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계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
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요란한 광고문구가 많은 책에 그다지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왠지 별스럽지 않은 내용물을 너무 이쁜 포장지로 감싸 감춰주는 것 같은 느낌이 앞서는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몇만부가 팔렸다느니, 베스트셀러라느니, 유명인사 누구누구가 추천했다느니 하는 식의 사탕발림에는 그다지 유혹을 느끼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번역자가 내게 신화의 달콤함을 알게 해 주었던 이윤기씨라는 점에서 나도 모르게  이 책에 대한 나의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쩌면 그로인한 나의 편견이나 선입견이 책을 읽는 내내 함께 했을 것이다. 책을 받아보고 책표지의 그림을 먼저 바라보았다. 왠지 꺼림직한 느낌을 주는 한사람,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그의 눈동자처럼 어떤 비밀의 문이 열려질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신화적인 장면들이 요소요소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햄든대학 그리스어과.. 줄리언 교수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수는 헨리와 버니, 프랜시스, 쌍둥이인 찰스와 커밀러 고작해야 다섯명이다. 거기에 주인공인 '나'가 끼어들어 여섯명의 스터디그룹이 된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인하여 전공을 바꾸게 되는 주인공은 사실 주변인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장치들로 인하여 주인공인 '나'는 어느새 사건의 중심부에 놓여지게 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조건들이 그들 여섯명의 그룹으로부터 물위에 떠있는 기름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책장을 넘겨가면서 줄리언 교수와 그들만의 수업장면속에서 나는 오래전에 보았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런 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책속의 화자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신과의 소통을  실제적으로 느껴보고 싶어하던  접신의 과정은 실로 놀라웠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보았던 디오니소스를 위한 그 광란의 밤 장면이 머리속에 그려졌다. 몰아의 경지였을까? 무의식의 세계속에서 그들에게는 진정 신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려주었던 것일까?  그리고 살인... 그 무의식의 세계속에서 그들이 만나야 했던 것은 하나의 살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만의 비밀이 된다.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이건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이건 너와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거야... 뭐 이런 식의 말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비밀이라는 것은 때로 황홀하게 그러나 때로 고통으로 우리곁에 다가온다. 더구나 그 비밀을 같이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심각한 사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보는 내내 나는 하나의 심리극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야금야금 남의 사소한 약점을 들춰내며 속을 부글부글 끓게 하는 사람이 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들이 그 사람의 입을 통하게 되면 정말이지 죽고싶을만큼 처절해질 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면 그야말로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두번째 살인대상인 버니가 그랬다. 함께 하고자 했던 접신의 과정에서 밀려난 버니는 어떻게해서라도 그들의 의식속에 들어가고 싶었을 게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받아들였던 친구들에게 그야말로 좀벌레처럼 야금야금 그들의 이성과 감정을 자극해가는 그를, 역시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말을 빌려 버니를 유추해보자면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악마적인 존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저마다의 개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던 그 친구들의 모습을 그려보자니 왠지 가슴 한쪽이 서먹서먹해져 온다. 왜일까?

결국 두번째 비밀을 갖게 되는 우리의 친구들은 이미 그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다. 인간으로써 살아가야 할 세월동안 느껴야 하는 모든 이성과 감정이 바람빠지는 풍선처럼 그들을 쪼그라들게 만들기 시작하고,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그들 각자에게 찾아오는 공포와 불신의 늪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미 계획되어진 살인의식이 수포로 돌아가려고 할 즈음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찾아들어와 버린 살인의 순간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더욱 더 커다란 공포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통에 찬 나날속에서 서로에게 아무런 위안조차도 찾아내지 못하는 그들은 절망속에서 허우적댄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고,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그 순간순간들이 너무도 처절하게 잘 그려져 있다. 함께였기에 그들에게는 고통도 함께 찾아왔다. 함께였기에 더 크고 무거웠을 그들의 고통..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문득 이런 의문점이 생겼다. 이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과 함께 하면서 느껴지는 것의 차이는 과연 얼만큼이나 될까?

