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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 조선 오백년 집권의 비밀
도현신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우선 왕의 시간표를 살펴보자. 새벽 4~5시경에 일어나서 6시경이면 왕실 웃어른께 아침 문안을 드린다. 7시경에 아침을 먹고 8시경부터 아침공부를 시작한다. 10시경에 조참朝參 또는 상참常參과 같은 아침 조회를 한다. 여기서 조참이라 함은 중앙의 문무백관이 한 달에 네 번 정전에 모여 임금께 문안을 드린 후 정사를 논하던 일을 말함이고, 상참이라 함은 중신과 시종관이 매일 편전에서 임금에게 정사를 아뢰던 일로 일종의 약식 조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1시경부터 오전 업무를 보는데 이 때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신하들과의 접견이 있었다. 정오부터 오후 1시경에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에 낮공부를 한다. 오후 3시경에 다시 신료 접견을 하고, 오후 5시경에 내의 야간 숙직자를 확인한다. 오후 6시경에 저녁공부를 하는데, 아침공부는 조강, 낮공부는 주강, 저녁공부는 석강이라 한다. 오후 7시경에 저녁을 먹고 8시경이면 다시 왕실 웃어른께 저녁 문안을 올린다. 밤 10시경에 상소문을 읽고 11시경에 잠자리에 든다. 가만히 따져보면 정말 놀 틈이 없다. 속된 말로 정말 빡세다.저런 시간표를 받아들고 딴짓할 틈이 있었을까? 아마도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왕이 좀 시끄러웠던 게 아닐까 싶다.
'전인적 공부법'이란 제목을 보면서 문득 인성교육이란 말을 떠올렸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말하는 인성교육.. 도대체 무엇이 인성교육인 것일까? 인성이라는 건 인간됨이나 인간다움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이 인간으로써 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인데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오질 않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추상적인 느낌이라서 그럴까? 그래서 全人的이라는 말을 찾아보았더니 知, 情, 意를 모두 갖춘... 뭐 이렇다. 공부를 함으로써 뜻을 정하고 가치관을 세우고,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일까? 그래서 인성교육에 대해 다시한번 찾아보니 인간이 가야할 올바른 길을 인도하며 나아가 全人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정말 어렵다.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며 산다는 게 그리 쉽진 않다는 말일게다.
어찌되었든 왕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계에 서연, 경연, 종학이 있었다. 서연은 왕이 되기 위한 공부를 말한다. 출생과 동시에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경연은 왕이 되고 나서 하는 공부를 말하며, 왕실의 종친 관리를 위한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종학이라 했다. 종학이라는 게 왕족만을 위한 공부이기도 했겠지만 왕이 되어 종친들로 인한 문제를 다루기 위한 일종의 처세를 가르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智,德,體를 강조 했다는 서연은 정말 대단하다. 일찌감찌 유아교육에 눈을 뜬 셈이다. 회강과 고강으로 복습을 하거나 시험을 치르기도 했으니 쟁쟁한 선생들에게 합격점을 받기가 녹녹치 않았을 테다. 왕이 되고나서도 경연을 통해 역사와 시사를 배워야 했다는 건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시 현실의 문제에 대한 답은 역사속에 있다는 말을 다시한번 인정하게 된다.
문답식과 토론식 공부를 했다는 것을 왜 우리의 교육 현실은 잊었던 것일까? 논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며 신하들의 논쟁조차도 허용했다는 왕의 열린 마음이 대체적으로 조선을 만들어낸 왕의 마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조선 왕들의 재위기간과 경연 횟수를 비교해 본 표가 재미있다. 물론 재위기간이 길어 경연의 횟수도 많을 수 있겠지만 재위기간과는 다르게 학문에 열중했던 왕의 모습도 보인다. 문종의 경우 2년이라는 재위기간동안 155번이나 경연에 참가했지만 철종의 경우 14년동안 4번밖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물론 상황에 따라 어느정도는 변수가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세종이나 성종, 중종, 숙종,영조와 같이 치세를 이룬 왕들만 보더라도 경연의 의미가 상당히 컸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당시부터 우리는 이미 선진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이었음에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점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나마 일방적인 주입식을 벗어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창의적 교육을 운운하며 내세운 교육이념이 오히려 논술이라는 파행을 불러오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해도 우리의 옛 선조들이 행했던 문답식과 토론식 교육을 갈고 다듬어 이 시대 혼란스러운 교육을 이끌어가는 이정표로 삼아주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