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위대하지 않다 - 개정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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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편하지만 읽어야 할 책', '적나라하되 천박하지 않은', '불편하되 무시할 수 없는' 신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 이 책을 말하고 있는 소개글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본다. 지금 세상에서 이런 내용의 책을 누가 그렇게 불편해할까?  이전에도 많은 책이 종교나 그들의 경전에 관한 왜곡을 짚어냈다. 이미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일텐데도 '불편하지만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한 걸 보면 아직도 종교의 어깨너머에 숨겨진 그 무엇이 더 있다는 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잘 읽힌다. '창조'에 관한 부분만 뺀다면 그다지 속도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느정도 각오한 일이긴 하지만 수시로 반복되어지는 이야기조차 쉽게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면 종교가 저지르고 있는 사악함이 지금의 세상속에 셀 수 없이 많이 보여지고 있다는 말일테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믿음'이라는 말에 빠져드는 것일까? 왜 그럴수 밖에 없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이 제공해주고자 하는 듯 하다.

 

종교는 인류가 겁에 질려 울어대던 유아기에 생겨났으며, 우리가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지식욕을(그리고 위안과 확신 등 유아적인 욕구들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유치한 방법이다.(-101쪽)

 

사실 우리가 종교에 빠져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누군가에게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인간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연속에서의 인간은 개미만큼의 크기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개미보다도 더 작은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그 나약함을 숨기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너무나도 고차원적인 이야기 같다.  굳이 책을 통해 살펴보지 않아도 종교가 왜 생겨났는지, 누가 어떻게 종교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에게 죄를 저질렀는지 알 사람은 다 안다. 너무나도 단순한 힘의 원리가 거기에 숨어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처음 종교가 생겨나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그 바뀐 세상 역시 원천적인 힘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아직도 휘둘리고 있는 탓에 우리는 정말 하릴없이 그 '믿음'이라는 허울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의 신비로움은 이미 옛이야기에 불과하다. 종교라는 테두리가 없어진다면 인간은 어쩌면 공황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말 그럴까?

 

믿음이 개인의 선택이 된 지금 신자들의 행동은 그들 자신이 알아서 할 문제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강제적인 방식으로 종교를 주입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도 신경쓸 필요 없다. (-146쪽)

 

중요한 건 처음이나 지금이나 종교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지독한 아집과 고집에 빠져 독선의 늪에서 허덕인다. '진정성'도 없고 입만 벌리면 새어나오는 그들의 '진리'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그들의 하는 양을 보라, 어쩌면 그리도 자신들이 내세우는 교리와 똑같이 이기적인지.... 저자의 말처럼 믿음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알아서 할 문제라는 말은 백퍼센트 옳다고 본다. 나 역시 어떤 식으로든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솔직히 신경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근래에 스스로가 교인임을 선뜻 밝히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늘 변해야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늘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순을 어찌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자가당착 自家撞着이라고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우리는 정결하고 선택받은 소수, 다른 이들은 모두 저주받았네.

지옥에는 당신이 들어갈 자리가 충분해. 우리는 북적이는 천국을 원하지 않네. (-339쪽)

조지 엘리엇의 <애덤 비드>에 묘사되어 있는 풍자글이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리도 완벽한 표현처럼 들리는지...

 

종교는 아무리 유순하게 굴더라도 결국은 '전체적인' 해법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해법에 따르면, 믿음은 어느 정도 맹목적이어야 하고, 사람들은 사생활과 공적인 생활의 모든 측면을 더 높은 존재의 영원한 감시에 맡겨야 한다. 이 끊임없는 감시와 복종은 대개 무한한 앙갚음의 형태를 띤 두려움에 의해 더욱 강화되며, 사람들에게서 항상 최고의 품성만 끌어내지는 않는다. (-362쪽)

 

또 흥분하고 말았다. 종교이야기가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감정적이 되고 만다. 어쩌면 내가 종교에 대해 무지렁이라서 그러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종교는 마음을 앞세운 '믿음'이라는 의미보다는 '필요에 의한 소통이나 교류'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진실된 마음으로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이어야만 내세울 수 있는 게 '종교'요 '믿음'은 아닐 것이다. '사적'이거나 '공적인'것의 구분이 없어야 하는 게 '종교'요 '믿음'은 아닐 것이다. 어쩌다가 우리의 힘겨운 마음을 보듬어주어야 할 종교가 이렇게 변질되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이 책대로 말한다면 종교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와 함께 교회에 가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과 가까이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던 내 이웃의 목소리는 아직도 나를 아프게 한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상상 속의 것이든 진짜이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 진리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만약 하느님이 오른손에는 모든 진리를, 왼손에는 비록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꾸준히 부지런하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열정을 감춰 쥐고서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겸손하게 왼손을 택할 것이다. - 고트홀트 레싱,<안티 괴제>-

