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 1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우선 정리부터 해보자.

반야.... 이미 무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인. 어릴적 철모르던 예닐곱살때부터 예지능력을 보여준다.
그토록이나 커다란 예지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라거나 맞닥뜨려야 할 힘겨운 상황까지는 볼 수 없었기에
그 작은 어깨위에 그리도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가야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외모는 아마도 경국지색쯤으로 치부될듯 하다.
물론 그 미모로 인하여 벌어질 애정행각은 예정되어져 있는 일이었을거란 말이다.
그러므로 그녀 곁에는 늘 남자들이 머물고 있음이다.
자신의 예지능력을 미처 컨트롤하지 못하던 어린시절부터 사람과 세상을 제몸으로 부딪혀가며 배우는
걸판진 삶의 굿판속에서 점점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은 또하나의 우리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를 위한 사랑은 두가지가 아닐까 싶다.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려지는 동마로나 현무부령,
무영의 모습속에서 읽혀지게 되는 욕망의 순간들은 어찌보면 안타까울 수도 있겠다 싶지만
차라리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덤벼드는 허울뿐인 또하나의 사랑이 더 솔직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국 자신보다는 타인들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혹은 살아내야 할 그녀의 운명이 참으로 가혹하다.
스물 몇살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운명을 매듭짓게 되는 반야..
그녀를 앞세워 보여주고 싶어하는 세상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 깊고 너무 먼 까닭이다.

사신계... 귀천이 없고 남녀의 차이도 따지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속에서는 모든 이들은 똑같다고.
사람마다 동등하고 자유로울 권리가 있으니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얼핏 듣기에는 정말 비현실적인 세상이다. 그야말로 꿈일수도 있는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꿈꾼다. 왜?
그런 꿈을 꾼다는 것이 우리들의 희망인 까닭이다. 그래야만 버텨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 스스로 답을 내려준다.
그런 비현실적인 것 같은 세상이 현실에 있나이까 물으니
현실 안일 수도 있고 현실 밖일 수도 있으나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또하나의 다른 세상이라고.
그야말로 현실적인 답변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혼란이 내게 온다.
허구인듯 하나 허구가 아닌, 꿈인듯 하나 꿈이 아닌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시대적인 배경이 언제쯤일까 궁금증을 갖게 될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그들이 만들어내는 배경은 이 소설속에 다시한번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아닐수가 없다.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글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니
그야말로 읽는 이의 판단에 맡겨지는 것이다.
사신계를 논하는 부분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동학과 유토피아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人乃天 사상을 가졌던 동학, 사람 보기를 하늘과 같이 여겨야 한다는 동학의 사상과
거의 비슷하게 맞물리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또 어떤가? 어느곳에도 없는 세상, 공상 사회소설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상향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똑같은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던 것은 암담하다는 거였다.
반야를 통하여 다가올 세상에 대한 미리보기가 실행되어지고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사신계의 등급을 따져볼 때 반야가 앉아 있었던 칠요라는 자리는 꽤나 묵직한 자리가 아닐 수가 없다.
반야를 칠요에 앉힘으로 인하여 그들은 이미 스스로의 선택권을 포기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가올 것을 미리 알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할 짓은 아닌듯 싶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학이란 체제가 한수 위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야를 마음속에서 내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대표적인 서민들의 삶속에 머무르는 까닭일 것이다.
힘겨워하는 서민들의 마음을 어우르며 만져주는 까닭일 것이다.
그녀를 통해 아픔 하나씩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까닭일 것이다.
하나의 위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미리보기를 하던 반야에게서 육안을 빼앗고 심안을 빼앗는 작가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기왕에 앞세웠으니 멋진 세상속에서 한바탕 승리를 위한 푸닥거리를 했어도 괜찮치 않았을까?
반야는... 우리곁에 늘 머물러 존재해야만하는 꿈이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끝없이 타오를 성적인 욕망,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떠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앞세우는 우리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모습,
내 성공을 위한 도구로 쓰일수만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 해도 괜찮을것처럼 행동하는 우리들의 모습,
누군가 나를 위하여 희생해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속내를
반야속에 모두 숨겨두고 있지는 않았는가 되돌아 생각하게 된다.
그럴수는 없는거라고 말해주고 싶어 그녀의 눈을 빼앗았고 마음의 눈 또한 멀어지게 했던건 아니었을까?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자유로우며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가꿀 권리가 있다.
귀천이 없고 남녀유별도 없는 세상이지요. 그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의 목숨 값이 같습니다.
동등하고 자유롭지요. 사람마다 그럴 권리가 있고요.
내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나를 보낼 수 있고, 내가 남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 애쓰고,
억울한 사람이 없게 두루 살피며 사는 그런 세상,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불법처럼 듣기 좋으나 무릉도원만큼이나 비현실 같나이다.
그런 세상이 현실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현실 안일 수도  있고 현실 밖일 수도 있지요. 덧붙이자면 무릉도원 같은 세상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또하나의 다른 세상이라 보아야겠지요.
<228쪽>

