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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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직히 종교적인 관념에 강한 거부감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일단은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신교들의 영향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종교적인 흐름을 본다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굳이 <이슬람교>라거나, <코란>이라거나 하는 종교적인 의미의 말들을 까발리고 싶지 않았다. 종교적인 색채를 떠나서 이것은 명백한 인권유린이란 생각이 들었다면 단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아프가니스탄이란 나라에 대해 내가 얼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언론지상을 통해서 들어왔던 몇개의 단어로 그들을 감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지도를 찾아본다해도 내게는 현실감이 전혀 없는 일일테니 말이다. 이 책속에서 그야말로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으로 살지 못했던 마리암과 라일라, 두 여인의 삶을 보았다. 하늘아래 그런 세상이 있을거라는, 아니 그런 세상도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었지만 실제적인 것으로 느낄수가 없었던 어느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책속에서 재판관이 했던 말이 떠올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와 뇌부터가 달라, 여자는 사고할 수가 없게 되어있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 뛰어나가 그 사람의 혀를 잘라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이 여인들의 삶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마리암...
그녀에게 있어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하녀였던 엄마를 두었다는 이유로 모두에게서 내쳐져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러 오는 아버지란 존재를 목빠지게 기다렸던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어둡고 칙칙한 자신의 삶보다는 밝고 넓을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집을 찾아나섰지만 냉담한 아버지의 모습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다시 돌아온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엄마의 죽음. 세상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던 엄마와, 가끔씩 찾아와 세상을 이야기하던 아버지. 세상을 알고 싶었고 가족을 알고 싶었고 아버지의 삶을 알고 싶었던 마리암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녀곁에 남겨져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여자는 오직 참아야 한다는... 그녀의 나이 열네살에 아버지의 생활속에서 쫓겨나듯이 해야만 했던 결혼생활은 어땠는가?  계속되어지는 유산으로 인하여 그녀의 삶은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 집에 속해있는 하나의 물건에 불과할 뿐이었다. 차라리 하녀였다면 나았을까? 비참함속에서 그녀에게 달려왔던 것은 깊은 절망뿐.
라시드...
마리암의 남편이다. 전통적인 이슬람교도인듯 하지만 상당한 기회주의자이다. 탐욕스러움의 상징물처럼 느껴지는 남자. 구두장이를 하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처세가 상당히 강한 편이다. 마리암에게 부르카를 입혀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차단시켰던 남자. 오로지 전통과 형식에 얽매인 채 사랑과 따스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인간. 결국 마리암의 손에 죽게되지만 안됐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라일라...
마리암이 전통에 희생되어진 여자였다면 그나마 조금은 변화되어진 세상을 느낄 수 있었던 여인이다. 선생이었던 아버지의 교육 덕택에 가난했지만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앞으로는 너와 같은 여자의 힘이 많이 필요할 거라던 아버지의 격려와 믿음속에서 자라나지만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사랑하던 남자와 가족을 모두 잃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찾아온 불행의 덩어리는 그녀에게 얼마만큼의 인내와 시련을 안겨주려는지.
타리크...
라일라와 어릴적부터 알고 지내던 이웃이지만 후에 라일라의 연인이 된다. 라일라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희망적인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남자를 보고 있으면 사랑만 있다면 힘겨운 세상도 살아낼 수 있을것 같다. 그가 있었음으로 라일라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타리크를 통해 그녀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를일이다.

마리암과 라일라... 그녀들은 허울뿐인 전통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여인과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조금은 진보적인 여인의 모습을 상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웃집의 아줌마와 소녀였던 두여인이 한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해가는 과정은 지독하다. 그야말로 처참했고 또한 비참했다. 사랑하던 남자 타리크의 아이를 위하여 라시드의 아내로 남기로 했던 라일라와  자신의 삶속에 느닷없이 뛰어든 라일라의 존재를 바라보아야 했던 마리암의 마음속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을까? 아니 살아 숨쉴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는 있었을까?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똑같이 절망뿐인 삶을 살아내던 두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같은 여자로서 미안함과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그녀들에게 그런 삶을 내려준것이 그들의 신이라면 차라리 없어져 버리는 편이 더 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라일라에게 딸 아지자가 태어남으로 인하여 두여인은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고 그때부터는 모든 아픔을 함께 나누기 시작한다. 아니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기 보다는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었다는 말이 맞을게다. 짐승같은 남편에게서 도망을 치던 순간에도, 다시 붙잡혀와 허리띠의 바클에 살점이 터지고 피가 튀기던 그 순간에도 그녀들은 하나였다. 그녀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라일라와 아지자를 통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받게 된 마리암으로써는 진정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새 엄마와 딸의 모습으로 변해가던 마리암과 라일라의 그 진한 사랑이 내 눈가에 눈물로 맺혀져 왔다. 절망과 희망사이에서 곡예를 하듯이 살아내던 두여인의 모습이 눈물겨웠다.