 

 책을 읽고나서 나는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나이가 들면 나도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던 오래전의 다짐을. 책장을 덮기전 답답한 나의 마음에 한줄기 바람처럼 느껴졌던 문구가 있었다. 만약 하느님이 오른손에는 모든 진리를, 왼손에는 비록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꾸준히 부지런하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열정을 감춰 쥐고서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겸손하게 왼손을 택할 것이다.. 라는 말이다. 어쩌면 서로를 향한 배려와 마음도 없이 '믿음'이라는 말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종교를 가졌다는 게 일종의 부적처럼 느껴지는 세상은 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아이비생각

 

"메시아는 오시지 않는다. 심지어 전화도 하지 않을 것이다!" -2001년에 나온 이스라엘 히트곡 (-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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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호스
마이클 모퍼고 지음, 김민석 옮김 / 풀빛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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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이 달랐을 뿐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다지 특별한 의미는 없어보인다.  말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시점과 다를바가 없었던 까닭이다. 이것이 실화라면?  실화였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기적같은 우연이 일어난다는 게 놀랍고 신기한 일일테니... 무언가를 진정으로 가슴가득 원한다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뭐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멋진 일이긴 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음을 다한 참사랑의 댓가쯤일까?  사람과 동물 사이의 교감이 이루어내는 감동은 작지 않다. 그만큼 순수한 사랑이 필요했을테니. 시점을 바꿔 말을 또하나의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와 비슷한 주제들은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의인법의 위대함이다..

 

한쪽 손에는 휴지를 준비하라는 자극적(?)인 뒷표지의 말보다는 그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들었다는데에 더 큰 유혹이 느껴진다. 어떻게 그렸을까 궁금해진다.  이 내용은 차라리 영화로 만나보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동물을 주제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게 쉽진 않겠지만 그런대로 멋진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거라고 나름대로 기대감이 생겨난다. 평범한 듯 하지만 두어군데 가슴 찡한 울림을 전해주는 장면이 그려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짐수레를 끌며 보통의 농장생활을 하던 말 조이가 어느날 갑자기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고 그런 조이의 눈을 통해 전쟁의 아픔과 고통이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운좋게도 조이 주변사람들은 하나같이 동물애호가들이다. 어쩌면 그리도 말에 대한 사랑이 독특한지... 얻고자하는 바를 위한 하나의 장치겠지만 그런 상황이 조금은 작위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문득 얼마전에 읽었던 <아버지의 길>이 떠오른다. 똑같이 전쟁의 참상을 그리고 있는 탓이리라. 주체가 말이었을 뿐이지 조이 또한 그 남자와 같이 국적을 달리하며 전쟁을 치루니 하는 말이다. 영국인의 말이었다가 독일인의 말이었다가 다시 프랑스인의 말이 되기도 한다. 결국 영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조이의 여정만이 끝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의 길과 달랐을 뿐이다. 영화속의 장면이었다면 그 완충지대에서의 조이가 상당히 멋지게 그려지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다보니 양쪽으로 쳐진 철조망 사이에 서 있게 된 조이. 그 말을 향해 서로 이쪽으로 오라며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어대던 병사들의 모습. 그러다가 끝내는 조이를 데려가기 위해 양쪽에서 한사람씩 뛰어나와 서로가 서로를 마음으로 보듬어안는 그 장면이 내게는 가장 뭉클했다. 서로 믿기만 한다면 사람들 사이의 문제는 얼마든지 풀 수 있다는 그들의 말이 내게는 커다란 울림을 전해주었다. 동전던지기로 조이의 거취를 정하던 그들처럼 상황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 크게 부풀려 문제를 만들어내는 건지도 모르는 일일거라고...

