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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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을 덮고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무릎위에 올려놓았던 책을 왠지 다시 만지기가 싫었다는 게 아마도 솔직한 심정이었을게다. < Atonement >라는 영화의 원작을 썼다는 작가의 소개글을 보면서 그 영화에 대해 검색해 보았던, 그리고 영화평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사소한 것들로 인하여 벌어지는 일들은 참 많다. 아주 잠깐의 순간때문에 얽혀드는 사연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왠지 한번쯤 보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던 영화였기에 이언 매큐언이란 작가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듯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난 느낌은 껄끄럽다. 어쩐지 혼탁한 호러물을 본 듯한 느낌처럼 그렇게 찜찜함을 피할 수가 없다. 책을 옮긴이의 말처럼 그렇게 내면적인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거라면 작가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체 또한 너무 무섭다. 그야말로 살벌하다. 어쩌면 그리도 가감없이 써내려 갈 수 있었는지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작은 은유조차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거침없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작가의 단편들을 모아놓았다거나 어떤 부류에 따라 혹은 시대적이라서...등등등 이런 식으로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편집상태를 과히 좋아하지 않는지라 처음 책을 받아 후루룩 넘기며 살펴보았을 때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이 그리 좋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더구나 책속 세상의 이야기들이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그런 이야기여서 책읽기를 그만 멈추고 싶어졌다.  그쯤에서 작가의 프로필에 다시한번 눈을 돌려보았지만 어떤 작품으로 어떤 상을 받았다는 식의 프로필만 눈에 뜨일 뿐 작가에 대한 나의 예측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느낌이 어쩌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듯한 첫번째 단편, 그리고 어린시절에 한번쯤은 겪었을지도 모를 호기심에 대한 것들을 능청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두번째 이야기, 세번째, 네번째로 넘어가면서 조금씩 책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단순히 보여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느끼기를 바라는 작가의 시선이 마치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나비'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 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너무 외롭다는거였다. 처절하도록 외로웠을 두 남자의 이야기속에는 보여질 듯 말듯한 무작위적인 사람들의 숨겨진 적의나, 어디에도 마음 둘데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배타적인 이기심, 그러면서도 어딘가에 안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수도없이 되뇌이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적인 그러나 사회적인 동물로써의 인간 군상이 그려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제 스스로 벽장속으로 다시 들어가야만 했던 그 남자의 모습이 책장위로 그림처럼 펼쳐져 당혹스럽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생생하게 다가왔던 그 느낌들이 나를 너무 섬뜩하게 만들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내게는 되돌이표를 찍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이야기 묶음이었다. 하지만 옮긴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어를 풀어주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강가를 산책하는 시셀( 일곱번째 이야기 첫사랑, 마지막 의식에 나왔던 여자) 처럼, 나도 어쩐지 내 인생의 어떤 부분을 덜어 놓은 기분이 든다고... 어떤 부분을 덜어 놓을 수 있었을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 집, 한 공간속에서 함께 살아갔던 쥐 한마리의 존재를 알고나서, 그리고 그 쥐가 점점 통통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공간속의 남자와 여자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되었던 이야기.. 그 쥐를 죽이던 순간 미처 태어나지 못한 채 제 어미의 찢어진 몸통 틈에서 투명하고 작은 발을 꿈틀대며 삶을 향했던 희망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 작은 생명들.. 그러나 그 작은 생명들에게 희망은 없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낚시를 통해 잡았던 장어를 다시 강물속에 다시 돌려보냈고 다시 시작되는 사랑을 느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작은 은유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너무도 큰 은유의 늪에서 내가 허우적거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너무나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강한 문체에 시달리다보니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은유속에 숨겨진 깊은 의미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이 섬뜩한 문체들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문득 눈을 감은 채 누워있던 여자, 책표지의 그림이 생각났다. 그 여자는 죽은 것일까? 그저 잠을 자고 있을 뿐일까?  그 생생했던 느낌들을 지워볼까하여 장난삼아 책을 옆으로 세워보았더니 그 여자가 일어나 생각이 많은 얼굴로 고뇌에 빠져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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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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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다. 솔직히 정신이 없다. 책을 읽는 내내 절망과 고통스러움만이 내게 존재했던 것 같다. 어지러움속에서 책장이 넘어가고 다가오지 않는 세상의 이야기들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이건 뭐지? 도대체 현실속인건지 상상속인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콘도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조차 알 지 못한채 그렇게 500쪽 가까운 책장을 모두 넘겼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라는 남자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이란 여자가 서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황당한 살인사건으로 인하여 그들은 다른 세계로의 도피를 꿈꾸게 된다.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황당하기까지 한 도피였다!)  수많은 역경을 딛고, 힘겨운 것들을 쳐내가면서 어느 한곳에 정착..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마을, 곧 그들과 그들의 후세들이 백년동안을 살아내야 했던 그 마을 마콘도를 만들어 그 안에서 그들이 겪어내는 삶의 여정은 너무 혼란스럽기만 하다.

