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주, 내 최애 한국 소설가.


기존 소설 작법의 문법을 파괴한 해체적이며 실험적 글쓰기로 탄생한 마치 무수한 파편같은 문장들의 집합체와 같은 그의 독특한 작품속에서, 파편들이 생채기를 내며 흐르는 의식 사이 왠지 뼈가 시린내가 물씬 풍기는 피폐한 문장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자살하고 싶어서였다. 어떤 죽음에도 이유가 없듯 자살에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거나 기술의 발전으로 생각을 읽어낼 수 있게 되더라도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자살하고 싶다, 자살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릇처럼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 당한 폭력보다도 더 큰 폭력을 스스로 행사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복수의 방식이었다.

-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연대기>, 31-32 쪽 - P32

손을 닦았는데도 땀과 크림과 비누가 뒤섞인 미세한 냄새가 났어요. 그런 냄새에도 이름이 있을까요. 내게는 의미나 상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내게는 이름이 필요해요. 구체적인 이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이름이. 모든 것의 모든 이름이. 나는 집 안을 둘러보았어요. 여전히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먼지 몇 점이 부유하고 있었어요. 내가 모든 것의 개수를 세려고 하게 된 이유가 그때 처음으로 궁금해졌어요.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그 처음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개수를 세고 다니지는 않았던 거예요. 존재하다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을 때부터 셀 수 없는 것들을 세려고 하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이름을 알려고 했던 거예요.
-한유주, 식물의 이름, <연대기> 83-84쪽 - P83

그건 도트였다. 도트 하나로는 아무런 의미로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했다. 도트가 작을수록, 그리고 도트가 많을수록 해상도가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는, 해상도가 높은 글을 쓰라고 했다. 수강생 하나가 정물화나 인물화, 풍경화 를 그리라는 말이냐고 물었다. 너는 반구상화나 추상화에 도 해상도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네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너는 해상도를 초과한다. 나는 너를 가까이서 보아 야만 한다. 나는 너를 가까이서 보려고 네게 다가간다. 어 느 순간, 눈을 감았다 뜨면, 나는 너를 통과한다. 나는 너를 계속해서 통과하고 있다. 너는 몇 개의 도트로 이루어져 있는가.
- 한유주, 은밀히 다가서다, 몰래 추적하다, <연대기> 144쪽 - P144

삼각형의 욕망은 사각형이 되었다가 원이 된다. 나의 욕망은 선이다. 나의 욕망은 선이 되어 너에게로 수직 상승한다. 나는 구체적인 소설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소설 쓰기 수업을 수강한 이유는 너를 보기 위해서다. 내 욕망에는 매개자가 없다. 내 욕망은 곧장 너에게로 향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어제는 오늘이 되었고 오늘은 내일이 되겠지만 나는 현재를 살 뿐이다. 나와 시간은 영원히 평행선을 그린다.
-한유주, 은밀히 다가서다, 몰래 추적하다, <연대기> 152-153 쪽 - P152

나는 언어를 낭비하고 싶다. 나는 언어를 경제적으로 운용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는 언어를 탕진하고 싶다. 어떤 의미를 적확한 한두 단어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묘사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 너.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너. 대단히 구체적인 주어로 자리하는 너. 나는 너를 설명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웠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운다. 맥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본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 저녁 하늘에 수많은 색이 있다. 저 색들을 하나씩 분리하는 일. 황혼. 어스름. 저물녘. 땅거미. 여명. Crepuscule.



-한유주,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 <연대기>, 218-21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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