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처음 뵈었던 순간부터 해맑고 아름다운 미소에 반했었다. 그래서인지, 한번도 직접 뵌 적이 없지만 매우 그리운 분인 프란치스코 교황님.


천주교인은 아니지만, 교황님의 청렴함과 선한 영향력, 강단 있는 지도력과 진중한 포용력을 생전 흠모하고 깊이 존경하였기에 애도하는 마음으로 장례 미사도 생중계로 끝까지 지켜보았고 자서전까지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무보수로 사목하시며 교황으로서 수임하신 전 급여를 기부하신 것은 물론이고 평소 청렴과 검소, 나눔을 실천하시어 선종 당시 남기신 전재산이 100유로에 불과한 것은 이미 큰 화제가 되었으며, 보수적인 가톨릭의 수장으로서 여성, 동성애자, 전쟁난민 등 소수자에 대한 포용력과 세계 평화를 위한 범종교적인 화합을 강조하신 것도 파격적 행보의 연속이었다.
이책엔 ‘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으나 교황 본인 업적에 대한 회고록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교황의 일대기가 조금씩 서술되기는 하나, 전반부 절반 가량은 차라리 제국주의와 신대륙으로의 이민, 제 1,2차 세계대전, 라틴 아메리카의 군부독재와 학살로 얼룩진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적 근현대사를 조부모님 세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수집한 증언문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걸맞게 프롤로그는 1927년 이탈리아 이주민들을 싣고 아르헨티나로 향하다 대서양에 침몰한 소위 ‘이탈리아의 타이타닉’ 마팔다호의 비극으로 포문을 연다. 베르골료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 가문의 선조들도 마팔다호에 승선할 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 이를 피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구전 전승은, 1차세계대전과 굶주림 및 가난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 중에 사망한 무수한 동족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서 이 책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살아남은 자로서 응당 받아들여야 할 인류애와 소명의식의 근원을 형성한다. 이 생은 누군가 역시 누려야 마땅하나 박탈당한, 하마터면 나의 선조들도 그럴 뻔했던, 따라서 내게는 은총으로 받은 생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전쟁의 참상을 들려주셨습니다. 공포와 고통, 두려움, 그리고 사람을 철저히 외롭게 만드는 전쟁의 헛됨을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적진 사이에 피어난 형제애의 순간들도 들려주셨죠. 양쪽 참호의 보병들은 모두 농부였고, 노동자였으며, 일꾼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기에, 서로 몸짓과 표정으로, 또는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상대방의 말로 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담배 한 개비, 빵 한 조각,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철저히 비밀스러워야 했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행위를 지휘부가 알면 가차없이 처벌했고, 심지어 총살형에 처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병사들끼리의 접촉을 막으려고 지휘부가 자기 군대의 참호를 향해 포격을 가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병사들은 깨달았습니다. 적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가까이서 보니, 선동 선전물이 떠들어 대던 그런 흉측한 괴물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저 자신들처럼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친 눈빛에는 같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고, 같은 진창 속에서 같은 고통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한 이탈리아 가수가 노래했듯이 “마음은 똑같은데 다른 색깔의 군복을 입었을 뿐” 이었습니다. (중략)
“지휘부는 미쳐버린 것 같았다. ‘전진하라!,’ ‘불가능합니다!’, ‘상관없다! 그래도 전진하라!’ 완전한 광기였다. 명령을 내리는 자들은 멀리 안전한 곳에 있었다.” (중략) “절대 바닥나지 않는 탄약이 있으니, 바로 사람이다.”
본문 40-42쪽
이책의 전반을 가로질러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쟁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범죄이자 살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강조하며, 우리가 그저 한줄의 역사 또는 뉴스로만 접하는 전쟁과 파시즘의 잔혹한 참상이 한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를 어떻게 말살하는지, 자신의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사목하면서 만났던 여러 형제자매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기록한다. 마치 ‘이들을 잊으면 안된다’라고 강조하듯, 역사가와 같은 사명감마저 읽힌다. 대놓고 소명의식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1-3차 세계대전이나 (교황은 가자지구 전쟁, 러-우크라이나 전쟁, 수단 내전, 핵무기 위협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시대를 3차 세계대전으로 정의한다) 마팔다호의 침몰 등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참상이라며 경각심을 일깨우고, 전 세계인이 항상 깨어서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소명 의식으로 전 지구적인 연대를 이루어야 함을 영적 지도자로서 촉구하고 있다.
2022년 초,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제3차 세계 대전이라는 먹구름이 참상의 무대로 뻗어나가더니 점차 전지구적 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서 스스로 독립을 선포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2월 24일 새벽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전쟁은 유럽의 심장부를 강타했고, 투키디데스 이후 24세기 만에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찾아왔던 ‘역사의 종말fine della storia’이라는 헛된 기대마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보유 자체만으로도 비윤리적이라 할 수 있는 핵무기들의 실존적 위협이 눈앞의 현실이 된 것입니다.
본문 411쪽
그는 ‘핵무기들’은 ‘보유 자체만으로도 비윤리적’인 ‘실존적 위협’이며 ‘비겁함’이라고 분명히 하며, 이는 ‘이성의 명백한 실종’ 때문이라고 엄격하게 진단한다. 기술 만능주의와 무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탐욕의 현대문명이 브레이크 없이 달려서 결국 위기에 놓인 이 시대에, 신앙인이 해야 할 일은 낡은 독트린에 갖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나가 범종교적으로 지구의 환경과 평화를 위해 함께 협력, 진리, 정의의 원칙으로 힘써야 함을 역설한다. 이는 그저 종교적인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 본인이 2019년 남수단 대통령 및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전쟁을 멈춰달라고 그들의 발에 입맞춤을 한 일화는 이미 유명하며, 2021년에는 이라크에서 무슬림 시아파 최고 종교 지도자 대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알시스타니와 만나 “강대국들이 전쟁의 논리를 버리고 이성과 지혜의 길을 택하도록 함께 촉구”하는 역사적 회동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마주한 참상 앞에서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여러 차례 천명한다. 2014년 한국 방한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노랑색 세월호 배지를 착용하자 누군가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고 한다. 이에 교황이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이란 없다”고 대답했다는 일화 역시 화제가 되었던 바 있다.

