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삭 놀 청소년문학 10
시몬 스트레인저 지음, 손화수 옮김 / 놀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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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삭, '천국과 지옥 사이, 영원한 기다림의 장소'.. 천국과 지옥사이는 어디일까? 영원한 기다림만이 존재하는 장소, 거기가 어디일까? 주제넘게도 나는 지금 여기가 바로 그곳이 아닐까 한다. 많은 아픔이 있지만 많은 행복이 함께 공존하는 곳, 거기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곳의 사람은 천국을 꿈꾼다. 그리하여 영원한 기다림만을 바라볼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가 결정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다이어트만이 목적인 에밀리에에게 그린카나리아섬이라는 장소가 천국이었을까?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법 입국을 선택해야 했던 사무엘의 고향은 지옥이었을까?  서글프게도 그 두 곳에는 천국과 지옥이 함께 존재한다. 다만 내가 느낄 수 있는, 내게 느껴지는 것들이 다를 뿐이다.

굳이 청소년문학이라는 분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세대가 느낄 수 끼리끼리의 감정을 공유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그 세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걸 보여주고 싶었던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지났다. 사람이 태어나 유아기→동기청소년기청년기성인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 시기마다 정해놓은 법칙처럼 통과해야만 하는 어떤 의식적인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거라고...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아이들의 고운 심성을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었다. 지나쳐왔으나 지금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 심성을 되찾기 바랬는지도 모를일이라고...

에밀리에와 사무엘이 나누어 갖는 마음속에는 분명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피부에 와닿는 현실의 체감온도는 확실히 다를 게 분명하지만 우리가 외면하고 살아가는 그런 것들이 분명 아이들속에는 있는 것이다. 지독한 아픔은 차라리 아름답게 그려야 하는 것일까? 아픔을 아픔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 말하는 듯한 책속의 배경이 조금은 아쉬웠다. 어쩌면 희망이라는 단어를 숨겨두고 싶었는지도... 그래서 그 희망을 너도 한번 찾아보라고... 뻔하고 간단한 주제인데 어쩌면 나는 더 깊은 걸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뭔가 조금은 부족한 느낌으로 책장을 덮은 걸 보면.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마저 하지 못하고 돌아서버린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바르삭, 천국과 지옥 사이를 이르는 말.. 영원한 기다림의 장소.. 어디일까?  그다지 멀리있지 않은 듯 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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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문학 걸작선 1
스티븐 킹 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조지훈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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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문학 걸작선>이라는 제목을 보고  문학의 한 장르인줄로만 알았다. 요즘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말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다. 만들어지고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지는 이 세상의 온갖 것들속에서 찾아낸 또하나의 장르쯤? 이라고 생각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장르는 없었다. 다시 말해 종말에 관한 글을 모아놓았기에 <종말문학 걸작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그 종말문학을 찾다가 묵시문학이라는 말을 찾아냈다.  사람의 지혜로써는 알 수 없는 어떤 비밀이 은연중에 신에 의해 그 뜻을 나타내는 것을 묵시默視,  혹은 계시啓라고 하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이 종말에 관한 것이라는 거였다. 다분히 종교적인 냄새가 나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작금의 세태를 살펴보면 쉽게 무시할 수도 없는 말이 또한 종말이란 말이고 보니 문학쪽에서조차 종말에 관한 글을 다루기 시작했구나 싶어 조금은 씁쓸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그리면서 마치 한참이나 지나쳐버린 순간을 내려다보듯이 써내려갔다는 느낌이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을 만들어냈다. 희안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핑크빛으로는 그리지 않는다. 꿈을 꾸는 건 핑크빛 미래인데 그림은 왜 잿빛일까?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순일 것이다.  엊그제 신문지상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구절이 새삼스럽게 깊은 울림으로 전해져온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변해야 한다면 나부터다.-  왜 이런 말이 깊은 울림을 주고 간 것일까? 변화를 갈망하고 변해야 한다고 우리는 종종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어떻게 변해야하는가에 대한 틀을 말하지않고 그냥 변해야 살 수 있다고 목소리만 높인다. 중요한 건 나부터! 인데 다른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책속의 이야기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메세지가 바로 그 한구절과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폭력, 새로운 형태의 그러나 절망적인 지하세계, 시스템에게 조종당하는 우리의 일상, 폐허도시, 돌연변이... 우리가 두려워하고 나만큼은 피해가고 싶어하는 많은 것을 이 책속에 나열해놓았다. 어찌보면 현재의 우리 삶이 만들어가고 있는 미래의 삶일수도 있을거라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중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게 있다. 절망적인 지구의 미래를 아주 얇은 막처럼 형성된 작은 희망으로 살려내고자하는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영화인데 나는 그 영화를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너무도 아리곤 했다. 얼마전에 흥행되었던 <아바타>라는 영화도 있다. 그 영화의 메세지를 생각해본다. 종말 SF는 가상이든, 현실이든 지금까지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한 문학적 단죄의 측면이 있다던 책속의 말을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저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 최대의 오만과 편견을 누리며 살고있는 인간군상의 행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만 하다.