무슨 방호벽처럼 가끔씩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던 신화적인 요소들이 내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불러내고 싶고 만나고 싶어하는 신의 존재 역시 우리안에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왠지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을 간직했던 그들이 가장 힘겨워했던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믿음이 깨지면서부터 서로를 위하는 마음, 즉 사랑이란 놈도 저만치로 멀어져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믿음과 사랑의 부재로 인하여 친구에게 총구를 들이댔던 찰스, 믿음과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서 결국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알을 박아넣어야 했던 헨리가 커밀러에게 마지막으로 해 주었던 속삭임은 바로 '사랑'이었다.  흘러간 시간속에서 다시 만난 커밀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주인공과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랑이었음에도 아직도..라고 말하는 커밀러의 대화속에도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는 걸 보니 우리 가슴속에는 아직도 사랑이 더 많이 남아 있음이 확실한 것 같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미 다 보여주고 시작하는 전개방식에 약간의 긴장감이 찾아오기 시작했었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심리적인 묘사들이 내게는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저리도 깊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두번째 살인, 즉 두번째 비밀이 생겨나고 부터는 왠지 긴장감을 잃고 늘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을 다잡아야 하기도 했다. 너무 많은 분량의 숙제를 받아들었던 느낌처럼 난감하기도 했었다. 일종의 심리극 한편을 보고난 느낌이다. 그것도 처절하리만치 깊게 까발려진 심리극을... 그들이 앓고 지나간 비밀의 계절속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들만의 비밀이 남아 있다. 누구나 가슴속에 저마다의 비밀 하나씩은 안고 살아가듯이...

책장을 덮으며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던 곳으로 되돌아가 보았다. 수수께끼 같았다고 주인공이 기억하는 대사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줄리언은 말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은 다 골라먹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만 상자에 남겨두는,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던 버니와, 꿈같은 기분으로 그들 스터디그룹에 머물던 주인공에게 라포르그 교수는 이렇게 말했었다. " 줄리언은 영원히 일급 학자는 되지 못할거야. 왜냐? 사물을 보되 자기가 선택하는 측면에서만 보거든"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었다. 아름다운 것에 사랑을 쏟는 게 잘못된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의미있는 것과 맺어지지 않으면 아름다움이란 것 또한 피상적인 것이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측면에만 선택적으로 관심을 쏟을 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측면을 무시하지는 않아야 하는거라고... 잠시 생각. 그리고 잠시의 공백. 그들의 비밀을 알게 된 후 그들 모두의 사랑을 버린채 떠나가 버렸던 줄리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여기에 줄리언 모로 교수의 한마디를 그를 위한 변명처럼 남겨놓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들만의 비밀로 인하여 더이상 아파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비생각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성에 의한 통제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은 우리같이 이성의 통제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문명화한 모든 사람들(우리뿐 아니라 고대인들까지도)은 생래적인 동물적 자신의 일방적인 억압을 통하여 문명화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 방 안에 있는 우리는 그런 그리스인, 그런 로마인들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우리는 의무, 신심, 충성, 희생, 이러한 것들을 강박증처럼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것들이 우리 현대인들의 입맛에는 끔찍한 것들이 아니겠는가" (82쪽 줄리언 모로 교수의 이야기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실격.사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부터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간 실격이란 말에 자꾸만 시선이 갔던 까닭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 실격이라고 외칠 수 있는 그런 순간은 언제일까? 표지에서 보여지는 그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암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길을 걷고 있는 사람의 뒷편으로 커다란 십자가처럼 버티고 선 채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는 전봇대의 위용.. 그리고 그 골목길은 참 스산하다. 왜일까? 그림속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서글프게 보이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도시는 회색빛의 건물로 가득 차 있다.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 아니 말을 걸 수 없는 그런 차가움을 안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찰나의 순간들이 저런 모습은 아닐까?  책표지의 작은 그림 한점이 이렇게나 많은 말을 뱉어내고 있다는 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사양 斜陽... 한자대로 풀이해보자면 이렇다. 비낄 斜, 볕 陽..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묻어나고 있음이다. 어쩌면 또한번 가슴 깊은 곳의 아픔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펼쳐들었다.