라시드와 타리크... 하나는 절망이었으며 또 하나는 희망이었다. 끝없는 질책과 매질로 두여인에게서 사람으로써의 의미를 빼앗아 갔던 라시드. 나는 무심코 우리의 조선시대를 떠올렸다. 그시절의 우리 여인네들과 아프간의 여인네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람대접 못받기로야 우리의 여인네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라일라의 아주 작은 희망마져도 짓밟아버린 라시드의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음이다. 마지막까지 라일라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었던 타리크가 안고 있었던 희망이라는 이름. 어쩌면 라일라가 희망을 사랑했었기에 그녀는 끝까지 살아남아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말하지만 나는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것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어보시라.. 여자들은 항상 집에 있어야 한다. 이유없이 거리를 나다니는 것은 옳지 않다. 거리에서 혼자 다니다가 걸리면 곤장에 처해진 후 귀가시킬 것이다. 여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얼굴을 보여선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심하게 맞을 것이다. 화장품은 금한다. 장신구도 금한다. 멋있는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말을 걸지 않으면 말하지 말라. 남자들과 눈을 마주치면 안된다. 공공장소에서는 웃지마라, 적발되면 곤장에 처해질 것이다. 손톱을 치장하지마라, 적발되면 손가락 하나를 자를 것이다. 계집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 여학교는 즉시 폐쇄될 것이다. 여자들은 밖에서 일을 하면 안된다. 간통하다 적발되면 돌로 쳐 죽일 것이다. 이를 명심하고 복종하라...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선언인가 말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법을 만들어 툭하면 여자들을 매질하던 있을 수 없는 일들. 또한 그런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야 했을 여인들. 그 여인들은 도대체 왜?  지금같은 세상속에서 도대체 그들은 왜?  불쌍하기도 했지만 화가 났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렸다.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해.

이슬람교도가 아니면, 이슬람교도가 보이는 곳에서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곤장을 맞고 감옥에 갇힐 것이다. 이슬람교도를 개종시키려다가 잡히면 처형될 것이다...라는 그들만의 법칙도 보였다.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그들을 개종시키러 갔던 우리의 잘난 종교인들이 생각났다. 그야말로 무례하고 자만스러운 모습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다른 문화에 대한 몰이해, 타자에 대한 몰이해는 물리적 폭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에 나는 감히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니 다른 문화와 민족, 그리고 다른 종교에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말에도 나는 적극 찬성하는 바이다.
이 세상속에서 마리암과 라일라처럼 살아왔던, 살고 있는, 살아야 할 여인들을 위해 우리는 뭔가 해야만 할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잠시 머리숙여 기도를 해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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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기술
제니스 A.스프링 지음, 양은모 옮김 / 메가트렌드(문이당)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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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을 살면서 혹은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습득해야 할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고 용서에도 기술이 필요한 세상이니 더 말해 무얼할까 싶으면서도 어찌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내야 하는 모든 일들에는 우리가 모르른 또다른 규칙같은 의미들이 많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용서의 기술>이란 책의 활자를 보면서 한번 마음을 닫아버리면 어지간해서 열지 못하는 내자신을 먼저 생각해냈다.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성격은 아닌지라 한번 화를 내면 그 마음을 영 다스리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먼저 이 책이 필요하지 싶었던거다.  처음 책을 받아 보았던 느낌대로 (사실 나는 딱딱한 양장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이 책의 내용이 내게로 전해지길 바랬다. 그런데 왠걸? 읽고 또 읽고 나는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으니... 