책속에는 공포문학의 거장이라는 스티븐 킹을 선두로 많은 소설가들이 등장한다. 하나같이 어두운 배경이다. 우리의 미래일텐데 너무 어둡다. 가끔은 난해한 부분도 보인다. 도대체 지금 우리의 현실속 무엇이 이런 결과를 유추하게 한거지? 의문점을 찍게도 한다. 가끔은 정말 그럴수도 있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저들이 상상하는 그 종말론적인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더 무서운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이미 빅브라더Big Brother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니 세상이 어쩌고 저쩌고 말할 게 아니라 변해야 할 것은 나부터! 라는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책속 세상과 같은 결말을 꿈꾸며 우리가 살아가는 건 아닐테니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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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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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을 그리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이 조금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선의 여인이 어디 난설헌 하나뿐일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의 연보를 보니 노년의 나이다. 어쩌면 그동안 감춰두고 살았던 자신의 속내를 은근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부모님 세대까지는 어쩔 수 없는 형식의 굴레안에서 살아야했을테니 하는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 형식의 굴레에 묶여 허덕이는 여인의 모습이 너무도 안스럽게 그려져 있다. 난설헌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조금은 지나치게 느껴져 아쉬웠다. 사실 조선은 여인에 대해 그다지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 여인을 옭아매기 위한 말도 너무나 많았다. 오죽했으면 三從之道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이며 깊게는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가 바로 조선이었다는 말이다. 그토록이나 많은 인물이 나왔다는 선조代에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허엽도 있었다. 남존여비사상이 조금씩 고개를 들던 시기였으니 허엽이 자신의 딸에게 당당하게 학문을 익힐 수 있게 해 주었던 일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기안으로만 파고들던 난설헌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난설헌은 그의 이름보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라는 것으로 더 유명한 듯 하다. 그래서그런지 허균만큼이나 글을 잘 지을 것 같다는 어설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한 줌의 재로 남을 뻔했던 그녀의 시가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져 있다고 하니 그녀가 살았던 고집스러운 세월에 대한 어느정도의 보상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서는 그녀의 학문적인 소양이나 소질을 말하기보다 일상적인 여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16세기 조선의 풍속사 또한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시집가는 날 비가 오면 어떻다더라 하는 식의 미신에 가까운 의식도 그렇고 함이 들어오는 날의 풍경이라거나  전통적인 혼례식 장면, 시집으로 들어가는 신행길과 같은 풍경이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그려진다.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는 그녀는 이미 여덟살에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거기다가 백옥같은 용모까지 가졌다. 재주있는 여자가 아름다운 용모까지 가졌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을까?  요즘과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그것은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을테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불행이라면 불행이었을 것이다. 후대의 실학자 박지원마저 여자가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아 재주있는 여자들은 난설헌의 삶을 경종으로 삼으라는 말을 했다는 것만 보아도 여성의 재주는 그다지 환영받을 수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을 살아낸다는 게 그리 녹녹치 않은 것이다. 조금의 타협도 찾아볼 수 없었던 팍팍한 그녀의 현실이 닫힌 문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자신의 뜻을 맘대로 펼칠 수 없다는 답답함과 너그럽지 않은 주변의 시선들은 그녀의 삶을 조여오는 올무와도 같았을테니 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 얘기하듯이 남편 김성립이 급제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지만 가정에서 편안함을 찾지 못하고 밖으로만 돌았다고 한다. 조금만 타협했더라면, 자신의 아픔을 바라보듯이 주변의 소리를 조금더 열린 가슴으로 들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이, 아버지의 객사와 오빠와 동생의 귀양과 같은 친정의 슬픔, 감싸주지 못하는 남편의 사랑, 좋지않은 고부간의 갈등등이 그녀를 외롭게 하여 끝내는 밀쳐두었던 서안을 가까이할 수 밖에는 없었겠지만, 그런 연유로 하여 멋진글이 탄생할 수있었다는 것은 정말 역설적이다.  어쩌자고 가슴에 촛불을 밝혔느냐던 친정어머니의 애타는 심정이 느껴진다. 그 촛불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결혼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던 그녀의 절규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그리워했던 최순치라는 남자의 이름앞에서도 변함이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걸 어쩔 수가 없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며 사는 것만이 옳다는 건 아니다. 난설헌의 삶을 통해 여인들의 지독한 고통만을 그려냈기에 하는 말이다. 가슴아픈 소설이었다. 한여인의 삶을 통해 이렇게나 절절한 느낌을 전해받을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버려진 이름, 버려질 수 밖에 없었던 이름이었으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또다른 의미로 그녀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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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마르탱 파주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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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존재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지금 내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일까? 이따위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왜 사는 것일까? ... 짜맞춘듯한 지성이 싫어서,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되어지는 인격이 싫어서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탈출시키고자 하는 한 남자가 있다.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그가 처음 선택했던 알코올 중독자되기는 맥주 반잔에도 알코올 과민반응을 보이는 육체적인 한계에 부딪혀 포기해야 했고, 두번째로 선택했던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들었던 자살강의는 어떻게 자살할 것인가를 확실하게 알게 해주긴 했으나 자살에 대한 생각을 없애버리고 말았다. 살고 싶지 않았지만 죽고 싶은 마음도 없던 그가 바보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앙투안...
 
