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완전정복
이완배 지음, 오동진 그림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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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미FTA를  國家百年之大計로 바라 봐야 한다는 말이 왠지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개인적인 일이 되었든 국가적인 일이 되었든 어떤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지금 당장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뭔가 미흡함이 있었기에 저런 말이 나온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솔직하게 말해 한미FTA라는 것을 그다지 심각하게 바라본 적은 없었다. 그냥 흘러들어오는 정보만으로 대충 그런건가보다 하는 식의 느낌만 있었을 뿐이다. 보통의 사람이 구석구석 알고자 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설령 알고자 한다해도 세세하게 알아내기가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이는 과제임은 분명할 터다. 한참 世間의 시끄러움으로 고성이 오갔더랬다. 그래서 한번쯤은 그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고 싶었기에 선뜻 손을 내밀었다. 自由貿易協定(free trade agreement) 이라는 말로 ''국가 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모든 무역 장벽을 제거하는 협정' 이라고 풀이되는 FTA, 과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책의 주제를 살펴보면  일단 '한미FTA를 어떻게 봐야 하나' 부터 짚고 넘어가자고 한다. 그리고나서 자유무역(Free Trade)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물론 자유무역의 주체인 미국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反美니 親美니 아무리 떠들어대도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어느정도는 말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ISD'나 'RACHET조항'같은 말 따위는 누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는 거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며 알려주던 부분부분을 통해 한미FTA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외교면에서, 사회면에서, 식량면에서와 같이 여러각도로 짚어본 한미FTA의 모습은 왠지 씁쓸하게 다가온다. 잘은 모르겠으나 책의 그림처럼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좀 더 신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마지막부분이 강한 울림으로 남겨진다.

 

책을 보면서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던 부분이 많았다. 한미FTA에 대해 전부를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는 말이다. 주제가 무거운지라 만화를 통해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점은 좋았다. 하지만 꼭 그런식의 문체를 써야만 했을까? 현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현대통령에 대한 말투는 솔직히 껄끄러웠다. 많은 사람에게 한미FTA가 무엇인지, 왜 그것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설득하기 위한 책이기보다는 반체제적인 느낌이 더 강하게 다가와 이 책을 쓴 동기가 순순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직은 어린 학생들이 이 책을 봐도 되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망설여질 것 같다. 그냥 한미FTA가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得과 失을 가져올 수 있는지, 우리가 그런 점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를 지도해 줄 수 있는 책이었다면 참 좋았을거라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다고 말 할 수 있는 혜안이 내게는 없다. 그만큼 알고 있는 것도 적다. 그러나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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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일어서다 - 21세기 한국과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손석춘 지음 / 들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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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가 썩어갈 때, 그것을 건강하게 할 책임이 네 군데 있어요. 종교계, 교육계, 언론계, 법조계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네 곳이 더 썩지 않았습니까? 가장 많이 썩은 게 종교계지요. 그러니 모든 사람이 돈만 좇을 수밖에요." (-30쪽)

 

종교... 언제부턴가 우리는 종교이야기를 하면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심한 경우 자신의 종교를 자신있게 앞세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서라는 궁극의 목적을 잃어버린 탓이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수단이 되어버린 종교..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작금의 상황으로 볼 때 종종 종교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꼬집어 말 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쓰러져가는 혹은 무너져내리는 어떤 것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누군가는 다가가야 하고 또 누군가는 힘을 써야하는 까닭이다.

 

얼마전 우연히 TV를 보다가 변해가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다큐를 보게 된 적이 있었다. 불교적인 명상수행이 그들의 기도처에서 행해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도 그것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했던 말이 생각난다. 종교를 통해 진정한 마음쉼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가 아니겠는가,라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같을테니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절집이 세상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은 산중의 붓다가 이제는 '시장'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단순하게 형식적인 의미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종교가 기독교가 되었든, 불교가 되었든 세상속으로 걸어들어올 만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따져보고 싶은 것이다. 우뚝 선 모습으로 우리 삶의 지렛대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처럼 멋진 일도 없을테니... 변화를 위한 그들만의 노력도 책을 통해 알려주긴 하지만 세상이 소수보다는 다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니 쉽진 않아 보인다. 나와 다른 소수를 안아주지 못하는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인 것을...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안타까움에 마음을 졸였다.

