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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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작가 #여수의사랑 #어둠의사육제 #붉은닻


글쓴날 1월 30일, 2025년


한강 작가의 초기 단편집 <여수의 사랑> 완독. 사실 제일 마지막 단편이자 작가의 등단작인 “붉은 닻”만 남겨놓고 작년에 거의 다 읽었긴 하지만. 


분명 문학적으로는 수작임에 틀림없으며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부터 좋아했던 작가의 못 읽어본 작품이라 기대했음에도 개인적 평점은 박하게 주고 싶다. 생의 원초적 고단함과 시대적 우울, 존재론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적 우울 앞 나약하고 무력한 인간 실존과 같은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시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불행 포르노처럼 가차없이 난도질하는 과정은 정당한가, 아무리 그들이 허구적 인물이라도. 


대개 빈민층이거나, 사회 구조적으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가장 약자이자 세파에 내동댕이쳐진 등장인물들의 삶에, 감히, 발도 들여보지 못했을 엘리트인 20대 초반의 젊고 명석한 작가가, 소외 계층의 삶을 어루만진다기엔 잔인하게 난도질 시켜놓는 과정이, 과연 윤리적인가, 라는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함이다. 이 근원적 폭력에 개인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꾸역꾸역 살아감을 감내하는 가운데, 누구도 가해자는 없다. 작가는 시스템마저 비판하지 않는다. “어둠의 사육제”에서 불청객 조카에게 서울 도심 아파트 한채를 지닌 부유층이지만 선심쓰듯 베란다를 거주 공간으로 내어놓는 이모조차도 나름의 변론의 여지가 있고 선량하게 그려진다. 반복하지만 이는 실존적 고단함이자 폭력적 실존이기에. 


다만 이는 물론 숙명론과는 다르다. 초기 작품집인 <여수의 사랑> 과 달리 인식론적 폭력과 그 구조화가 더욱 빛을 발하며 직조되어 능란하게 쓰인 <채식주의자> 연작은 분명 좋아하는 작품이었지만, 당시 읽으면서 뭔가 극한까지 망가져가는 영혜의 이야기를 보면서 들던 알듯 모를듯한 불쾌감의 근원을 더욱 잘 확인할 수 있던 작품집이었다. 빛나는 주제의식 속 가차없이 '사고 실험'에 난도질당하는 허구적 개인들의 불행 포르노 전시이다. 작품 말미에 이르러서는 비슷한 구조의 반복에 피로감마저 느낄 정도. 사실 나도 한때 비슷한 나이에 소설 지망생으로서 비슷한 만행(?)을 허구적 인물들에게 저질렀던 과거에서 비롯한 자기 혐오가 투영된 리뷰일지도 모르겠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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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처음 뵈었던 순간부터 해맑고 아름다운 미소에 반했었다. 그래서인지, 한번도 직접 뵌 적이 없지만 매우 그리운 분인 프란치스코 교황님.






천주교인은 아니지만, 교황님의 청렴함과 선한 영향력, 강단 있는 지도력과 진중한 포용력을 생전 흠모하고 깊이 존경하였기에 애도하는 마음으로 장례 미사도 생중계로 끝까지 지켜보았고 자서전까지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무보수로 사목하시며 교황으로서 수임하신 전 급여를 기부하신 것은 물론이고 평소 청렴과 검소, 나눔을 실천하시어 선종 당시 남기신 전재산이 100유로에 불과한 것은 이미 큰 화제가 되었으며, 보수적인 가톨릭의 수장으로서 여성, 동성애자, 전쟁난민 등 소수자에 대한 포용력과 세계 평화를 위한 범종교적인 화합을 강조하신 것도 파격적 행보의 연속이었다. 


