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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선비'라는 말과 '유교 또는 유학'이라는 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그 두 낱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까놓고 말해 유교나 유학의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선비'라는 허울좋은 옷속에 숨어있는 뻘건 속살이 휜히 보인다. 현실성 없음, 무능력함,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음, '眼下無人' 으로 상당히 이기적인 사고를 가진.. 그야말로 누가 알까봐 꽁꽁 숨기고 싶었을 속살일터다. 또한 '유교나 유학'이라는 말속에서는 허울좋은 명분과 자기만의 틀에 갇힌 배타적인 상황, 소통의 부재가 그려지곤 한다.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라는 의식은 분명 저 고매한(?) 유교적 의식에서부터 왔을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책을 읽다 무서운 도박: 유교 부흥 운동 편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되었다.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유교... 주희가 제시한 학습과정을 살펴보더라도 선비의 삶이 곧 구도자의 삶임을 쉽게 알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솔직히 그렇게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韓,中,日 삼국중에서 한국의 유교가 가장 철저하게 의례적이고 의식화되어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굳이 종교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해도 그런 수준까지 이미 우리의 의식을 점령했다는 말로 들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일전에 신문지상에서 보았던 정통 유교(유학)를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는 중국의 젊은이들에 관한 기사가 생각났다. 유교의 본거지에서 오히려 한국으로 유교를 배우러 온다는 그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도 한국인의 의식속에 유교가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으면 저런 일이 생길까 싶었었다. 유교가 얼마나 의례적이고 의식화되어 있으면 싶었었다. 그런데 그런 우려가 사실이었다는 말에 조금은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검증된 바 없는 유교 이론- 편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늘 궁금했었다.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깊이 유교의 수렁에 빠져 있으면 바뀐 세상속에서도 유교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는 말이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은 아주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유학의 배경이 되어주는 말이다. 그런데 역사의 틀에서 볼 때나 작금의 우리 사회와 생활사를 살펴볼 때 유교나 유학의 가르침인 '德으로 가르치고 이끌어준다'는 그 말의 실천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이런 의문은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점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더 가관인 것은 -선비가 꿈꾼 나라, 그들이 만든 나라- 편이다. 소제목에서부터 나를 긴장하게 했다. '차별의 나라, 또 차별의 나라, 새로운 차별의 나라, 철저한 차별의 나라' 로도 모자라 특권층의 나라로, 소인배의 나라로 만들어버린 게 선비들이었다는 말이다. 책에서 차별의 대상으로 등장했던 서얼이나 노비,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는 더이상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다. 오로지 '명분'을 위하여, 자신의 安危만을 위하여 '차별'을 고집했던 그들의 유교나 유학에 화가 날 뿐이다. 물론 나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깊이있는 눈은 없다. 그래서 어찌보면 저자의 말이 한사람만의 주관적인 내용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반감은 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가려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고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가난한 집안에서 콩알 한쪽을 나누어 먹는 데에는 그나마 마지못해서라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콩알의 개수를 늘리는 데에는 생각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206쪽)
맹자조차도 백성을 먼저 배불리 먹인 후에야 예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는데 그토록이나 禮學을 중시했다는 선비들의 나라에서는 어떠했을까? 그저 가난하고 배고프더라고 참는 것만이 '禮'라고 말했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들도 역시 가난하고 배고팠을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기는 했다) 禮는 본래 중국 고대의 종교적 祭祀儀式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後代에 인간행위의 규범이자 사회질서의 근본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그 처음의 이유가 문득 궁금해진다. 말이 예학이지, 한시대를 상복논쟁만으로 끝내버린 대표적인 예송논쟁만 보더라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다. 그 부분은 '상복의 나라'를 다룬 부분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선비들의 시문과 예술을 논하기보다 선비들의 유교문화가 한국 문명사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했는가와 같은 문제 제기와 역사 평가 작업을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는 말에 백퍼센트 공감한다. 동아시아 유교 사회에서 '民'은 늘 통치의 대상이었을 뿐, 정치를 담당한 주체가 아니었다.(-262쪽) 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결국 유교나 유학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어느 부류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일까? 진정한 유학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참된 유학은 본래 나라를 다스리되 백성을 편안케 하고, 이적을 물리치고, 재정을 풍족하게 하고, 문무에 정통하여 무엇이든지 담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찌 자구字句나 문장만을 취급하고 벌레나 물고기를 주석하는 것만을 일삼으며, 소매 넓은 옷을 입고 두 손 모아 인사하는 것만을 익힐 것인가 (-184쪽)
정약용이 당시 유학자들의 풍조를 개탄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풍조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몇 백 년에 걸쳐 오랜동안 형성된 선비들의 폐습이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유학의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할 때 가장 반대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조선 최고의 선비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황조차도 적서의 구분과 귀천의 질서는 예법의 근본으로 국가와 가정을 공고히 유지하는 근본이라 못 박았다고 하니, 결국 돌보아야 할 백성보다는 자신의 명분을 먼저 챙겼다는 말로 들려 왠지 씁쓸해진다. 성리학자들이 조정의 대소사를 쥐고 흔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크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 여자와 여자의 생활사였다. 그것을 앞서 말했던 '새로운 차별의 나라' 에서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리학의 대표격인 송시열의 이름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감춰져 있는가는 한번쯤은 가늠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자주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우리의 先祖들이 실학쪽에 무게중심을 두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라는... 소매 넓은 옷을 입고 수염이나 쓰다듬으며 허울좋은 명분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면... 물론 유학의 개념이 모두 잘못되고 나쁘기만 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역사책에도 곧잘 등장하는 조상들의 이름을 수도없이 들으며 자랐다. 외가엘 가도 그랬으니 오죽했을까? (그 꼿꼿하신 외할아버지의 풍채라니!) 내가 나고 자란 친정은 종가집이었다. 아버지가 종손인 것은 당연한 일이나 아버지의 경우는 좀 그렇다. 작은집의 작은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가 어떻게 큰 집의 맏아들이 맡아야 할 종손이 되어야 했는가는 유교적인 이념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나'는 없었다. 오로지 책임과 의무만이 따랐을 뿐이었다. 이제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다. 물귀신처럼 '溫故知新'이라는 말만 물고 늘어질 일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耳懸鈴鼻懸鈴' 이라는 말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선비들에게 유학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은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 그만 선비를 역사로 놓아주자 는 저자의 에필로그가 새삼스럽다. /아이비생각
<이 글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