그야말로 이상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상당한 마력을 지닌 책이 아니었나 싶다. 나도 모르는 새 사신계라는 유혹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그런 세상은 올까? 아니 있기나 한 것일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세상이.
평등... 과연 평등이란 말속에 숨겨진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어쩌면 꿈일런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깨지 못할 꿈. 그래서 그런 세상에 대한 미련이 많은건지도 모르겠다.
반야라는 여인의 향기속에 묻혀버린 사상하나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여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이 너무 커져버린 여인의 존재때문에 안개속처럼 희미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 또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반야의 예지능력이 그리 허황하게 보여지지 않았던 것은 그토록 커다란 신통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았던, 묻는 말에만 답해주었던 그녀의 마음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름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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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이오지마 총지휘관 栗林忠道
가케하시 쿠미코 지음, 신은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일본군영쪽이 궁금했었다.
철저하게 미국식으로 각색되어져버린 하나의 이야기를 앞에 두면서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참모습은 어디에 있는거냐고.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같은 상황하에서 벌어졌던 일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말에 선택했었던 순간부터 정말 기대가 되었다.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그야말로 영웅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쟁신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보면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벌어졌던 일들이
어쩌면 이토록이나 다른 느낌을 전해줄 수 있는가 놀라웠다.
단순히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어떤 것들이 숨어 있는 듯 했다.

도쿄도 남쪽 오가사와라 제도에 있는 작은 섬 이오지마.
섭씨 60도에 달하는 높은 지열과 곳곳에서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유황섬 이오지마.
그 작은 섬에 비행장만 세개였다고 한다.
미국이나 일본쪽 모두에게는 정말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아닐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빼앗기 위한 싸움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오지마섬을 사수하기 위해 떠났던 쿠리바야시 장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을.
그래서였을까? 그토록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쿠리바야시는 미국이 이 전쟁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조차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고 하니 꽤나 현실주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쿠리바야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과 병사들의 목숨을 걸고
일본 본토의 민간인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한 계책을 세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휘하에 있는 병사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며
병사들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를 모셨던 사람들은 회고한다.

한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통해 보여지는 전쟁의 단면은 참으로 서글프게 다가왔다.
그 지옥같은 전쟁속에서 살아냈던 하루라는 시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 긴박했던 상황속에서 치밀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쿠리바야시조차도
일본 본토가 불바다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지막 일전을 위해 술잔을 돌리던 그 순간이 지나
결전의 날을 기다리는 중에 너무도 초라한 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과 표정으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가슴을 얼만큼이나 아프도록 쥐어짜야 했을까?

이채로운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가족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내용들이다.
이 책속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편지글들은 살아 숨쉬는 느낌표 같다.
바람이 들어와 추웠다던 부엌의 틈새를 수리를 해주지 못한채 떠난 아버지의 마음은 보내는 편지에
글과 그림으로 자세하게 바람을 막는 방법을 설명할 정도로 자상하기만 하다.
또한 군인이었기에 부름을 받아 최전선으로 떠났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어려움을 겪는다하여도 꼭 살아남아 주기를 바라는 한 남자의 지극한 바람은 아내를 향한,
혹은 자식을 향한 뼈아픈 사랑의 표현이 아닐수가 없다.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다가올 앞일을 예견하며 걱정과 염려로 또는 당부의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보내지던 쿠리바야시의 편지들. 그 편지들을 보내며 어쩌면 그는 꺼져가는 삶의 의지를
되살려내고 있었던건 아니었을까?  살고 싶다는, 살아 돌아가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를
그렇게 표현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깃발>과는 달리 이 책속에서는 전쟁이란 괴물이 그리 크게 부각되어져 있지 않은 듯 보여진다.
한 인간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 사람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하는 애절함이 흥건하다.
단 한장의 사진으로 영웅이 되어버린 미 해병대 여섯명의 병사들에 비해 지하 벙커에 숨어 마지막
한명까지도 게릴라전으로 싸움에 임하며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일본 병사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싸워야 했던 것일까?
그들의 죽음을 옥쇄(玉碎)라고 했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이란다.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을 이르는 말이란다. 과연 그랬을까?
말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옥쇄가 아니라 진정 어쩔 수 없이 선택되어져야 했던 죽음이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저토록 크게 부각시킨 이오지마섬의 전투에 대해 일본본영쪽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고 하니 후손에 의해 옥쇄라는 말로 만들어진 죽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뒤에 남는 자들에 의해 다듬어지게 마련일테니..
하지만 똑같은 죽음을 두고도 표현하는 방법은 천지차이였다.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미국식의 표현방법과 후일에야 그 죽음의 의미를 되씹어야 했던 일본식의 표현방법은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깃발을 꽂았던 깃대가 일본군이 빗물을 모아 사용하기 위해 만든 저수조에
연결되어져 있던 철제 파이프였다는 말은 참으로 가슴을 아프게 했다.
미국의 승리를 선어한 이오지마의 성조기.
그것이 묶여 있었던 파이프는 2만여 일본군들의 생명을 지탱시켜 준 도구였다. 
이 기묘하면서도 잔혹한 조합은 완벽한 사진의 일부가 되어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222쪽>