이책엔 ‘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으나 교황 본인 업적에 대한 회고록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교황의 일대기가 조금씩 서술되기는 하나, 전반부 절반 가량은 차라리 제국주의와 신대륙으로의 이민, 제 1,2차 세계대전, 라틴 아메리카의 군부독재와 학살로 얼룩진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적 근현대사를 조부모님 세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수집한 증언문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걸맞게 프롤로그는 1927년 이탈리아 이주민들을 싣고 아르헨티나로 향하다 대서양에 침몰한 소위 ‘이탈리아의 타이타닉’ 마팔다호의 비극으로 포문을 연다. 베르골료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 가문의 선조들도 마팔다호에 승선할 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 이를 피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구전 전승은, 1차세계대전과 굶주림 및 가난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 중에 사망한 무수한 동족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서 이 책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살아남은 자로서 응당 받아들여야 할 인류애와 소명의식의 근원을 형성한다. 이 생은 누군가 역시 누려야 마땅하나 박탈당한, 하마터면 나의 선조들도 그럴 뻔했던, 따라서 내게는 은총으로 받은 생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전쟁의 참상을 들려주셨습니다. 공포와 고통, 두려움, 그리고 사람을 철저히 외롭게 만드는 전쟁의 헛됨을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적진 사이에 피어난 형제애의 순간들도 들려주셨죠. 양쪽 참호의 보병들은 모두 농부였고, 노동자였으며, 일꾼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기에, 서로 몸짓과 표정으로, 또는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상대방의 말로 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담배 한 개비, 빵 한 조각,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철저히 비밀스러워야 했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행위를 지휘부가 알면 가차없이 처벌했고, 심지어 총살형에 처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병사들끼리의 접촉을 막으려고 지휘부가 자기 군대의 참호를 향해 포격을 가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병사들은 깨달았습니다. 적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가까이서 보니, 선동 선전물이 떠들어 대던 그런 흉측한 괴물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저 자신들처럼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친 눈빛에는 같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고, 같은 진창 속에서 같은 고통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한 이탈리아 가수가 노래했듯이 “마음은 똑같은데 다른 색깔의 군복을 입었을 뿐” 이었습니다. (중략)


“지휘부는 미쳐버린 것 같았다. ‘전진하라!,’ ‘불가능합니다!’, ‘상관없다! 그래도 전진하라!’ 완전한 광기였다. 명령을 내리는 자들은 멀리 안전한 곳에 있었다.” (중략) “절대 바닥나지 않는 탄약이 있으니, 바로 사람이다.”


본문 40-42쪽




이책의 전반을 가로질러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쟁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범죄이자 살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강조하며, 우리가 그저 한줄의 역사 또는 뉴스로만 접하는 전쟁과 파시즘의 잔혹한 참상이 한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를 어떻게 말살하는지, 자신의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사목하면서 만났던 여러 형제자매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기록한다. 마치 ‘이들을 잊으면 안된다’라고 강조하듯, 역사가와 같은 사명감마저 읽힌다. 대놓고 소명의식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1-3차 세계대전이나 (교황은 가자지구 전쟁, 러-우크라이나 전쟁, 수단 내전, 핵무기 위협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시대를 3차 세계대전으로 정의한다) 마팔다호의 침몰 등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참상이라며 경각심을 일깨우고, 전 세계인이 항상 깨어서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소명 의식으로 전 지구적인 연대를 이루어야 함을 영적 지도자로서 촉구하고 있다. 




2022년 초,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제3차 세계 대전이라는 먹구름이 참상의 무대로 뻗어나가더니 점차 전지구적 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서 스스로 독립을 선포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2월 24일 새벽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전쟁은 유럽의 심장부를 강타했고, 투키디데스 이후 24세기 만에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찾아왔던 ‘역사의 종말fine della storia’이라는 헛된 기대마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보유 자체만으로도 비윤리적이라 할 수 있는 핵무기들의 실존적 위협이 눈앞의 현실이 된 것입니다.