책속에서 만나지는 수많은 유형들의 심리전들은 가히 총을 쏘고 대포를 날려대는 전쟁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우리에게 혹은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존재들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누구였을까? 그리고 또 무엇이었을까? 감히 말하건데 나를 아프게 했고 나를 화나게 했었던 존재들은 바로 내 곁에 있었다. 나의 주변을 항상 떠돌고 적어도 나와 가깝다고 느껴지는 존재들이 나를 화나게 했고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다시 또 똑같은 쳇바퀴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아마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용서라는 의미때문이 아니었을까?  용서의 기술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용서하는 방법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혹은 부모가 아이에게, 아이가 부모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를 주고 받음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직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처를 받은 쪽과 상처를 준 쪽의 느낌과 의미가 서로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겨우 그것때문에? 뭐 그런걸 가지고?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상처로 받아들여지는 입장에서는 엄청 큰 의미로 다가온다는 거였다.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엄격한 기준과 고정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대단히 나쁜 일이라고 과대평가한다"-<124쪽>
문득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잣대를 가지고 산다는 말이 떠올랐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서 비롯되어진다고 늘 생각은 하면서도 살아가는 일상이 어쩌면 나의 틀에 타인을 맞추고 싶어 안달을 하곤 했던것이 다반사이니...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를 따져 묻기 전에 다시한번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되돌아보는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그런 후에 다시한번 상대방을 바라본다면 좀 더 쉽고 빠르게 문제가 해결되는 거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예로 들어준 모든 유형들이 몇번씩 반복되어지고 있었던 까닭에 조금은 지루했던 면도 없지않아 있었다.

내게만큼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느낌들을 나는 이 책의 말미에 있었던 부록, 유년의 상처가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서 아하, 싶었다. 그렇구나, 그렇겠구나... 그러면서 나는 가슴이 아팠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마음의 상처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삶을 지배하고 그 상처들로 인해 나로 모르는사이에 마음을 닫아버린 채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정말로 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한아이를 둔 엄마로써,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유년의 기억들을 되새겨보며 가슴 한쪽이 시리기도 했다.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 누군가에게 먼저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테지만 그야말로 끝없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은 강조하고 강조해도 넘쳐나지 않는 말이 아닐까 싶다. 용서에도 과연 기술이 필요한 것일까? 지금 나는 내 자신에게 묻고 있다. /아이비생각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우리 모두는 불가피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상처 입힌 사람들은 그들이 야기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아픔을 달래는 향유를 발라 준다면 그 때 상처 입은 사람은 그것이 진심임을 알고 회복하게 된다. 사랑처럼 치유는 보살피는 관계에 있을 때 성공한다. 사람은 혼자 사랑할 수 없으며 혼자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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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 요정
칼리나 스테파노바 지음, 조병준 옮김 / 가야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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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라는 말은 그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동화가 어느때부터인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컨셉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왜일까? 단순히 어린시절의 마음, 동심으로 돌아가보자고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점차 잃어가고 있는 길을 찾기 위함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해 보았다. 어른이 되면서 점점 희미해지고 찾기 힘들어지는 것들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많은 것 같다. 단순히 순수라거나, 순진이라거나 하는 말의 의미를 떠나서라도 우리가 잃어버린 채 혹은 잊어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정채봉님의 글을 사랑해 왔다. 특히 그분께서 보여주셨던 생각하는 동화시리즈는 각권 모두를 구입해서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책의 목록에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음이다. 아주 단순해보이지만 그 짧은 이야기들이 전해주고 싶어하는 의미는 참으로 넓고 크고 깊다. 그 짧은 이야기속에서 어렵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환하게 빛을 발하며 나 여기 있어요! 하면서 웃고 있다. 그래서 나는 동화를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앤의 요정들은 모두 일곱명이다. 그 요정과 만나는 순간 앤은 자신을 닮은 자신의 요정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로 한다. 도,레,미,파,솔,라,시... 참 이쁘지 않은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일곱명의 요정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각양각색이다.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당신이 지닌 여러 얼굴들이고 당신이 지닌 성격의 여러 측면이에요. 그러니 우리를 서로 구분하는 일이 어려울 이유가 없지요...하고 요정이 말했듯이 앤은 요정들에게 명명식을 하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자기 자신의 모습과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거다.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요정들의 모습속에는 앤의 여러 모습이 판박이처럼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지도자의 모습을 한 도, 절대 '안 돼'라는 대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의 레, 홍보담당 미, 일 중독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파, 여행가 솔, 언제나 화해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외교관 라, 항상 무언가를 쓰고 골똘하며 혼자있기 좋아하는 작가 시... 멋지다. 정말 멋지다. 나에게도 이렇게 멋진 요정들이 있을거란 생각을 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지만 또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의 모습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도 하다.