 

책을 읽던 중에 문득 생각나 표지의 그림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머리위의 초에서 흘러내린 촛농이 마치 부처의 굵은 눈물처럼 보여 보는 마음을 싸하게 만들었다. 저 부처는 떨어지는 촛농이 뜨거워 우는 것은 아닐까? 차마 눈을 뜨지 못한 채 굳게 다문 입술로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많은 의미를 담은 듯한 그림을 보면서 이 책이 종교서적인가를 묻고 싶었다. -21세기 한국과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이란 부제를 달아놓긴 했어도 종교를 빌미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까닭에 읽으면서 조금은 껄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종교와 사회적인 현상을 빗대어 말했는지 그 깊은 속내를 알 수는 없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이나 성철스님처럼 우리에게 이정표가 되어줄 인물이 없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큰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들지않아도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도 없을테지만, '불교적 시각'이라는 어려운 말속에서 '소통'이라는 열망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무리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불자가 아니어서일까?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그랬다는 말이다.

 

사실 나는 아직까지 종교가 없다.  친구따라 주변따라 어린시절 교회에 나가본 적은 있지만 나이들어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천주교인이나 불자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때때로 성당이든 법당이든 들어가 기도하고 잠시 앉아 있기도 한다. 붓다의 가르침이 '지금 여기서'라는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책을 읽고 얄팍하게나마 전해받은 느낌이 있기는 있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서도 흔히 말하는 '진보성향'이라는 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방심하고 있다 돌려차기에 당한 그런 느낌이랄까?  내가 순수한 종교서적을 생각하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해 종교보다는 우리곁에 만연한 사회적 현상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직설적으로. 뒤에 남는 여운이 그다지 명쾌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절박함에 공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학습되어져버린 가치로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교육의 현실은 또다시 나를 아프게 한다.  

 

'1+9=ㅁ' 와 같은 문제 유형을 보자. 우리가 흔히 비교하는 핀란드나 스웨덴 학교에서는 '1+9=ㅁ'와 같은 문제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ㅁ+ㅁ=10'의 유형이다. 1+9=ㅁ에서 ㅁ안에 들어갈 정답은 하나지만 ㅁ+ㅁ=10의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무궁무진이다. 1과 9나 2와 8만이 아니다. -48과 +58을 적은 친구도 나오고, 2.13과 7.87 따위로 적은 학생도 있다.(-181쪽 참조)

창의적인 사고를 외치는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은 아닐테니 더욱이나 그렇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해버리거나 나아닌 누군가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그 스님의 말씀처럼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불교의 존재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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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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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무사라는 말이 선뜻 내 앞으로 달려나왔다. 시골무사라... 그리고 그 옆의 작은 이름 이성계... 책을 앞에 두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이성계라는 이름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물었다.  위화도 회군, 최영장군, 조선을 건국한 사람, 이방원, 함흥차사... 그 언저리만 맴돌다 말았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 역사라는 게 단편적인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때문이었다. 깊은 속내까지 짚어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 순간 너무 많았구나 싶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이 책의 밑그림은 분명 사실일터인데 자꾸만 허구처럼 느껴지는 것도 당혹스러웠다. 깊이있는 울림이 짧은 문체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는, 그래서 단 하루만의 이야기였으나 너무나도 단단히 나를 조여오던 이야기. 그래서였을까? 그사람의 뒷모습이 그려진 마지막 그림은 너무나도 쓸쓸했다.

 

배경장면으로 깔린 살풍경.. 복잡해보이지만 복잡하지 않은.. 마치 어린시절 오빠와 마주앉아 실뜨기를 하며 하나씩 엮어가던 그런 느낌과도 같았다. 손가락마다 걸린 실 한 줄팽팽함과 오빠 손가락에 망처럼 걸린 실그림을 다시 내 손가락으로 옮겨오던 그 진지함이 책을 읽는 순간 나를 찾아왔다. 안풀릴 것 같아도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가며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고려가 왜 조선으로 탈바꿈해야만 했는가를.  물론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의 고리처럼 조금 미흡했다고 느껴졌던 부분도 있다. 잠시 등장하는 어린 난이의 이야기속에서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전쟁을 다루면서 순수함을 대표하는 아이의 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경기전에 위리안치당한 듯 하다던 작가의 말이 왠지 쓴소리로 들렸다.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어두는 형벌이 위리안치다. 중죄인에 해당하는 사람을 이 형벌에 처했다. 그렇다면 이성계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어쩌면 죄인은 우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겉핥기식으로 대충 훑어내리는 우리의 역사인식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소설 한 권 읽으면서 이 무슨 거창한 화두를? 그냥 내게 던지는 질문일 뿐이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살아숨쉬는 이름들을 적어도 위리안치만은 모면하게 해야 한다고. 그러고보면 우리 주변에 위리안치당한 이름이 수도없이 많다. 