본문 411쪽



그는 ‘핵무기들’은 ‘보유 자체만으로도 비윤리적’인 ‘실존적 위협’이며 ‘비겁함’이라고 분명히 하며, 이는 ‘이성의 명백한 실종’ 때문이라고 엄격하게 진단한다. 기술 만능주의와 무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탐욕의 현대문명이 브레이크 없이 달려서 결국 위기에 놓인 이 시대에, 신앙인이 해야 할 일은 낡은 독트린에 갖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나가 범종교적으로 지구의 환경과 평화를 위해 함께 협력, 진리, 정의의 원칙으로 힘써야 함을 역설한다. 이는 그저 종교적인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 본인이 2019년 남수단 대통령 및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전쟁을 멈춰달라고 그들의 발에 입맞춤을 한 일화는 이미 유명하며, 2021년에는 이라크에서 무슬림 시아파 최고 종교 지도자 대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알시스타니와 만나 “강대국들이 전쟁의 논리를 버리고 이성과 지혜의 길을 택하도록 함께 촉구”하는 역사적 회동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마주한 참상 앞에서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여러 차례 천명한다. 2014년 한국 방한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노랑색 세월호 배지를 착용하자 누군가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고 한다. 이에 교황이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이란 없다”고 대답했다는 일화 역시 화제가 되었던 바 있다.


한국 방한 당시 세월호 배지를 착용하고 미사를 집전하시던 모습



우리는 갈등을 부정하지 않고, 숨기지 않으며, 무시하지 않고,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갈등을 억누르면 더 큰 불의를 낳고 불만과 좌절이 쌓이게 되며, 이는 결국 개인이든 집단이든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리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가 결코 서로를 겨누는 무기나 장벽에서 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진정 지속 가능한 평화는 생명을 앗아가지 않고, 죽음을 낳지 않으며, 정의를 가꾸고, 기술 만능주의와 무분별한 이윤 추구의 문화에 굴복하지 않는 경제에서 비롯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사람은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 (갈라 6,7 참조)입니다.

모든 전쟁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이 꽃피우려면 인간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문명이 죽음과 파괴를, 두려움과 불의를, 그리고 절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이 변화는 가장 힘없는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는 일에서 시작해,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와 피조물을 지키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와 모든 민족의 권리를 지켜 내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는 마음으로 증오의 깊은 샘을 메워야 할 때입니다.


본문 428-429쪽



책 전체를 아울러 교황의 언어는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깊은 성찰을 지녔으며, 인문학적, 철학적, 문화적 소양의 깊이가 심오한 한편 그의 태도는 진솔하고 겸허하며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기존 남성적인 문명의 파국이 세계 대전과 기후위기문제로 나타난만큼,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소수자를 감싸안는 것도 교회의 역할임을 강조한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에서 일어난 아동 성 학대 및 범죄에 대하여 가해자 사제들의 성직자 신분을 박탈하는 데에도 서슴없었다. 미래에 교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그의 인도에는 신학적으로는 파격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깊고 풍부한 철학적 성찰이 돋보인다. 



성직자들이 여성이 누구인지, 여성의 신학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는 결코 교회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큰 죄악 중 하나는 교회를 ‘남성화maschilizzare’한 것입니다. 


본문 308쪽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새로운 사제 양성 과정에 여성 평신도와 수도자들의 참여를 모든 방법으로 장려하는 일입니다. 이는 신학생들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여성이 신학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내고, 교회 기관의 책임있는 자리에서 일하며, 공동체를 이끄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곳에서는 특히, 여성들에게 예정된 모든 기회가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이를테면 피상적인 세속적 개혁이 아닌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이시며, 더 나아가 어머니”이신 하느님을 더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309-310쪽





전쟁la guerra이라는 단어는 여성형 명사이지만 결코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머니들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본문 427쪽





얼마 전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 구스타프 말러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전통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전통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씨를 지키는 일이다.”

