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정원에는 코끼리가 산다
마이클 모퍼고 지음, 마이클 포맨 그림, 김은영 옮김 / 내인생의책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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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끔직한 참사로 기록되었다는 드레스덴 폭격이 배경이다. 무서운 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삶이다. 히로시마 원폭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드레스덴 폭격은 현재의 후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고 정반대의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잔혹함속에는 그 전쟁의 잘못됨을 인정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막아 주었던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미 영화나 책으로 소개되었던 이야기말고도 묻혀진 이야기는 많을 것이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전쟁의 모습.. 이 책속에는 그 전쟁의 불길속에서 살아남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마치 실화처럼 느껴지는 내용이 마주막까지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도 어쩌면 실화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렸.

 

글을 쓴 사람이 같은 까닭인지 일전에 읽었던 <워 호스>의 느낌이 내내 나를 따라왔다. 동물을 등장시킨다는 게 우리에게는 왜 잔잔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처럼 계산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까닭일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눈물과 웃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마음을 여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그 존재가 아기코끼리라면?  그러니 <워 호스>에서 등장했던 말이나 이 책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살아남아 주인공들의 마지막을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은 그들도 좋아할 것 같다. 그나저나 덩치 큰 코끼리가 어떻게 그 불바다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책을 읽고나서 드레스덴 폭격을 다시한번 찾아보았다. 연합군이 독일의 드레스덴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은 사건인데, 그 결과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이 거대한 화염폭풍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으며, 드레스덴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단일 폭격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이 보인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유서 깊은 도시는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던 까닭에 희생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 희생자의 수를 합하면 모두 35,000명 정도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숫자다. 지금까지도 비인도적인 처사로 비난받고 있다는 드레스덴 폭격이 책의 중심 배경이지만 그 참혹한 모습은 생각처럼 많이 그려지지 않았다. 단지 코끼리를 포함한 한 가족이 어떻게 그 불길로부터 피해갈 수 있었는지가 이야기의 중심 흐름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동화다. 그 커다란 코끼리를 어떻게 정원에서? 오래전의 기억을 회상하는 리지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거짓말 같은 이야기도 누군가 들어주기로 작정한다면 생명을 얻게 된다. 그렇게 코끼리는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병상에 누워있던 할머니의 기억속에서부터. 그리고 그 코끼리의 여정을 따라가는 기분은 끝까지 훈훈했다. /아이비생각

 

 

 

당시 폭격당했던 드레스덴의 실제모습이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나중에 재건 할 때도 수많은 시체가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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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사랑
전경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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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다. 2년만에 만나는 거라고해서 반가움에 덥석 손부터 내밀었지만 한쪽에서는 내심 걱정스럽기도 했다. 전경린... 그녀의 이름은 왠지 모르게 무겁다. 그녀의 이름을 앞세워 만나는 작품은 왠지 쓸쓸하다. 삶의 언저리를 돌며 우리의 아픔을 직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숨기고 싶은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더 마음을 사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속마음을 파헤치고자 작심하고 달려드는 작가에게 내 마음을 들켜버릴까봐 늘 노심초사다. <최소한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앞에두고 이미 나는 기싸움에서 밀려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너무 쉽게,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없이 툭툭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거라는, 아주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그 말.. 그러나 어느 누구도 쉽게 따라하지 못하는 그 진실을 어쩌면 이 책속에서 마주치겠구나 싶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우울증에 시달린다. 조급증에 시달린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의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고 했던가? 무엇이고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결핍에 시달리는 이상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그 결핍의 원인을 똑바로 바라보려하지 않는 듯 하다. 두려운 까닭이다. 숨기고 싶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칠까봐 주춤거리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 숨어버린 또하나의 자신과 만나야 한다고, 그렇게 해야만 그 결핍을 채울 수 있다고 에둘러 말했던 많은 소리를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주인공 희수가 어린 시절에 잃어버렸던 배다른 동생 유란을 찾아나서고, 유란이 머물렀던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 사실은 일부러 잃어버린 동생이었다. 새엄마의 딸 유란은 그렇게해서 결국 희수의 집에서, 희수의 삶속에서 버려졌다. 자신의 죽음앞에서 딸을 찾아달라던 새엄마의 부탁이 있었다는 건 어쩌면 하나의 핑게였을지도 모르겠다. 유란을 버렸던 그 날부터 그녀의 마음도 이미 닫혀버렸기에.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잔인한 거예요. 힘들지 않고 사는 존재가 어디에 있어요?"