 

완충지대, 사람과 사람사이의. 믿음, 사람과 사람사이의. 어쩌면 조이의 역할이었을지도 모를 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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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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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선비'라는 말과 '유교 또는 유학'이라는 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그 두 낱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까놓고 말해 유교나 유학의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선비'라는 허울좋은 옷속에 숨어있는 뻘건 속살이 휜히 보인다. 현실성 없음, 무능력함,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음, '眼下無人' 으로 상당히 이기적인 사고를 가진..  그야말로 누가 알까봐 꽁꽁 숨기고 싶었을 속살일터다. 또한 '유교나 유학'이라는 말속에서는 허울좋은 명분과 자기만의 틀에 갇힌 배타적인 상황, 소통의 부재가 그려지곤 한다.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라는 의식은 분명 저 고매한(?) 유교적 의식에서부터 왔을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책을 읽다 무서운 도박: 유교 부흥 운동 편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되었다.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유교... 주희가 제시한 학습과정을 살펴보더라도 선비의 삶이 곧 구도자의 삶임을 쉽게 알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솔직히 그렇게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韓,中,日 삼국중에서 한국의 유교가 가장 철저하게 의례적이고 의식화되어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굳이 종교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해도 그런 수준까지 이미 우리의 의식을 점령했다는 말로 들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일전에 신문지상에서 보았던 정통 유교(유학)를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는 중국의 젊은이들에 관한 기사가 생각났다. 유교의 본거지에서 오히려 한국으로 유교를 배우러 온다는 그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도 한국인의 의식속에 유교가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으면 저런 일이 생길까 싶었었다. 유교가 얼마나 의례적이고 의식화되어 있으면 싶었었다. 그런데 그런 우려가 사실이었다는 말에 조금은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검증된 바 없는 유교 이론- 편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늘 궁금했었다.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깊이 유교의 수렁에 빠져 있으면 바뀐 세상속에서도 유교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는 말이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은 아주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유학의 배경이 되어주는 말이다. 그런데 역사의 틀에서 볼 때나 작금의 우리 사회와 생활사를 살펴볼 때 유교나 유학의 가르침인 '德으로 가르치고 이끌어준다'는 그  말의 실천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이런 의문은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점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더 가관인 것은 -선비가 꿈꾼 나라, 그들이 만든 나라- 편이다. 소제목에서부터 나를 긴장하게 했다. '차별의 나라, 또 차별의 나라, 새로운 차별의 나라, 철저한 차별의 나라' 도 모자라 특권층의 나라로, 소인배의 나라로 만들어버린 게 선비들이었다는 말이다. 책에서 차별의 대상으로 등장했던 서얼이나 노비,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는 더이상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다. 오로지 '명분'을 위하여, 자신의 安危만을 위하여 '차별'을 고집했던 그들의 유교나 유학에 화가 날 뿐이다. 물론 나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깊이있는 눈은 없다. 그래서 어찌보면 저자의 말이 한사람만의 주관적인 내용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반감은 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가려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고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가난한 집안에서 콩알 한쪽을 나누어 먹는 데에는 그나마 마지못해서라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콩알의 개수를 늘리는 데에는 생각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206쪽)

맹자조차도 백성을 먼저 배불리 먹인 후에야 예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는데 그토록이나 禮學을 중시했다는 선비들의 나라에서는 어떠했을까? 그저 가난하고 배고프더라고 참는 것만이 '禮'라고 말했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들도 역시 가난하고 배고팠을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기는 했다) 본래 중국 고대의 종교적 祭祀儀式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後代 인간행위의 규범이자 사회질서의 근본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그 처음의 이유가 문득 궁금해진. 말이 예학이지, 한시대를 상복논쟁만으로 끝내버린 대표적인 예송논쟁만 보더라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다. 그 부분은 '상복의 나라'를 다룬 부분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선비들의 시문과 예술을 논하기보다 선비들의 유교문화가 한국 문명사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했는가와 같은 문제 제기와 역사 평가 작업을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는 말에 백퍼센트 공감한다. 동아시아 유교 사회에서 '民'은 늘 통치의 대상이었을 뿐, 정치를 담당한 주체가 아니었다.(-262쪽) 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결국 유교나 유학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어느 부류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일까? 진정한 유학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참된 유학은 본래 나라를 다스리되 백성을 편안케 하고, 이적을 물리치고, 재정을 풍족하게 하고, 문무에 정통하여 무엇이든지 담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찌 자구字句나 문장만을 취급하고 벌레나 물고기를 주석하는 것만을 일삼으며, 소매 넓은 옷을 입고 두 손 모아 인사하는 것만을 익힐 것인가 (-184쪽)