전통은 박물관처럼 보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은 미래를 비추는 등불입니다. 자꾸만 과거의 잿더미로 돌아가려는 것은 근본주의자들의 그리움일 뿐, 전통의 참뜻은 아닙니다. 전통은 오히려 나무가 늘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는 든든한 뿌리와 같습니다.


본문 162-163쪽





전통은 조각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조각상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며, 전통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전통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좋았던 옛날’에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세르가 지적하듯이,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모든 면에서 꼭 아름답기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길을 걸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시대의 요구를 읽어 내는 지혜를 함양하고, 성령의 창조적 지혜로 그것들을 채워가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실천 속의 식별로 나타납니다.


본문 358쪽





서민들의 등골을 빼먹는 기업인이나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오염시키는 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으면서, 교황이 이혼한 여성이나 동성애자를 축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비난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는 교회가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한 반대 입장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본문 35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교황은 인류의 강력한 정신적 동력인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이책의 제목도 ‘희망하라Spera’이다), 이로서 어떤 기적을 인류가 이룩했는지를 강조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를 그저 장밋빛으로 미화하고 현재를 종말론적 ‘관습적 탄식’으로 ‘아름다운 옛 추억’에 매달리는 것 또한 반그리스도적인 태도로서 경계한다. 



희망은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직접 겪고 만지는, 지극히 구체적인 체험입니다. 세속적인 차원의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계에서는 이제 인간이 지닌 이러한 특성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생존 본능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질병과 맞서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로는, 이는 인간이 지닌 가장 복잡한 능력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뇌는 사회적 관계와 언어, 사고방식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화학적 수용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최근 연구들은 신뢰와 기대, 긍정적 전망이 우리 몸속의 수많은 분자를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마치 약물처럼 작용하여 같은 생화학적 경로를 활성화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희망은 단순한 환상이나 막연한 기대가 아닌, 실제로 작용하는 약이자 치료제인 셈입니다. (중략)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를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중략)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며,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굳건한 믿음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 35.37.)


본문 438-439쪽




















5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교황의 언어는 깊이있으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씌였으며 활자도 큼직하여 부담스럽지 않다. 밑줄 그을 구절이 너무 많아 고르기 곤혹스러웠다. 적고나서 보니 너무 진지하게만 썼는데, 덧붙이자면 콘클라베 후일담 및 소소한 유머스러운 이야기와 교황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도 풍부하게 읽을 수 있다. 오늘 후임 교황인 레오 14세의 즉위 미사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분도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평화의 메신저로서의 의지를 천명하고 계셔서 다행이다.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표어)’, 주님 품에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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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등 대표작들은 이미 섭렵했으나, 작가님의 이번 노벨문학상 계기로 초기 장단편들도 모두 건드리고 싶어져 구매한 한강 작가 작품집들이다. 


 

































하룻밤만에 한강 작가님의 2002년작 <그대의 차가운 손> 을 탐독했는데 역시나 잔상이 강렬하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의 작품을 관통하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육체와 이에 종내는 저항하게 되는 지점의 광기어린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유미주의적 표현력으로 승화하여 묘사하였다.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ㅡ소화해내야만 하며ㅡ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62쪽



손은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었다. 오직 한 가지, 그 안의 비어 있는 공간을 제외한다면,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을 만큼 정교했다. 잔주름과 손톱, 가느다란 핏줄과 뼈의 잔가지들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동안 내가 혼을 불어넣어 빚어냈다고 믿어왔던 어떤 형상들보다 강렬하게 그 손은 실재하고 있었다. 어떤 생명을, 숨결을 훔쳐 감쪽같이 내 것으로 만든 듯한 전율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 속에는 혈관도 근육도 뼈도 없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그 손에서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섬뜩했고, 차가웠으며, 비인간적이었다. 