 

단 하루만의 이야기였다. 그렇게까지 나를 조여오던 이야기가... 책장을 덮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또다른 매체를 통해 재탄생되어질 수 있을까? 그 촘촘한 올무의 은근한 조임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종이책이었기에 가능했을 그 조임의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할 것 같다. 죄송한 말 한마디만 하자면 <남한산성>을 휘돌아치던 김훈의 마력같은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문장들이 너무나도 좋았다. 가쁜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었다. 그 내면까지 들여다보지 못했던 한 남자의 고뇌를 함께 느껴보자고 이끌어주심에 감사드린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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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상처받는 관계만 되풀이하는가
카르멘 R. 베리 & 마크 W. 베이커 지음, 이상원 옮김 / 전나무숲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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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상처받는 관계만 되풀이하는가'.. '착한 사람들은 왜 항상 피해를 입고 상처받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주제가 아닐까 싶었다.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사람측에 들어갈거라는 걸 부정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상처받는 관계만 되풀이하는 것일까?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나 선택에 후회가 따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관계만큼에서만큼은 상처받고 싶지 않은게 나의 바램이라면 욕심일까? 나뿐만 아니라 아마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제쳐두고라도 나는, 정말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상하리만큼 착한 사람들이 항상 피해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복을 받기는커녕 왜 착한사람들은 피해만 보며 살아가야 할까? 요즘은 착하다거나 순진하다거나 하는 말 따위가 그다지 좋은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세상이 그렇게 많이 변해버려서 그런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덫'이라는 말에 시선을 빼앗겼다. '덫'... 무언가를 잡기 위해 또는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 책의 소제목들을 살펴보면 '피해자의 덫'이라는 말이 많이 보인다. 분노나 슬픔, 두려움이나 죄의식, 거짓으로 강한척하는 것 모두가 피해자의 덫이라는 말을 공감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의자라기보다는 피해자라는 틀에 갇혀버리는 모순이 왠만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걸려들고마는 하나의 '덫'이었던 거였다. 무언가 이익이 되는 상황에서는 '나'라는 말이 앞서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너'라는 말이 앞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모든 원인은 결국 내가 아닌 '내 안' 에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채 수없는 피해자들이 발생하는 거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와 '너'의 구분이 아니다. '나'와 '너'의 대화, 즉 타협점을 찾는 노력이 우리에게 얼만큼이나 있었던가를 물어야 했다. 옛말에 '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듣고 쓰기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정말로 어려운 말..  문제의 실마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거였는데 바꿔 생각한다는 게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으니 그게 문제다.  상대방에게 맞춰주기만 한다고, 상대방에게 맞춰달라고 한다고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보여지는것만 보기보다는 속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도 쉽지만은 않다. 하긴 쉬웠다면 우리 주변에 그토록이나 많은 아픔과 분노가 난무하지는 않았을게다. '내 탓'이니 '네 탓'이니를 따지기에 앞서 서로를 마음 깊이 보듬어 안아 줄 수 있다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일테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결국 그것인 걸.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회피라는 말이 있다. 그때 당시에는 피해갔을지언정 그 문제는 계속해서 내 곁을 맴돌고 있을테니 말이다. 책속의 내용은 수도없이 같은 말이 반복되어지고 있다. 몇 번을 말해도 답은 그것이라는 듯이.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모두가 피의자였고, 피의자라고 생각했던 모두가 역시 피해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와 김형경의 <사람풍경>이 생각났다. 내 안의 나를 다스릴 줄 아는 힘이 필요하다는 말을 다시한번 떠올린다. 상처입은 내 안의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해야만 한다는 그 말을 되뇌인다.  책 속에서 말하고 있는 피해자의 덫은 누가 나에게 덮어씌우는게 아니다. 그 덫을 놓아 내가 나를 잡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만 한다. 책장을 덮으며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내 안의 아이를 살짝 불러보았다. 아직은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그러나 언젠가는, 너무 늦지 않게 그 아이와 대면해야만 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피해자의 덫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한다.