책속 세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환상적인 묘사들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무슨 마술사의 손안에서 비둘기가 나오듯이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아오르고, 하늘로 날아올라 승화되어지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나타날때마다 나비를 앞세우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음이다. 이미 죽은 가족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 그리고 그 유령들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현재의 사람들.. 그런가하면 우르슬라는 120년정도를 살았고, 또 한 여자는 (그 여자는 카드로 점을 치며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부엔디나 가문의 후세도 낳아준다) 140살을 넘기고서야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것들에 대한 나의 느낌은 그야말로 황당함 그 자체였으며 그런 대목이 나올 때마다 너무도 어색하기만 했다. 한편의 신화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신화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도 없다.

처음에 나는 어떤 원주민들이 서구문명의 발아래 짓밟혀가는 과정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들이 그들나름대로는 잘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가 들어오고 기차가 들어오는 현대적인 문명앞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펼쳐질거라고 지레 짐작을 했었다.  밀려들어온 문명의 물결속에서 그들이 겪어내야 했던 일들, 고용주와 고용인의 싸움,  파업을 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런 일들은 원시적인 삶속에서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짐작했었던대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어색하게만 다가오는건지... 근친상간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가족사는 정말 비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날까봐 늘 노심초사 했던 맨처음의 여인 우르슬라가 염려했던대로 그들의 마지막대에 와서는 결국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나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의 가문은 멸망한다.  이름부터가 참 어지럽다. 같은 가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름을 손자 손녀가 쓰고 또 그 손자 손녀의 이름을 더 먼 후세의 자손들이 다시 쓰고하니 몇 대를 걸쳐가면서도 같은 이름의 반복이다. 차리리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 1세,2세,3세,4세...등으로 불리워졌다면 덜 혼란스러웠을까?  모르지..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저마다 겪어내는 삶의 여정조차도 대물림을 고스란히 하고 있는걸 보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도 그 이름을 썼던 사람들과 같은 혹은 비슷한 여정을 가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닮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음이다.