-91쪽



그녀는 멍하니, 마치 지상에서 가장 낯선 물건을 보듯이 쌀밥을 내려다보았다. 쌀밥에서는 흰 김이 너울너울 피어올랐다. 그녀의 침묵과 저녁의 정적 위로 흰 김은 끝없이 높이 오르려 했고, 채 오르기 전에 찬 공기 속으로 흔적 없이 흩어졌다. 고요한 춤과도 같이, 비명과도 같이, 쓸쓸한 노래와도 같이. 숨결과도 같이. 침몰하고 또 생성되는 집요한 생명과도 같이,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 젊음, 더럽혀지지 않은 유년과도 같이. 무섭게 투명한 물, 더욱 투명한 시간과도 같이. 우리의 입술을 다물게 하는, 적요만 남게 하는 시간과도 같이. 


-153쪽



봄꽃들은 퇴색한 채 떨어지거나, 떨어진 뒤에 퇴색했다. 천천히 나는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고 있었다. 나는 철저히 내 과거 안에 있었고,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 기록이라는 습관은 은밀히 매력적이어서,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끊이지 않고 병행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실제의 삶과 이 기록 사이에 가로놓인 쓸쓸하고 단호한 침묵을 나는 느꼈고, 아마도 글 쓰는 사람들의 우울이나 염세는 그 지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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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 내 최애 한국 소설가.


기존 소설 작법의 문법을 파괴한 해체적이며 실험적 글쓰기로 탄생한 마치 무수한 파편같은 문장들의 집합체와 같은 그의 독특한 작품속에서, 파편들이 생채기를 내며 흐르는 의식 사이 왠지 뼈가 시린내가 물씬 풍기는 피폐한 문장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자살하고 싶어서였다. 어떤 죽음에도 이유가 없듯 자살에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거나 기술의 발전으로 생각을 읽어낼 수 있게 되더라도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자살하고 싶다, 자살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릇처럼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 당한 폭력보다도 더 큰 폭력을 스스로 행사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복수의 방식이었다.

-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연대기>, 31-32 쪽 - P32

손을 닦았는데도 땀과 크림과 비누가 뒤섞인 미세한 냄새가 났어요. 그런 냄새에도 이름이 있을까요. 내게는 의미나 상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내게는 이름이 필요해요. 구체적인 이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이름이. 모든 것의 모든 이름이. 나는 집 안을 둘러보았어요. 여전히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먼지 몇 점이 부유하고 있었어요. 내가 모든 것의 개수를 세려고 하게 된 이유가 그때 처음으로 궁금해졌어요.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그 처음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개수를 세고 다니지는 않았던 거예요. 존재하다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을 때부터 셀 수 없는 것들을 세려고 하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이름을 알려고 했던 거예요.
-한유주, 식물의 이름, <연대기> 83-84쪽 - P83

그건 도트였다. 도트 하나로는 아무런 의미로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했다. 도트가 작을수록, 그리고 도트가 많을수록 해상도가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는, 해상도가 높은 글을 쓰라고 했다. 수강생 하나가 정물화나 인물화, 풍경화 를 그리라는 말이냐고 물었다. 너는 반구상화나 추상화에 도 해상도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네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너는 해상도를 초과한다. 나는 너를 가까이서 보아 야만 한다. 나는 너를 가까이서 보려고 네게 다가간다. 어 느 순간, 눈을 감았다 뜨면, 나는 너를 통과한다. 나는 너를 계속해서 통과하고 있다. 너는 몇 개의 도트로 이루어져 있는가.
- 한유주, 은밀히 다가서다, 몰래 추적하다, <연대기> 144쪽 - P144

삼각형의 욕망은 사각형이 되었다가 원이 된다. 나의 욕망은 선이다. 나의 욕망은 선이 되어 너에게로 수직 상승한다. 나는 구체적인 소설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소설 쓰기 수업을 수강한 이유는 너를 보기 위해서다. 내 욕망에는 매개자가 없다. 내 욕망은 곧장 너에게로 향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어제는 오늘이 되었고 오늘은 내일이 되겠지만 나는 현재를 살 뿐이다. 나와 시간은 영원히 평행선을 그린다.
-한유주, 은밀히 다가서다, 몰래 추적하다, <연대기> 152-153 쪽 - P152