정약용이 당시 유학자들의 풍조를 개탄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풍조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몇 백 년에 걸쳐 오랜동안 형성된 선비들의 폐습이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유학의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할 때 가장 반대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조선 최고의 선비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황조차도 적서의 구분과 귀천의 질서는 예법의 근본으로 국가와 가정을 공고히 유지하는 근본이라 못 박았다고 하니, 결국 돌보아야 할 백성보다는 자신의 명분을 먼저 챙겼다는 말로 들려 왠지 씁쓸해진다. 성리학자들이 조정의 대소사를 쥐고 흔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크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 여자와 여자의 생활사였다. 그것을 앞서 말했던 '새로운 차별의 나라' 에서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리학의 대표격인 송시열의 이름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감춰져 있는가는 한번쯤은 가늠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자주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우리의 先祖들이 실학쪽에 무게중심을 두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라는... 소매 넓은 옷을 입고 수염이나 쓰다듬으며 허울좋은 명분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면... 물론 유학의 개념이 모두 잘못되고 나쁘기만 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역사책에도 곧잘 등장하는 조상들의 이름을 수도없이 들으며 자랐다. 외가엘 가도 그랬으니 오죽했을까? (그 꼿꼿하신 외할아버지의 풍채라니!) 내가 나고 자란 친정은 종가집이었다. 아버지가 종손인 것은 당연한 일이나 아버지의 경우는 좀 그렇다. 작은집의 작은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가 어떻게 큰 집의 맏아들이 맡아야 할 종손이 되어야 했는가는 유교적인 이념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나'는 없었다. 오로지 책임과 의무만이 따랐을 뿐이었다. 이제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다. 물귀신처럼 '新'이라는 말만 물고 늘어질 일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耳懸鈴鼻懸鈴' 이라는 말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선비들에게 유학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은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 그만 선비를 역사로 놓아주자 는 저자의 에필로그가 새삼스럽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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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왜공정 - 일본 신新 왜구의 한반도 재침 음모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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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왜구' 3명이 2011년 한반도를 침구했다! 책띠의 말이 섬뜩하다.  일전에 일본국회의원 3명이 막무가내로 입국을 시도했던 그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왜구'라~~ 우선 이 책을 통해 '왜구'라는 말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자. '왜구'는 '倭'와 '寇'의 합성어다. '倭'라는 글자는 고대 일본에 대한 호징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에서 쓰여져 온 말이라고 한다. '寇'는 '떼도둑' 또는 '겁탈함'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寇'자만 보더라도 도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구'라는 말이 왜인들의 집단 도둑 행위나 도둑집단, 또는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침구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라는 걸 솔직히 지금까지는 몰랐다. 그저 일본인을 격하시켜 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왜구의 주체가 나중에 '도망자 무리'라는 뜻을 가진 '포도배'로 바뀌기도 한다. 악한 사람의 무리라는 '惡黨'이란 말조차도 일본에서 비법 행위를 자행하는 무리였단다. 우리가 쓰고 있는 '악당'이란 말의 유래다. 그렇게 따지고보니 저 한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섬뜩하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역사강의를 들으면서 간혹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이웃을 잘못 만났다고. 위에서는 중국이, 아래에서는 일본이 끝도없이 우리를 친다. 그런데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가만히 살펴보면 이웃들만의 탓도 아닌 것 같다. 내 집안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점도 인정해야만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이 책과 같은 일본의 '남왜공정'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원인을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인연중에는 좋은 인연도 있지만 '악연'도 있게 마련이다. 모든 상황을 남의 탓으로 돌리자고 한다면 끝도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도 그런게 아니었을까?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그들은 그렇게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팔짱끼고 바라보고만 있는 건 아닌지 한두번 해 본게 아닌 까닭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움직이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등줄기가 서늘했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공감대가 점점 커져갔다.

 

처음엔 격한 개인의 감정이 글로 표현된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책날개에서 소개하는 저자의 이력이 그런 편견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꼼꼼하고 세세하게 근거를 제시하는 저자의 강력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깊은 울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누이 듣고 말해왔던 것처럼 모든 문제의 해답은 역사속에 존재한다는 걸 다시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저자 한사람만의 생각일까? 단지 저자 한사람만의 생각은 아닐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주장이다. 너무나도 오랜세월을 우리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속에서 지내왔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가 놀랄만한 속도로 모든 상처를 씻어내고 어느날 우뚝 선 골리앗처럼 보이는 우리의 뒷모습은 어떤가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가 숨겨놓은 내면은 어떤 모습일까?