편지글 형식으로 된 책을 두번째 만나는 것 같다.
책속에서 만나지는 편지글들이 전해주는 느낌은 참으로 다양하다.
김다은 작가의 <이상한 연애편지>에서처럼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속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글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편지글들로 인하여 담담하게 다가오는 일상과 전쟁의 이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책장을 덮고 책표지에 있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찌의 사진을 본다.
그저 평범하기 이를데없는 한사람, 아버지이며 남편이었을 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제 무덤은 어디라도 괜찮습니다.
돌 하나에 '육군중장 쿠리바야시 타다미찌의 묘'라고 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형 요시마 앞으로 보냈던 그의 편지가 떠오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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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세계사의 진실
키류 미사오 지음, 홍성민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역사는 왜곡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숨기고 싶은 것들이 그토록 많았던 것일까?
진실은 알고 싶어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진실되지 못한 것들은 누군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진실한가? 하고 묻게 된다면 대게는 과학적인 어떤 해답을 요구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과학적인 그 어떤 의미와는 다른, 과학이란 것으로 증명되어지지 않는
아니 증명되어지지 못하는 그런 진실도 꽤나 있는 듯 하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우리가 역사적인 일화로 많이 듣고 또한 보아오던 것들이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철가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절,
철가면이 왕의 쌍둥이 동생이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셰익스피어 진위 사건은 사실 처음 접하는 이야기였다.
후대에 그토록 추앙받을 작품을 쓰게 되었던 셰익스피어는 진정 누구였을까?
그런데 왜, 무엇때문에, 누가 그런 이야기들을 꾸며낸 것일까?
눈앞에서 총구를 겨눈 암살자에게 다섯발의 총알을 맞고 죽어간 존 레논 암살 사건에서는
그 암살자의 생활과 관념등을 파헤쳐가며 단순한 팬으로서의 암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용당했음을 말한다. FBI나 CIA등의 기관을 예로 들면서.
그 밖에도 구구절절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라던가
병사했다고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 암살 사건 또한 그 죽음뒤에 감춰진 음모를 보여주고
베트남 전쟁과 세계적인 입지에서 난감한 입장이 되어가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이나
남북전쟁에서 승리를 하던 바로 그 때에 죽어야 했던 링컨 대통령의 암살 사건에 얽힌 진실을
이 책에서는 되묻고 있다. 어떤 것이 진실로 보여지느냐고.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정치적인 희생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죽임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 또한 자국인들이었다는 거다.
그 죽음이 병사가 되었든 암살이 되었든 그들의 죽음은 단연코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사실 역사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저런 사건들은 일반적인 평민들의 삶속에서는 만나기 힘든,
아니 쉽게 드러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숨겨져야 했던 진실이라는 이름을 불러내고 싶어하는 것일까?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이렇다.
세계사는 커다랗고 복잡한 그림 퍼즐 맞추기라고.
그러니 우리는 그 퍼즐을 얼마나 맞추고 싶어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완성'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각 하나 하나를 맞춰가면서 그 완성된 그림을 상상할뿐.

