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지, 이후.

 

 

 어느 블로그에서 연인을 사고사로 떠나보낸 여성의 절절한 사연을 읽었습니다. 그 여성은 소울 메이트를 잃고 정서적으로 황폐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일차적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었겠지만, 오랜 세월 후 받은 상담치료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처가 유난히 깊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진행된 장례식이 끝난 수개월 후 갑작스레 이메일로 연인의 사망소식을 통보받은 충격이 원인이었습니다. 장례식은 고인과의 이별에 대해 주변인들이 서로 정서적 치유 의식을 나누는 중요한 사회적 절차라고 합니다. 서로 슬픔을 알리고, 위로받고, 망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 그녀는 이 과정을 박탈당했던 것이지요.
 제 상실감을 감히 위 사례에 비교하려니 부끄럽습니다만, 교지 종간호 발간은 저에게 일종의 장례식과 같은 의식이라 생각됩니다. 애도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굳이 교지 폐간이 시사하는 바라든지 제 깜냥을 벗어나는 이야기는 않겠습니다. 이 글은 교지『관악』을 스쳐 간 일개 퇴임이 장례식에서 주절거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식상한 고백입니다.

 교지 이후, 졸업하고 저는 산업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몇 년 후 백수가 되어서야 스스로의 신체전반에 일어난 변화를 새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작 노동 현장에서는 알아채지 못했는데 말이지요. 저는 원체 느긋하고 게으르며 즉흥적인 인간이었습니다. 학부 시절 장래희망란에 “알람 없이 내킬 때 일어나는 삶을 사는 인간”이라고 답하던 제 DNA 유전정보가 신자유주의적 코드로 변형되어 있더군요. 제 행동양태를 결정하는 프로세스가 신념과는 무관하게 뼛속까지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개조되어, 한동안 자아분열을 겪었습니다. 좀더 어렸던 시절 저는 제 신념이 옳다 힘주어 말하며 댕기던 젊은이였습니다. 뭐 거창한 것은 아니고, 간단한 겁니다. 사람은 차별받아서는 아니 되며, 소수자들이 존중받아야 하고, 절차는 민주적이어야 하며, 남녀가 평등하다는 가치입니다. 이제 저는 전에 뵈지 않던 ‘가장’, ‘사장님’ 등 ‘리더’(이전엔 ‘기득권’의 이미지로 더 와닿았지요)들의 짙은 페이소스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한국 사회에서 소신을 드러내는 일은 어린 시절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갑절은 지난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네요. 그리고 저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노미 상태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나는 경험치가 상승하며 유연한 사고방식을 체득한 것일까요, 아니면 체제 순응적인 인간으로 재사회화되는 과정에 놓인 걸까요.

 혼란스러울 때마다 떠오르는 시큰한 기억 한 장면은 수북이 쌓인 회의 문건과 책 더미 사이 과자껍질과 종이컵, 빈 깡통 따위가 지저분하게 뒹구는 『관악』편집실 책상이었습니다. 지끈거리는 논쟁, 치열한 반박, 설익어 낯뜨거운 문장들도 함께 뒹굴었군요. 당신과 나는 우리가 공유하던 가치를 우리의 언어로 공글려 책을 내고자, 밤을 꼬박 새고 새벽녘까지 편집실에서 회의하며 때로는 언성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서로서로의 생각이 온전히 결맞은 게 아니더라도, 독자들과 맥놀이를 일으키길 소망하면서요. 편집위원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고 소통하자며 배제의 논리를 최대한 배제하다보니 교지 역사상 가장 분량이 넘치는 책을 만드는 겸연쩍은 사고를 내기도 했었지요. 신자유주의적 개조인간인 제가 과연 앞으로 어느 조직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치열한 논쟁 끝에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변화시키던 우리는 퍽 사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아노미 이전을 더듬더듬 거슬러간 최후의 기억 한 지점은 항상 편집실 책상 언저리에 머물러 있네요.

