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사랑을 이야기하다 - 신화 속에서 찾은 24가지 사랑 이야기
최복현 지음 / 이른아침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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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매력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사실 뭐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따지고보면 늘 그 얘기가 그얘긴데도 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아마도 내가 신화를 좋아하는 까닭이려니 생각한다. 옛날 늦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던 할머니가 빌고 빌어 아이를 낳았는데 구렁이였다. 그래도 할머니는 열심히 키웠다. 나이든 구렁이 아들이 장가를 보내달라고 했을 때 할머니는 잠시의 망설임을 뒤로 하고 옆집의 어여쁜 셋째딸과 결혼을 시킨다. 결혼 하던 날 밤에 구렁이 신랑은 멋지고 잘생긴 남자로 변하였다. 저주를 받았으나 사랑을 얻었으므로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를 시샘한 두 언니가 있어 구렁이 신랑이 한양으로 올라간 뒤에 그의 허물을 태우게 하니 구렁이 신랑은 아내가 자기를 버렸음을 알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아내는 어찌 되었을까? 우리의 설화 한편이다.

그런데 설화속에서 만나지는 사랑의 모습을 그리스 신화속에서도 보게 된다. 두 언니들로 인하여 에로스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프시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구렁이 신랑을 찾아 끝도 없는 길을 헤매던 아내는 검은 돌을 흰돌로 만들기도 하고, 끝없이 펼쳐진 돌밭을 일구기도 하고, 새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종내는 구렁이 신랑의 지하왕국을 찾아가 남편과 해후를 하게 된다. 프시케 또한 그렇다. 어딘지도 모를 남편의 행적을 찾아 나서면서 아프로디테의 시험에 걸려들게 되지만 그 역시 신들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단계까지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설화와 그리스 신화속에서의 여인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의 구렁이 아내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구렁이 신랑에게 묘한 여운의 수수께끼같은 말을 빌어서 끝까지 자기 자신이 지키지 못한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사랑을 다시 찾게 되지만 프시케는 다르다. 마지막까지도 호기심을 버리지 못한채 죽음의 잠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 에로스의 도움으로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모습이다. 그것뿐인가?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적장을 사랑한 메가라의 공주 스킬라의 이야기는 마치도 우리의 낙랑공주 이야기와 그 흐름이 흡사하다. 호동왕자를 위하여 자명고를 찢어버린 낙랑과 적장을 사랑하게 되어 아버지의 자줏빛 머리카락을 뽑아버리는 스킬라.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건데 이토록이나 힘겨운 고통을 잉태하는가 말이다.

신기한 것은 사랑도 무슨 특권인양 다루었다는 점이다. 늘 그렇다. 너무나 멋지고 잘생겼거나 여신도 질투할 정도의 미모를 가졌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다소 억지스러운 면도 있는 듯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을 한번 더 쳐다보게 되는 그것또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사랑이 잉태하고 있는 것들의 느낌은 참으로 다양하다. 믿음이나 의심, 혹은 질투와 시기, 오해와 열정,증오와 저주 따위의 힘겨운 고통도 들어있다. 프시케와 에로스에게서 나온 딸의 이름이 '환희'라는 것만 보아도 사랑의 결실을 맺기까지가 엄청 어려운 것만은 사실인듯 보인다. 작가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 비록 고통을 받을지라도 한 번쯤은 죽을만큼 사랑해 볼 일이다.... 라고.

