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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낙원 - 현대 도시 문화와 삶에 대한 성찰
정윤수 글.사진 / 궁리 / 2011년 11월
평점 :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는 토건한국의 집약적 장이다. 나는 서울시민으로서 서울시청구청사, 서울중앙우체국, 동대문운동장, 피맛골, 세운상가, 스카라극장 등의 철거를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공간의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와 개발의 논리로 인해, 근대사의 흔적을 처연히 간직하였던 서울의 유서 깊은 건물들이 사라져갔다. 내 참담함은 이처럼 꼭 거창한 역사적 공간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니고, 소녀시절 뛰어놀던 동네에서 체험한 상실감에 근원을 두어 역시 같은 맥락으로 맞닿아 있다. 어린 시절 물곰팡이 냄새가 알싸하게 피어나는 달동네 골목길에서 부러 길 잃으며 산비탈 켜켜이 쌓인 지붕 사이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도시 풍경을 좋아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여느 때처럼 앞산 달동네 비탈길을 올랐다가 콩밭과 야트막한 담장과 할머니와 아이들이 곧잘 해바라기하는 평상이 있던 한 평 남짓한 안마당 등 소박해서 애틋한 삶의 흔적들이 포클레인으로 처참히 파괴되는 현장을 맞닥뜨리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후에 머리가 커지고 나서 그것이 재개발로 인한 철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부 시절, 캠퍼스는 4년 내내 공사가 끊일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정작 학내 구성원들은 필요를 체감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새 건물들이 들어섰(거나 여전히 공사중이고)고 학생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공간들이 스러져갔다. 기부채납으로 지어진 새 건물에서는 그 대가로 수익을 창출해야하므로 각종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잠식해 들어왔고 자본의 논리는 학교라는 공공성의 공간마저 소비의 장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우리의 도시는 타국의 도시들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퍽 빠른 것 같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무색케 할 정도로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혹시나 이 리뷰를 읽는 분이 도시에 거주하는 분이 아니시라면 논지를 쉽게 전개하기 위한 일반화를 용서하시길, 2010년 9월 기준 도시 인구 비율이 81.5%라는 통계 결과가 배제의 논리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풍경은 각종 지표에서도 드러난다. 대한민국의 ‘GDP대비 건설업 부가가치 비중’은 평균 8.8%로 OECD 평균인 5.48%에 비해 50% 이상 높으며, ‘GDP대비 건설 투자의 비중’은 약 20%에 달하여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무려 2배나 높다고 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았을 때 사업의 궁극적 목적이 불분명하고 의심스러운 토건 사업도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사례는 현 정권의 4대강 사업이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디자인서울사업일 것이다(특히 광화문 광장…). 한 마디로, 저 사업 지금 꼭 필요한 건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사업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공간이 전광석화와 같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새로이 생성되는 과정은 다른 어떤 것의 소멸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3차원적 공간은 한정적 속성을 지니므로. ‘소멸되는 그 무엇’은 공간을 향유하였던 주체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빠른 소멸 속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어떤 시대적 가치나 감수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로이 생성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언제나 진일보한 가치일까?
혹여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지켜야 한다고 공감하는 그 무엇을 굳이 소멸시켜가면서 다른 무언가를 생성해내야만 한다면, 최소한 그에 준하는 가치를 창출하거나 ‘소멸하는 그 무엇’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정통으로 계승할 수 있는 ‘새로운 그 무엇’이어야 정당성이 확립될 것이다. 현 정권의 주요 토건 사업이 ‘토건 포퓰리즘’이 비판받는 이유는 이러한 정당성 확보에 실패했(거나 정당성 확보가 애초 불가능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2011년 11월에 출간된 《인공낙원》이 반가웠다.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매우 시의적절하며 매력적이다. 저자는 ‘도시는 거대해졌고 인간은 왜소’해지며 ‘인간이 점점 주눅들어가는’ 풍경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으매, 이는 앞서 필자가 기술한 ‘지켜야 할 무엇의 상실’이라는 맥락과 맞닿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공간의 변화나 그 공간이 함유한 시대성의 의의를 잘 보여주는 예시로 광장/극장/모델하우스/모텔/카지노/백화점/테마파크/경기장/박물관/공항/기차역을 제시한 구성은 탁월하다.
경관이 해체되고 풍경이 사라지고 그 속에서 애틋하게 이뤄졌던 사람살이의 인연마저 마치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말끔히 정제되고 마는 이 거대 도시의 인공 공간을 배회하면서, 나는 ‘과연 인간적 삶이란 가능한가’ 하는 근원적 질문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p.8.
아쉽게도 이 책은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데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듯싶다. 저자는 오랜 시간 동안 공간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발로 열심히 뛰었지만 비평을 위한 논지 전개에 있어 다소 게으른 것 같다. 따라서 풍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곁들인 문학적 인용이 별로 장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효과적이지 않다). ‘과연 인간적 삶이란 가능한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앞서 ‘인간적 삶(필자의 언어로 정리하면 ‘지켜야 할 무엇’이 될 것이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독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논지 전개가 생략된 채, “…는 더 이상 …이 아니다”는 표현이 다소 엉뚱한 구석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단지 클리셰로만 읽힌다. 예를 들면, 영화 기술의 진보를 서술하면서 현대 극장의 최신식 영상 시설을 장황하게 서술하는 과정에 생뚱맞게 삽입된 ‘〈시네마 천국〉같은 영화에서 보는 그 옛날의 아날로그 릴 영사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와 같은 문장이 그러하다.