 함께라서 행복했습니다. 『관악』의 폐간 소식에 밀려오는 참담함과 상실감 또한 함께라서 더 애틋할 터입니다. 교지 이후, 당신의 삶은 어떠했나요. 편집위원회에 몸담았던 시점이 원점이라면 편집실을 스쳐간 사람들의 삶은 방사상으로 제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달라졌습니다. 10년 쯤 후에는 더욱 달라져 있겠지요. 그때 당신도 편집실 책상을 추억한다면, 다시 만나 한잔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궤적이 변했어도 서로의 파장이 여전히 공명을 일으키길 기대하면서, 더, 수다스럽게 떠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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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낙원 - 현대 도시 문화와 삶에 대한 성찰
정윤수 글.사진 / 궁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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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는 토건한국의 집약적 장이다. 나는 서울시민으로서 서울시청구청사, 서울중앙우체국, 동대문운동장, 피맛골, 세운상가, 스카라극장 등의 철거를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공간의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와 개발의 논리로 인해, 근대사의 흔적을 처연히 간직하였던 서울의 유서 깊은 건물들이 사라져갔다. 내 참담함은 이처럼 꼭 거창한 역사적 공간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니고, 소녀시절 뛰어놀던 동네에서 체험한 상실감에 근원을 두어 역시 같은 맥락으로 맞닿아 있다. 어린 시절 물곰팡이 냄새가 알싸하게 피어나는 달동네 골목길에서 부러 길 잃으며 산비탈 켜켜이 쌓인 지붕 사이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도시 풍경을 좋아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여느 때처럼 앞산 달동네 비탈길을 올랐다가 콩밭과 야트막한 담장과 할머니와 아이들이 곧잘 해바라기하는 평상이 있던 한 평 남짓한 안마당 등 소박해서 애틋한 삶의 흔적들이 포클레인으로 처참히 파괴되는 현장을 맞닥뜨리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후에 머리가 커지고 나서 그것이 재개발로 인한 철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부 시절, 캠퍼스는 4년 내내 공사가 끊일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정작 학내 구성원들은 필요를 체감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새 건물들이 들어섰(거나 여전히 공사중이고)고 학생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공간들이 스러져갔다. 기부채납으로 지어진 새 건물에서는 그 대가로 수익을 창출해야하므로 각종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잠식해 들어왔고 자본의 논리는 학교라는 공공성의 공간마저 소비의 장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우리의 도시는 타국의 도시들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퍽 빠른 것 같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무색케 할 정도로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혹시나 이 리뷰를 읽는 분이 도시에 거주하는 분이 아니시라면 논지를 쉽게 전개하기 위한 일반화를 용서하시길, 2010년 9월 기준 도시 인구 비율이 81.5%라는 통계 결과가 배제의 논리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풍경은 각종 지표에서도 드러난다. 대한민국의 ‘GDP대비 건설업 부가가치 비중’은 평균 8.8%로 OECD 평균인 5.48%에 비해 50% 이상 높으며, ‘GDP대비 건설 투자의 비중’은 약 20%에 달하여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무려 2배나 높다고 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았을 때 사업의 궁극적 목적이 불분명하고 의심스러운 토건 사업도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사례는 현 정권의 4대강 사업이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디자인서울사업일 것이다(특히 광화문 광장…). 한 마디로, 저 사업 지금 꼭 필요한 건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사업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공간이 전광석화와 같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새로이 생성되는 과정은 다른 어떤 것의 소멸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3차원적 공간은 한정적 속성을 지니므로. ‘소멸되는 그 무엇’은 공간을 향유하였던 주체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빠른 소멸 속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어떤 시대적 가치나 감수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로이 생성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언제나 진일보한 가치일까?
혹여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지켜야 한다고 공감하는 그 무엇을 굳이 소멸시켜가면서 다른 무언가를 생성해내야만 한다면, 최소한 그에 준하는 가치를 창출하거나 ‘소멸하는 그 무엇’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정통으로 계승할 수 있는 ‘새로운 그 무엇’이어야 정당성이 확립될 것이다. 현 정권의 주요 토건 사업이 ‘토건 포퓰리즘’이 비판받는 이유는 이러한 정당성 확보에 실패했(거나 정당성 확보가 애초 불가능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2011년 11월에 출간된 《인공낙원》이 반가웠다.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매우 시의적절하며 매력적이다. 저자는 ‘도시는 거대해졌고 인간은 왜소’해지며 ‘인간이 점점 주눅들어가는’ 풍경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으매, 이는 앞서 필자가 기술한 ‘지켜야 할 무엇의 상실’이라는 맥락과 맞닿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공간의 변화나 그 공간이 함유한 시대성의 의의를 잘 보여주는 예시로 광장/극장/모델하우스/모텔/카지노/백화점/테마파크/경기장/박물관/공항/기차역을 제시한 구성은 탁월하다.