결국 숨기기로 작정한 진실은 끝까지 보여줄 수 없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보여주지 않기로 작정하고 숨긴것을 열심히 찾아다녀봐야 허구만을 짚어낼 뿐이다.
무수한 억측들만을 쫓아가기 마련일테니까 말이다.
마지막 쪽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나는 다시 고개를 주억거린다.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이 역사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욕망이라는 흉측하고 냄새나는 괴물. 역사속에는 그 괴물이 숨어 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아리아드네를 어디가면 만날 수 있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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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 머물다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김활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왜 고독할까?
우리는 왜 마음을 열지 못한채 살아가는 것일까?
이 책에서 찾아낸 물음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옆에 있어주면서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옆에서 나도 그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한 남자가 있다.
어느날 문득 얇은 벽너머에서 들려오던 흐느낌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위안을 삼던 남자에게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며칠을... 더 흐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때까지는 참아달라고.
한 여자가 있다.
자신의 흐느낌소리를 듣고 찾아왔던 남자에게 그만 마음을 열어버린 여자.
그 남자가 밥도 없이 내민 카레라이스를 식빵에 찍어먹으며 그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하나가 된다.
단,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지.
하지만... 하지만 운명은 그들에게 너무 가혹했다.
아니 운명이란 놈은 누구에게나 가혹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자궁적출을 이유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그녀의 동생 대신 아이를 갖게 되는 여자.
대리모...
나는 늘 궁금했었다. 자신의 아이도 아닌 생명을 열달동안 뱃속에서 키워내는 대리모의 마음이.
그저 단순히 아이를 뱃속에서 키운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까닭이다.
살기 위해서, 아니 살아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여자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너무나 일상적인, 지극히 사소한 일들속에 파묻혀 지내던
그저 그야말로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던 그들에게 그 문제는 커다란 파국의 길로 인도한다.
처음엔 그저 단순하게 생각했었던 일들이 하루,이틀.... 한달, 두달.... 시간이 흘러가면서
모체의 느낌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거다.
뱃속의 아이와 대화를 하는 엄마가 되어가는 여자는 그만 알 수 없는 몽상에 빠져들고 만다.
누군가가 자신을 몰래 감시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오기전에 도망을 쳐야만 한다고..
아이가 자랄수록 여자의 정신적인 힘겨움은 점점 커가고, 그 힘겨움을 알아채지 못하는 남자,
아이를 만들지 못하는 남자는 그저 임신으로 인한 중압감이려니 치부해버린다.
어느날부터인가 새벽길을 나서는 여자. 아무도 보지 않을 시간에 도망을 시도하는 여자.
그여자의 손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지.
여자는 정말 도망치고 싶었을게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을게다.
이건 내 아이라고, 당신과 나의 아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을 게다.
여자는 아니 엄마는 그렇게 아이와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점점 조여져오는 조바심때문에 나는 진땀이 났다.
제발... 이 여자를 죽이지 말아줘....

몇편의 일본소설을 읽게 되면서 나는 아주 일상적인 사소한 삶의 모습과 마주치곤 했다.
그래서일까? 아주 편안하게 다가오던 문체들.
이 소설도 물론 지독히도 일본적인 냄새가 난다.
어쩌면 그래서 아주 편안하게 몰입되어갈 수 있었던건지도 모를일이다.
결국 그 여자는 남편과 함께 하던 도망길에서 아이를 잃고 말지.
그리고 그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이 많은 거라고.
"아이를 갖는 건 포기했었어. 그런데 어느새 아이를 잃은 아버지가 되어 있었어"
"이제부터는 아이를 잃은 부부로서 살아갈 생각이야"
뒤늦게야 아이를 갖었던 여자와 하나가 된 남자의 말이 왠지 가슴 저렸다.
그 여자가 동생의 아이를 대신 임신해주겠다고 했을 때 그 남자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묻고 싶었다.
그 여자의 동생이 미웠다. 도대체가 너무 이기적이고 개인적이 아닌가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에게 그런 힘겨움을 안겨 줄 수 있었다는 게 너무 미웠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또하나의 느낌표를 찾아낸다.
사랑은 언제쯤에나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가?
둘이서 하나로 만나질때, 진실로 상대방의 모든 감정들과 동화되어질때...
그럴때에 진실하고도 깊은 사랑이 제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모든 힘겨움을 이겨내고 간신히 자신의 삶속으로 되돌아온 여자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잊지 마"
"당신을 찾는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언제까지나 기억해줘"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 내가 내민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길 원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정말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마음이 따스해지길 바라는 건 아닐까?
둘이 있어도 외로운 삶의 모습...
가끔은 천길 낭떠러지 끝에 서있는 것 같다는 표현과 마주치게 된다.
과연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
세상의 끝은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
내 마음속 깊숙히 숨어버린 까닭에...  /아이비생각