 

용서한다는 말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던 시간이었다. 용서는 다시금 관계를 맺자는 뜻이 아니며, 용서하고 나면 상처 주었던 상대를 다시 내 삶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너무나도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용서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야만 했다.  남들의 행복이 나와 관련 있다는 생각을 멈추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상당히 이기적인 느낌을 주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속의 존재에게 미래를 위해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빼앗길 필요가 없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상대는 과거에 놓아두고 현재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면 된다.. 는 말이 큰 울림으로 남았다. /아이비생각

 

 

★ 실패와 대면하기 위한 7가지 자세 (- 185쪽)

1.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2. 다른 사람에게 무리하게 기대하지 않기

3.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터놓고 이야기하기

4. 용서하고 용서받기

5. 사랑을 주고 사랑받기

6. 자기 모습 그대로 살기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게)

7. 자기 힘의 정도와 한계를 알고 표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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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사라진 직업들
미하엘라 비저 지음, 권세훈 옮김, 이르멜라 샤우츠 그림 / 지식채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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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이라는 이름아래 일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이즈음에 이미 사라져버린 역사속의 직업을 볼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일까? 어쩌면 이미 사라져버린 직업을 보면서 앞으로 사라져버릴 직업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 같아 내심 기대감이 있었다. 씁쓸한 진실이랄까?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아픔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편함만을 추구하면서도 양손 가득히 먹을 것을 쥐고 살 수 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는 게 솔직한 말은 아닐지... 이전에 이미 사라져버렸고 우리의 세상속에서도 사라져가고 있는 수많은 직업은 분명 필요에 의해 생겨났을 것이다. 필요해서 생겨났으나 필요에 의해 없어져야 했던 것들이 어디 직업뿐일까?  이런저런 직업을 만들어냈던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옷을 갈아입은 건 아닐까?  어느날엔가 언론지상에서 그 옛날 호령하던 양반네들의 가속이었던 노비가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말을 보고 서글픔을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과연 우리곁에서 옛날의 노비처럼 잔일을 처리해주는 직업이 얼마나 많은가를...

 

사라진 직업군속에서 나의 어린 시절도 볼 수 있었다. 이동변소꾼은 아닐지라도 똥지게를 짊어지고 다니며 집집마다 변소청소를 해 주던 '똥퍼!" 아저씨,  비록 그 목적은 다를지라도 리어카에 솔솔 김이 나는 번데기 양푼을 싣고 와 짤강짤강 가위소리를 내며 아이들을 불러대던 엿장수 아저씨, 모래장수가 가져다주는 모래는 아니었지만 나 어릴적만해도 친정어머니는 모래나 연탄재로 녹그릇을 닦기도 했고, 책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더러운 오물위에 모래나 흙을 뿌려 치우기도 했다. 대리석구슬제조공을 보면서 어린날의 구슬치기를, 오줌세탁부를 보면서 우리동네 한 가운데 있었던 양말공장의 양잿물냄새를 생각해냈다.  왠지 모르게 무서워 가까이 다가가보지 못했던 넝마주이는 나 어릴적만 해도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필요했기에 생겨났을 많은 직업으로 인해 먹고 살 수 있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지금도 간혹 들려오는 '칼갈아요~~!" 하는 소리가 반가운 것도, 추운 겨울날 느닷없이 들려오던 '짭싸아알떠어억! 메밀무우욱!' 하는 소리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어쩌면 그 옛날의 향수를 담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 싶어 공연스레 웃음짓게 된다. 그 목소리따라 계절이 오기도 하고 가기도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아주 오래된 역사속의 유랑가수.. 우리에게도 마지막 서커스단이 문을 닫았다는 말을 들은지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책속에서 보여주었던 유모라는 직업이 낳았던 사회적인 병폐는 지금 보아도 씁쓸하다. 단순히 먹고 살기위해서라기 보다는 더 많이 갖기 위해 온갖 몹쓸짓을 했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인 듯 하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직업이 없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편함만을 추구할수록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사라져갈 것이다. 진화는 인간이 편리하기 위해 변해가는 모습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렇다보니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는 건 當然之事라해야 옳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다른 그림을 그려보게 된다.  옛날의 가마꾼이나 인력거꾼이 지금의 택시가 아니겠느냐고 말한다면 말이다. 사실 유럽의 이동변소꾼이나 나 어린시절 '똥퍼'아저씨의 일을 대신해주는 것이 지금의 정화조사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토록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던 숯쟁이나 양봉가 역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만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라는 것이 어디간들 그렇게 특별하고 유별날까? 사람사는 건 어디나 다 마찬가지고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한 건 없어보여 하는 말이다. 물론 사라져야 할 것도 있고 사라져갈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무엇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득 그리워진다. 간신히 올라탄 버스문에 매달려 엉덩이로 나를 밀어올리며 오라이 탕탕을 외치던 버스차장, 손수레에 배경화면을 싣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주던 사진사, 그것뿐일까? 어린아이들을 위해 손수레에 놀이기구를 싣고 다니던 아저씨, '머리키락 팔아요~~' 하던 아줌마 목소리, 고장난 우산을 고쳐주던 아저씨, 풀빵을 팔던 그 손길...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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