 

여러장에 걸쳐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바를 말하고 있는 '남왜공정'이란 낯선 단어에 대해 설득력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냥 한때 지나가는, 한번쯤 해 본 생각이 아니라는 걸 말하려는 듯 반복되어지는 사료들은 충분히 저자의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4장. 왜구, 전쟁으로 전쟁을 말하다...에서 보여주는 왜구의 속성은 정말 놀라웠다. 많은 말이 있었지만 병상신속兵尙神速 치고 빠지는 약탈 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침소분용侵消紛用 내외부 혼란을 통해 자국의 분란을 해소한다, 만무근린萬無近隣 철저하게 ‘이웃이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병이사립兵以詐立 사실왜곡으로 끈질기게 목적한 바를 사취한다, 위국개동僞國個動 국가적 활동을 개별집단의 준동으로 위장한다 와 같은 부분은 굳이 역사적인 사료를 들추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점입대담漸入大膽 초기에 불씨를 끄지 않으면 점점 대담해 진다, 우물찬적優物纂敵 상대의 우위요소를 재침구 수단으로 활용한다 와 같은 경우는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그리고 현재의 우리를 되새겨보면 우리가 정말 그랬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누구나 말하는 냄비근성을 여기서 보게 된다는 말이다. 쉽게 끓어오르니 쉽게 식을 수 밖에 없다. 큰 불만 잡았다고 불을 다 끈건 아닐텐데도...

5장. 왜구, 어떻게 막을 것인가? 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늘 말로만 외치는 우리의 못된 습성이 부끄러워진다. 현장 중심 사고의 필요성... 중요한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저하나만의 욕심때문에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는 데 수군이 아니고 누가 한단 말입니까? 수전, 육전의 어느 한 쪽인들 없앨 수 없습니다"  바다의 적은 기필코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던 이순신장군의 그 의지가 있었기에 그만했다는 말은 백퍼센트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선공후비先攻後備 문제의 근원을 초기부터 뿌리째 뽑아라, 초비응왜招備應倭 국가혁신으로 대왜구전 우위를 갖춰라, 병형상수兵形象水 적의 형세에 맞춘 ‘맞춤형 전략’을 짜라 와 같은 대처방법은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들어야 할 말이다.

 

'남왜공정'이라는 용어는 사실 이 책을 통해 처음 보았다. 저자도 말한다. 우리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고자 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귀에 익지만 일본의 팽창주의적 행태와 재침을 우려하는 '남왜공정'에 대해서는 우리 내부에서조차 공론화된 적이 없다고. 독도문제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종군위안부 문제와 같이 '문제'로 인식되고 국한되어 왔을 뿐이라고. 그런데 나는 실질에 준하는 침략,침탈,침구 행위를 '문제'로만 한정해 보는 것도 실은 일본이 오랫동안 벌여온 '남왜공정'의 성과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왜구주의'라는 말 자체도 왠지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지가 않았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아픈 진실인지도 모를 일이다.  독도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많은 사람이 말했었다. 감정적으로 대처할 일이 아니라고. 그렇기에 저자가 말하고 있는 '신왜구주의' 대처법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2045년 일본은 재침한다 라는 책띠의 말이 근거없는 말로 여겨지지 않는 건 왜일까? 설사 그저 그런 가상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일본에 대한 의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남왜공정'이란 제목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이 세상은 강한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래서 내 아이가 살아가야 할 미래가 서늘해지는 것이다. /아이비생각

<이 글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격변이 몰아치는 동북아 현실에 한반도는 늘 긴장의 정중앙에 놓여있다. 지정학적으로 서로 접해있는 특성상 3국은 오랜 기간 서로 얽히고 섥히며 뿌리 깊은 약육강식의 관계망을 형성해 왔다. 또한 이해국 간 상반된 흐름 속에서 국제 질서를 새롭게 재편해 왔다. (중략) 모든 국제정세의 변화는 복잡한 역사적 맥락과 이해관계 하에 놓여있다. 이같은 역사 전개 방식은 현재성을 띠며 지금도 우리의 운명을 가로지르는 핵심 축으로 작용하고있다. (중략) 역사에는 두 가지 뚜렷한 명제가 있다. 항시 반복적이라는 것과 대비하는 자에게나 생존의 길을 열어준다는 점이다. 이같은 원칙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없다. 현재의 모순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외부요인을 찬찬히 살펴봄으로써 내부의 동력을 이끌 필요가 있다. (-맺음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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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박물관 - 글누리의 모음
박창원 지음 / 책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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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전에 우연히 TV를 보다가 어느 연예인이 '엄친'이 뭐예요? 하고 묻는 걸 보았다. 주변 사람 모두 그것도 모르냐며 큰소리로 가르쳐준 말은 '엄마친구' 였는데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질문했던 사람의 그 다음 말이었다. 아하, 그렇구나! 나는 '엄청 친한'이란 말인줄 알았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엄친'이란 말 하나만 가지고도 앞의 두가지 뜻뿐만 아니라 또다른 뜻으로도 쓸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왜 모른척해야 했을까 싶어 씁쓸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그렇게 말을 줄여쓰는 걸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양 쓰고 있다. 사실 나부터도 요즘 쓰는 줄임말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경우가 많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을 줄여서 쓸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한두번 해 본 게 아니다.  제대로 된 길을 보여줘야 할 언론사까지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앞장서듯 하는 작태에 나는 가끔 분노마저 생겨난다.  '슈스케'가 뭔지를 몰라 무안을 당했던 경우도 있었다. (슈스케가 슈퍼스타케이의 준말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때만해도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묶음형 가수이름인 줄 알았었다.) IT세대라는 젊은이들이야 그렇다쳐도 우리는 왜 언론사들마저 그렇게 써야만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지 나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라지만 씁쓸한 이야기하나가 있다. 광화문 거리에서 주위를 둘러보시던 세종대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도대체 여기가 어느 나라인고?