경관이 해체되고 풍경이 사라지고 그 속에서 애틋하게 이뤄졌던 사람살이의 인연마저 마치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말끔히 정제되고 마는 이 거대 도시의 인공 공간을 배회하면서, 나는 ‘과연 인간적 삶이란 가능한가’ 하는 근원적 질문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p.8.

아쉽게도 이 책은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데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듯싶다. 저자는 오랜 시간 동안 공간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발로 열심히 뛰었지만 비평을 위한 논지 전개에 있어 다소 게으른 것 같다. 따라서 풍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곁들인 문학적 인용이 별로 장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효과적이지 않다). ‘과연 인간적 삶이란 가능한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앞서 ‘인간적 삶(필자의 언어로 정리하면 ‘지켜야 할 무엇’이 될 것이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독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논지 전개가 생략된 채, “…는 더 이상 …이 아니다”는 표현이 다소 엉뚱한 구석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단지 클리셰로만 읽힌다. 예를 들면, 영화 기술의 진보를 서술하면서 현대 극장의 최신식 영상 시설을 장황하게 서술하는 과정에 생뚱맞게 삽입된 ‘〈시네마 천국〉같은 영화에서 보는 그 옛날의 아날로그 릴 영사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와 같은 문장이 그러하다.
‘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은 상투적인 서술로만 그쳐서 빈곤하고, 따라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안타까워해야 한다’는 선언적 태도로 기술한 감상의 편린들만 남는다. 기술의 진보를 덮어놓고 꺼리는 복고적 낭만주의로 읽힐 위험성이 다분하다. 키치적인 조형물만 남은 광화문 광장에 못마땅해 쯧쯧 혀를 차면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센나야 광장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떠올리고, 그의 입맞춤이 광화문 광장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장면은 어색하다. ‘왜 라스콜리니코프는 센나야 광장에는 입을 맞출 수 있지만 광화문 광장에는 입을 맞출 수 없는가’에 대한 성찰은 없고 단편적인 사색의 편린만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도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가 '최소한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역까지 소비문화를 강요하며 침범해 들어오는 현상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부재하기 때문에 '현대인은 더이상 물가를 산책하지 않고 거대 쇼핑몰을 산책한다'고 서술하는 태도 역시 클리셰로 읽히는 것이다.