책속에서 내가 만났던 것은 어떤 희망이나 기대보다는 절망과 좌절, 고통스러움이었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쳤던 멜키아데스라는 집시 예언자(이 집시 예언자는 죽어서도 유령이 되어 그들의 집에서 방한칸을 차지한채 지내고 있다)의 기록을 부엔디나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 해독하는 순간 그 가문의 종말을 보게 되는 결말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결국 예언자가 양피지에 써놓았던 것들은 부엔디나 가문의 일대기였음이 밝혀지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현존하는 사람과 이미 죽어 유령이 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곳 마콘도.. 그 마콘도가 안고 있었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래도 가장 똑똑하다고 존경받으며 한마을의 지도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가 집시가 전해주던 문명의 도구에 빠져들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과학이 없고 종교가 없고 형식이 없었던 세상속에서의 인간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냈었던 것일까?  인간에게 과학과 종교가 그리고 허울뿐인 형식이 자리잡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인간은 과학과 종교와 형식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복잡하다. 매끄럽지 못한 길을 걸어온 듯한 느낌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보다도 나는 사실 <백년 동안의 고독>이란 제목과 고전이라는 유혹에 이끌려 이 책을 접하게 되었지만 잘 모르겠다. 내면의 고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 것인지...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내가 보아야만 했던 것은 진정 무엇이었는지...  저마다 사랑을 갈구하며 가슴속에 바윗덩이만한 고독을 숨긴 채 일세기를 살아내야 했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 가문의 사람들... 그래도, 어찌되었든 한번 태어난 사람은 저마다 기를 쓰고 살아낼 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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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시커 1 - 별을 쫓는 아이
팀 보울러 지음, 김은경 옮김 / 놀(다산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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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하게 매력적인 판타지... 맛있게 맵다는 광고카피가 떠올랐다. 처음 그 광고카피를 들으면서 매우면 매운거지 맛있게 매운건 또 뭐냐고 말했었는데 이 책이 그런 느낌이랄까? 정말 상큼하다. 그러면서도 뭔가 우리가 알 수 없는 판타지를 보여주고 있음이다. 우리의 현실을 떠난 세계, 조금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황당하기도 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보통의 판타지 소설이라면 이 책은 결코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 내가 겪어내야 할 혹은 내가 겪어내고 있는 그런 상황속에서 나와 만나기를 원하고 있는듯이 보여진다.  '별을 쫓는 아이'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이미 맑고 아름다운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오래전에 내 가슴속에서 노래하던 작은 난장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부족함때문에 깊은 사랑을 보여줄 수 없었던 그 작은 난장이의 아름다운 노래를 다시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란 책이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책속에서 우리의 주인공 루크가 위안을 찾던 곳으로 선택되어진 오크가 있는 숲의 배경은 파스텔톤 물감으로 그려진 수채화처럼 다가왔으니 말이다.  막내 난장이가 백설공주를 위하여 몸짓으로 표현했던 그 사랑의 아름다움이 그 숲을 배경으로 다시 떠오른 것만 보아도 너무나 서정적이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까?

아빠를 잃은 소년 루크는 그 상실감을 이기지 못한채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세계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결코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선택되어진 삶의 여정은 막힘없이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어느새 불량학생으로, 문제아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싫어지면서 그와 함께 했던 아이들의 협박은 오히려 루크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설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는 계기가 되어준 듯 하다.  아빠를 잃고 또한 새로운 사랑을 찾아낸 엄마를 다시 잃게 될까봐 두려웠던 루크의 마음속에 찾아와 주었던 그 작은 별하나... 그것은 자신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향한 집착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늘 함께 있어주는 듯한 아빠의 존재감은 어쩌면 루크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꿈이요 이상이었을거란 생각을 한다.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는,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 모든 바램들이 그 존재감속에 함께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인생은 어떤 곡조에 지나지 않을지도, 차이코프스키의 곡 제목처럼 한낱 짧은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 잠에서 깨어나 보면 우리가 여태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 "우리 삶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상처를 받는 걸까요?" (78- 79쪽)  살면서 어찌 상처없이 살 수 있을까?  내게로 향하는 모든 것들과 부딪히고 싸우며 살아내야 할 그 삶의 여정속에서 어찌 좋은 일만 있을까?  성장소설이란 말속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들이 내포되어져 있는 것 같다. 성장하기 위해서 겪어야만 하는 모든 아픔들이 그 속에 녹아 있으며, 성숙해지기 위한 발판으로써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모든 인내가 그 안에 들어있음이다.  어쩌면 리틀부인과 발리의 사연이 루크의 성장판을 두드려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르겠다. 피아노의 선율을 통해 잠재되어져 있던 사랑과 따스함을 함께 공유했었던 발리와 루크의 관계 역시도 까칠하기만 했었던 리틀부인과의 관계와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아니 타인으로 인해 생겨났던 상처였기에 그토록 감추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를 리틀부인의 서글픈 자기애를 바라보며 나는 왠지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의 틀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리는 어리석음을 행하는 것이 어찌 리틀부인뿐일까.. 