"마지막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지금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현재를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거죠"
"왠지 철근을 빼고 빌딩을 짓고 있는 것 같아"
"인생의 내진강도를 위장한다는 말씀이죠?"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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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권현숙 지음 / 세계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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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선 생각해 본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랑이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처음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읽는 내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간결한 문체와 숨한번 크게 내쉬면 이내 부러져버릴 것처럼 꺾여들어가는 인색한 문장들 앞에서
나는 느낌없이 그저 눈길로만 책을 읽고 있었다.
도저히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 어떤 느낌이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여섯편의 단편으로 엮여져 있다.
첫번째이야기, 두번째이야기, 세번째.... 읽어가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랑했던 아내를 떠나보냈으면서도 그 아내와의 시간을 차마 버리지 못한채
무수히도 많은 시계들을 사들이는 남자의 기억속에서 (삼중주),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채 일그러지고 추한 얼굴로
여자의 체취에 코를 벌름거리며 더운 숨을 몰아쉬는 노인의 마지막 모습에서 (열린문),
사랑하였으나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한 육체의 상실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감마져 거부해야 했던 남자와
그 사랑을 위해 홀연히 나타나 함께 머물러주기 원했던 어떤 여자의 이야기 (인간은 죽기 위해-) 는
사랑 그 이후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는 왜 사랑후에 오는 죽음을 그리고 싶었을까?
316쪽 박수현님의 작품해설편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에로스는 왜 늘 타나토스를 짝으로 거느리고 나타나는가? 답은 소설속에 있다 라고.
타나토스를 달리 해석하자면 자기를 파괴하고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 환원시키려는 죽음의 본능이라고
나온다. 죽음의 본능,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것...
태어나되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무엇일까?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길래 저토록 두려운 존재를 안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늘 사랑이란 이름의 짙게 화장한 얼굴만 만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이 잉태하고 있는 미움과 증오와 원망과 때로 죽음으로 나타나는 자식들은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스스럼없이 그 사랑의 자식들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거침없는 표현들이 나름대로는 매력적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걸 보면.
모두의 가슴속에 하나씩은 간직했음직한 욕망의 덩어리들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려 한다.
한지붕 아래에서 한침대를 쓰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괜찮은 남자 있으면 만나라고, 자고 싶으면 자도 된다고.(마지막 수업)
정말 그럴까? 그 남자의 말처럼 상대가 나한테 만족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해줘야 하는게
진정한 사랑일까? 그것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것일까?

작가는 사랑의 단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너무도 강렬하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한다. 지나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보고 있는 순간을 절실히 느끼려고, 지금 이순간을 몸속 어딘가에 깊이 새겨 넣으려고.
나는 길게 손을 뻗는다. 무지개처럼 스러지는 저 노을을 만져보려고,
언젠가 그립게 추억할 이 순간을 잡아보려고, 보고 있다는 이 느낌을 실감하려고..
시어진 눈에서 눈물이 배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줄곧 눈을 뜬 채로 쫓아가고 있다,
이 시간이 지나자마자 추억이 될 추억의 씨앗들을.(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
그 사랑의 끝에는 또다른 사랑의 모습으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러면서도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그치고 그 자리에 삶이 있게 하라고.
사랑이 되었든 미움이 되었든 모든 것은 우리의 삶속에 존재하나니...
그것이 어떠한 조건이 되었든 자신이 살아내고 있는 삶과 떨어뜨릴 수가 없나니...
보여지는 겉치레만으로 사랑을 평가하는 우리에게 어떤 경종이라도 울리고 싶었던 것일까?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를 본 왕은 그만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왕이 죽은 후에 그 소녀는 왕의 무덤에 같이 묻혔다.(순장)
그 소녀는 소녀만 두고 가기가 안타까워  왕이 함께 묻어달라고 해서 묻혀진 것일까,
아니면 너무도 사랑했으므로 함께 있기 위해 왕의 무덤속으로 소녀 스스로 걸어들어간 것일까?
작가는 묻고 있었다. 도대체 사랑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을 위해 태어난 그 여자와 그 남자를 작가는 왜 가만 놔두지 않았을까?
우리 이대로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하던 TV광고의 카피처럼 그들을 그냥 사랑하게 놔둘수는 없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스쳐가는 얼굴들을 떠올린다.
가부키에 열중하고 있는 일본 연극배우의 얼굴과, 경극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손끝을 바라보던
그 짙은 화장속에 가리워진 중국 배우들의 얼굴을..
짙게 그려진 화장뒤에 가리워진 얼굴이 행여 사랑이란 존재의 얼굴은 아닐까?
때로는 너무 아름답게 그러나 때로는 너무 아프게 다가오는 사랑이란 이름의 존재.
끝없이 유혹하는 손길로 우리를 부르는 사랑이란 이름의 존재.
작가의 말처럼 이 시간이 지나자마자 추억이 될 추억의 씨앗들을 위해
우리는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닐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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