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왕의 이름, 묘호 - 하늘의 이름으로 역사를 심판하다 ㅣ 키워드 한국문화 7
임민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종묘에 가서 호명을 하면 제이름을 듣고 나오는 왕이 있을까? 전에 누군가 재미삼아 물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가 정답이다. 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죽은 뒤 후세들이 만들어 바친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왕들은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불리우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죽은 왕들에게까지 이름을 만들어주었던 것일까? 그것 또한 간단하다. 그 이름으로 왕의 업적을 판가름했다. 한마디로 역사적인 평가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하다보니 결코 단순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닌 듯 하다. 정말 복잡하다. 우선적으로 어려운 말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묘호, 시호, 종호...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이렇게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흔하게 쓰지 않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세대와는 거리가 먼 말인 까닭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다. 묘호는 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배향할 때 신위에 쓰는 임금의 호이고, 시호는 제왕이나 재상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존호는 보통 상대를 높여 부르는 칭호지만 임금이나 왕의 덕을 기린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휘호라는 말까지 찾아보니 점점 더 어려워진다. 죽은 뒤에 시호와 함께 내리던 존호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호와 묘호와 존호따위의 의미를 한꺼번에 쓰기도 했다는 말이 된다. 태조의 신주를 보면, '유명증시강헌태조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이라고 쓰여있는데 '유명증시강헌'은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인 강헌을 말하며, '태조'가 묘호이다. '지인계운'은 존호이며, '성문신무'와 '대왕'은 시호이다 (-53쪽) 이보다 더 머리아프게 하는 것도 있다. 고종시호의 경우 고종이라는 묘호 2자와 8자의 시호, 53자의 존호로 무려 63자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재위했던 스물일곱 명의 국왕은 저마다 고유의 왕명을 지녔다. 요즘 사람들은 태조니 세종이니 하고 부르는 이름들이 왕명인 줄 안다. 물론 왕명으로 이해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본래는 묘호廟號 혹은 종호宗號 라고 해야 맞다. 묘호는 국왕이 승하한 뒤에 올리는 이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하들도 태묘太廟니 중묘中廟니 하여 사당 이름을 태조와 중종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묘호는 사당 이름인 한편, 시호 혹은 왕명이기도 하다. (중략) ... 묘호는 두 글자로 만들어졌다. 앞의 한 글자는 시자諡字로서, 시법諡法(시諡로 사용할수 있도록 정해진 글자)에 따라 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뒤의 한 글자는 종계宗系(종가와 계통)와 조공종덕祖功宗德의 예제에 근거하여 붙이는 祖나 宗 중 하나를 쓴다 (-머리말중에서)
1. 삼국시대 국왕의 묘호
2 황제국의 묘호를 사용한 고려
3 조선, 묘호로 예를 바로세우다
4 이름으로 국왕의 공덕을 평가하다
5 3백 년, 공정왕이 묘호를 받기까지
6 대한제국의 황제, 그 아픈 이름
7 묘호의 의미
책을 펼치면 목차를 통해 이 책에서 다루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禮" 를 상징하게 되었다는 묘호.. 그저 무의미하게 외워대던 왕조의 순서에서 조와 공으로 나뉜다는 것에 대해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알게 된다. 공이 있는 이는 조祖로 하고 덕이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한다는 조공종덕을 기억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끝까지 가지는 못했다. 경우에 따라서 바뀌기도 했고 또한 무시되기도 했던 듯 하다. 조종공덕을 통해 예치국가를 지향했다거나 국가 운영의 원리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좀 씁쓸하다. 시호를 정하는 일이 하나의 의례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며 안타깝게도 명분에 죽고 명분에 살았던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않은 일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의 뜻을 받든다는 형식을 취하며 왕에게 부여되었다는 묘호... 그 이름으로 인해서 자신의 업적이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하늘의 뜻과는 어쩐지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평가는 하늘이 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수많은 당파싸움으로 인해 왕이 바뀌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왕이 되고 싶지 않았어도 왕이 되어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래놓고는 하늘이 뜻이다? 바로 그런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니었을까? 묘호를 일러 상당히 아름다운 의미를 두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지만 말로써 말을 죽이고 살렸던 시절이었다. 가장 뚜렷하게 보여지는 정종을 보자.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정종은 죽은 뒤에 정통성마져도 인정받지 못했으며 왕으로써의 공적 또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묘호없이 그저 사당에 모셔졌을 뿐이다. 300년이 지난 숙종대에 와서야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는 것만 보아도 하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300년이라는 기간이 지나는 동안 몇 번 시도되어진 적은 있으나 그 썩어빠진 당쟁의 뿌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는 정종의 묘호.. 죽었으니 알 길은 없겠으나 만약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라보는 그가 편안했을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적장자로써 제대로 왕위에 오른 이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또한 적장자였으나 왕위를 잇지 못한 세자도 많았다. 27명의 왕 중에서 제대로 절차를 밟아 즉위한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으로 7명뿐이었다. 그것뿐인가? 그 7명마져도 해석에 따라 6명이나 8명이 되기도 한다. 그 나머지는 다른 형태로 즉위했는데, 그 형태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왕위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조공종덕이라는 원리를 제대로 따랐을리가 만무하다. 앞서 말했던 태조 이방원 역시 그 점에 대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세世, 중中, 인仁 등 시자 한 글자가 갖는 역사의 함의는 대단히 크다. 한 글자로 국왕의 평생의 업적을 재단하여 평가했기 때문이다. 또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왕권의 정통성 문제이다. 성종과 인조는 종법에 어긋난다고 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왕이 아닌 생부를 왕으로 추숭했다. 그들이 덕종과 원종이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했다. 종법상의 흠결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묘호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국왕들은 남겨질 이름을 두려워했다. 국가와 왕권의 기초 수립에 ㅈ러대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묘효는 그야말로 터잡이 구실을 했다. 한갖 이름인 듯이 보이나 묘호는 국가와 사회의 운영원리를 배경으로 거대담론을 형성했다. 그래서 정통의 묘호를 갖는 일에 군신의 노력은 신중했다. 묘호는 당시의 유교윤리와 국가이념, 통치철학, 역사 등 인간의 사고를 통섭하는 가치판단으로 빚어낸 창조물인 것이다 (-156쪽)
태조, 세종, 세조, 영조, 정조... 우리가 배우고 익혔던 이름속에는 정말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왕의 공덕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했고, 정통성을 부여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두 글자로 된 묘호속에서 더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역사의 흔적이 담겨있다고도 한다. 후대가 기억하는 이름이 역사라는 말에는 공감한다. 그런데 그 역사가 공정했다고는 볼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그렇게 아름답기만 했던 것도 아닌듯 하다. 생각이 삐뚤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의미로 인해 오백년의 역사를 간직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이름속에서 보여지는 폐단과 어긋남 또한 밝히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평가가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이 조그마한 책이 아주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 어려웠다. 일단은 모든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한다는 한국의 존대말이 생소했다. 서거라거나 승하라는 말을 넘어 훙서라는 말을 써야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옛의미를 살리고자 했음을 알 수 있겠으나 내게는 어려웠다는 것이 솔직한 말이다. 왕이나 왕족, 귀족 등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는 나와 있으나 대개는 왕의 죽음을 일컫는 말이었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이 너무 어렵다보니 그 말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 또한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 책보다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책을 한번 더 찾아볼 요량이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