물방울처럼 여린 모습으로 나타났던 집 없는 요정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까닭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렇구나, 요정이 한말을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에게 해주기 바라는 행동만을 남들에게도 할 수 있다던 말,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자신이 행한 모든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는 것을...
언젠가 스님이 말씀하셨었다. 길가에 함부로 침을 뱉지 말아라, 그 침도 역시 내 안에서 나간 것이기에 남들이 그 침을 보면서 더럽다고 욕을 하게 되면 그 욕이 고스란히 네게로 되돌아오게 되는거란다...
결국 세상 모든 일은 당신이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달려 있어요..하던 요정의 말이 새삼스럽게 내 가슴속에 각인되어져 버린다. 뜨끔하게도...

사랑이 가슴속에 머물고 있는 한,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내 가슴속에 떠나지 않는 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한 나의 요정들은 내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앤처럼 나도 나의 요정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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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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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부자놈들이 아무에게도 빌려주지 않는 장난감이지요.-39쪽

고통은 늘 여기 있지만,그렇다고 내가 걷고 말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477쪽

인간들은,행위가 아닌 말이 힘을 갖는 세상, 최고의 능력은 바로 능변인 세상에 살고 있다.-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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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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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속을 편히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있나요? "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어떤 대답 혹은 어떤 반응를 보여줄 것 같은가?
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그녀, 쉰네살이고 이름이 르네인 아파트 수위 아줌마가 카쿠로 오주에게 이렇게 물었을 때, 그리고 변기의 물을 내릴 때 불쑥 튀어나왔던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듣게 되었을 때의 황당함에 그리고 당혹스러움에 노랗게 변했을 수위아줌마의 얼굴 표정을 떠올리면서..
나같으면 다시한번 물었을 것이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한거야? 

내가 항상 그렇지만 늘 독서란을 훑어보면서 이 책의 광고문구를 보게 되었다. 우선적으로 나는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란 제목에 유혹을 느꼈다. 고슴도치라고? 뭔가 아주 깊고도 진한 것을 숨겨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주 대단한 은유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레임같은..
망설임없이 선택했지만 책을 읽기까지는 꽤나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매력적이면서 유머 가득한 어쩌구 저쩌구 했던 광고문구에 비해 책의 두께가 나를 압박해 왔다. 어쩌면 너무 가볍게 생각했을수도 있다는 자책감과 함께 쉽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유혹에 넘어가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나는 아주 소금에 절인 배추마냥 이 책속의 세상에 푹 절어버리고 말았다.

'깊은 사색'과 '세상의 움직임에 대한 일기'라는 이중일기를 쓰기로 작정했던 그러나 자살을 꿈꾸었던 깜찍하고 당찬 열두살 소녀 팔로마와, 아파트 수위이면서 자신의 내면을 자신의 아픔을 남에게 철저하게 숨기고자 하는 쉰네살의 수위 아줌마 르네의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짧은 단막극을 보는 듯한 이야기 전개가 너무도 황홀했다. 그렇다면 열두살 소녀는 왜 자살을 꿈꾸었으며 쉰네살의 수위 아줌마는 왜 그토록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야만 했을까? 세상속에 존재하는 모든 편견과 아집과 선입견들이 여기에서 다 까발려지고 있다.  고슴도치처럼 가시옷을 입은 채 자신을 깊게 바라보려 하는 사람을 향해 가시를 곧추세우는 우리의 주인공 르네 아줌마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니 말하지 않은 유년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르네 아줌마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실질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이미 썩어가고 있는 상처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 터뜨려주었으면 하는 고름덩어리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 뭐 그런거 말이다. 