만약에 나에게도 루크에게 있었던 그 신비로움이 찾아와 준다면 루크처럼 남을 돕기 위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자신이 갖고 있었던 작은 능력으로 인하여 타인의 삶속에 사랑과 희망을 키워주었던 루크.. 타인을 위하기보다는 내 안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고 싶어했었던 루크의 내면속에는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떻게 보면 나도 눈이 멀었는지도 몰라. 눈이 멀고 머리도 혼란스러운 데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나의 인생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어쩌면 나도 발리처럼 남을 잘 믿는 사람이 되어, 누군가 나를 인생길의 어느 지점으로 데려다 주기를 바라야 하는지도 몰라.(228쪽)  엄마와 로저 아저씨가 자신을 위하여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을 포기했던 그 순간까지도 루크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빠의 죽음으로 인하여 느껴야 했던 그 상실감을 자신으로 인하여 받아들여야만 했을 그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없었던 마음 자체가 루크는 두려웠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해피엔딩이다. 우리의 삶 또한 해피엔딩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가슴속에 루크와 같은 별하나를 새겨두고서 그 별을 쫓아가는 순간을 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별은 루크에게 있어 아빠였으며 엄마였고 과거였으며 미래이기도 했다. 사랑이기도 했고 아픔이기도 했다.  삶의 여정에서 겪어야 할 모든 것들이 내 안에 있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난장이의 소리없는 사랑의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이었지만 백설공주의 아니 이미 늙어버려 백설왕비가 되어버린 한 여인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그 노래가... 루크의 손끝에서 만들어져 피아노의 선율로 표현되어졌던  그 따스함과 사랑이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서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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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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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 효과란 말이 있다. 유명인이나 자신이 존경해 마지 않았던 사람이 죽게 되면 그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살을 하게 된다는... 글쎄, 사실 난 그런류의 생각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사람마다 성격 차이가 있음으로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감정도 다르겠지만 내게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을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영화 한편이 떠오르곤 한다.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역시 사랑을 담았던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그 노래가 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자살이 늘어가기 시작해 사회라는 거대한 무리가 흔들리는... 영화를 보면서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노래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금을 울린다느니, 감동을 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그냥 괜히 나오는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꿈결같았던 학창시절에 도서관을 찾으면 왜 이리도 이해할 수 없는 고전을 찾아 헤맸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겠으나 이 책 역시도 이미 그시절에 나의 손을 거쳐 갔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나의 기억속에서 그다지 커다란 공간을 차지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죄와 벌, 폭풍의 언덕, 목걸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 등등등... 생각나는 고전들은 많지만 유독 이 책의 내용은 그다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한번 꼭 읽어보리라 생각하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었는데 책을 읽고나서 나는 다시 또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세월이 지난 후에 읽어볼 걸 그랬다고... 그렇다고 내가 다시 고전읽기에 도전한 마음을 되돌리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절실한 그리고 아주 지독한 짝사랑이 불러왔던 고통, 그 고통으로 인하여 주인공이 받아들여만 했던 아픔의 순간들, 결코 승화되어질 수 없었던 집착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만 보여지던 그 사랑의 행로.. 그처럼 지독한 사랑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해보았을까?  사랑을 하면 이 세상의 크기가 오직 그사람만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만큼의 크기로 보여진다는 말이니 온통 상대방 생각뿐이라는 말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가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욕심과 집착을 키워가며 끝내는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끝내버린 그의 사랑을 나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지가 않다. 그것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자신의 집착에 불과했을 뿐이다.  