‘왜 팔각정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민족성과 장소성을 시각적으로 무리하게 드러내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연못의 팔각정. p.314
(왜 국립중앙박물관 연못의 팔각정이 민족성과 장소성을 시각적으로 무리하게 드러내는지 잘 모르겠으며 ‘왜 팔각정이어야 하는가’는 더더욱 모르겠다)

필자의 당위적 태도는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삭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 뿐만 아니라 ‘어떤 요소가 공간을 구성하는 주 요소로 생성되어야 하는 당위’로서도 서술된다. 폐광지에 카지노가 설립되는 과정과 지역사회에서 강원랜드가 지닌 의미는 기본적으로는 긍정적이라는 태도로 묘사된다. ‘가난한 광부의 아들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구심점이므로 앞선 공간(탄광 도시)의 의의를 삭제하면서 새로 구성한 공간(도박산업 도시)의 경제적 가치는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당위가 숨어 있다(내게는 왜 ‘가난한 광부의 자녀들’이 ‘민족의 순결한 딸’이라는 표현만큼이나 당혹스럽게 느껴질까). 카지노와 함께 전당포·모텔·노래방이 가득 들어서게 된 풍경에서 그 옛날의 탄광도시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대해 다른 각도로 바라본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기장은 ‘개인의 열정과 공동체의 열망이 수렴되고 확산되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무대’이기 때문에 역시 긍정적인 공간이라는 태도로 묘사된다. 저자의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못마땅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가슴에 별로 와 닿지 않는다. 비평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공간의 의의를 파헤치기보다는 각각의 테마에서 자신이 보려는 모습만 보고 서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태도는 비장소성을 지닌 공항과 기차역의 상업 공간에 대해 상이한 평가가 나오는 모순을 낳는다. 〈공항〉의 상업 공간은 공항이 ‘환각의 공간’이 되어 ‘삶에 대한 절절한 역설’이 되는데 기여한다고 서술하는데 비해 〈기차역〉의 상업 공간은 ‘눈물의 서정이란 좀처럼 생성되기 어렵’게 만든다며 부정적인 태도로 서술하는 이 비일관성이란! (비슷한 코드의 공간의 의의에 대한 상이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 섬세한 논지로 이끌어냈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었으련만)

차라리 도시 공간에 대한 비평보다는 저자의 복고적 감수성을 잘 살려 과감하게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았겠다. 공간을 향유하는 주체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묘사했다면 인공 낙원에 대한 성찰이 ‘날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경기장은 그런 곳이다. 6만여 명이 강제 동원되어 일사분란하게 수행 지침을 따라 구호를 외치고 돌아가는 연병장이 결코 아니다. 6만여 명이 운집했지만, 그 숫자는 저마다 아름다운 꿈을 꾸는 6만 개의 열렬한 사랑의 행렬인 것이다. p.295.

〈경기장〉에서 나는 볼보이 소년이 국가대표를 꿈꾸는 것 외에 경기장을 찾는 ‘개인들의 꿈’을 느끼기 어려웠다. ‘일순간의 강렬한 열정을 보기 위한’ 또는 ‘반복과 규율의 삶’에서 잠시나마 일탈하기 위한 집단적 욕망만 읽힐 뿐이다. 경기장을 찾는 6만 개의 아름다운 꿈이 있다고 선언적 태도로 진술하기보다 응원하는 사람들의 풍경을 날 것의 언어로 묘사하는 편이 나았겠다. 물론 현대 도시인인 우리에게 유효한 지적들도 있다. 한국의 박물관이 타국과 달리 도심에서도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에 위치하는 공간적인 의의는 우리가 박물관이 함의한 ‘영속의 시간’을 우리 삶 한가운데 받아들인 게 아니라 ‘주말에나 관람하는’ 정도로만 여기기 때문이라는 소중한 지적이 더 풍부했으면, 좋았겠다.


사족. 복고적 낭만주의와 도시 공간에 대한 비평 사이에서 길을 잃은 측면이 없잖아 있지만 저자가 직접 발로 뛴 공간들에 대한 묘사와 사진들은 흥미롭다.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많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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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차 가까운 시간에 퇴근하면서 붉은 색 티셔츠를 입고 전철을 타는 사람들이 많아 깜짝 놀랐다. 어떤 사람은 막차 끊길 새라 걱정하면서 전철을 타는데, 어떤 이들은 축구 응원을 위해 밤샐 작정으로 일부러 막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고 있다니, 그들의 열정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축구 응원을 위해 붉은 색 티셔츠를 입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 이유는 시기별로 약간씩 차이가 있다. 2002년 이전에는 물론 축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한국 대표팀이 4강까지 올라가리라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매 경기 때마다, 이번에 사면 한번 입고 말텐데 아까워서, 라는 생각이 들어 주저주저하다 결국은 붉은 티셔츠를 사지 못했었다(그때의 짧은 생각이 지금도 참 아쉽다). 
 

