본이 얽히고 설켜 칡넝쿨처럼 꼬여가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칡넝쿨은 지역이 없다. 그저 힘센놈이 먼저 더 많은 넝쿨을 뻗어가는 게 상책이다. 무지해서가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더 문제다. 제 주머니 채울 수 없는 일이라서, 건드려봐야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까, 저마다 큰 짐 떠맡게 되는 건 아닌가하고 몸 사린다. 그러니 알아도 모른 척 강건너 불구경이다. 다만 가끔씩 이런 말들이 어디선가 들려와 잊을뻔 한 일, 잊혀져가는 일들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주니 내심 고마울 뿐이다.

이 다큐프로그램을 통해 새롭게 안 사실도 많았지만 나에게는 오랜 숙적이자 오랜 벗일 수 밖에 없는 한일관계의 소통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말 흥미로웠던 시간이었다. 그 당시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 부분들은 이 책을 통해 채울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아이가 울때면 어른들은 그 무서웠던 역사를 되새기곤 했을 것이다. 무심코 뱉어내던 '에비'라는 말이나 '무쿠리고쿠리' 인형을 통해 서로의 아픔을 보게 된다. '에비'는 왜놈들이 전리품으로 죽은 사람의 코와 귀를 베어갔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무쿠리고쿠리'는 일본을 향한 여몽연합군의 무자비한 침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세계사를 돌아볼 때 아시아가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나섰던 것은 칭기즈칸때였다. 서구와는 달리 동양의 침략자는 지나쳐가는 곳마다 불사르고 모든 사람을 죽이는 그야말로 싹들이 전략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처참했을지는 영화의 한장면처럼 보여지는 일이다. 오래도록 기억되어지는 아픔은 그만큼 처절했고 끔찍했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이 긴시간이 흘러버린 지금에 와서까지 똑같은 강도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역사 바로 알기가 더 중요해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몇 번을 들어도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역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조선과 일본의 태도였다. 서양의 증기선을 흑선이라 하면서도 그들의 기술을 배우고자 했던 일본과 달리 이양선이라 부르며 파괴하고 불살랐다는 조선의 상반된 모습은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죽했으면 정약용마져 혀를 찼을까? 책에서는 성리학에 도취된 우리의 선비들 중 분연히 일어섰던 의병장을 두고 성리학을 기초로 한 忠의 사상때문이었다고 좋게 말하고 있지만 솔직히 그건 아닌 듯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용학파가 득세를 했어야 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과정이 있기에 결과가 만들어진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수순으로 두 나라의 역사를 되짚어준다. 크게 다섯개의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데 인연, 적대, 공존, 변화, 대결의 구도이다. 인연(因緣)에서는 떼려야 땔 수 없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말해준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그 인연의 고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적대(敵對)편에서 비극적 한일 관계 2000년 역사의 시작을 알린다. 바로 여기서  여몽연합군으로 인한 그 아픈 기억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이다. 공존(共存)에서 보여주고 있는 공생의 법칙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평화가 또다른 평화를 불러왔다면 더없이 좋았을테지만 사람은 욕망을 쫓아 달려가는 동물이다보니 그럴수가 없는 것이다. 변화(變化),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다.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만큼의 위력을 보여주었던 조총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었다. 이양선을 통해 뚜렷하게 선을 갈라버린 조선과 일본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때 만약 우리도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대했다면... 대결(對決), 받아들이고 내몰고의 차이가 빚어낸 결과만 보다라도 그 때의 실수가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왔는가는 말 할수록 입만 아프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책표지의 말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역사는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의 싸움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지만 일본에서는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 기억이 역사를 구성하지만 때로는 역사가 기억을 지배하고, 그 역사가 현실을 지배할 수도 있기에... 그랬기에 책속에서 증언하고 있는 일본의 목소리가 새삼스럽다. 중국과 일본의 한반도 침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를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역사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다시한번 되새긴다. 모르는 내가 들여다보아도 모든 것은 반복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는 그런 아픈 역사가 반복되어지지 않도록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일들을 확실하게 기억하는 일은 중요할 것이다. 역 사 바 로 알 기, 정말 필요하다!!! 신숙주가 죽으면서까지 유언으로 남겼다는 말을 생각해본다. "원컨대 국가에서 일본과 화친을 끊지 마소서".. 그 큰 뜻이야 내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만 이웃으로 지낼 수 밖에 없는 현실만큼은 확실하다.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울림을 주는 목소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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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 : 난세를 이기는 지혜를 말하다 - 완역결정판
열자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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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어구이고 전국시대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도가 일파가 그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일 수도 있다. - 열자를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다. 그런데 열자를 말하기 전에 노자를 먼저 알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노자사상이 열자와 장자에게 계승되었다고 하니 하는 말이다. 노자와 장자에 의해 만들어진 노장사상은 한고조가 정치이념으로 삼기도 했다. 한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다는 황로사상이 바로 황제와 노자를 신봉한다는 것이니 일단은 노자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유교 불교와 더불어 동양의 3대 사상이라 일컫는 노장사상은 위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자연법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것이다. 중국의 사상가는 꽤나 많아서 이름을 말해도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도교에 영향을 미친 도가사상의 시조라고 하면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일전에 읽었던 <공자 인생강의>라는 책에서 공자에게 禮를 가르쳤다고 나와 있는 인물이 바로 노자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노자나 열자를 검색해 보면 실존인물이다 아니다를 두고 공론이 오갔다는 말을 보게 된다. 열자 역시 그렇다. 형식적인 의례에 치우친 유가사상에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노자의 도가사상은 우리나라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니 사직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신라의 화랑도 정신을 지배했던 것도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선비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기도 했다. 물론 중국의 도교와 우리나라의 도교가 아주 똑같지는 않을 것이나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도교의 흔적은 많은 듯 하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 지금 세상과는 맞지않는 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인위적인 것과 작위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속에서 어찌 생각해보면 그것이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화형식이지만 그다지 재미있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우화라고하여 어른을 위한 생각동화가 아닐까 생각했다면 다분히 따분할 것이다. 도가 3서중의 한 권이라는 말에 선택했지만 역시 내공이 부족했음을 인정한다. 뭐 그렇다고 골치가 딱딱 아프게 어려운 말로 풀이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천천히 읽으면서 조금씩 다가선다면 괜찮은 느낌이 전해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짧은 일화나 고사성어로 마주쳤던 우화가 자주 보였던 까닭이기도 하다. 가장 쉬운 예로 우공이 산을 옮기는 이야기나 관포지교라는 말을 생겨나게 한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가 있다. 목차를 보면 크게는 8편의 주제로 나뉘어져 있지만 각편마다 작은 제목이 따라 나와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유교에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을 어느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대목도 보인다. 오래된 말이지만 지금 세상에서도 되새겨볼 만한 말은 많았다. 바쁘다는 핑게로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도 많았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로 삼아도 괜찮은 말이 많았다. 마치 선문답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하여, 각 편마다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다.