사랑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단지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변할 뿐이다. 헤어지면서도 행복을 빌어주었던 사랑법과 너 같은 사람 다시 만나 너도 나처럼 당해보라는 식의 사랑법은 확실히 다르다. 그다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편지 곳곳에서 묻어나던 베르테르의 현실적 감각이 느껴질 때마다 자살로 맺음을 해야했던 그의 모순을 보게 된다. 꽤나 현실적인 듯 하면서도 이상에 자신을 맡겨버린 무책임함도 그의 자살을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인정하기는 싫다.

이 책처럼 편지글 형식의 책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편지글 형식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용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답답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게다. 공감할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 아직은 내가 그 사랑이란 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 같다. 그 편지를 받았다던 친구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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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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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잠이 든 아이의 뱃속에서 누군가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 help me.. 잠이 든 육체를 사이에 두고 선과 악이 대립을 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육체를 희롱하였던 악마적인 감성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정말 섬뜩하다는 거였다. 다섯째 아이를 읽으면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현실적이었다는 점과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때문이었을까? 책장을 덮으면서도 내 마음속에 솟아올랐던 소름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도리스 레싱이란 작가의 이름을 어디서 보았더라? 아하, 그랬군! 사실 나는 노벨문학상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우리의 작가 고은님께서 몇번을 후보에 올랐었다는 말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도리스 할머니였다는 걸 기억해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의 글처럼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었던 계기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다는 점 때문이었지만) 너무 주관적인 관점이 아니길 은근히 바라기도 했었다.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가족이야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두 남녀가 이루고 가꾸어 나갔을 그 가정의 이야기...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평범하다. 특별히 남들의 앞에 서서 달려나가는 타입도 아니다. 어쩌면 고지식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다. 혼전성관계를 용납하지 못하고 허울과 가식이 넘쳐나는 파티를 마음속으로 조롱할만큼... 그런 그들이 서로에게 운명이라고 느낀 순간 그들은 하나가 된다. 그리고 많은 아이를 낳아 행복한, 그야말로 행복한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며 소망한다.  빅토리아풍의 커다란 주택에서 그들은 그들이 원했던 삶을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다섯째 아이를 임신하기 전까지는.. 다섯째 아이..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뭔가 알 수 없는 힘을 발산하고 태어남으로 인하여 그 가족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해줄 수 없었던 다섯째 아이..  아니 어쩌면 그 자신보다도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오고자 했던 그 아이의 존재에 대해 이미 가족들은 아무런 존재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건지도 모르겠다. 괴물, 그렘린, 호빗... 그아이를 따라다니던 많은 수식어들이 그 아이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처음부터 상실감만을 안고 태어난 아이. 인정받을 수 없었던 아이. 환영받지 못했던 아이.. 어쩌면 그런 것들이 그아이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의 입을 통하여 자신에게 전해져 왔던 약의 의미는 너무도 참혹했다. 어린 태아를 진정시키기 위한 진정제란 말조차도 끔찍했다. 그 아이가 태어나 자람으로 인하여 그 커다란 저택을 꾸며주었던 행복의 존재들과 아이들은 하나 둘씩 해리엇을 떠나게 되는 서글픔..

