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지, 이후.
어느 블로그에서 연인을 사고사로 떠나보낸 여성의 절절한 사연을 읽었습니다. 그 여성은 소울 메이트를 잃고 정서적으로 황폐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일차적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었겠지만, 오랜 세월 후 받은 상담치료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처가 유난히 깊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진행된 장례식이 끝난 수개월 후 갑작스레 이메일로 연인의 사망소식을 통보받은 충격이 원인이었습니다. 장례식은 고인과의 이별에 대해 주변인들이 서로 정서적 치유 의식을 나누는 중요한 사회적 절차라고 합니다. 서로 슬픔을 알리고, 위로받고, 망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 그녀는 이 과정을 박탈당했던 것이지요.
제 상실감을 감히 위 사례에 비교하려니 부끄럽습니다만, 교지 종간호 발간은 저에게 일종의 장례식과 같은 의식이라 생각됩니다. 애도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굳이 교지 폐간이 시사하는 바라든지 제 깜냥을 벗어나는 이야기는 않겠습니다. 이 글은 교지『관악』을 스쳐 간 일개 퇴임이 장례식에서 주절거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식상한 고백입니다.
교지 이후, 졸업하고 저는 산업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몇 년 후 백수가 되어서야 스스로의 신체전반에 일어난 변화를 새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작 노동 현장에서는 알아채지 못했는데 말이지요. 저는 원체 느긋하고 게으르며 즉흥적인 인간이었습니다. 학부 시절 장래희망란에 “알람 없이 내킬 때 일어나는 삶을 사는 인간”이라고 답하던 제 DNA 유전정보가 신자유주의적 코드로 변형되어 있더군요. 제 행동양태를 결정하는 프로세스가 신념과는 무관하게 뼛속까지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개조되어, 한동안 자아분열을 겪었습니다. 좀더 어렸던 시절 저는 제 신념이 옳다 힘주어 말하며 댕기던 젊은이였습니다. 뭐 거창한 것은 아니고, 간단한 겁니다. 사람은 차별받아서는 아니 되며, 소수자들이 존중받아야 하고, 절차는 민주적이어야 하며, 남녀가 평등하다는 가치입니다. 이제 저는 전에 뵈지 않던 ‘가장’, ‘사장님’ 등 ‘리더’(이전엔 ‘기득권’의 이미지로 더 와닿았지요)들의 짙은 페이소스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한국 사회에서 소신을 드러내는 일은 어린 시절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갑절은 지난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네요. 그리고 저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노미 상태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나는 경험치가 상승하며 유연한 사고방식을 체득한 것일까요, 아니면 체제 순응적인 인간으로 재사회화되는 과정에 놓인 걸까요.
혼란스러울 때마다 떠오르는 시큰한 기억 한 장면은 수북이 쌓인 회의 문건과 책 더미 사이 과자껍질과 종이컵, 빈 깡통 따위가 지저분하게 뒹구는 『관악』편집실 책상이었습니다. 지끈거리는 논쟁, 치열한 반박, 설익어 낯뜨거운 문장들도 함께 뒹굴었군요. 당신과 나는 우리가 공유하던 가치를 우리의 언어로 공글려 책을 내고자, 밤을 꼬박 새고 새벽녘까지 편집실에서 회의하며 때로는 언성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서로서로의 생각이 온전히 결맞은 게 아니더라도, 독자들과 맥놀이를 일으키길 소망하면서요. 편집위원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고 소통하자며 배제의 논리를 최대한 배제하다보니 교지 역사상 가장 분량이 넘치는 책을 만드는 겸연쩍은 사고를 내기도 했었지요. 신자유주의적 개조인간인 제가 과연 앞으로 어느 조직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치열한 논쟁 끝에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변화시키던 우리는 퍽 사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아노미 이전을 더듬더듬 거슬러간 최후의 기억 한 지점은 항상 편집실 책상 언저리에 머물러 있네요.
함께라서 행복했습니다. 『관악』의 폐간 소식에 밀려오는 참담함과 상실감 또한 함께라서 더 애틋할 터입니다. 교지 이후, 당신의 삶은 어떠했나요. 편집위원회에 몸담았던 시점이 원점이라면 편집실을 스쳐간 사람들의 삶은 방사상으로 제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달라졌습니다. 10년 쯤 후에는 더욱 달라져 있겠지요. 그때 당신도 편집실 책상을 추억한다면, 다시 만나 한잔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궤적이 변했어도 서로의 파장이 여전히 공명을 일으키길 기대하면서, 더, 수다스럽게 떠들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