나는 언어를 낭비하고 싶다. 나는 언어를 경제적으로 운용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는 언어를 탕진하고 싶다. 어떤 의미를 적확한 한두 단어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묘사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 너.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너. 대단히 구체적인 주어로 자리하는 너. 나는 너를 설명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웠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운다. 맥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본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 저녁 하늘에 수많은 색이 있다. 저 색들을 하나씩 분리하는 일. 황혼. 어스름. 저물녘. 땅거미. 여명. Crepuscule.



-한유주,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 <연대기>, 218-21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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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ed, I’ve been eager to explore genuine meaning beyond specific languages—a concept reminiscent of Plato’s ‘idea’ that we can never fully grasp. 



Sometimes, this quest leads me to deep pessimism. I particularly grappled with this when I was creating novels in my twenties, feeling frustration and agony over the inconsistencies between meanings and the random structures of words, including phonemes and sounds, used by different people from different backgrounds, social classes, or personal particular experiences accumulated throughout their lives, even among those who speak the same language.  For example, to me, ‘love’ encompasses the meaning of ‘humanity,’ ‘willingness to dedicate’ and ‘philanthropy’, but many people tend to reduce it merely to ‘sexual relationships’ driven by mischievous hormonal impulse, which I still find hard to accept. This disconnection was difficult for me to bear, and I grew frustrated with the arbitrary links between meanings, sounds, and words. I often created several protagonists in my novels who developed acquired aphasia due to their feelings of betrayal and mistrust regarding g this randomness in meaning and language.















After reading Han Kang’s *Greek Lessons,* I decided to stop writing on my own. The work offers stunning insights into the primitive anti-language realm of the unconscious mind, which lies hidden beneath the structured, language-driven human consciousness. Her protagonists tenaciously attempt to reveal inconsistencies of their world, often pushing themselves to extremes in their struggle against cognitive—and sometimes physical—violence. They drive themselves into ruthless self-experimentation to confront the contradictions of the world around them in this process. She articulates the topic I had been trying to explore with such intense beauty in her poetic prose. 


It felt perfect, and I no longer felt the need for my own work on this topic, although I still love my novels! lol



 © 2024 Isha Green. All rights reserved. 





The terror was still only vague, the pain hesitant to reveal its burning circuit from the depths of silence. Where spelling, phonemes and loose meaning met, a slow-burning fuse of elation and transgression was lit.

- P10

The night is disturbed.
The roar of engines from a motorway half a block away makes incisions in her eardrums like countless skate blades on ice.
The lily magnolia, lit by the glow from the street lights, scatters its bruised petals to the winds. She walks past the voluptuous blooms straining the branches and through the spring night air, which is thick with an anticipatory sweetness of crushed petals. She occasionally raises her hands to her face, despite the knowledge that her cheeks are dry. - P13

There is evil in this world, and it causes the suffering of innocent people.
If God is good but unable to redress this, he is impotent.
If God is not good and merely omnipotent, and does not redress these things, he is evil.
If God is neither good nor omnipotent, he cannot be called God.
Therefore the real existence of a good and omnipotent God is an impossible fallacy. - P29

Your eyes widen when you are genuinely angry. Your thick brows rise, your lashes and lips quiver, and your chest heaves with every breath you gasp. As soon as I returned the pen, you hastily scrawled in the notebook:

In that case, my God is both good and full of sorrow. If you are attracted to such nonsensical arguments, one day your own real existence will become an impossible fallacy. - P30

That when the most frail, tender, forlorn parts of us, that is to say our life-breaths, are at some point returned to the world of matter, we will receive nothing in recompense.

That when the time comes for me, I don‘t see myself remembering the full range of the experiences I‘d accumulated up to that point only in terms of beauty.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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