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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는 벽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2년 4월
평점 :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떠오른 낱말이 있었다. '추억'이라는 말과 '기억'이라는 말이다. 문득 이런 愚問이 생겼다. 그 두 낱말의 정확한 의미를 내가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것일까? 라는... 그래서 한번 찾아보았다. '기억 記憶' - 이전에 했던 경험을 의식속에 간직함. 또는 어떤 것들의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꺼내는 것. '추억 追憶' - 어떤 것들의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꺼내는... 똑같다! 그런데 왜 나는 기억이라는 말과 추억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이렇게 다르기만 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억'이라는 말은 상당히 광범위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추억'이라는 말은 약간은 좁은 의미의 말로 쓰이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기억'이라는 말보다는 '추억'이라는 말이 좀 더 애틋하고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 짖궂긴 하지만 내 맘대로 해석해보자면 이렇다. 말 그대로 '記憶'은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고, '追憶'은 생각을 쫓아가는 것이라는 거다. 그러니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나쁜 일보다는 좀 더 아름다웠거나 좋았던 일을 쫓아가려고 하는 건 당연지사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의 사건(?)들은 아무래도 아름다웠던 '追憶'은 아닌 듯 하다. 어쩌면 이제는 우리가 모른 척 하고 싶어하는 지나가버린 '記憶'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작가가 나열하는 책속의 사건(?)들은 아프다.
조정래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참 대단하다. 그만큼 우리의 삶속에서 살아숨쉬는 이름이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어쩌면 바로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나온 책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살짝 들기도 한다!) 이 책 <외면하는 벽> 은 작가의 짧은 글을 모아놓은 일종의 작품집이다. 그런데 그 주제가 한결같이 똑같다. 70년대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데도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정말 고릿적 캐캐묵은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지금 아무리 '달고나'나 '뽑기'가 유행을 한다해도 그건 단순히 호기심일뿐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것처럼 이 책속의 이야기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는 분명 낯선 풍경일테지만 그 때를 살아낸 세대에게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감히 '아픔'이라는 말을 한다.
한참 반공 방첩을 외쳐대던 시대에는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의심을 받았다. 물론 지금도 사상범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어디 그 때의 무게와 같을까? (-첫번째 이야기 '비둘기') 전쟁을 겪어 힘겨웠던 부모 못지 않게 그들의 아이들 역시 힘겨웠다. 그 힘겨운 삶의 올가미에 걸려 어쩔 수 없이 변해가는 자신과 맞닥뜨려야 하는 고통의 순간도 있었다. (-세번째 이야기 '진화론' 과 네번째 이야기 ' 한, 그 그늘의 자리') 우리는 쉽게 말한다. 그런 그들의 희생과 감내가 있었기에 지금, 좋은 시절을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그들의 희생과 감내는 외면당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채 풍요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지금도 그 거대한 외면의 벽에 부딪혀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눔'이라는 이름과, '함께'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쓰다듬어 줄 마음의 따스함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고의적으로 그 마음들을 외면한 채 모든 것이 다 잘될거라고 위안삼으며 살아왔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외면하는 벽' 의 야야기나 마지막 이야기 '두 개의 얼굴'속에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고스란히 들어있다. 철저하게 나만을 위하는 그러나 아닌 척하는 가증스러운 얼굴이 이야기위로 겹쳐진다는 말이다.
우리가 못살았던 시절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아픔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아팠던 기억만을 끄집어내기로 작정한 듯 하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무심코 저질렀던 그 '외면'이 고스란히 지금의 우리를 더욱 더 아프게 하고 있다는 역설일수도 있지 않을까? 외면함으로써 잊고자 했던 것들이 지금의 우리를 다시 외면하며 아프게 하고 있는 거라고... 그 모든 아픔들이 누구의 탓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 한쪽이 껄끄러웠던 건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그 무엇을 우리 스스로가 모른척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나는 아픔을 동반하는 '記憶'보다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追憶'에 매달리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