인간들은 행위가 아닌 말이 힘을 갖는 세상, 최고의 능력은 바로 능변인 세상에 살고 있다.(77쪽) 
눈은 늘 자각하지만 유심히 바라보지 않고, 믿긴 하지만 의문을 갖지 않고, 받긴 하지만 찾지는 않는다. 즉 욕망도 배고픔도 십자군도 없다. (448쪽)
아픈 은유들을 만나게 되는 순간들은 가슴속이 섬뜩해져 옴을 느끼게 된다.  르네 아줌마가 수위로 있는 부자 아파트에 이사온 일본인 카쿠로 오주.. 한눈에 가시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버렸던 그 사람에게 결국 자신을 내보이고 말았던 르네 아줌마가 어느날 아파트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카쿠로씨의 팔짱을 끼고 식사를 하러 나갈 때의 장면.. 그 장면속에서 나는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들의 서글픈 모습을 본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안녕히 가세요 사모님!... 아무런 의미와 형태도 없이 그저 부자인 카쿠로씨의 팔짱을 끼고 가는 모습만으로 사모님이 되어버렸던 우리의 수위아줌마는 그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우리는 왜 보여지는 것만 믿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니 우리는 왜 되도록 우리에게 편안함만을 제공하는 것에 열망하게 된 것일까?  굳게 닫혀진 성안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타인을 인정하지 못한채 성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며 그럴것이다,라고 추측해 버리고 마는 그 억지스러움은 어쩌면 우리가 늘 저지르고 사는 바보같음인지도 모를일이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우리가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가 사물의 아름다움과 죽음을 동시에 보는 순간에 일어나는 사물의 찰나적인 배열이다.... 아마 이것이 살아잇는 것이리라. 죽어가는 순간들을 추적하는 것이.(400쪽)
고통은 늘 여기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걷고 말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477쪽)
어린 아가씨 팔로마 앞에서, 그녀의 내면을 들켜버렸던 카쿠로 오주씨 앞에서 오열하며 흘렸던 르네 아줌마의 눈물은, 그 아픈 서러움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숨겨야 할 우리의 모습은 도대체 몇가지나 되는 것일까? 좋은 모습만 기억되어지길 바라면서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속에는 진정한 나의 정체성이 몇프로나 들어있는 것일까?  때에 따라 적당한 표정으로 갈아 써야만 하는 이중의 가면속에 숨겨진 우리의 모습은 우리 스스로가 얼만큼씩이나 인정해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르네 아줌마의 서러운 기억을 보듬어 안았던 우리의 열두살 아가씨 팔로마는 이렇게 말했지.. 나는 내 주위의 그 누구에게도 잘 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아줌마의 손을 잡으면서 나는 나 역시 병자였다는 걸 느꼈다..고. 그래서 불을 내고 자살할거라는 계획을 재고해야만 할 것 같다고... 가끔씩 주변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아주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돌아가 있는 모습과 만나게 된다. 누구나에게 한번쯤은 아니 한가지쯤은 있음직한 혹은 있었을 아픔도 오직 나만의 아픔이었고 나였기에 더 아팠고 나였기에 더 혹독했다고 그러니 그걸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큰 목소리로 웅변하듯이 토해냈던가?  누군가의 관심을, 사랑을, 배려를 그토록 원하면서도 과연 나는 그 누군가를 얼마나 배려했으며 얼만큼의 관심으로 사랑을 주었는가?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믿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통 받는 것을 원치않는,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할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이 있고, 그렇기에 삶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데 우리의 모든 힘을 다 써버린다.(29쪽)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내 속깊이 파고 들어오는 알 수 없는 느낌때문에.. 끝도 없이 살아 숨쉬는 글자의 마술속에 갇힌채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던 진정한 내면의 아우성.. 우리의 수위 아줌마 미셸부인 르네와 우리의 열두살 소녀 팔로마를 앞세워 웅변같은 열변을 토해내는 작가의 모습, 아시아로의 여행을 꿈꾸는 철학 선생과 그의 책을 읽는 독자와의 실제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그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가 오고 갈까?  참으로 부질없을 궁금증 하나가 내 머릿속에서 서성거렸다.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세상은 너무도 많다. 엉킨 실타래같은 길찾기가 나에게 주어진 몫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 속담처럼 너무도 많은 길을 보여주고 혹시? 하는 물음표도 던져주지만 결국 르네와 팔로마의 귀착점은 같다. 외로움.. 고독..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아니 다른 사람들의 속깊은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목마름.. 그 외로움과 고독과 목마름을 서로에게서 찾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안타까웠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그들의 모습.. 첫눈에 가시속에 숨겨진 수위아줌마의 내면을 알아챈 카쿠로씨에게 결국 마음을 열게 되었던 르네 아줌마와 그 길속에서 잠시 머무르다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우리의 깜찍한 팔로마에게 나는 정말로 이제까지의 아픔보다도 더 진한 행복이 함께 했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철학선생인 작가의 선택은 너무나 잔인했다. 달려오던 차와 부딪혀 차가운 아스팔트위에서 죽어가던 수위아줌마 르네의 행복은 이제 어쩌라고?  그 죽음의 순간속에서 그녀가 불러보던 그 이름들의 아픔은 또 어쩌라고?

