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과학도에게 그날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상대성 이론을 일반인에게 어떻게 설명하실래요?”

그랬더니 그는 쌍둥이 이론을 펼쳐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 설명이 뭔가 추상적이면서도 장황히 느껴졌는데, 이유는 본인이 지극히 평범한, 과학의 문외한이었음에 다름 아니겠다.

그런 나 역시 영화를 보기 전에도 ‘나비 효과’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도 개념 정도는 이해했지만, 그건 어쩌면 ‘카오스 이론’이나 ‘상대성 이론’을 인지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일지 모른다.

요컨대 '나비 효과'의 기본 플롯은 가정과 선택의 문제이다. 이러한 점은 ‘슬라이딩 도어즈’를 연상시키지만 그닥 해피엔딩을 애써 추구하려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며, 회상을 통한 기록으로 실마리를 찾아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메멘토’를 떠올리게도 한다. 스스로에겐 그만큼 머리를 쓰게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고마운(?) 영화였으며, 다큐멘터리가 아닐 바에야 영상물의 기본 자질이 재미라면 상당히 흥미롭게 본 작품이기도 했다.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러한 의문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가령, 정신병자가 아닌 평범한 대학생이었다면? 어린 시절의 추한 기억들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현재가 아닌 그녀와 한번이라도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이런 의문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엄청난 파급으로 다가온다. 행복한 대학생이 또다른 인생의 방해꾼을 만나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포르노를 찍는 나쁜 어른에게 일침을 가할 수는 있어도 이미 연인은 죽게 돼버리는 식이니까 말이다. 혹 연인을 구할 수는 있어도 자신이 희생자가 되어 불구의 삶을 산다거나 친구에게 여자를 빼앗겨버리는 식이다. 이 얼마나 부조리한 현실인가. 완전한 해피엔딩은 고전 소설이나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허무하다.

인생의 정점에서 돌아볼 때 과연 얼마나 행복을 자각할 수 있을까. 아마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허나 미각을 느끼는 인간의 미뢰가 짠맛만 희미하게 감지하는 노년에도 인생의 굴곡을 바꾸려 몸부림 친 젊은 날을 과연 거시적으로 성찰하게 될까, 하는 부분에선 회의적이다.

아니, 오히려 작은 단맛들을 무미하게 지나치게 되고 말지는 않을까.

그러나 나는 주인공처럼 허겁지겁 현재를 일기장에 기록하지는 않겠다.쓰레기와 같은 현재 때문에 미래를 바꾸려 안간힘 쓰다가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정신 병자가 되어 방치될지 모를 일이다.

쓰레기는 본인이 손수 치워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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