제1편 하늘의 상서로운 조짐 -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道를 보여주고 있다. 세상 만물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모든 일이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결국엔는 無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죽음은 사람들이 쉴 곳이며, 길을 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물질적인 욕망때문에 괴로움이 오니 집착하지 말고 내려놓으라는 말은 불교의 교리와 어느정도는 일맥상통하는 듯 보여지기도 한다.

제2편 황제의 깨달음 - 지극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天性이 무엇일까?  타고난 바탕대로 시작한 것이 습성으로 발전하고 천성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고 공자가 물었는데 해설을 보면 자기를 없애고 완전히 자연에 융화됨을 말하는 것이라도 되어있다.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가에 따라 상대의 반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껄끄럽다는 말이다. 겉모양만 보고 상대를 평가하지 않고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사무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선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한다.

제3편 주나라 목왕의 세상 유람 - 깨어 있을 때와 꿈꿀 때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이상과 현실의 경계쯤일까? 어느 쪽이 참되고 어느 쪽이 허망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꿈에서는 즐거웠으나 그 꿈을 깨고나서 괴롭다는 것도 매양 한가지라는 말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허망한 것인지 진실된 것인지를 묻고 있다. 다시말해 외부의 자극에 의해 변하는 사람의 감정은 일정하지가 않으니 의식이나 감정 모두 불안전한 것이라고..
 
제4편 공자는 진정한 성인이었는가? - 공자와 그의 제자가 나오는 대목이다. 생각해보면 공자는 인과 예를 논했던 사람이니 무위를 이야기했던 노장사상가들과는 다른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를 다룬 4편의 이야기는 무슨 의미일까? 그렇다고해서 공자에 대해 탐탁치않다는 말은 없다. 단지 성인으로 인정받는 공자의 이야기를 통해 기본 도리를 설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잘났어도 그 잘남을 내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힘세다고 소문난 사람과는 달리 정말로 힘센 사람에게는 그 힘을 써야 할 일이 정작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은 되새겨볼 만하다.

제5편 탕임금이 추구하는 진리 - 나만의 잣대로 남을 재지 말라.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옳다, 그르다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나와 다르다고 이상하게 보는 견해를 버리라고 충고한다. 세상의 일들은 한가지 기준에 의해 처리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사실이 그와 다른 경우는 많은 까닭이다. 여기서 '우공이 산을 옮기다'라는 우화가 등장하고, 아침 해와 대낮의 해는 어느 편이 우리로부터 더 멀리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던 공자의 예가 나온다. 그만큼 자신만의 잣대로 세상일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6편 절대적인 운명 - 사람에게 있어 능력과 운명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람의 모든 일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능력이 운명에게 말했다. 그대의 하는 일이 나와 견주어본다면 어떻겠는가, 하고.. 정해진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운명이라고, 사람의 능력이나 재능 혹은 지혜가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고 열자는 대답하고 있다.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정해졌으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또한 운명이라는 말이다. 사람마다 제각각 서로 다른 것이 운명이라고도 한다. 

제7편 양주는 어떤 사상가인가? -  양주는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이다. 명예나 욕망 따위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본성과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는 게 양주의 인생관이기도 하다. 못났건 잘났건 죽는 것이 사람이니 살아있는 동안 욕심 부리지말고 자연스럽게 되는대로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때문에 번거롭게 禮를 지키며 살아야 하느냐는 그의 말을 뒤집어보면 잡다한 禮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가에 대한 반박이라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유가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에 대한 반박도 있다. 자기 자신이나 집안을 잘 다스리지는 못해도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나조차도 굳이 잘못된 말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제8편 하늘의 도에 들어맞는 올바른 말 -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런데 8편에서 오히려 더 많이 공감하게 된다. 모든 결과는 자기의 행동에 원인을 두고 있다는 말도 그렇고, 재주가 있다한들 적당한 기회를 이용할 줄 모른다면 그 또한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으니 알맞은 때가 언제인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그렇다. 자시의 처지를 잘 알아서 행동해야한다는 말도 되새겨볼 만 하지 않은가 말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나 어떤 일의 겉모습보다도 그 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더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명분과 사실을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 까닭은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명분 때문에 자기 일생까지도 망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사람과 생물은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세상의 만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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