 지금 내가 붉은 티셔츠를 사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다(양심의 가책이라기엔 너무 거창하고, 낯이 지나치게 얇아서랄까?). 평소에 K리그 경기나 심지어는 국가 대표 평가전 및 친선 경기 등등에 관심도 없는 주제에 월드컵이라는 큰 경기때만 무슨 열혈 축구팬인양 붉은 티셔츠 차림으로 응원 나가기에는 뭔가 겸연쩍은 기분이 드니 어쩔 수 없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두번째는 나의 차림새로 인해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내가 어떤 정체성으로 해독되는 게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내가 타인에 의해 ‘저 사람은 축구 응원하러 나가는 축구팬이네’라고 해독되는 게 싫다. 비단 축구 응원복장 뿐만이 아니다. 저 사람은 ○○대학생이네, 저 사람의 직업은 ○○○네, 라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해독된다는 일은 상상만 해도 겁이 나고 끔찍하다. (그런 측면에서 학교 로고가 커다랗게 새겨진 야구점퍼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참 감탄스럽다. 비꼬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런 복장을 감행할 수 있는지, 나같으면 겁이 나서 차마 못할 짓이라서이다) 난 나야, 특별한 나인데 어떻게 그렇게 한정된 정체성으로 나를 표현할 수가 있지? 이런 치기 어린 자존심의 발로는 절대 아니다. 내 복장·차림새·소지품이 기호로 작용하여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받아 수많은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해독하기 쉬운 여지를 남기기보다는 여간해서 잘 해독되지 않는 평범한 군중 구성원 중 하나로 숨어 있고 싶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 때 거리 응원을 나갔었다. 그때 나는 그러한 이유로 인해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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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권력과 지성, 매력적인 아내와 사랑스러운 자식까지 모든 것을 갖춘 남자가 있고, 그의 유혹에 휩쓸렸다가 삶을 송두리째 파멸당한 여자가 있다. 어찌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가 진행되면서 되풀이된 진부한 스토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영화 『하녀』는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흥미로운 장면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제부터 스포일러의 향연이 펼쳐지니 혹시라도 영화를 보고픈데 아직 못 보신 분들은 읽지 마시길)

 



영화의 첫 장면에서는 시장 상인, 주방에서 요리하는 아주머니, 담배를 피우는 아가씨, 클럽에서 춤추는 젊은이들, 패스트푸드 점에서 떠드는 아이들, 그 모든 앵글의 주인공인─젊음을 만끽하는 여성에서부터 삶의 최전선에서 돈벌이를 위해 땀흘리는 여성들까지─여성들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남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많은 여성들이 오가는 유흥가에서 한 여성이 투신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가십적인 관심만 보일 뿐, 그녀는 이튿날 아침 사건이 벌어진 땅바닥에 하얀 줄과 피투성이 흔적이라는 기억으로만 남은 채 사라진다. 이는 결말의 은이(전도연)의 최후에 대한 복선인 것일까. 의미를 곰곰이 생각케 만드는 장면.