 

각설하고...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흔히 듣는 말로 한글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글이니, 아름다운 글이니들 하지만 왜 그런건지 자세히 알고 싶었던 까닭이다.  수박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한글 박물관이라는 제목에 유혹을 느꼈다는 말이다. 한글 박물관이라~~ 무엇을 보여줄지 여느 때의 답사처럼 작은 설레임도 있었다. 박물괸에 들어서면 예상했던대로 문자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자가 있는지, 말과 글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문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며 살아남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글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을 돌아보는 동안 새로운 시각이 열리기도 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중국의 영향이 우리에게 얼만큼이나 미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알게되었던 시간이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로 시작되어지는  '훈민정음의 예의' 편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볼 수 있었던 경우는 없었던 듯 하여 큰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책을 읽기 전이나 읽으면서도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보급되었으며 어떻게 확산되었는가보다 더 궁금했던 건, 한글이 보급된 후 그토록 불쌍히 여겼던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가였다. 많은 방법으로 한글을 보편화시키기 위해 애를 썼던 건 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었던 건 한글보급 후의 변화였다. 소설적으로 보여지는 게 아닌 백성들의 실제적인 삶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을 통해 그 궁금증이 해소되진 못했다. 한글 박물관을 한바퀴 돌아본 후의 느낌은 좀 그랬다. 좋은 면만 보고자 했다면 굳이 답사를 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한글 박물관을 통해 독특한 우리문자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 건 사실이다. 막연했던 느낌이 조금은 가까워진 듯 한. 

 

책장을 넘기다 눈이 동그래졌던 부분이 있다. 성종 23년에 간행되었다던 일본어 학습서였는데 일본어음을 표기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에도 이렇게 (보기좋게 정리한) 외국어 학습서가 있었구나 싶었다. 물론 역관의 손을 거쳐 펴낸 책이긴 하지만 정말 멋진 일이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말과 글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많은 말과 글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묵과할 수 없는 일임엔 분명하다.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말과 글에 우리의 한글이 꼽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만큼 우리글자의 탁월함을 받침해줄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박물관을 나서기 전에 다시한번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음미해본다. 한글, 아자! 아자!  /아이비생각

<이 글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의 기원은 대략 세 가지다. 서유럽과 북미 등에서 사용되는 로마 문자와 옛 소련 지역에서 사용되는 키릴 문자, 그리고 서남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사용되는 아랍 문자, 인도 문자,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사용되는 문자 등은 모두 이집트 문자에서 갈라져 나온 문자다. 이집트 문명과 함께 발생한 이집트 문자를 인근 지역에서 차용해 변화시킨 것을, 다시 다른 민족이 도입해 자기 나름대로 바꾸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여러 문자로 정착한 것이다. 이집트 문자 외에 여러 문자의 기원이 되는 것은 漢字다. 현재 중국 및 인근 지역에서 사용되는 문자들은 한자나 한자에 기원을 둔 문자들이다. 마지막 하나는 우리민족이 사용하는 한글이다. 이 문자들 가운데 문자를 만든 원리와 과정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한글뿐이다. 인류가 사용하거나 사용했던 수백 가지 문자 가운데 그 기원과 과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문자는 한글뿐이고, 또 그 기원과 과정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유일한 책이 <訓民正音>이다. (- 훈민정음 창제의 의의 중에서.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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