그의 바보선언문을 살펴보자. 단순한 사람은 행복하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작용이 아니다, 장수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은 전혀 지적이지 않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회적인 자살이다 왜냐하면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까발려지고 벗겨져 종종 그것을 죽이게 되기 때문이다, 지성은 곧 질병이다 왜냐하면 생각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까닭이다... 이 바보선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정도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한 사람은 복잡한 사람에 비해 행복하다는 그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는 약간 정신을 놓고 원인이나 진실, 현실따위를 모른채로 살고 싶어 했다. 현실을 모른 채 그냥 살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건 현실도피가 아닐까? 세상의 편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고, 매사를 분석하고 껍질을 벗겨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기를 바랬다. 다시한번 들여다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주제가 아닐까 싶어서.
 
사실 바보가 되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만들어진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면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삶이야 말로 바보스러운,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바보처럼 산다는 말에 왠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지금의 현실은 너무나도 각박하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것들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말일 게다. 때로는 바보스럽게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여기 이 책속의 남자 앙투안이 꿈꾸는 삶이 어쩌면 그 자연스러움의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이들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유령놀이가 어쩌면 우리에게도 필요한건 아닐까? 다른 사람의 판단이 나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버튼이라고 말한다면 억지일까? 바보가 된다는 것은 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앙투안이 꿈꾸었던 바보는 남에 의한 내가 아니라, 나에 의한 나로써 살고 싶어했던 욕심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끝없이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면서도 현실은 몰개성화 되어가고 있는 아이러니라니...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진정한 바보가 될 수있다면 오히려 행복한 삶에 한발짝 다가가는 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하지만 책속의 말이 나의 생각에 비수를 꽂는다. 인생은 수표와 신용카드를 먹고 사는 동물이다(-134쪽), 가장 쉽게 부패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임을(- 151쪽)..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던 앙투안은 그 뒤로 별탈없이 행복하게 살았을까?
 