 

자신이 부리던 가사 도우미 은이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안주인 해라는 은이에게 몹쓸 짓을 저지르지만 이 사건에 가장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인 남편 훈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입술을 깨물어 상처를 주는 일 밖에 없다. 그녀의 어머니는 온갖 더러운 일이 있어도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최고의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견뎌내야 하는 시련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이는 귀족같이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그야말로 상위 0.1%는 됨직한 부를 누리는 안주인 해라(서우) 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계급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이 사실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해라와 해라 모는 하녀 은이(전도연)가 남편 훈(이정재)의 아이를 임신하였음을 알고 은이가 마시던 한약과 정체 모를 약을 바꿔치기해 은이의 아이를 유산시키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훈(이정재)이 해라의 어머니, 장모에게 내뱉는 대사가 압권. “어떻게 당신 딸이 낳은 아이만 내 아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감히, 감히 나의 씨에 그런 짓을…” 훈의 분노에 해라 모가 반박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장면은, 영화 내내 보여지던 그녀들의 권력이 결국엔 남성 기생적 권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다가 그녀도 반박하지 못함으로써 가부장제 하 섹슈얼리티의 헤게모니 질서에 동의한다는─사실을 알려준다.


 

은이가 비극적 최후를 선택하며 자신이 아끼던 주인집 딸 미나에게 애원하는 대사. “아줌마 기억해야 해.” 주인집 가족들의 눈앞에서 자신의 끔찍한 최후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녀의 복수가 이루어진다. 장면이 바뀌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대저택의 정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나의 생일 파티가 열린다. 가족은 미국에 있는 저택으로 이사한 모양이다. 슬프게도 온몸을 불사른 은이의 복수는 이 귀족 가정에 발톱의 때만큼의 영향도 주치 못한 것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세련된 복장의 어머니 해라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듯 마이크에 대고 영어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 훈은 특유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신만만한 남자의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터뜨리지만 소녀의 건조한 표정은 섬뜩하다. 부유하고 행복해 보이는 이 집안에 있었던 추악한 사건의 전말을 아직 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듯한 눈망울을 한 미나의 표정. 복수를 하려거든 부부에게 해야지 가장 큰 트라우마를 애한테 주다니, 당췌 애가 무슨 죄야….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 가장 획기적이면서도 비겁한 복수였던 것일까. 한편, 전태일 열사로부터 시작된 분신의 역사가 시사하는 슬픈 메시지가 떠오른다. 못 가진 자들, 피기득권층의 기득권을 향한 직접적인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것. 기껏해야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 처럼 앞에서는 굽신거리지만 뒤에서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는 뜻이래나)를 되뇌며 분노를 삭이는 게 고작이겠지. 아니면 복수(더 나아가서는 저항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려나)를 성취하는 수단은 자기 존재의 최후의 불꽃을 불사르는 길밖에 진정 없는 것인가. 짓밟히고 또 짓밟혔지만 자기 존재 또는 존재 방식의 정당성까지는 침해당할 수 없다, 그런 내가 여기 있었다는 장렬한 자기 산화의 절규. 그 이상의 진정 합당한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씁쓸한 진실. 






 



결말이 충격적으로 회자되는 모양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해라가 침실에서 독서하는 장면이었다. 쌍둥이를 임신한 채로 남편과 정사를 벌이면서 해라가 내뱉는 대사. “나, 당신 아이 계속 가질 거야. 넷째 아이도, 다섯째 아이도…” 남성에게 성을 제공하고 그의 씨를 제공함으로써 그녀의 지위는 유지되는 것이고, 그러한 그녀의 신념은 동서 고금을 막론한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여성의 에토스이자 ‘레종 데뜨르’였다. 그런 그녀가 만삭의 몸으로 침실에서 읽는 책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性)》이라니, 어쩌면 우리 시대의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임상수 감독의 재치에 피식하고는 이 반어적인 장면이 씁쓸하면서도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사족. 시각적 화려함과 긴장감이 어우러져(원작에 비해 떨어진다고 혹평을 늘어놓는 분들도 많은 모양이지만 난 원작을 보지 못했으므로 패스-) 보는 눈이 즐거웠던 영화. 정사신은 절제되어 좋았고 자칫 설득력이 떨어지기 쉬운 은이 캐릭터가 잘 살아나 있는 것이 만족. 쟤 왜 저래? 가 아니라-_-; 그런 그녀였기에 훈의 유혹에 저렇게 순응했구나, 그런 그녀였기에 최후를 그렇게 선택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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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강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0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구판절판