아폴론을 피해 월계수 나무가 되어버린 다프네, 꽃으로 다시 피어난 히아킨토스나 아도니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자아도취의 의미 나르키소스의 이야기, 제우스의 여인이었던 이오, 칼리스토,레토등 불운의 여인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이 책속에서는 보이지 않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죽음도 불사한 사랑이야기등 수도 없이 많은 사랑이야기가 신화속에서나 혹은 우리의 설화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한결같이 고통이 따르는 사랑이야기가 더 많은 것을 보면 누구나에게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것을 차지한다는 게 어렵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어느 영화속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삶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때 그때 주지 않는다고..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제발 그 얄미운 바람이라는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아줘요... 사냥에 지쳐 잠시 쉬면서 시원하게 불어주는 바람에 속삭이던 케팔로스의 목소리를 바람이란 여자와 정분이 난 줄 알았다던 그의 아내 프로크리스가 죽어가면서 한 말이다. 그때부터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속삭이는 사람을 바람난 사람이라고 했다나 뭐라나... 헤라의 질투때문에 제우스의 아이를 갖고도 힘겨운 나날을 견뎌야 했던 레토에게 한모금의 물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농부들이 목마름도 잊은 채 퍼부었던 레토의 저주로 인하여 등이 녹색으로 변하고 배가 흰색으로 변하여 죽을 때까지 물가를 떠나지 못했다는 개구리의 시조이야기는 이 책속에서 찾아낸 재미이기도 했다. 이렇듯 신화속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머문다.

사랑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어찌보면 인류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라고 했던 작자의 말처럼 세상은 온통 사랑타령이 넘쳐나는 것 같다. 좀 더 멋지거나 아름다운 상대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열망 또한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고 또한 시간이 흘러서 그 사람에게 길들여지게 된다고 한다. 즉 익숙해진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이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것에서는 새로운 느낌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또다른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또다른 사랑을 꿈꾸게 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사랑의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다고? ... 알 수 없다.

책장을 덮고 나니 여우와 어린왕자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길들여진다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여우가 말했었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것을 찾아 헤매는 건지도 모를일이다. 여우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를일이다.
"마음으로 바람을 볼 수 있을 때 엄마를 만날 수 있을거야"
<오세암>이란 영화속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던 길손이에게 스님이 해주었던 말이다. 도대체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도 요란하지 않게 마음으로 할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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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에, 이 땅에는 거대한 공허함이 있었어요. 무엇가를 기다리고 있었죠.
채워지길 기다리며, 사랑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아주 멋진 카피라는 생각을 한다. 공허함이 있었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
태초의 카오스도 아니고 너무도 지극한 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무엇일까? 족장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족장이 될수 없다. 족장으로서의 영민함과 자질을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족장의 후계자로 키워지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 그 커다란 생각속에서 자라나는 파이키아.
고래등을 타고 왔다는 부족의 선조 이름이 파이키아였기에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억지로라도 파이키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이유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을의 족장이었던 할아버지만큼은 파이키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결단코 마을의 족장이 될 수 없었고 또한 지도자로서의 길을 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전통에 의한 관념때문이다. 왜 안될까? 여자는 왜 안되는걸까?

자연을 소재로 한 영화이거나 동물 혹은 곤충들의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속에는 작은 감동들이 하나씩은 자리를 차고 앉아 나 여기 있소~ 하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속에서는 어린 소녀 파이키아와 고래의 의사소통이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아니 인정해 줄 수 없는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선조가 타고 왔다던 고래만이 인정해 주고 또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러니다. 어쩌면 그리도 고집스러운지 우리의 유교적인 관습에 젖어 여자가 어딜 감히? 라고 호통을 치던  우리네 할아버지들과 아주 똑같다. 은근슬쩍 짜증과 화가 밀려온다.  족장으로서의 길, 지도자로서의 길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되야만 하는 운명을 지녔던 파이키아. 아버지의 차를 타고 떠나던 그 소녀에게 바닷속의 고래가 말을 한다. 떠나면 안된다고.  차를 세워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소녀의 귀환은 환영받지 못한다.