우리는 늙어가고, 그건 아름답지도 좋지도 즐겁지도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모든 자신의 힘을 다해, 지금 뭔가를 구축해야 한다.(187쪽)
우리는 정말이지 끝도 없을 것처럼 달려간다.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 내 앞에 놓여진 시간을 내맘대로 하기 보다는 그 시간에 끌려가듯이 그렇게 달려가고 있는건지도 모를 일이다. 르네 아줌마의 죽음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왜 그녀는 죽어야 했을까? 그토록 오랜동안 시간에게 끌려다니다 이제와 그 시간앞에 섰는데 어째서 그녀는 죽어야만 했을까? 오십사년만에 처음으로 느꼈던 마음의 평안을 그녀에게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 버린 우리의 철학선생이 나는 너무도 미웠다. 그런 평안을 그녀에게 영원히 선사하고 싶어서였을까?  작가가 곁에 있다면 나는 묻고 싶었다. 왜 그랬느냐고. 그녀를 왜 죽여야 했느냐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해 달라고..  하지만 나는 책장을 덮고서야  그 죽음에 대해 한번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녀의 아픔과 열두살 소녀의 자살계획은 과연 누구로부터 비롯되어진 것이었던가에 대해.. 어느 누구도 그녀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적은 없었을 것이다. 내게 온 시간은, 내게 배당되어진 시간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것을.. 그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비롯되어진것이라는...
수위아줌마 르네의 죽음을 카쿠로씨에게서 전해들었던 열두살 소녀 팔로마의 일기에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난생 처음 나는 '다시는'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느꼈다. 그건 끔찍하다. 우리는 하루에 이 단어를 백번씩 발음하지만 진정한 '더이상... 다시는' 에 직면해보기 전에는 우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477쪽) 고..

생은 많은 절망이 있지만, 또다른 종류의 시간인 아름다움의  몇 순간들도 있다. 마치 음악의 한 소절이 시간속에 일종의 괄호와 정지를, 바로 여기속의 다른 곳, '다시는'속의 '언제나'를 만드는 것처럼. 그래, 바로 그거다. '다시는'속의 '언제나'...  이 책의 맨 마지막 쪽에 나와있는 마지막 구절이다. 열두살 소녀 팔로마의 일기속이기도 하다. 그리고 팔로마는 이렇게 말한다. 걱정마요, 르네.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아무것도 불태우지 않을거에요. 당신을 위해 나는 이제부터 다시는 속의 언제나를 추적할 것이기 때문이에요..라고. 
그야말로 황홀한 유혹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멋진 말들과 표현으로 내게 다가왔는지 이 책을 선택해 주었던 내 자신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아니 많은 분야들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모두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 많은 분야들을 내가 다 알수는 없으므로.. 그저 우리의 주인공인 수위아줌마와 열두살소녀에게만 집중을 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멋진 두명의 친구를 사귀는 듯 했지만 그녀들은 끝내 가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아쉽게도.. 그리고 나는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녀들과의 재회를 꿈꾸기로 했다. 그녀들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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