‘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은 상투적인 서술로만 그쳐서 빈곤하고, 따라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안타까워해야 한다’는 선언적 태도로 기술한 감상의 편린들만 남는다. 기술의 진보를 덮어놓고 꺼리는 복고적 낭만주의로 읽힐 위험성이 다분하다. 키치적인 조형물만 남은 광화문 광장에 못마땅해 쯧쯧 혀를 차면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센나야 광장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떠올리고, 그의 입맞춤이 광화문 광장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장면은 어색하다. ‘왜 라스콜리니코프는 센나야 광장에는 입을 맞출 수 있지만 광화문 광장에는 입을 맞출 수 없는가’에 대한 성찰은 없고 단편적인 사색의 편린만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도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가 '최소한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역까지 소비문화를 강요하며 침범해 들어오는 현상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부재하기 때문에 '현대인은 더이상 물가를 산책하지 않고 거대 쇼핑몰을 산책한다'고 서술하는 태도 역시 클리셰로 읽히는 것이다.
‘왜 팔각정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민족성과 장소성을 시각적으로 무리하게 드러내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연못의 팔각정. p.314
(왜 국립중앙박물관 연못의 팔각정이 민족성과 장소성을 시각적으로 무리하게 드러내는지 잘 모르겠으며 ‘왜 팔각정이어야 하는가’는 더더욱 모르겠다)
필자의 당위적 태도는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삭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 뿐만 아니라 ‘어떤 요소가 공간을 구성하는 주 요소로 생성되어야 하는 당위’로서도 서술된다. 폐광지에 카지노가 설립되는 과정과 지역사회에서 강원랜드가 지닌 의미는 기본적으로는 긍정적이라는 태도로 묘사된다. ‘가난한 광부의 아들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구심점이므로 앞선 공간(탄광 도시)의 의의를 삭제하면서 새로 구성한 공간(도박산업 도시)의 경제적 가치는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당위가 숨어 있다(내게는 왜 ‘가난한 광부의 자녀들’이 ‘민족의 순결한 딸’이라는 표현만큼이나 당혹스럽게 느껴질까). 카지노와 함께 전당포·모텔·노래방이 가득 들어서게 된 풍경에서 그 옛날의 탄광도시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대해 다른 각도로 바라본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기장은 ‘개인의 열정과 공동체의 열망이 수렴되고 확산되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무대’이기 때문에 역시 긍정적인 공간이라는 태도로 묘사된다. 저자의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못마땅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가슴에 별로 와 닿지 않는다. 비평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공간의 의의를 파헤치기보다는 각각의 테마에서 자신이 보려는 모습만 보고 서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태도는 비장소성을 지닌 공항과 기차역의 상업 공간에 대해 상이한 평가가 나오는 모순을 낳는다. 〈공항〉의 상업 공간은 공항이 ‘환각의 공간’이 되어 ‘삶에 대한 절절한 역설’이 되는데 기여한다고 서술하는데 비해 〈기차역〉의 상업 공간은 ‘눈물의 서정이란 좀처럼 생성되기 어렵’게 만든다며 부정적인 태도로 서술하는 이 비일관성이란! (비슷한 코드의 공간의 의의에 대한 상이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 섬세한 논지로 이끌어냈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었으련만)
차라리 도시 공간에 대한 비평보다는 저자의 복고적 감수성을 잘 살려 과감하게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았겠다. 공간을 향유하는 주체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묘사했다면 인공 낙원에 대한 성찰이 ‘날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경기장은 그런 곳이다. 6만여 명이 강제 동원되어 일사분란하게 수행 지침을 따라 구호를 외치고 돌아가는 연병장이 결코 아니다. 6만여 명이 운집했지만, 그 숫자는 저마다 아름다운 꿈을 꾸는 6만 개의 열렬한 사랑의 행렬인 것이다. p.295.
〈경기장〉에서 나는 볼보이 소년이 국가대표를 꿈꾸는 것 외에 경기장을 찾는 ‘개인들의 꿈’을 느끼기 어려웠다. ‘일순간의 강렬한 열정을 보기 위한’ 또는 ‘반복과 규율의 삶’에서 잠시나마 일탈하기 위한 집단적 욕망만 읽힐 뿐이다. 경기장을 찾는 6만 개의 아름다운 꿈이 있다고 선언적 태도로 진술하기보다 응원하는 사람들의 풍경을 날 것의 언어로 묘사하는 편이 나았겠다. 물론 현대 도시인인 우리에게 유효한 지적들도 있다. 한국의 박물관이 타국과 달리 도심에서도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에 위치하는 공간적인 의의는 우리가 박물관이 함의한 ‘영속의 시간’을 우리 삶 한가운데 받아들인 게 아니라 ‘주말에나 관람하는’ 정도로만 여기기 때문이라는 소중한 지적이 더 풍부했으면, 좋았겠다.
사족. 복고적 낭만주의와 도시 공간에 대한 비평 사이에서 길을 잃은 측면이 없잖아 있지만 저자가 직접 발로 뛴 공간들에 대한 묘사와 사진들은 흥미롭다.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많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