  


짜여진듯한 각본이지만 늘 그렇다.  배역과 배우가 얼만큼의 혼연일체가 되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는 재미가 한결 좋아지던가  아니면 별것 아닌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파이키아 역을 소화해내던 소녀 배우의 모습은 정말 가녀리다.  아마도 소녀가 소화해내야 할 배역의 의미를 더 커보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고래등에 올라 타고 발을 차며 '가자'고 말하던 소녀는 이미 맑은 영혼의 파이키라와 닮아 있었던 듯 싶다.
자연속의 모든 것들은 우리와 동화되지 못하면 소통을 원하지 않는 듯 하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위대하다는 뜻일까? 그만큼 맑고 순수해야 한다는 뜻일까?  영화한편속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찾아낸다.  죽어가는 자연을 살리고 싶어하는 이미지와 여자와 남자의 차별에 대한 말없는 항변과  어찌보면 인종적인 그 무엇까지도 담아내고 싶었던 듯 하다.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의 그 무표정과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웅변과 노래를 하던 소녀의 가녀린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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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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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리 알았던 정보가 너무 많았던 탓이었을게다. 이미 다가와 있던 느낌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을게다.
진즉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손이 가질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기를 며칠인지...
이제는 읽어야지 하면서 책꽂이에서 뽑아들었을 때조차도 나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작가서문에 이어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라고 세편의 작은 분류가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 옆줄에 붙어 있었던 남도 사람1, 남도 사람2, 남도 사람3 이란 제목이 더 눈에 들어왔다. 남도 사람이라...

오래전에 이미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의 가슴속에 흔적을 남겼던 서편제에 대해서는 미리 겁부터 먹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미리 알아버린 느낌때문에 책이 주는 감흥을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섰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라는 매체를 통해서 보았던 영화의 한장면들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버랩되어오는 배우의 소리하는 모습이 책속에서 늘 나를 따라왔다.
남도 사람1 에서는 소리꾼이 생겨나는 과정을, 남도 사람2 에서는 소리꾼이 되어가는 과정을,
남도 사람3 에서는 소리꾼으로서 생을 마감하는 한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편제라는 영화는 단순하게 전체적인 이미지를 모티브로 빌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랬구나..

소리꾼으로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곁을 떠나간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아버지..
그렇게 곁에 두고 싶어하던 딸아이의 눈을 빌어 자신의 서글픔을 말하고 싶어했던 아버지는
끝내 그 아픔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 채 떠나가버리고, 그 아픔을 고스란히 빛을 잃어버린 두 눈속에
간직해 두어야 했던 딸아이는 끝내 소리로서 그 고통을 잊으려 한다.
허리에 끈이 묶인채 무덤가에서 뜨거운 태양볕을 이불삼아 자라야 했던 소년의 서러움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멀어졌다 가까워지곤 하던 엄마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의 존재감을 느껴야 했던 어린 아이의 뜨거운 그 무엇...
햇덩이를 빌어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은 아마도 가슴속에서 자라지 못한 채
하나의 응어리로 남아야 했던 사랑이 아니었을까?
손을 뻗으면 달려와 주어야했던 엄마의 그 마음에 대한, 혹은 울음울면 달려와 안아주겠지 했던
엄마의 그 따뜻함이 그리웠던 건지도 모를일이다...
끝없이 갈구했으나 끝내는 채워지지 못한 사랑의 한자락이 아닐까도 싶은데...
나는 왠일인지 의붓아버지를 처치하고 싶던 살해욕구를 머금은 그 뜨거운 햇덩이를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태어나고 그토록 다가오길 원하던 엄마의 존재는 사라져 버린채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소리로써 유랑하는 유랑객이 되어버린 소년.
그 소년의 가슴속에서 자라던 증오와 아무런 힘도 없이 소리꾼으로 키워져야만 했던 소녀의 삶은
차라리 무채색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자조적으로 내뱉듯 하는 사내의 그 말속에는 이미 한이 되지도 못한 사내와 누이의 삶이 들어 있었다.
누이를 향한 마음을 사랑이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사랑과는 다른 그 어떤 의미를 이미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기에...
자기의 속내를 숨긴채로 서로가 마주했었던 시간들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한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선학동. 이미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선학동을 바라보면서
무너질듯한 사내의 발걸음이 못내 안스러웠다.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마리 학으로 여기 그냥 남겠다고 말하던 누이나
그 누이의 행적이 분명코 머물렀을 것을 알았던 사내의 마음은
어쩌면 하나였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진정 누이를 보낼 수 있었을까?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궁금했다. 과연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소리라는 것을 빌어 한국적인 그 어떤 의미를 찾아주고 싶어했을까?
아니면 함께 할 수 없었으나 함께 하고 싶었던 한 사내와 누이의 같은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했을까?
하지만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다.
아직은 책속에 남아 있을 내가 느끼지 못했고 찾아내지 못했던 그 어떤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기에.
얇은 책 한권속에서 나는 너무 많은 시간동안 멈춰 있었던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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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어디 계세요?"
봄핀아이들 글, 최숙자 엮음 / 사분쉼표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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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뜬 나는 깜짝 놀란다. 내 몸에 뭔가 변화가 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게 뭐지? 팔다리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아. 으악!.... 카프카의 <변신>이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야말로 가족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었는데 어느날 문득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가족의 냉대다.  그때 그때 달라요~하고 말하던 광고카피를 문득 떠올린다.  산다는 건 그야말로 그때 그때 달라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리라.

