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권력과 지성, 매력적인 아내와 사랑스러운 자식까지 모든 것을 갖춘 남자가 있고, 그의 유혹에 휩쓸렸다가 삶을 송두리째 파멸당한 여자가 있다. 어찌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가 진행되면서 되풀이된 진부한 스토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영화 『하녀』는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흥미로운 장면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제부터 스포일러의 향연이 펼쳐지니 혹시라도 영화를 보고픈데 아직 못 보신 분들은 읽지 마시길)

 



영화의 첫 장면에서는 시장 상인, 주방에서 요리하는 아주머니, 담배를 피우는 아가씨, 클럽에서 춤추는 젊은이들, 패스트푸드 점에서 떠드는 아이들, 그 모든 앵글의 주인공인─젊음을 만끽하는 여성에서부터 삶의 최전선에서 돈벌이를 위해 땀흘리는 여성들까지─여성들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남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많은 여성들이 오가는 유흥가에서 한 여성이 투신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가십적인 관심만 보일 뿐, 그녀는 이튿날 아침 사건이 벌어진 땅바닥에 하얀 줄과 피투성이 흔적이라는 기억으로만 남은 채 사라진다. 이는 결말의 은이(전도연)의 최후에 대한 복선인 것일까. 의미를 곰곰이 생각케 만드는 장면.

 

자신이 부리던 가사 도우미 은이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안주인 해라는 은이에게 몹쓸 짓을 저지르지만 이 사건에 가장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인 남편 훈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입술을 깨물어 상처를 주는 일 밖에 없다. 그녀의 어머니는 온갖 더러운 일이 있어도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최고의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견뎌내야 하는 시련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이는 귀족같이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그야말로 상위 0.1%는 됨직한 부를 누리는 안주인 해라(서우) 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계급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이 사실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해라와 해라 모는 하녀 은이(전도연)가 남편 훈(이정재)의 아이를 임신하였음을 알고 은이가 마시던 한약과 정체 모를 약을 바꿔치기해 은이의 아이를 유산시키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훈(이정재)이 해라의 어머니, 장모에게 내뱉는 대사가 압권. “어떻게 당신 딸이 낳은 아이만 내 아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감히, 감히 나의 씨에 그런 짓을…” 훈의 분노에 해라 모가 반박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장면은, 영화 내내 보여지던 그녀들의 권력이 결국엔 남성 기생적 권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다가 그녀도 반박하지 못함으로써 가부장제 하 섹슈얼리티의 헤게모니 질서에 동의한다는─사실을 알려준다.


 

은이가 비극적 최후를 선택하며 자신이 아끼던 주인집 딸 미나에게 애원하는 대사. “아줌마 기억해야 해.” 주인집 가족들의 눈앞에서 자신의 끔찍한 최후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녀의 복수가 이루어진다. 장면이 바뀌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대저택의 정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나의 생일 파티가 열린다. 가족은 미국에 있는 저택으로 이사한 모양이다. 슬프게도 온몸을 불사른 은이의 복수는 이 귀족 가정에 발톱의 때만큼의 영향도 주치 못한 것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세련된 복장의 어머니 해라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듯 마이크에 대고 영어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 훈은 특유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신만만한 남자의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터뜨리지만 소녀의 건조한 표정은 섬뜩하다. 부유하고 행복해 보이는 이 집안에 있었던 추악한 사건의 전말을 아직 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듯한 눈망울을 한 미나의 표정. 복수를 하려거든 부부에게 해야지 가장 큰 트라우마를 애한테 주다니, 당췌 애가 무슨 죄야….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 가장 획기적이면서도 비겁한 복수였던 것일까. 한편, 전태일 열사로부터 시작된 분신의 역사가 시사하는 슬픈 메시지가 떠오른다. 못 가진 자들, 피기득권층의 기득권을 향한 직접적인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것. 기껏해야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 처럼 앞에서는 굽신거리지만 뒤에서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는 뜻이래나)를 되뇌며 분노를 삭이는 게 고작이겠지. 아니면 복수(더 나아가서는 저항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려나)를 성취하는 수단은 자기 존재의 최후의 불꽃을 불사르는 길밖에 진정 없는 것인가. 짓밟히고 또 짓밟혔지만 자기 존재 또는 존재 방식의 정당성까지는 침해당할 수 없다, 그런 내가 여기 있었다는 장렬한 자기 산화의 절규. 그 이상의 진정 합당한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씁쓸한 진실. 






 



결말이 충격적으로 회자되는 모양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해라가 침실에서 독서하는 장면이었다. 쌍둥이를 임신한 채로 남편과 정사를 벌이면서 해라가 내뱉는 대사. “나, 당신 아이 계속 가질 거야. 넷째 아이도, 다섯째 아이도…” 남성에게 성을 제공하고 그의 씨를 제공함으로써 그녀의 지위는 유지되는 것이고, 그러한 그녀의 신념은 동서 고금을 막론한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여성의 에토스이자 ‘레종 데뜨르’였다. 그런 그녀가 만삭의 몸으로 침실에서 읽는 책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性)》이라니, 어쩌면 우리 시대의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임상수 감독의 재치에 피식하고는 이 반어적인 장면이 씁쓸하면서도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사족. 시각적 화려함과 긴장감이 어우러져(원작에 비해 떨어진다고 혹평을 늘어놓는 분들도 많은 모양이지만 난 원작을 보지 못했으므로 패스-) 보는 눈이 즐거웠던 영화. 정사신은 절제되어 좋았고 자칫 설득력이 떨어지기 쉬운 은이 캐릭터가 잘 살아나 있는 것이 만족. 쟤 왜 저래? 가 아니라-_-; 그런 그녀였기에 훈의 유혹에 저렇게 순응했구나, 그런 그녀였기에 최후를 그렇게 선택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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