처음 책장을 펼쳐들면서 예외없이 작가의 이력을 파헤친다. 그렇구나, 결국 이 사람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구나...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생각났다. 왜일까?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의 내면성에 대해 고민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신의 삶에 대해 무책임해야 하는 것일까?  <설국>을 읽는 내내 조바심을 내던 나를 기억해내고는 이내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끝내는 책을 읽어냈다는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감사한다. 그렇게 조바심을 내며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역시도 작가와 같이 깊은 수렁같은 절망속에 빠져들었지만 말이다. 그 절망감은 책을 통해 내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또하나의 알 수 없는 느낌 그 자체로 내게로 온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아프다. 끝없이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매이는 것 같아도 궁극적인 애정결핍으로 결론지어져 버리는 상황이 나를 너무도 아프게 한다.  험난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 어떤 겉치레가 필요하고, 보기좋은 허울이 필요하고, 표정을 숨겨줄 수 있는 가면이 필요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현실이지만 왜 그런 것들을 걸치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감춰둔채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 속에 있는 것들을 위장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속에서 움직이는 주인공은 누구도 아닌 작가 자신이며 책을 읽는 자의 모습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너무도 아프게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모습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늘 사랑에 목말라하고 늘 사랑에 굶주린 채로 살아가지만 자신 안의 사랑을 꺼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니 자신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랑을 향한 욕망이 변하여 자기학대를 하며 그런 자신의 모습을 위장한채 웃고 있는....

