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식할 듯 화창한 봄날이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마른 풀씨가 풀풀 날리고 바람이 스쳐가는 머리칼에도 드러낸 팔뚝에도, 깃폭처럼 늘어진 빨래에도 묻는 그대로 꽃으로 피어날 것 같은 봄날, 담 밖을 지나가는 도부장수 아낙네의 기침 소리는 꽃가루처럼 지분처럼 날리고 막연한 예감으로 공기 속에 뒤섞이는 것이었다.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마루에 길게 누웠다. 문틀에 걸친 발등으로 햇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옆집 지붕의 물매가 역시 유연하게 하늘의 차양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감정의 표백 상태, 어떠한 느낌도 생각도 완벽하게 잃어버린, 단지 한 장의 흰 종이가 머릿속에 막처럼 펼쳐지는 상태의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햇빛 때문이었다. ─「봄날」-122쪽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 여섯 달째로 접어든 아이를, 더러운 종양을 제거하는 기분으로 용감하게 지워버렸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도 나는 여섯 달짜리 태아의 망령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잠재성 간질이었다. 생활의 표면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결코 없었으나 보다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서 시시때때로 마치 비오기 전의 류머티즘처럼 민감하게 반응했다. 얇은 고무질의 피막을 벗기듯 일상의 표면을 한 꺼풀만 들치면 그 속에서 배태되고 자라는 새끼를 친 욕망과 회한의 기억들이 진득한 거품으로 부글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봄날」-124-125쪽
공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몸 전체를 사선으로 기울이고 넓게 팔을 벌렸다가 힘차게 밀어올리는 동작들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잔인했어. 단애에 서 있는 듯한, 곧 무너져내릴 듯한 정교함이었어. 기교가 더할 수 없이 섬세해지고 완벽해지면 그것은 극도로 단순화되어 이미 상징성밖에는 드러내지 않게 되지. 공을 치는 그애의 모습은 철망에 부딪히는 공의 이켠에서 튀어오르는 다른 한 개의 공처럼, 혹은 빛의 한 순간처럼 번득거릴 따름이었어. 그것은 바로 그애 나이 때의 내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아 있었는지 몰라. 자신의 체력과 기교가 절정기에 도달해 있음을, 더 이상 공이 완벽하게 맞는 일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찾아들던 절망감으로 나는 자살을 생각했었지. 죽음의 의식(義識)은 너무도 투명해서 한치의 빗나감도 용서치를 않지. 그 무렵 나는 꼭 절벽 끝에 선 듯한 기분으로, 라켓을 휘두름으로써 내 속에서 돋아나는 그 어찔어찔한 허무감을 죽이고 또 죽였어. ─「관계」-149-150쪽
당신이 쉬엄쉬엄 올라가는 언덕길가로 나무들이 서 있다. 나무가 휘어질 듯 달린 잎들은 은백양 나뭇잎처럼 반짝이고, 햇빛이 부딪치면 캐스터네츠의 우림처럼 쟁강쟁강 맑은 소리를 내었다. 언덕길은 희게 부풀어 솜을 깔아놓은 듯 보였다. 나는 숨이 가빠왔다. 언덕은 그리 가파르지도 않고 당신은 서두르는 품도 없이 걸어 올라가는데 나는 당신을 따라가기가 무척 어렵다. 구름 속을 걷는다면 이럴까, 다리가 무거워져서 걸음을 떼놓기가 힘이 든다. 나는 큰 소리로 당신을 부른다. 저 좀 보세요. 저 좀 보세요. 당신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이 더불더불한 뒤통수만 보여주며 올라간다. 나뭇잎들이 와아와아 흔들린다. 당신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저 좀 보세요오. 입에 두 손을 대고 길게 부르다가 나는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려버린다. 쏘는 듯 강렬한 빛에 눈이 시었다. 손박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벌려진 손가락 새로 언덕을 살핀다. 햇빛은 어디에나 만연해 있다. -192쪽
(이어서) 나는 플라타너스 같기도 하고 은백양 같기도 한, 잎을 휘도록 달고 있는 나무를 바라본다. 그것은 햇빛에 부딪혀 쟁강거리는 잎새로 가지마다 열매를 은폐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를 좀더 넓히고 반짝이는 잎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아, 소리를 지르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무성한 잎 사이로 얼핏얼핏 내뵈는 것은 풍작의 과일처럼 주렁주렁 달린 남근(男根)이었다. ─「직녀」--쪽
어머니와 관련된 최초의 가장 뚜렷한 기억은 익사의 공포에서 비롯됐다. 유년 시절 어머니와 갔던 바다에서 물에 빠졌을 때 나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이젠 다시 어머니에게로 갈 수 없다는, 그녀의 자궁에서 떨어져나온 이래 가장 확실히 분리되었음을 막연한 느낌으로 자각하여 얼마나 외로웠던가. 어머니와 나를 갈라놓았던 수천 수만의 물결, 인처럼 묻어나던 번득거림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절대적인 힘으로 나를 떠밀어 내가 물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끌어올려진 후에도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손에 십자가를 쥐고 타계했을 때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나는 그녀와 굳게 결합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친화력이 생겨 있었다. …(중략)… 그러나 밤바다 거듭되는 그와의 끈질긴 싸움 끝에 어느 날 문득 최초로 잉태의 기미를 손끝으로 느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서 완벽하게 떨어져나온 격렬한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174-175쪽
(이어서) 나는 내 속에 또 다른 하나의 알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아이를 죽여버리기로 작정한 순간 나는 이미 두 손에 피를 잔뜩 묻힌 듯 섬뜩한 느낌이 들었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본 듯하였다. 나는 그 일을 조용히 은밀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쉽게 치러진 것이어서 오히려 어머니가 이러한 것을 제물로서 기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아할 정도였다.─「번제」--쪽
목 안의 양쪽 편도가 걷잡을 수 없이 부어오르는 느낌에 잠을 깨었다. 눈을 뜨는 순간 거대한 분홍빛의 봉오리 대신 다가드는 어둠에 나는 고통의 형태나 강도에 앞서 당황스레 고통의 기억만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그다지 생소한 것은 아니다. 막사의 딱딱한 목침대 위에서도, 때때로 나는 셔츠깃이 바짝바짝 조이는 느낌에, 혹은 저고리 소매의 솔기가 우드득 뜯어지는 소리에 눈을 뜨곤 한다. 한밤중인데도 창의 격자 무늬가 또렷이 나타나는 건 달빛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끔씩 어두워지는 건 달을 가리는 구름 탓이라고 짐짓 확인한다. 강상을 뒤지는 밤낚시꾼들의 칸델라 불빛의 흔들림이 번득번득 이곳까지 미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도사리고 있는 건 뜨락 가득한, 어둠, 어둠뿐이고 나는 차차 통증이 되살아남을 감각한다. 꿈속에서의 고통이, 또는 후드득 후드득 실밥 터지는 소리의 불안이 흡사 의식의 솔기가 터지는 소리인 듯 느껴져오고 막막한 절망으로 실감되어오는 것이다.─「走者」-221-222쪽
그의 흰 손, 거기서 비롯한 끈끈한 기억에서 떠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밖의 어둠이 두텁게 버티고 있었다. 나는 폐에 가득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 번, 다시 한 번, 다시, 다시. 그러나 공기는 조금도 신선하지 않았다. 어둠을 들이마신 듯, 다시 그것은 폐 속에서 응고하는 듯했다.─「走者」-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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