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등 대표작들은 이미 섭렵했으나, 작가님의 이번 노벨문학상 계기로 초기 장단편들도 모두 건드리고 싶어져 구매한 한강 작가 작품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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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만에 한강 작가님의 2002년작 <그대의 차가운 손> 을 탐독했는데 역시나 잔상이 강렬하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의 작품을 관통하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육체와 이에 종내는 저항하게 되는 지점의 광기어린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유미주의적 표현력으로 승화하여 묘사하였다.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ㅡ소화해내야만 하며ㅡ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62쪽
손은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었다. 오직 한 가지, 그 안의 비어 있는 공간을 제외한다면,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을 만큼 정교했다. 잔주름과 손톱, 가느다란 핏줄과 뼈의 잔가지들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동안 내가 혼을 불어넣어 빚어냈다고 믿어왔던 어떤 형상들보다 강렬하게 그 손은 실재하고 있었다. 어떤 생명을, 숨결을 훔쳐 감쪽같이 내 것으로 만든 듯한 전율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 속에는 혈관도 근육도 뼈도 없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그 손에서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섬뜩했고, 차가웠으며, 비인간적이었다.
-91쪽
그녀는 멍하니, 마치 지상에서 가장 낯선 물건을 보듯이 쌀밥을 내려다보았다. 쌀밥에서는 흰 김이 너울너울 피어올랐다. 그녀의 침묵과 저녁의 정적 위로 흰 김은 끝없이 높이 오르려 했고, 채 오르기 전에 찬 공기 속으로 흔적 없이 흩어졌다. 고요한 춤과도 같이, 비명과도 같이, 쓸쓸한 노래와도 같이. 숨결과도 같이. 침몰하고 또 생성되는 집요한 생명과도 같이,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 젊음, 더럽혀지지 않은 유년과도 같이. 무섭게 투명한 물, 더욱 투명한 시간과도 같이. 우리의 입술을 다물게 하는, 적요만 남게 하는 시간과도 같이.
-153쪽
봄꽃들은 퇴색한 채 떨어지거나, 떨어진 뒤에 퇴색했다. 천천히 나는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고 있었다. 나는 철저히 내 과거 안에 있었고,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 기록이라는 습관은 은밀히 매력적이어서,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끊이지 않고 병행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실제의 삶과 이 기록 사이에 가로놓인 쓸쓸하고 단호한 침묵을 나는 느꼈고, 아마도 글 쓰는 사람들의 우울이나 염세는 그 지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2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