책의 서두에서 보여지는 석장의 사진에 대한 설명은 정말이지 기묘하다. 첫번째 사진으로 보여지는 꼬마의 웃는 얼굴... 양손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웃고 있는 아이의 웃음을 이야기하며 결코 웃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란 이렇게 두 주먹을 움켜쥐고서 웃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두번째 사진속에서 보여지는 청년의 모습...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진 장식품 같은 느낌으로 한 채로 웃고 있다. 계산된 표정도, 경박스럽지도, 멋스럽다고도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그 학생에게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고 음침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그런 이상한 미모를 갖춘 청년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가장 기괴하다고 쓴 마지막 사진속의 모습에는 아예 그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다고 써 있다. 웃고 있지 않지만 다른 어떤 표정도 들어있지 않은... 자연스럽게 죽어있는 듯한, 너무도 꺼림칙하고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사진이라고.  그래놓고 작가는 또 이렇게 말한다.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얼굴, 눈을 뜨고 다시 들여다봐도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라고.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고... 그 석장의 사진을 묘사한 대목을 읽으며 알 듯 모를 듯 묘한 느낌을 받아내야만 했던 그 순간은 내게도 끔찍했다. 그 석장의 사진만으로도 아주 간단하게 한사람의 일생이 그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실격속의 주인공 요우죠우를 보면서 나는 껍질도 없이 돌아다니는 달팽이같다고 생각했었다. 단단함이라고는 제 몸을 숨길 수 있는 등딱지뿐인.. 세상을 향해 더듬이를 내밀다가도 아주 작은 충격에도 놀라 그만 제 몸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마는.. 세상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너무 말라도, 너무 젖어있어도 안되는 특성이 그를 자꾸만 멈칫거리게 만드는.. 그렇지만 그 요우죠우에게 어느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으니 결국은 모든것들로부터 상처를 입고 그 상처로 인하여 끝내는 자신의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어버리고 마는 요우죠우의 모습. 정서상으로는 사랑이 필요했던 거라고 말을 하지만 오롯이 그 사랑하나때문만은 아니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자기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를일이다. 그런데 누구를 탓해야 할까?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인 아버지를 탓해야 했을까? 아니면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나 억눌림을 받았던 생활을 탓해야 했을까?  그런 외적인 형편보다는 진실되지 못한 채 앞뒤가 서로 틀린 인간의 모습들이 어쩌면 그를 자신만의 세계속에 안주하게 만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사양에서의 주인공 가즈코 역시 귀족 출신이다. 시대가 변하여 이미 귀족으로서의 틀이 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족정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주변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가즈코의 현실은 그런 것들로부터 탈출하고자 제 스스로 타락하고 파탄의 길로 들어서고자 노력했던 동생 나오지보다 더 참혹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죽어간 어머니의 모습과 그런 모습을 만들어주었던 형식들이 싫었지만 결국 어머니를 닮은 여인에게 사랑을 느껴야 했다고 유서에 썼던 나오지의 모순은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세상속에서 끝도없이 마주쳐야 할 모순의 하나일수도 있다.  남들이 말하는 생활 능력이란 게 없다고. 돈 때문에 남들과 겨룰 만한 힘이 없다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를 칠 수가 없다고 그래서 죽는 게 나을거라고 말하던 나오지의 착잡함은 정말 착잡하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언제까지 그렇게 보여지는 형식의 틀에 갇혀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그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역경 또한 누구나 똑같다. 단지 더 아프고 덜 아프고의 차이일뿐이다. 그 느낌은 누가 느끼나? 그것 또한 내가 느끼는 것이다.  저 위에 가면 무엇이 있나요?  끝도없이 위로 올라가며 거대한 기둥을 만들었던 애벌레들의 질문처럼 요우죠우와 가즈코의 모습은 그 기둥의 끝에서 보았던 황홀한 날개짓을 위해 고치를 만들었던 것과 다르지 않을거란 생각을 한다. 그 고치속에서 이제는 나와 황홀한 날개짓을 하기 위한 아픔이었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코 누군가가 도와주어서는 안되는 그 ....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요일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진즉부터 요시다 슈이치라는 작가의 글과 만나고 싶다는 유혹에 빠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사 만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제까지 읽어보았던 일본소설들이 내게 남겨두고간 느낌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 많은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일본소설들은 내게 알 수 없는 아픔을 주었던 까닭이다. 대체적으로 현실속에서 느껴야만 했으나 비껴가고 싶었던 것들을 책속에서 만난다는 건 가끔씩 나를 아프게도 한다. 되돌아보기 싫은 나의 지나간 시간속의 얼굴처럼 말이다. 책을 읽고난 후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과연 그들에게 '일요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들에게 다가왔던 게 과연 '일요일들'이었을까? 였다. 

책표지의 말처럼 애인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누구나에게 일요일은 온다. 일요일의 의미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쉰다'는 것이다. 이제껏 힘들게 살아왔으니 오늘 하루쯤은 맘놓고 푹 쉬어도 좋다고 허락받아 놓은 날이 일요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 책속의 '일요일들'속에는 편안함 혹은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일요일들'이라고 명명지어진 날들 속에서 더 아파하고 더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얻고자 했던 '쉼'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그 '쉼'에게도 그날이 '일요일들'은 아니었을까? 알 수 없다. '일요일들'마다 벌어졌던 일들의 의미는 또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날들이 일요일일수도 있고 일요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그러나 어쩌면 늘 쉬고 있는 것일수도 있는 그런 것처럼 말이다. 책속에서 만나지는 일요일들은 저마다 주인공의 아픔을 하나씩 안고 있었다. 이별의 아픔, 존재성의 아픔, 생활의 아픔.... 우리곁에서 늘 맴돌고 있는 차마 버릴 수 없는 아픔들이 그 안에 나란히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부터 만나는가는 읽는자의 몫이다. 역시 일본소설답게 현실속의 아픔이 절절히 녹아져 있다. 피해가지 않고 정면돌파를 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여진다. 신기한 것은 매 '일요일들'의 사이 혹은 그 '일요일들'마다 감초처럼 끼어들던 어린 형제의 모습이다. 그 형제들의 시간이 결국 현재와 마주치면서 이 책의 책장을 덮게 되지만 나는 그 어린 형제의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보았던 <주온>이란 영화속의 어린아이를 떠올렸었다. 영화속 아이의 그 텅빈 눈동자처럼 이 책속의 어린형제는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묻혀져 있었던 것은 어쩌면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무언가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하는 그 순간,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발버둥치는 그런... 늘 외로움속에 존재하면서 외롭지 않다고 우겨대는 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기에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던 노리코와 다 자라서 청년이 되어버린 어린 형제를 만나게 해 주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결코 외롭지 않다고, 우리가 살아내는 이 시간들은 결코 외롭지 않은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를일이다. 누군가 우리를 떼어놓을 거라고 복지원으로 들어가길 거부하던 그 형제들은 그들이 생각했었던대로 동생은 입양이 되고 형은 목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현실을 멋지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다. 마주바라보던 노리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청년도 말없이 끄덕거렸다고... 그렇게 우리의 현실은 받아들여지는 거라고...