 

말처럼 어차피 살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잔인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잔인함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더 잔인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유란은 너무도 긴 시간동안을 아팠다. 사랑을 하면 더 아파지는 병.. 사랑을 하면 쇼크가 일어나는 희귀병.. 그랬어도, 그렇게 힘들었어도 끝없이 사랑을 갈구했던 유란의 아픔은 버림받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만물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은 가슴 깊숙한 통증을 느끼게 한다. 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이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던 어떤 스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조차 내 것이라고 당당하게 소리치며 가질 수 없었던 유란과 희수는 어쩌면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가 여기서 기다린다고 유란에게 전해주세요."

 

그 때 그렇게 너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었다고, 그러니 지금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돌아와 달라고 희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린 유란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다시 찾아갔던 그 성모상 아래의 그림자가 왜 그렇게 깊었는지를 이제는 안다고. 희수가 유란을 찾아가 머물게 되는 북쪽 끝마을 파주는 추웠다. 생면부지의 그 장소에 자신을 내려놓고 차츰 유란처럼 되어가는 희수의 일상속에서 나도 희수처럼 유란의 속마음을 보았다. 유란을 기다리며 유란을 대신해 살아가던 날들은 닫혀져 있던 희수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유란을 기다리는 동안 또하나의 자신과 만나게 되는 희수의 여정이 나를 아프게 했다. 내가 희수가 되고 유란이 되고, 과거가 되고 현재가 되었다.

 

<최소한의 사랑>은 상처를 준 사람과 상처를 받은 사람의 이야기다. 우리는 끝도없이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건 상처를 입었다는 것 뿐이다. 상처를 입었다면 나도 그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을거라는 건 외면해버린다. 유란에게 이제는 혼자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던 희수처럼. 솔직히 말해 작가가 파놓은 우물이  너무 깊었다. 두레박을 어느정도나 내려야 하는지 가늠하면서 그 우물을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이다. 약간은 환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던 작품속의 공간이 내게 온전히 느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 내게 필요한 것, 아니면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책속에서 상담사가 했던 말을 다시한번 찾아본다. 모든 문제를 최소한의 것들을 되찾게 해서 푼다던.. 많은 고통과 상처가 가장 최소한의 것을 지키지 못해 생긴다던..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데 최대한의 욕망을 품어 스스로를 아프게 한다는.. 내게도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 최소한의 사랑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위하여.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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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아랑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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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읽었던 전래동화는 재미있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어른이 되어 읽어도 재미있다는 거다. 그 내용의 황당함에 코웃음을 치고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상황들을 보면서도 그다지 싫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실 전래동화는 권선징악의 구도다. 모진 풍파를 헤쳐가며 살아가야하는 어른들의 세계는 그 단순한 구도가 먹히지 않는다. 착하게 살면 나중에 복을 받는다? 그런 결말을 보장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오죽했으면 어린시절에 나쁜 역할을 맡았던 놀부와 팥쥐같은 캐릭터가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데는 더 긍정적이었다는 말이 나올까? 같은 이야기라해도 순수하게 받아 들였던 어린 날의 마음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처절한(?) 어른의 세계도 저렇게 권선징악의 구도로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숨겨두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래서일것이다. 여전히 고전에 이끌리는 이유는.

 

모던보이나 모던걸과 같은 수식어처럼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전래동화의 모습은 이채로웠다. 그냥 뒤집기정도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단순하게 어떤 반전만을 기대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하나의 동기가 되어준 우리의 고전은 옛맛과 현대의 맛이 어울려 묘한 느낌을 내게 전해주었다. 아하,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는거였구나 싶었다. 여기에 인용된 전래동화는 금도끼 은도끼, 심청전, 할미꽃전설, 토끼전, 북두칠성, 아랑전이다. 제목만 들어도 다 알 수 있는 어린시절의 향수다. 그런데 작가는 그 향수속으로 빠져들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네 도끼냐? 하고 묻는 연못속의 신령님 물음에 제 도끼는 쇠도끼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지만 그 도끼를 통해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해야 할 메세지는 분명히 달랐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이 싯점에서 인간의 수명조차 태어날 때 유효기간이 정해진다는 설정이 오싹하게(?) 느껴졌던 북두칠성은 오래전에 보았던 어떤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의 복제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시설을 탈출하는 그 영화는 보는 내내 껄끄러웠었다. 인간의 오만이 어쩌면 저런 세상을 만들어낼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서. 하지만 우리의 전래동화가 어떤 것인가? 단순히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별을 노래하고 함께 나눈 정을 그리워하는 마지막 설정은 못내 안타까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동화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슬프다. 그 슬픔을 '아름답다'는 틀에 가두어 그것을 '바보같다'고 느낄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전혀 아름답지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는 동화는 여전히 아름답다. 한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 형제의 동화는 원작과 다르다는 말과 함께 무서운 동화, 잔혹동화라는 말이 떠돌았던 적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것'에만 촛점을 맞춘 탓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동화도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옛날이야기라는 것이 굳이 윤리적이고 교육적이어야만 한다는 규칙은 없는 까닭이다. 옛날 옛날에~~~ 라는 말 뒤에는 어떤 내용이 따라붙어도 괜찮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은 온전히 듣는 사람의 몫이다.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무섭고 잔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기대하시라, 짜자잔~~ 하고 나타날 그 어떤 것에 대한 설레임은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나만의 것이기에.