질식할 듯 화창한 봄날이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마른 풀씨가 풀풀 날리고 바람이 스쳐가는 머리칼에도 드러낸 팔뚝에도, 깃폭처럼 늘어진 빨래에도 묻는 그대로 꽃으로 피어날 것 같은 봄날, 담 밖을 지나가는 도부장수 아낙네의 기침 소리는 꽃가루처럼 지분처럼 날리고 막연한 예감으로 공기 속에 뒤섞이는 것이었다.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마루에 길게 누웠다. 문틀에 걸친 발등으로 햇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옆집 지붕의 물매가 역시 유연하게 하늘의 차양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감정의 표백 상태, 어떠한 느낌도 생각도 완벽하게 잃어버린, 단지 한 장의 흰 종이가 머릿속에 막처럼 펼쳐지는 상태의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햇빛 때문이었다.
─「봄날」-122쪽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 여섯 달째로 접어든 아이를, 더러운 종양을 제거하는 기분으로 용감하게 지워버렸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도 나는 여섯 달짜리 태아의 망령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잠재성 간질이었다. 생활의 표면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결코 없었으나 보다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서 시시때때로 마치 비오기 전의 류머티즘처럼 민감하게 반응했다. 얇은 고무질의 피막을 벗기듯 일상의 표면을 한 꺼풀만 들치면 그 속에서 배태되고 자라는 새끼를 친 욕망과 회한의 기억들이 진득한 거품으로 부글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봄날」-124-125쪽

공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몸 전체를 사선으로 기울이고 넓게 팔을 벌렸다가 힘차게 밀어올리는 동작들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잔인했어. 단애에 서 있는 듯한, 곧 무너져내릴 듯한 정교함이었어. 기교가 더할 수 없이 섬세해지고 완벽해지면 그것은 극도로 단순화되어 이미 상징성밖에는 드러내지 않게 되지. 공을 치는 그애의 모습은 철망에 부딪히는 공의 이켠에서 튀어오르는 다른 한 개의 공처럼, 혹은 빛의 한 순간처럼 번득거릴 따름이었어.
그것은 바로 그애 나이 때의 내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아 있었는지 몰라. 자신의 체력과 기교가 절정기에 도달해 있음을, 더 이상 공이 완벽하게 맞는 일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찾아들던 절망감으로 나는 자살을 생각했었지. 죽음의 의식(義識)은 너무도 투명해서 한치의 빗나감도 용서치를 않지. 그 무렵 나는 꼭 절벽 끝에 선 듯한 기분으로, 라켓을 휘두름으로써 내 속에서 돋아나는 그 어찔어찔한 허무감을 죽이고 또 죽였어.
─「관계」-149-150쪽

당신이 쉬엄쉬엄 올라가는 언덕길가로 나무들이 서 있다. 나무가 휘어질 듯 달린 잎들은 은백양 나뭇잎처럼 반짝이고, 햇빛이 부딪치면 캐스터네츠의 우림처럼 쟁강쟁강 맑은 소리를 내었다. 언덕길은 희게 부풀어 솜을 깔아놓은 듯 보였다. 나는 숨이 가빠왔다. 언덕은 그리 가파르지도 않고 당신은 서두르는 품도 없이 걸어 올라가는데 나는 당신을 따라가기가 무척 어렵다. 구름 속을 걷는다면 이럴까, 다리가 무거워져서 걸음을 떼놓기가 힘이 든다. 나는 큰 소리로 당신을 부른다. 저 좀 보세요. 저 좀 보세요. 당신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이 더불더불한 뒤통수만 보여주며 올라간다. 나뭇잎들이 와아와아 흔들린다. 당신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저 좀 보세요오. 입에 두 손을 대고 길게 부르다가 나는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려버린다. 쏘는 듯 강렬한 빛에 눈이 시었다. 손박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벌려진 손가락 새로 언덕을 살핀다. 햇빛은 어디에나 만연해 있다. -192쪽