노리코의 입을 통해 전해들었던 것은 모든 것은 다 내 안에 있다는 거였다. 현실은 내가 당당하게 대항할 수 있을 때 이겨낸다는 거였다. 우리가 그토록 찾고 싶어하는 '일요일들'마져도 우리속에 감춰져있다는 거였다. 노리코의 말처럼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닐테니까..../아이비생각

"아니, 그 뭐냐, 잊으려고 하는 건 말이야, 참 어려운 일이지, 난 그렇게 본다."
"네?"
"아니, 그러니까,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잊히지가 않아.
 인간이란 건 말이다, 잊으면 안되는 걸, 이런 식으로 맘에 담아두고 있는 건가 보다."
"이런 식으로라니요?"
"아니, 그러니까, 잊어야지, 잊어야지 노상 애를 쓰면서....."
<163쪽, 일요일의 남자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사의 수수께끼 - 흥미진진한 15가지 쟁점으로 현대에 되살아난 중국 역사
김영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원복님의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책이 시리즈로 출간되어 학생들에게 읽혀졌던 게.. 만화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다가가기에 부담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책이 아직도 책꽂이에 꽃혀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들녀석은 도통 흥미가 없다. 하기사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책보다 가까운 컴퓨터와 게임이 있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일본편을 보면서 새롭게 다가오던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느낌을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을거란 기대를 했었다. 단순히 중국사를 논하기보다는  중국의 역사에 맞추어 우리의 모습을 한켜,한켜씩 보여주던 작가의 세심함에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던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중국이란 나라의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역사속에서도 아주 진득하게 그리고 질펀하게 녹아져 있는 게 중국이란 나라인 것도 같고...  사실 어지간한 중국의 문명이나 문화가 우리의 삶속에 그대로 녹아있는 경우도 허다하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중국이란 나라의 이모저모를 만날 수 있었다.  무인 출신이었으나 지식인을 높이 평가하여 끝까지 그들을 지키고자 했던 송 태조 조광윤, 그는 공개, 공평,공정이라는 '3공'의 정신에 입각한 유례없이 합리적인 인재 선발 제도였던 과거제도를 확대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출세의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대운하를 통해 들려주었던 시대적인 정치나 경제, 군사의 복합적인 배경은 나에게 놀라움을 전해주기도 했다. 운하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중국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한번은 찾아보리라던 진시황릉과 병마용 갱의 역사는 아주 세밀하게 잘 그려져 있어서 보고 또 보았다. 사진과 곁들여진 작가의 세심함에 놀랍기도 했지만, 그런 중국사를 들려주며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지식인들, 정치인들에 대한 우려감을 표현한 부분들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중국인들의 역사재조명이나 그들의 역사관이 변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작가는 되묻고 있었다. 기원전 2333년이 위험하다던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으니 그런 현실을 몸으로 보고 느꼈던 작가의 심정이 오죽할까?