그 다섯째 아이 벤은 진정 장애아였을까? 하지만 내게는 장애아는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화자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그 아이는 단지 엄마 뱃속에서부터 들려왔던, 그리고 느껴왔던 공격적인 정서에 반응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주변사람들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버지의 묵인하에 시설에 갇히게 되는 벤.. 벤이 사라지던 그 순간부터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자신들이 꿈꾸어왔던 행복이란 개념을 다시 찾아 올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벤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해리엇은 막무가내로 벤이 있는 곳을 찾아가게 되고 벤이 처해진 그 현실에 경악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시작... 벤이 돌아오자 모든 가족들은 해리엇에게서 등을 돌리지만 해리엇은 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라고 보여지지 않으니 또 왠일일까?  책을 읽고 있는 내게는 해리엇의 행동이 사랑보다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한발 먼저 앞섰다는 느낌뿐이었다. 어째서? 왜 그래야만 하는거지? 물론 엄마로써의 의무와 책임감을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진실로 그 무서운 아이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으면서도 굳이 행복하고 싶어하는 가족 틈새로 그 아이를 밀어넣어야 할 권리는 그녀에게는 없어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무엇때문에 하나를 위하여 다섯을 아니 그보다 많은 것들을 희생시켜야 하는건지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으며 그토록 영위하고자 했었던 그 많은 것들을 왜 포기해야만 했는지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사랑은 결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나의 생각만으로는 결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세월은 흐른다. 그 세월속에서 가장 많이 아파했고, 그 현실을 가장 혹독하게 견뎌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해리엇이었을까? 데이비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벤이었을까? 사실 속깊이 들여다보면 아프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마는 화자의 시선속에서 또 하나의 장애아가 자라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넷째 아이 폴.. 엄마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에 자신의 자리를 벤에게 빼앗겨 버렸던 아이.. 그 아이는 자라면서 무언가를 끝도없이 요구하게 된다. 엄마는 항상  벤,벤,벤, 벤뿐이잖아요.. 나도 사랑이 필요하다구요, 나도 엄마가 필요하다구요... 벤을 다시 집으로 데려왔을 때 흘렸던 그 가족의 눈물을 나는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 일을 어찌하나?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그 아픔이 내게로 전이되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했고 그 고통이 나에게로 전이되어져 해리엇과 벤이 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벤이 익혀가는 어설픈 상황대처법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런 벤을 이해할 수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해리엇과 데이비드를 바라보면서 삶은 정말 우리를 가혹하게 시험하려 드는구나 싶기도 했다.

어느덧 청년으로 자라버린 다섯째 아이 벤. 그리고 나이보다 부쩍 늙어버린 해리엇과 데이비드.  그렇게 사회속의 일원으로 발을 디디는 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멀지 않은 벤의 미래를 생각하는 해리엇의 예측속에는 벤속에 내재되어져 있을 그 엄청난 파괴본능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쯤에서 묻고 싶다. 과연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꿈꾸었던 가정이야말로 정말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벤속에서 억압되어지고 내재된채로 커나가고 있었을 그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은 우리 모두가 안고 살아가는 그런 것들은 아니었을까?  틀안에서 보여지지 않은 그 어떤 틀안에서 나도 모르게 그 틀에 맞춰살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채 현실을 바라보았던 그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장을 덮자 알 수 없는 느낌의 공포가 나를 향해 웃고 있는것만 같았다. 잘못했다, 이 책을 밤을 세워 읽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리 긴 이야기도 아니었건만 나는 너무도 긴 이야기를 읽고 난 느낌이 들었다. 겨우 200쪽에 가까운 이야기였을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온 느낌은 너무도 무거웠다. 누가 비정상이었을까? 벤이었을까? 아니면 벤을 둘러싸고 있었던 그의 주변이었을까? 누가 비정상적이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단지 현실을, 그 현실이 가혹하든 행복하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허울뿐이었든 진심이 담겨있었든 그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길로 통하는 것은 아닌지...

"우린 애가 없어, 해리엇. 아니, 나는 애가 없어. 당신은 애가 하나 있지" 그가 집에 더 자주 있었더라면 그렇게는 말을 하지 않았을텐데, 하고 그녀는 느꼈다. (169쪽)
마흔다섯의 나이에 머리가 세어버린 해리엇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과연 그가 자주 집에 있었더라면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까? 지쳐버린 그들의 삶속에서 다시 시작되어질 또다른 삶 하나가 눈을 뜨고 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 누구를 탓해서도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저마다의 몫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들조차도 어쩌면 다시 가혹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가족 모두에게 각자의 행복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해리엇, 그녀의 이름은 여자였고 그녀의 이름은 엄마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또하나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든든한 그 무엇으로써의 의미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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