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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무선) ㅣ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우리에게 金閣寺라고 불리워지는 긴카쿠지(きんかくじ)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다. 원래의 이름은 鹿苑寺였는데 누각의 3층인 舍利殿에 금박을 입혀 金閣이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지게 되어 金閣寺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절은 본래 무로마치막부 시대의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쯔가 1397년에 지은 별장으로, 그의 유언에 따라 녹원사라는 禪宗사찰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3층 건물로 되어있지만 각층마다 건축양식의 시대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1층은 후지와라기식으로 침전과 거실로 쓰이며, 2층은 가마쿠라기식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셨고, 3층은 당나라 양식으로 불전으로 쓰인다. 그 중 2층과 3층에 금박을 입혔다. 1950년 그 절에 있던 사미승에 의해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55년에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의 내용이 방화범, 그 사미승의 이야기다. 일종의 팩션인 셈이다. 놀라운 것은 미시마 유키오가 이 소설을 쓴 이후로 일본내에서 金閣寺라는 절이 유명해지게 되었다는 것인데 지금도 매년 교토 시민들의 세금으로 금박이 보수된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진즉부터 이 책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런데 왜 이제사 읽게 된 것인지... 인간의 내면과 거리낌없이 마주하는 것이 일본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까닭인지 상당히 몰입이 잘되었다. 1인칭 소설은 종종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속내가 어느 정도는 가미되어있는 듯 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뒤에 부록처럼 붙어있는 작품해설을 보면서 역시나, 했다.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와 소설속의 주인공 미조구치가 어느정도는 일치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13세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의 삶도 그다지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세 차례나 거론되었다던 그가 1970년에 일본 자위대 주둔지에서 자위대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고 할복했다고 하니....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지가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탐미주의 문학의 걸작이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문득 그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50년에 일어난 실제 방화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였다는 이 소설의 뒷맛은 쓸쓸했다. 못생기고 말더듬이라는 외적인 조건으로 인해 내성적이 되었다는 주인공 미조구치의 고독한 삶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미조구치가 만들어낸 金閣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우리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그 어떤 것의 절규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삶의 여정속에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살아간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가해자라는 사실보다는 피해자라는 사실에만 주목하며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배신이라거나 배반이라는 말의 이면속에도 피해자로써의 입장만을 강하게 각인시켜 놓았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니?" 친구인 가시와기와의 대화속에 등장하는 '인식'과 '행위'에 관한 부분이 시선을 끈다. 삶을 견디기 위해서 인간은 인식을 무기로 삼게 됐다고 할 수 있지. 동물에게는 그런 건 필요 없어. 동물에게는 삶을 견딘다는 의식 따위는 없으니까. 인식은 견디기 힘든 삶이 그대로 인간의 무기가 된 거지만, 그러면서도 견디기 힘든 것이 조금도 경감되지 않아. 그것뿐이야. (-312) 힘겨운 방황속에서 무언가라도 잡고 싶었던 미조구치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너무도 야멸찬 가시와기의 말속에서 서로를 향한 현대인들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방화를 결심한 미조구치가 스님에게 물었었다. 그러자 스님이 대답했지.
"남들에게 보이는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걸까요?"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아. 하지만 유별난 짓을 저지르면 또 남들은 그렇게 봐주지. 세상은 건망증이 심하니까"
"남들이 보는 저와, 제가 생각하는 저와, 어느 쪽이 오래 지속될까요?"
"어느 쪽이건 곧 멈추지. 무리하게 결심하고 지속시켜도 언젠가는 멈추게 되지. 기차가 달리는 동안 승객은 멈추고 있지. 기차가 멈추면 승객들은 거기서부터 걸어야만 해. 달리는 것도 멈추고 숨도 멈추지. 죽음은 휴식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거든."
"저를 꿰뚫어 봐주십시오" "저는,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제 본심을 꿰뚫어 봐주십시오."
"꿰뚫어 볼 필요는 없어. 전부 네 얼굴에 나타나 있으니까."
선문답같은 미조구치와 스님의 대화가 마음을 빼앗아가고 말았다. 불현듯 看話禪의 한 방법이라는 '이 뭣고!' 라는 말이 떠오른다. 金閣을 불태워버리겠다고 다짐하던 미조구치의 내면에서 부글거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金閣과 함께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하던 미조구치가 불속에서 도망쳐 나와 담배를 피우며 중얼거리던 '살아야지', 라는 그 한마디에서 왜 그토록이나 강한 절박함이 느껴졌는지... 알 수 없다. 스님을 향하던 미조구치의 질문이 서글픈 여운을 남긴다. 昨今의 현실속에서는 보이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