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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환궁하면... 환궁하면... 그래 환궁하면 너희들에게... - 그리고 그들은 환궁했다. 어찌되었든간에. 임금이 나아가 적의 발아래 엎드려 이마를 땅에 찧었든지 말든지 어찌되었든 그들은 환궁했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환궁하면...이라고 말하며 가져다 썼던 것들을 갚았을까? 단지 임금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임금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지 않고 제 삶의 길로 되돌아간다는 이유로 목에 칼을 맞아야 했던 백성들이었다. 그 백성들이 말했다. 봄에는 조정이 나가는 것이옵니까? 조정이 비켜줘야 소인들도 살 것이온데.... (-319쪽) 그랬다.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었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아니 모른체 했다. 그래야만 저희들 뱃거죽에 기름이 낄테니 말이다. 그래야만 저희들이 편하게 살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한숨만 나왔다. 소설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토록 강한 문체처럼 그 때의 그들도 그렇게 살았다면 차라리 나앗을 것이다. 그렇게만 했다면 그토록이나 험난한 여정을 백성들에게 강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라가, 임금이, 나라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하나의 걸치적거림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게다. 어찌 그리도 영악스럽지 못했는가 묻고 싶었다. 그 세월을 살아낸 백성들은 오롯이 몸을 낮추고 입을 닫았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생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다고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이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그들의 후손이 분명 우리일진저...
전하, 지금 성 안에는 말(言)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馬)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197쪽)
어찌된 일인지 모를일이다. 아니 나도 모른체하고 싶을 뿐일게다. 전쟁이 나도, 태평성대를 누려도 말(言)이 너무 많았다. 전쟁이 나면 제 살길 찾느라고, 제 방패막이가 되어줄 희생양을 찾느라고 말(言)이 많았고, 태평성대에는 제 가진 것을 지키려고, 제 가진 것 빼앗기지 않으려고, 제 가진 것보다 남 가진 것이 더 많아보여서, 그래서 또 말(言)이 많았다. 그들이 나랏일을 했다. 그런 그들이 백성의 안위를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랫기에 저희들끼리 속삭였을 것이다. 소설속의 구심점은 두개였다. 화친은 곧 죽음이라고 일컫는 자와 화친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는 자..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길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길을 만날 수 있는지 다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단지 명분이 문제였다. 현실을 배재시킨 뜻없는 명분만이 살아 숨쉬고 있음이었다. 입만 열면 그들은 말했다. 전하, 아니되옵니다... 차라리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내가 임금이었다면 그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 입만 나불대는 그들을 등에 업고 가야 할 임금의 처지가 애처로웠다. 제 자신의 생각조차도 제것이 아닌 것이 임금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나도 치졸하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284쪽)
청의 왕 '칸'의 일성에 내 속이 다 뚫리는 것만 같았다. 접지도 말고, 구기지도 말며, 펴서 내질러라! 이 얼마나 호탕한가.. 여우새끼처럼 제 속으로는 저 살 궁리만 했던 시대의 충신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성벽으로 올려놓으니 손과 발가락이 얼어 터져 떨어져나가는 군졸들 앞에서 솜두루마기를 걸쳐입었던 그들이었다. 성 밖으로 내몰려 일전을 치루는 군졸들을 내려다보며 아이쿠, 그럴 때는 오른쪽으로 빠져야지...무릎을 치며 입으로 전쟁을 치루던 그들이었다. 힘겹게 싸우고 다친 병사를 챙겨 돌아온 군졸에게 곤장을 치던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임금이 말했었지. 경들이 알아서 하라.. 참다못한 군졸들이 임금앞으로 밀려왔다. 임금을 에워싸고 말만 앞세우는 그들에게 말했다. 승지가 칼을 빼니 산천이 떠는구려. 그 칼을 들고 적 앞으로 나아가시오. 우리가 따르리다. (-337쪽) 그랬지만 그들은 결코 앞장서지 못했다. 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적을 향해 함성 한번 내지르지 못했다. 그들이 내뱉는 말(言)들은 모두 죽어 있었고, 그들을 움직이게 할 말(馬)들도 모두 죽어 있었다. 그들은 말(言)만 있고 말(馬)이 없어서 앞장서지 못했던 것일까?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내지 못할진대, 땅으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작가의 말) 작가가 그리고 있는 소설 <남한산성>안에는 살아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들만이 義였고 그들만이 生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제가 죽인 사공의 어린 딸이 아비를 찾아 성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게다. 저야 임금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왔다지만 제 아비의 온기를 찾아 성 안으로 들어 온 계집아이를 보면서도 백성이 근본이라는 생각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예판 김상헌의 그 옹골진 외고집이, 그 터무니 없는 얍삽함이 너무도 미웠다. 그 계집아이를 아무말없이 이어받아 온기를 나누어 주었던 대장장이 서날쇠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꽁꽁 동여매어진 임금의 문서를 가지고 성을 나와 산천을 휘돌던 서날쇠를 우리의 가슴속에 심어주고 싶었을 게다.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여주는 거라고, 그렇게 서로에 대하여 조금씩은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제사 읽은 <남한산성>.. 자책하고야 말았지만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랴.. 숱하게 떠돌아다니는 그 남한산성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꼴도 보기 싫었고 눈도 마주치기 싫었던 남한산성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김훈이라는 작가가 채색한 남한산성은 느낌이 너무나도 달랐다. 힘이 있었고 감히 내치지 못할 그 무언가를 품어 안고 있었다. 일갈하지 않고도 조용하게 깨우침을 전해주었던 작가의 문체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너무도 흔한 것을 통하여 너무도 흔하지 않는 것을 전해줄 수 있는 그런것들이 있었다. 남한산성에 한번 올라보리라 한다. 다음에는 꼭 가야지 하면서 별렀던 그곳에 이번에는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가리라 한다. 그 숨결이 머무는 곳으로. 가서 서날쇠의 그 義를 찾아보리라. 발걸음이 무거울 것 같다. 남한산성을 한가슴 가득이 안고 올라야 할테니...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