한국 방한 당시 세월호 배지를 착용하고 미사를 집전하시던 모습
우리는 갈등을 부정하지 않고, 숨기지 않으며, 무시하지 않고,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갈등을 억누르면 더 큰 불의를 낳고 불만과 좌절이 쌓이게 되며, 이는 결국 개인이든 집단이든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리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가 결코 서로를 겨누는 무기나 장벽에서 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진정 지속 가능한 평화는 생명을 앗아가지 않고, 죽음을 낳지 않으며, 정의를 가꾸고, 기술 만능주의와 무분별한 이윤 추구의 문화에 굴복하지 않는 경제에서 비롯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사람은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 (갈라 6,7 참조)입니다.
모든 전쟁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이 꽃피우려면 인간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문명이 죽음과 파괴를, 두려움과 불의를, 그리고 절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이 변화는 가장 힘없는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는 일에서 시작해,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와 피조물을 지키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와 모든 민족의 권리를 지켜 내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는 마음으로 증오의 깊은 샘을 메워야 할 때입니다.
본문 428-429쪽
책 전체를 아울러 교황의 언어는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깊은 성찰을 지녔으며, 인문학적, 철학적, 문화적 소양의 깊이가 심오한 한편 그의 태도는 진솔하고 겸허하며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기존 남성적인 문명의 파국이 세계 대전과 기후위기문제로 나타난만큼,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소수자를 감싸안는 것도 교회의 역할임을 강조한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에서 일어난 아동 성 학대 및 범죄에 대하여 가해자 사제들의 성직자 신분을 박탈하는 데에도 서슴없었다. 미래에 교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그의 인도에는 신학적으로는 파격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깊고 풍부한 철학적 성찰이 돋보인다.
성직자들이 여성이 누구인지, 여성의 신학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는 결코 교회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큰 죄악 중 하나는 교회를 ‘남성화maschilizzare’한 것입니다.
본문 308쪽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새로운 사제 양성 과정에 여성 평신도와 수도자들의 참여를 모든 방법으로 장려하는 일입니다. 이는 신학생들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여성이 신학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내고, 교회 기관의 책임있는 자리에서 일하며, 공동체를 이끄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곳에서는 특히, 여성들에게 예정된 모든 기회가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이를테면 피상적인 세속적 개혁이 아닌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이시며, 더 나아가 어머니”이신 하느님을 더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309-310쪽
전쟁la guerra이라는 단어는 여성형 명사이지만 결코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머니들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본문 427쪽
얼마 전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 구스타프 말러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전통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전통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씨를 지키는 일이다.”
전통은 박물관처럼 보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은 미래를 비추는 등불입니다. 자꾸만 과거의 잿더미로 돌아가려는 것은 근본주의자들의 그리움일 뿐, 전통의 참뜻은 아닙니다. 전통은 오히려 나무가 늘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는 든든한 뿌리와 같습니다.
본문 162-163쪽
전통은 조각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조각상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며, 전통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전통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좋았던 옛날’에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세르가 지적하듯이,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모든 면에서 꼭 아름답기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길을 걸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시대의 요구를 읽어 내는 지혜를 함양하고, 성령의 창조적 지혜로 그것들을 채워가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실천 속의 식별로 나타납니다.
본문 358쪽
서민들의 등골을 빼먹는 기업인이나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오염시키는 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으면서, 교황이 이혼한 여성이나 동성애자를 축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비난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는 교회가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한 반대 입장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본문 35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교황은 인류의 강력한 정신적 동력인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이책의 제목도 ‘희망하라Spera’이다), 이로서 어떤 기적을 인류가 이룩했는지를 강조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를 그저 장밋빛으로 미화하고 현재를 종말론적 ‘관습적 탄식’으로 ‘아름다운 옛 추억’에 매달리는 것 또한 반그리스도적인 태도로서 경계한다.
희망은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직접 겪고 만지는, 지극히 구체적인 체험입니다. 세속적인 차원의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계에서는 이제 인간이 지닌 이러한 특성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생존 본능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질병과 맞서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로는, 이는 인간이 지닌 가장 복잡한 능력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뇌는 사회적 관계와 언어, 사고방식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화학적 수용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최근 연구들은 신뢰와 기대, 긍정적 전망이 우리 몸속의 수많은 분자를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마치 약물처럼 작용하여 같은 생화학적 경로를 활성화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희망은 단순한 환상이나 막연한 기대가 아닌, 실제로 작용하는 약이자 치료제인 셈입니다. (중략)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를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중략)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며,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굳건한 믿음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 35.37.)
본문 438-439쪽

5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교황의 언어는 깊이있으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씌였으며 활자도 큼직하여 부담스럽지 않다. 밑줄 그을 구절이 너무 많아 고르기 곤혹스러웠다. 적고나서 보니 너무 진지하게만 썼는데, 덧붙이자면 콘클라베 후일담 및 소소한 유머스러운 이야기와 교황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도 풍부하게 읽을 수 있다. 오늘 후임 교황인 레오 14세의 즉위 미사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분도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평화의 메신저로서의 의지를 천명하고 계셔서 다행이다.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표어)’, 주님 품에 영면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