내가 학창시절에 주변 어르신들께서 툭하면 하시던 말씀이 있다. 그래도 가방들고 학교 댕길때가 가장 좋은거이다. 아 느그덜이 무신 걱정이 있겄냐아.. 그때는 그 말씀이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모른다. 맨날 새벽같이 일어나 콩나물시루같은 버스에 몸을 구겨넣으며 시작되는 하루들이 좋긴 뭐가 좋다고?  그놈의 시험은 왜그리도 자주 있는지 툭하면 시험공부를 해야하고 쯧쯧쯧.... 그랬던 내가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학교 다닐때가 가장 좋은거란다. 아니 너희들이 지금 뭘 고민하면서 사니? 그저 한가지 오로지 공부만 하면 되는거야. 아무 생각없이 그저 공부하나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싫으냐? 한다.  그 옛날의 어르신들께서 나에게 주셨던 말씀을 내가 지금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만큼의 세월이 그만큼의 인생을 깨닫게 해주신 스승이 되어버렸다는 말일게다. 아마도.

처음 "우리 엄마 어디 계세요?" 라는 책제목을 보았을 때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책을 읽으며 느꼈던 이미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아하! 그렇구나. 부모는 저편에 밀어두고서 오로지 자신들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나의 생각은 그야말로 부모세대다운 발상에 불과했던 거였다.
abracadabra... abracadabra.. abracadabra.... 신화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신이지만 마술을 부리는 악마로 표현되어진다는 아프락사스의 신비로운 주문을 외어서라도 아이들은 처해진 지금의 쳇바퀴같은 현실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이들의 생각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그리스신화속에서 만났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떠오른다.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한다고 데려와 쇠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렸다던 프로크루스테스.. 이 이야기는 곧잘 회자된다. 언제?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비유할 때에.. 결국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자신도 똑같은 상태로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우리는 어떤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속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은 말하고 있다. 자신들이 마치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여 있는 것 같다고. 자신의 이상과 꿈은 저멀리로 내던져둔채 부모가 원하는 것, 혹은 우리의 교육현실이 원하는 길로만 가야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책속의 아이들은 말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나는 뜨끔했었다. 우리 엄마 어디 계세요? 하면서 묻고 있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힘겨운 시간속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엄마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엄마의 존재성에 대하여 묻고 있었던 것이었기에..