마르탱 파주의 <완벽한 하루>를 읽고 색다른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한번 더 그의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은 쉽게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는 게 더뎠다. 이제 막 글을 배운 사람처럼 더듬거렸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도 '난해하다'라는 말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수도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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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풍수 인테리어 - 복과 행운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Mr. 류 지음, 김소라 옮김, 곽민석.김윤곤 감수 / 황금부엉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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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水地理 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땅의 생김새나 방향을 사람의  吉凶禍福과 연결시키는 것인데,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경우가 집을 짓거나 무덤을 정할 때가 아닌가 싶다. 옛날에만 풍수사상의 지배력이 컸던 건 아니다. 말은 안해도 은근하게 따진다는 풍수... 그런데 실내장식을 하는데도 풍수를 따져야 한다니 궁금하기는 하다. 대체적으로 풍수사상을 말하다보면 음양오행설이 함께 따라 나온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처럼 말이다. 가까운 고궁엘 가보아도 건물 하나하나를 그냥 세우지 않았다는 걸 알 수가 있는데 그것도 음양오행설과 풍수가 함께 아우른 결과물일 것이다. 좋다하면 뭔들 못하겠나 싶으면서도 가구 하나도 내 맘대로 놓을 수 없는거냐는 반발심도 은근하게 생겨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돈이 들어오고 저렇게 하면 아프지 않고 그렇게 하면 출세를 한다고 하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사람의 심리일테다.

이 책에서 다루어주는 건 현관풍수다. 모든 집의 첫관문인 현관.. 그 집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곳이 바로 현관이라는 말도 있듯이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현관이 사실 보기좋은 건 아니다. 풍수를 떠나서 현관만큼은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며 사는 습관을 갖는다면 아마도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정리정돈을 그냥 하지말고 풍수를 생각하며 하라고 한다. 현관의 방향에 따라  배치해야하는 것들도 달라진다는 말이다. 우측에는 무엇을 두면 좋은지, 좌측으로는 무슨 그림을 걸어두어야 좋은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어떤 장식품을 놓아야 행운을 불러 들일수 있는지.. 또한 색도 서로 궁합을 맞춰준다면 금상첨화란다. 자신에게 맞는 색이 어떤 색인지 알 수 없으니 그것조차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현관은 吉凶禍福이 동시에 들고나는 곳이다. 기왕이면 복이 들어오게 하고 들어온 복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현관풍수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함께 있으니 물론 나쁜기운도 함께 들어온다. 그렇다면 그 기운을 어떻게 하면 약하게 할 수 있는가를 따져 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이 말하는 현관풍수의 일부분에 속한다.

내가 태어난 출생연도에 따라 좋은 방위나 좋은 색은 달라진다. 심심풀이 삼아 한번쯤은 뒤적거려봐도 괜찮을 것 같다. 밑져야 본전이다. 각설하고, 이 책에서 다루어주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한번 살펴보자면 이렇다. 돈이 모이는 현관 만들기도 보이고 항상 건강한 현관을 만드는 방법도 보인다. 氣의 성질을 알고 액운을 떨쳐낼 수 있도록 가구 배치를 한다거나 방을 배치하는 방법등도 말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청소하기가 아닐까 싶다. 일단은 깨끗하게 정리하는 결과를 가져오니 굳이 풍수를 미리 따지지 않아도 늘 개운하게 청소하는 습관을 갖는다는 건 좋은 일임에 분명하다. 깨끗한 것이 운기를 향상시킨다고 하니 명심할 일이다. 오래전에 현관에서 바로 부엌이나 화장실이 보이는 구조는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상적으로 우리 곁을 맴도는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식의 말은 많지만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는건지를 알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정말 그럴까 싶은 말도 있었지만 모든 건 자신이 할 탓이다. 현관이 행복하면 왜 행복해지는 건지 머리말에서 이야기하고 넘어갔듯이 우리가 조금만 더 몸을 움직여 주변을 항상 깨끗하게 유지한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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