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동산 - 체호프 희곡선집, Mr. Know 세계문학 50 Mr. Know 세계문학 5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주문한 책을 받았을 때 언뜻 떠오른 건 봉평의 이효석 전시관에 있던 이효석의 친필 원고인 체홉의 <벚꽃 동산>이었다. 거기서 그가 유진오와 교류했던 편지들을 보며 든 생각은 <메밀꽃 필 무렵>에서 시적 언어를 구사했다는 이효석 역시 한 때 사회주의를 동조한 동반 작가였고 보면 국내에서 1920년대의 사회주의란 혹여 지식인들 사이에 일종의 장식품으로 기능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었다. 체홉은 사회주의라기 작가라기보다 사실주의에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 심리나 인간이 사회로 인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를 내밀히 관찰하는 것이 사실주의라고 한다면 두 사상은 마치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행에서 파생된. 문학이 사회나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면 체홉의 인물들은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는데 더없는 소재가 될 것 같다.

지식인들

단편 소설이나 장편 희곡이나 그의 작품에서 우선 눈에 띄는 캐릭터의 특징은 지적(知的) 계급이란 점이다. 이 책엔 실려 있지 않지만 <세 자매>에서 장교 베르쉬닌이나 <갈매기>의 작가 뜨리고린, 지적인 여배우 아르까지나 그리고 작가 꼬스차 <바냐 아저씨>에서 퇴직 교수인 세례브랴꼬프 등이 그러하다. 그들은 천박한 언행을 경멸하며 예술을 통해 정신을 고양시키려는 인물들이다. 이는 작가가 되려는 꼬스차에게 조언하는 의사 도른의 대사에서도 충분히 드러난다. 체홉 자신이 의사 신분이었으므로 어찌 보면 그는 주변 인물들을 그렸는지 모를 일이다.

 

도른 : 그래요. 중요하고 영원한 것만 그리기 바랍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까지 원하는 대로 잘 지내왔습니다. 만족하지요. 하지만 예술가가 창작을 할 때에 느끼는 것과 같은 그런, 정신이 고양되는 순간을 체험했다면 나는 아마도 이 물질적인 겉껍질과 그것에 속한 모든 것을 경멸하고 지상을 떠나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겁니다.
(중략)

도른 : 그리고 한 가지 더. 작품 속에는 반드시 명료한 특정 사상이 담겨야 합니다. 왜 글을 쓰는지를 알고 있어야 하지요. 그렇지않고 일정한 목적도 없이 길을 걷는다면 길을 잃을 것이고 당신의 재능은 오히려 당신을 붕괴시킬 겁니다.

 

희극적인 인물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는 지적인 인간들의 모순 또한 잘 알고 있었을 법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극히 평범하며 소심하지만 이로 인해 웃기는 캐릭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청혼>에서 지주 추부꼬프의 딸 나딸리아에게 청혼하러 간 로모프가 뜻하지 않게 그녀와 땅 문제로 싸우고 돌아온다는 에피소드가 그러하고 <갈매기>의 꼬스차는 어머니의 권위와 명성에 가려 자신의 입지를 못 찾고 방황하는 인물을, <벚꽃 동산>에서 류보비 안드레예브나가 자신의 아름다운 동산이 경매에 넘어갈 걸 전전긍긍하면서도 없는 돈을 펑펑 써대는 모습, <어쩔 수 없이 비극배우>에서 똘까초프가 일상적인 일로 자살하려 친구에게 권총을 빌려달라는 장면 등에서 볼 수 있다.

 

불우한 사람들

작품에서 인물들은 사소함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사회에 불만을 품는다. 이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몰락한 지주 계급(<벚꽃 동산>)을, 전처의 영지에 사는 무능한 학자(<바냐 아저씨>)를, 모스크바로 돌아가려 하나 가지 못해 좌절하는 사람들(<세 자매>)이다. 이들은 불우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불행은 사적인 성향이라기 보단 사회에 기인하는 듯하다. 작품 배경이 되는 19세기 제정러시아의 모습은 1861년 농노 해방이후 근대화가 이루어졌으나 이론뿐인 열악한 생활 환경과 그에 파생된 외압과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반체제 운동이 이루어졌다. 후에 볼셰비키 혁명 후 사회주의 체제로의 도입은 이러한 썩은 체제를 물갈이하자는 취지였으므로 가진 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부여잡기엔 이미 역부족이었을 듯하다. 가난과 상실, 무능함 등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사조는 사실주의나 사회주의일 것이며 체홉은 사회 제도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불행을 배가시킨다.

따뜻한 사람들

하지만 또 이러한 인물들은 심성이 본시 따뜻하고 과거를 향수하며 일말의 희망을 담고 사는 인간들이기도 하다. 이는 <벚꽃 동산>의 여주인이 자신의 딸과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나 <세 자매>에서 자매들이 모스크바에를 그리워하는 장면에서 보인다. <세 자매>의 셋째딸 일리나는 약혼자를 잃고서도 혼자서 모스크바를 가겠다고 하며 <갈매기>의 꼬스차는 니나를 받아주려 하는 장면(결국 자살하지만)이 그러하다. 그들은 옛 것을 향수하며 낭만을 즐길 줄 알아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희망 한 가닥을 품는다. 동산이 경매에 넘어가고 별장의 문을 닫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잊고 떠난 사람들을 향해 하인 피르스가 중얼거리는 대사는 희극적이면서도 마음 허전하게 만든다.


 

피르스 : (문에 다가가서 손잡이를 만져본다) 잠겼군. 다들 떠났어. (소파에 앉는다) 나를 잊었군. 괜찮아. 여기에 좀 앉아야겠어. 나리는 떠날 때 얇은 외투를 입어을지도 몰라. (걱정스러운 듯한숨을 내쉰다) 보살펴 주었어야 하는데 젊은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니까!(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린다)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눕는다) 좀 누워야겠어. 기운이 하나도 없군.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아무 것도.

 

피르스가 중얼거린 말은 사실은 작가가 당시 자신의 조국을 향해 뇌까리고 싶던 말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웠던 옛날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현재는 불행하다는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인간사를 녹여낼 줄 알았던 그의 희곡(소설 또한) 과연 그답다 감탄하게 만든다. 내게도 생이 짧은 단편보다 더 짧게 느껴지는 때가 온다면 그의 작품을 향수하며 다시 탐독하련다. 그때는 굳이 밑줄을 치며 읽지 않아도 그의 애상적이면서도 재담 어린 언어들이 가슴 가득 들어오리라.

* 열린 책들은 첨 사보는 것 같은데 책의 지질은 별로다.(까끌한 누런 종이) 그리고 대사에도 러시아의 긴 이름들이 그대로 실려 누가 누군지 잘 봐야만 해서 불편했음.(무식한 말인 듯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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