책속에서 아이들은 묻고 있었다. 엄마, 우리들의 꿈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라고.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우리의 교육현실이 안타까웠다. TV를 보지 못해서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아들녀석의 말이 생각났다. 아직 어린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부재를 호소하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지 싶어서 TV보는 것을 허락했던 날이 있었던 까닭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야 뻔하다. 게그나 코미디 프로그램...하지만 엄마들은 어떤가? 봐도 꼭 저같은 것만 본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만 본다고 잔소리에 또 잔소리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 많은 시간중에 단 한시간만, 컴퓨터를 하며 단지 한시간 머리를 식혔을 뿐인데.... 지겹다는 의미로밖에는 다가서지 못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진정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도 잔소리꾼인 엄마이기에.. 오죽하면 엄마의 필살기는 잔소리라고 아들녀석이 말할까?

창공의 섬, 라퓨타에서 나는 지금 살고 있다고 말하던 아이가 책속에 있었다. 땅 위에 떠 있긴 하지만 해와 바람을 절대 보고 느낄 수 없는 곳. 라퓨타가 과학의 신비한 힘의 결정체였다면 내가 사는 이곳은 어른들의 작품이라면 작품이라고 아이는 말하고 있다. 잠시라도 해를 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을 어른들은 절대로 모를것이라고 아이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탈출하고 싶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나 자신에게 떳떳해질 수 없다는 걸 용남할 수 없기에 그럴수 없다고 책속의 아이는 말하고 있다.  그야말로 서글픈 현실!  어찌 하겠는가? 그런 길을 가야 하는 아이들도, 그런 길을 걷게 해야만 하는 어른들도 모두 같은 배를 탔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니 서로가 조금씩 양보를 해가면서 마음을 한데 모으는 방법밖에는 없을 듯 싶다.  이 아이들의 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를 고민하기보다 그저 아이들의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주는 어른의 입장에서 읽어도 좋을 듯하다던 엮은이의 말로 한가닥 위안을 삼아본다. 모쪼록 아이들의 마음이 그대로 어른들의 세상에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던 엮은이의 바램에 나도 마음으로나마 힘을 실어주고 싶은 것이다. /아이비생각

아이들은 할 말이 많았다. 자신에 대해, 사회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어른들에 대해 해야만 하는 말들이 태산처럼 쌓여만 갔다. 그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별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금지된 장난에 대한 유혹과 세상의 어른들에 대한 편견은 서로의 간극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아이들의 생각은 무한궤도를 달려야만 하는 협궤열차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하면서 '학원'의 벽 앞에서 한없는 절망을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정화시켜나갈 줄을 알았다. <9쪽 엮은이의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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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해리스 로젠블라트 지음, 최진성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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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을 보았을 때 어쩌면 성경에 관한 색다른 맛을 느껴볼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성경속에 나오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어디 하나, 둘뿐이겠는가 말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여인네들의 이야기가 색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주려니 생각했었다. 책을 받자마자 작가의 이력을 먼저 살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심리치료사로서 지속적인 성경연구를 하는 사람이라고 나왔다. 왠지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것은 그야말로 여자들의 이야기, 여자들의 삶, 여자이기에 겪어야 했던 것들, 그리고 여자였기에 가능했었던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의 일생이란 말에 담긴 의미는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여자와 남자라는 아주 단순한 분류기준 앞에서 왜 여자들은 그토록 가혹한 삶의 여정속에 자신을 버려야만 했을까?