16년 넘게 100여 차례나 중국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길고도 짧은 여행을 다녔다는 작가가 우리에게 제대로 된 중국을 알려주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는 책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 하다. 고대 중국에서는 공무원을 어떻게 선발했으며 그에 따른 녹봉은 또 얼만큼씩이나 책정이 되어졌는지 그리고 지금처럼 평가제가 있었고 정년퇴직을 해야 했다는 점등, 능력이 없다고 평가되어진 관리들은 명예퇴직을 당하거나 한직으로 쫓겨나고 그것도 안되면 파직 당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의 정치현실을 바라보니 쓴웃음만 나온다.  병마용갱이나 능원을 발굴해보자는 여러계층의 제의를 받고도 자신들의 역사를 지키기 위하여 '하루 늦게 파는 것이 하루 일찍 파는 것보다 낫다'는 원칙을 사수했던 그들의 모습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우리같았으면 어땠을까?  얼마전 신문지상에서 보았던 우리의 오래된 문화유산들이 재개발이나 건축현장속에서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문화적인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간 서로 떠넘기기만 하다가 시간이 흘러 그렇게 되었다는 글을 읽으며 쫓아가 머리라도 한대씩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던 까닭이다. 도대체 저들과 우리가 무엇이 다르길래 이토록 의식의 차이를 느껴야 하는가 말이다. 시대적으로 변해져 내려오던 무인상과 문인상을 바라보면서 저 모습속에도 그토록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구나 싶어 다시한번 바라보기도 했다. 역사는 이긴 자에 의해, 남겨진 자에 의해 쓰여진다고 했지만 자신들의 색깔과 선을 분명하게 긋기 위하여 노력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되어지던 순간이기도 했다.

사진과 이야기가 적절하게 어울어져 서로 보충설명을 해주었던 점은 이 책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어찌 이것뿐일까? 아마도 작가의 생각과 마음속에는 이것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들이 살아 숨쉬고 있으리라. 2002년부터 시작된 '동북공정'이나 2000년부터 시작된 '중화문명탐원공정' 등은 '중국사 다시 쓰기'의 큰 퍼즐 맞추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작가는 묻고 있음이다. 그 안타까움을 여러가지 예시를 들어 설명하고 있으니 나까지도 착잡해지는 느낌을 감출수가 없다.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꼬집어 말한다해도 그들중 아무도 고개 들어 반박할 수 없을 것 같다.  작가의 말처럼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 싶다. 작가의 말처럼 식민사관에 안주한 채 집단이기주의를 등에 업고 사사로운 매명에만 열을 올리는 기득권층이 역사적 책무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제 닭잡아 잔치해 봐야 무슨 득이 있다고 우리의  저 잘난 인물들은 오늘도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흔히 말하는 made in china 만이 중국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던 옛말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몰이
조에 부스케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오래 걸렸다. 아직까지도 이 책을 내려놓는다는 게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도중하차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으면서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같은 문장, 같은 페이지를 몇번씩 읽어가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나를 이 책속에 머물게 했던 것일까? 어찌보면 거대한 은유의 물살에 휩쓸려 제정신을 차라지 못했던 것도 같고, 어찌보면 끝없는 나락의 저 밑창으로 한없이 떨어져내리는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마져도 들었던 것도 같다.
보통 불가에서 말하는 '화두'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책 자체는 어쩌면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군가 툭 던져놓고간 화두처럼 그렇게 무겁기만 하다. 이만큼 왔다고 생각되어지는 순간에 나는 또 저만큼 멀어져 있으니... 읽고 읽고 또 읽을 수 밖에....