 

한마디로 말해 <모던 아랑전>은 은근히 오싹하다. 군데군데 이야기의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는 공포스런 분위기의 그림도 단단히 제 몫을 한다. 하도 강한 것들이 많이 나오는 세상이다보니 그 그림을 보고 겨우 이런걸 보고? 라고 말할런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새로웠다. 작가의 전작이라는 <모던 팥쥐전>도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어떻게 그렸을지 궁금하다. 아울러 그림형제의 잔혹동화 역시 그 본모습이 궁금해진다. 편협된 나의 개념에 한방 먹인 책이다. 아우를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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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테이키 作庭記 - 일본 정원의 미학
다치바나노 도시쓰나 지음, 김승윤 옮김, 다케이 지로 주해 / 연암서가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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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天圓地方의 원리를 잘 따르고 있다는 우리의 전통정원양식속에는 陰陽의 조화도 숨겨져 있어 가만히 살펴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방향까지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나무 한그루 심는 것조차도 많은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정원을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게 자연과의 어울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동화되어 그 안에서 살기를 바랐던 선조들의 지혜는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없지만 그 뜻만큼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을 뽑으라하면 단연 창덕궁 후원일터다. ( 비원이라는 말을 굳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해도 왠만하면 후원으로 불러주자..) 그 창덕궁 후원이 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최대의 장점을 제대로 살렸다는 것인데 한번 가보면 왜 그런 수식어가 붙었는지 대충은 짐작하게 된다. 일부러 만들지 않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신의 정원인양 그렇게 품어안은 모습이 보기에도 흐뭇해진다. 그런 반면 슬그머니 옛사람들은 참 욕심이 많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렇다하게 울타리를 치지 않았으면서도 나만의 정원이라고 뒷산을 품어 안았으니 말이다. 거기에서 피고지는 온갖 꽃과 나무를 제 것인양 보고 즐겼으니 그만한 호사가 따로 없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왕년에 한가락 했다는 상류층의 옛집에서 어김없이 꾸며진 정원을 만나게 된다. 어떤 정원이 제대로 된 정원인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들어섰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 있다. 풍류를 제대로 즐길 줄 알았다던 옛사람들의 취향이 그대로 들어나는 정원도 있다. 오래전 외암리 민속마을을 찾았을 때 송화댁과 건재고택의 색다른 느낌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을자체도 그랬지만 집집마다 연결되어진 물길이 이채로웠다. 송화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 솔향기에 흠뻑 취했을 때 집안의 마당을 가로지르는 작은 시내를 보고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우리의 전통정원 양식인 天圓地方의 원리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듯 하지만 건재고택의 정원은 일단은 그 꾸밈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어떤 형태를 취했는지도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어떠랴 싶었다. 그저 좋았으니까. 그만큼 정원이라는 의미는 우리에게 편안함과 포근함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곳이 아닌가 싶다.

 