굳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될 성경속의 여인들 이야기. 그 많은 일화들 앞에서 문득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낀다.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던 그 순간부터 여자라는 원죄의 업보를 어찌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과연 그럴까? 이 책속에서는 의외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자의 모습으로 이브를 그려주고 있다. 뱀이 이브를 꼬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던 그때에 이브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순간의 선택을 했었던 건 아니었다고 당당하게 비추어주고 있다. 많은 생각, 그 행위로 인하여 생겨날 문제들에 대해 곱씹어 본 후에야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는 해석과 이브가 주는 선악과를 아무 생각없이 덥석 먹어버리는 아담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나름대로 멋진 설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문제를 앞에 두고서 세심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여자의 특성과 그렇지 못한 남자의 특성을 비교해주고 있음이다. 여자들의 어머니이자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의 선택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자의 힘겨운 마음속 고통을 대변해주고 있는듯 하다. 자손을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바로 옆 남편의 천막안으로 자신의 여종을 들여보낼때의 서러운 아픔을 남자들은 알까? 이미 오래전 우리네 생활속에서 만나지던 여인들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음이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시대였다면 어림없는 이야기이리라.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여자들의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성경에 관한 혹은 성서를 이끈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한때 성경이야기를 파고 들었던 적이 있었던 까닭에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이미 알고 있어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으나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겉으로 들어나는 여인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강인했고 또한 용감했으며 모든 역경을 빠르게 극복해 나갔던 여인들의 숨은 공로를 파헤쳐주고 있었던 거다. 당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상이 아마도 남성 중심의 사회였을 것이다. 그런 남성중심의 사회속에서도 항상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었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다.

이삭을 만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에서 과감하게 따라나섰던 여인 리브가가  나이차이와 성격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던 모습, 장자우선 원칙에 의하여 에서가 받아야 했을 이삭의 축복조차도 자신이 사랑하는 야곱에게 주어버린 그녀의 모습속에서 대리만족이랄까? 뭐 그런 상태를 살짝 엿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야곱이 사랑했던 여인 라헬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마음속의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되묻고 있다. 진정 사랑했으나 장인의 속임수로 인하여 라헬의 언니 레아를 본부인으로 맞아들이는 야곱이 자신이 진정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여인 라헬을 위하여 다시 7년이란 세월을 참고 인내하여 결국은 결혼을 하게 되는..... 라헬과 레아, 두 자매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정의는 다시한번 생각해 볼만 하다. 과연 우리는 마음하나만 믿으며 얼만큼의 사랑을 줄 수 있는것인지... 하지만 나는 현실을 무시한 사랑이란 관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서글프게도..

다말이나 다윗의 아내 아비가일, 밧세바, 세바 여왕등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지혜와 미모로써 스스로 자신의 인생길을 바꿔 자신이 원하는 삶의 길을 걸어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는 시대를 초월한 여인들의 당당함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 책속에는 그토록 당차고 멋진 여자들의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삼손을 유혹하여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여자 들릴라의 이야기나 욕망의 끈을 잡고 끝도없이 못된 짓을 저지르는 악녀 이세벨의 이야기도 있다. 허황된 한순간의 욕망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겹쳐져 안타깝기도 했던 대목이 아니었나 싶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성경속의 여인들이지만 작가는 성경을 단지 모티브로 삼았을 뿐이다. 그 성경속의 여인들을 빌려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아주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교하여 주고 있다. 시대적인 배경을 떠나서 그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않고 살았던 여인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던 책이었다. 어쩌면 여자이기에 더없이 가깝게 느껴질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먼저 다루었던 이브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느냐? 하고 신께서 물었을 때 아담이 대답했다. 여자가 그 열매를 주기에 먹었습니다. 이브도 대답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따먹었습니다 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속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다를게 무엇이 있을까  작가는 말하고 있다.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문제는 우리네 인간사회에서 끊임없이 발생하지만 사회나 개인이나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결정과 선택은 없었던 것인양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작가는 뼈아프게 힐책하고 있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시적인 평화보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나오미와 룻의 일화속에 보여지는 고부간의 사랑과 믿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지극히 필요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따스한 마음을 주고 받을 때 진정한 평안의 시간을 나눌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음이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성서이야기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관점으로 보며 생각할 수도 있는거구나 싶어 좋았다. 눈앞에 보여지는 하나의 단면만 보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 속내까지 들춰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어디 그렇게 하기가 쉬운일인가 말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니다. 책속에서 만났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질투, 유혹과 욕망에 갇혀버린 인간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않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작가가 보여주었던 여인들의 삶을 통해 힘겨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지혜를 배워볼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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