반칙을 써보기로 했다. 책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이 싫어서 옮긴이의 말이나 책에 대한 해설을 가장 나중에 읽곤 했었던 나만의 법칙을 벗어나보기로 했다.  마지막 부분의 해설편에서는 이 책의 작가인 조에 부스케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조에 부스케의 작가정신이라기 보다는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어쩌면 그의 사상이 되어주기 위해 존재했었던 그의 생활들은 참으로 끔찍했다. 부스케 자신의 상처 체험을 극단으로 심화하여 그것을 존재론적 차원에까지 이르게 한 거대한 노력의 결정체... 우리가 자신의 상처와 불행을 어떻게 극복하여 육화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사랑과 긍정의 이야기이며   가장 자전적인 산문이라던 광고의 말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다가와 주었으면 했다. 그런데 사실은 너무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주 가끔씩 부스케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현실을 그려내며 보여 주었던 대목을 빼고나면 너무 어렵다. 소용돌이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가까이 다가올 듯 하면서도 다가오지 않는 어떤 느낌들이 너무 짜증스럽기도 했다.
너의 전 존재를 마치 너를 판단하기 위해 사건의 형태를 취한 것 같다.
색 속에서 사는 모든 것은 땅 밑에서 산다.
사람은 깨어나 살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말은 말의 기호이다. 우리가 깨어나는 세계에는 그것의 광대함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등등등... 언뜻 언뜻 보여지는 볼드체의 말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부르조아 집안의 경직이 싫어서 결국 부모에게 복수를 하려고 전쟁에 자원입대를 하게 되었던 조에 부스케. 자살을 꿈꾸었던 그에게 전쟁에 대한 공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무모함으로 대담함으로 전쟁을 치루어냈던 그는 장교 계급장까지 달게 되지만 부스케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싸우기를 원했다고 한다. 1918년 큰 부상으로 인해 잠시 병가를 보내게 되었을 때 한 여인을 만나 첫사랑을 하게 되지만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다시 귀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쓰러진다. 척추를 뚫고 나간 총알이 그를 쓰러뜨리고 그대로 그곳에 버려지길 바랬던 그의 명령을 무시한 부하들에 의해 그는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부대원 전원이 전사하는 전장에서 그는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다시 회생할 수 없었던 그의 삶은 침대와 더불어 이어지게 되는데 그 고통스러움과 절망의 끝에서 부스케가 희망처럼 부여잡았던 글쓰기의 결과가 이 책으로 태어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죽는 날까지 침대에 누워 지내기로 작정하고 공부를 시작했으며 철학과 문학에 빠져 들었다고 하니 말이다.

다시 원점. 천천히, 천천히 다시 읽기 시작한다. 아마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다시 이 책을 잡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고통의 깊이가 너무 깊어도 그 고통을 인식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조에 부스케에게 있었던 그 고통은 고통이기에 앞서 하나의 절망이었고, 하나의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이 안고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 역시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절망이며 희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며칠을 안고 뒹굴었던 화두 '달몰이'의 무게가 자꾸만 나를 가라앉게 한다. /아이비생각

인간은 그가 제어하는 사건들의 장소이며, 그가 제어하지 못하는 사건들의 장소이다.(43쪽)
우리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처는 이 분리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상처를 내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67쪽)
사람들은 보존할 가치가 있었던 것에만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때 사람ㄷ르은 무엇에도 우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디에 우리의 가치들이 있는가? 나는 이 가치들이 심지어 우리의 실존이 우롱하는 정의에 대한 사랑속에 있다고 믿는다.(100쪽)
세계의 진부성은 우리 직관의 불완전성 때문이고, 우리의 주의력 불능 때문이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의해 뚫려진 밤의 시야처럼 사실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항상 애매하고 막연하다. 사람은 그토록 눈이 멀었지만 자신이 희미하게 들여다보는 세계의 불충분함을 메우기 위해 자신의 상상력이 하나의 세계를 열어 줄 것을 요구한다.(161쪽)
의식은 인식의 모든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의식을 인식의 자리에 놓는 데 온 상상력을 사용할 것. 의식은 '있는 것'에 따르고, 인식은 '우리인 것'에 따른다.(20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