이 책 <사쿠테이키>는 바로 그런 정원을 만드는 방법을 기록해 둔 책이다. 作庭記さく헤이안시대의 일부 귀족층을 위해 만들어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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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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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고 싶다는 딸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남들 놀 때 놀고 남들 일할 때 일하는 그런 직장에 다니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종목이 써비스업이긴 하지만 외국계 회사로 내가 볼 때는 괜찮은 회사였는데 단지 그 이유때문이라고 하니 친구가 속앓이를 할 만했다. 게다가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중의 하나라는데... 도움을 요청하기에 만나서 한참을 설득아닌 설득을 했었다. 정 그렇다면 사직서는 내지 말고 새벽에 학원을 다니면서 자신을 한번 시험해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나의 말에 그러면 일단 그렇게 해보겠노라는 확답을 받아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녀석 지금은 그 회사에서 잘나간다. 승진도 했고 어느정도는 시간도 자신에게 맞출 수 있을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지금은 모녀가 그 때 말려줘서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이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게 그리 녹녹치 않다는 말일게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판단과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내 몫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에게 존재한다. 내가 그 때 저 길로 갔더라면... 내가 그 때 저것을 선택했더라면... 그게 사람일테다.없는 선택과 후회가 충돌하며 시간을 꾸며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TV에서 자주 보이는 광고카피가 생각난다. 더럽고 치사하다고 사표내야겠다는 직장인과 취직을 해야 사표를 쓰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고 말하는 백수, 뒹굴거리는 백수를 보며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군인, 그 군인들을 바라보며 저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직장인. 거기다 하나 더 보탠다면 커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그린 광고가 그렇다. 누구나 그 상황에 닥쳐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알 수없는 울림이 내게 전해져왔다. 어느날 갑자기 백수가 되어버린 남자의 시간은 오롯한 아픔이다. 그 아픔이 주인공 영수만 느낄 수 있는 아픔이 아니라 지금 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모두의 아픔일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무슨 상을 수상했는지, 어디에 응모되어 당선된 작품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선되었다는 그 자체는 이미 그만큼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도 될테니까. 그래서 보기좋은(?) 앞의 수식어는 떼어내 버리고 그냥 내용에만 관심이 간다고 하면 삐딱한 시선일까? <굿바이 동물원>은 정말 기대이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아픔을, 이미 곪아버린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비켜가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느닷없이 백수가 되어버린 남편으로 인해 마트 계산원이 되어 출근하던 아내는 말한다. 그렇게 놀거야? 마늘이라도 까지? 그 날 이후로 우리의 주인공은 마늘까기, 곰인형눈알 붙이기, 바비인형 속눈썹 붙이기의 달인이 되어간다. 그런데 묘하다. 곰인형눈알을 본드로 붙여한다는 그 설정이. 본드 흡입으로 인한 환상의 세계는 그에게 색다른 세상을 보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무너진다면 우리의 주인공이 아니다. 2대 1의 경쟁(?)을 뚫고 다시 얻게 된 직장. 그 직장이 또 묘하다. 단순히 동물원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진짜같은 가짜가 되는 일이 그에게는 버겁다.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원의 우리속에서 동물처럼 행동하며 관람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는다. 그 동물원이라는 배경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 동물원에 동물로 취직된 사람들 또한 바라볼수록 아프다. 세상이 나를 구경하는 것인지, 내가 세상을 구경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을 읽다가 잠시 책표지의 남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쓸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표정속에서 내가 눈치챌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울고 싶으나 차마 울지 못하는 고릴라 탈속의 저 남자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욕이 앞서 바나나를 너무 먹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도, 못된 관람객에게 쿡쿡 찔림을 당해도, 동물앞이라고 부끄럼없이 끈적한 장면을 연출하는 남녀를 바라보는 것도 그에게는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철장 안에서나 철장 밖에서나 모두가 관람객의 입장일 뿐이라는 게 어쩌면 우리의 현실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바라보는 입장으로만 살아가니 제 아픔을 모르고 살아가는 거라고....

 

책을 다 읽었는데도 책장을 덮고 싶지 않았다. 책장을 덮으면 책표지의 남자와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게 왠지 껄끄러웠다. 다시 마주치면 나도 그 동물원의 철장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 할 것만 같았다. 같이 느낄 수 없는 그 아픔에 공연스레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한줄기 빛처럼 나를 찾아왔던 건 마지막 장면이었다. 임신한 아내에게 다가가 철장 밖으로 손을 내밀어 고릴라를 만져보고 싶다는 아내의 평생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 그리하여 아내가 자신의 손을 잡으면서 활짝 웃었다는 것. 희망의 빛이라는 건 순간일지라도 설렘을 안겨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한 것일까?  어설픈 첫인사와 함께 영수에게 찾아왔던 새로운 인연들. 그 관계속에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정이 있었다. 저마다의 아픈 사연을 안고 동물의 탈을 쓰게 되었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꿈을 놓지않는 그들만의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격려와 다독임이 있어 좋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마음의 소통이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그럼 동물처럼 사냐? 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한다면 과연 몇이나 될까?  괜찮았다. 오랜만에 멋진 소설을 읽었다. 다 읽고도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어설픈 위로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다.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진실한 마음 나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행복한 인생 통장' 까지도 깨면서 서로의 마음을 믿어준 영수와 그 아내처럼. 그런데 내내 궁금한 존재가 하나 있다. 그 돼지엄마는 누구였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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