(이어서) 나는 플라타너스 같기도 하고 은백양 같기도 한, 잎을 휘도록 달고 있는 나무를 바라본다. 그것은 햇빛에 부딪혀 쟁강거리는 잎새로 가지마다 열매를 은폐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를 좀더 넓히고 반짝이는 잎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아, 소리를 지르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무성한 잎 사이로 얼핏얼핏 내뵈는 것은 풍작의 과일처럼 주렁주렁 달린 남근(男根)이었다.
─「직녀」--쪽

어머니와 관련된 최초의 가장 뚜렷한 기억은 익사의 공포에서 비롯됐다. 유년 시절 어머니와 갔던 바다에서 물에 빠졌을 때 나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이젠 다시 어머니에게로 갈 수 없다는, 그녀의 자궁에서 떨어져나온 이래 가장 확실히 분리되었음을 막연한 느낌으로 자각하여 얼마나 외로웠던가. 어머니와 나를 갈라놓았던 수천 수만의 물결, 인처럼 묻어나던 번득거림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절대적인 힘으로 나를 떠밀어 내가 물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끌어올려진 후에도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손에 십자가를 쥐고 타계했을 때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나는 그녀와 굳게 결합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친화력이 생겨 있었다. …(중략)… 그러나 밤바다 거듭되는 그와의 끈질긴 싸움 끝에 어느 날 문득 최초로 잉태의 기미를 손끝으로 느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서 완벽하게 떨어져나온 격렬한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174-175쪽

(이어서) 나는 내 속에 또 다른 하나의 알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아이를 죽여버리기로 작정한 순간 나는 이미 두 손에 피를 잔뜩 묻힌 듯 섬뜩한 느낌이 들었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본 듯하였다. 나는 그 일을 조용히 은밀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쉽게 치러진 것이어서 오히려 어머니가 이러한 것을 제물로서 기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아할 정도였다.─「번제」--쪽

목 안의 양쪽 편도가 걷잡을 수 없이 부어오르는 느낌에 잠을 깨었다. 눈을 뜨는 순간 거대한 분홍빛의 봉오리 대신 다가드는 어둠에 나는 고통의 형태나 강도에 앞서 당황스레 고통의 기억만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그다지 생소한 것은 아니다. 막사의 딱딱한 목침대 위에서도, 때때로 나는 셔츠깃이 바짝바짝 조이는 느낌에, 혹은 저고리 소매의 솔기가 우드득 뜯어지는 소리에 눈을 뜨곤 한다.
한밤중인데도 창의 격자 무늬가 또렷이 나타나는 건 달빛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끔씩 어두워지는 건 달을 가리는 구름 탓이라고 짐짓 확인한다. 강상을 뒤지는 밤낚시꾼들의 칸델라 불빛의 흔들림이 번득번득 이곳까지 미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도사리고 있는 건 뜨락 가득한, 어둠, 어둠뿐이고 나는 차차 통증이 되살아남을 감각한다. 꿈속에서의 고통이, 또는 후드득 후드득 실밥 터지는 소리의 불안이 흡사 의식의 솔기가 터지는 소리인 듯 느껴져오고 막막한 절망으로 실감되어오는 것이다.─「走者」-221-222쪽

그의 흰 손, 거기서 비롯한 끈끈한 기억에서 떠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밖의 어둠이 두텁게 버티고 있었다. 나는 폐에 가득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 번, 다시 한 번, 다시, 다시. 그러나 공기는 조금도 신선하지 않았다. 어둠을 들이마신 듯, 다시 그것은 폐 속에서 응고하는 듯했다.─「走者」-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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