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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린저 평전 - 영원한 청춘의 상징,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케니스 슬라웬스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1919-2010)의 공식 여인은 세 명이다. 결혼을 세 번 했다는 의미다. 비록 매체에 작품을 싣기 위한 과정은 험난하고 고달팠지만 일단 작품이 인정 받고 난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작품을 성공시키며 평탄했던 작가 생활에 비해 그의 사랑은 그다지 평온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샐린저가 릴케나 카프카처럼 유리감성이나 신경쇠약이 동반된 우울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이 평전에서 본 경우지만, 전쟁 중 군인으로 뽑히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곳에서 살아돌아온 샐린저의 대담함과 담담한 회고가 샐린저가 생각보다 훨씬 고집스럽고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에는 샐린저가 1980년대 말 결혼한 콜린 오닐이 언급되지 않는다. 이미 언론을 극도로 기피하게 된 그가 세 번째 부인과의 결혼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으며, 사생활을 꽁꽁 숨겨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사랑은 <밤으로의 긴 여로>, <느릅 나무 아래 욕망> 등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이자 코미디 천재, 마임 예술가 등의 별칭이 따라붙는 배우 우나 오닐이었다. 교제중이던 우나는 할리우드로 막 진출해 서른 여섯 살 연상인 채플린의 네 번째 부인이 되며 샐린저에게 큰 배신의 상처를 입힌다. 채플린과 우나의 사랑 역시 평생 견고한 콘크리트 사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첫 번째 부인은 2차 대전에 참전해 온갖 고난을 겪고 살아난 직후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몰래 결혼한 실비아 벨터, 두 번째 부인은 아직 사교생활에 한창이었을 때 파티에서 만난 심리학 전공의 클레어 더글러스, 세 번째 부인은 일흔이 되어갈 무렵 만난 마흔 살 연하의 콜린 오닐이다. 실비아는 첫눈에 사랑을 느낀 타입이라 맞지도 않고 맞을 수도 없는 상대임을 자각 못했고, 클레어 역시 샐린저처럼 우울한 내면을 가진 여인으로 서로를 거울처럼 비췄기 때문인지 초기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각자 외롭고 고독한 결혼생활을 한다. 2010년 샐린저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킨 아내는 콜린 여사로 보이지만 앞서 말했듯 언급되지 않는다.
창작자일수록 필연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작품과 본인(사생활)을 분리할 수밖에 없다. 많은 예술가들이 창작물과 사생활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은둔과 단절로 점철된 샐린저의 삶은 더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미국에는 트루먼 커포티, 존 업다이크, 실비아 플라스, 나보코프, 헤밍웨이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비트 제너레이션 세대를 대표하는 잭 케루악과 윌리엄 버로스도 빠질 수 없다. 이들과는 대개 한때 무난한 관계를 맺는다. 명성에 비해 작품수가 많지 않은 샐린저지만 유독 사건사고가 빈번했으며 주로 미국문학사에 유일무이한 캐릭터로 우뚝 선 홀든 콜필드를 낳은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으로부터 나온다. 1980년 존 레논의 아파트에 침입한 25세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살인 당시 품에 지니고 있었고 체포 직전 계단에 앉아 태연히 읽으며 "모든 사람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야 한다"고 밝혀 충격을 주었다. 다음 해 푹 빠져있던 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게 총을 쏜 존 힌클리가 머물렀던 호텔에서도 이 책이 발견되었으며, 영화 [컨스피러시]에는 서점 갈 때마다 이 책을 사와서 꽂아두는 약물 중독 남자 주인공(멜 깁슨)이 등장한다.
J.D. 샐린저의 삶을 살피려면(정확히는 판단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의 삶을 둘러싼 복잡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용감한 군인과 실패한 남편, 창조적인 열정으로 가득 찬 작가에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은둔을 택한 남자까지, 모두 한 인물 안에 들어 있다.
인간의 본성에는 스스로 세운 우상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그의 실제 미덕보다 더 높이 극찬하다가도, 돌연 상대에게 부여한 높은 가치가 탐탁지 않은 듯, 다시 그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스스로 만든 우상을 파괴하려는 충동이 분명 우리 안에 있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무언가를 우러러보고 싶다는 욕망 또한 존재한다.
적어도 어느 한 시기 동안, 샐린저는 자신이 미국의 야만적인 환경에서 부조리를 울부짖는 예언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 샐린저는 짧게나마 그가 고발한 것들 덕분에 기억되고, 그런 성찰을 계속 밀고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도 받는다. 마치 그는 세상에 내어 준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빚지고 있는 것만 같다.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재현의 순간들처럼 J.D. 샐린저가 작가로서 자신의 의무를 완수했다고, 심지어 예언자로서의 소명도 이미 예전에 이룩했다고 밝혀질지도 모르겠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상, 무언가를 해야 하는 책임은 우리의 몫이다. 그렇게 샐린저의 이야기는 작가로부터 출발해 독자를 거쳐 완성되는 과정을 되풀이할 것이다. 우리는 J.D 샐린저의 삶에 담긴 슬픔과 불완전함, 그가 작품을 통해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모두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인생, 자신이 맺은 인간관계, 자신이 지닌 진실의 무게를 다시 검토하게 될 것이다. (pp.574-575)
샐린저는 말년에 언론으로부터 깊숙이 자신을 숨기고 보호한 이유로 흔히 괴팍한 은둔형 작가로 통하지만, 젊은 시절 그는 혼란한 시대와 부조리한 상황을 스스로 개선해나가려 부딪치는 행동파에 가까웠다. 전쟁이 발발하자 전장에 나가기 위해 군인에 자원하고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며, 떨어지고 나서 속상해한다. 전우들의 비극을 대할 때도 회피보다는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와 살아있음에 감사로 응대할 만큼 실질적인 모습이었다. 작가로서 완전한 성공궤도에 오르기 전에도 끊임없이 매체에 작품을 보내고 또 보낸다. 서서히 주목 받았고 대부분의 작품이 성공했으며, <호밀밭의 파수꾼>을 빼놓고는 미국 문학사를 논할 수 없다. 홀든 콜필드는 그 탄생부터 지금까지 미국 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방랑아 혹은 자유로운 청춘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다. 샐린저가 은둔형 작가라고는 하지만 기질이나 성격이 괴팍하다거나 혼자 있는 걸 즐기거나 사회성 부족 문제는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자발적으로 세상과의 단절을 택함으로써 본인과 작품을 보호한다. 예술가와 작품을 분리하지 않는 세속(언론)에 대한 회피, 유명세 끝에 찢어발겨지고 훼손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
급작스런 성공이라기에는 억울할 만치 매체의 문을 두드리는 기고의 시간이 길었지만 완벽한 성공은 늘 시기와 질타, 칭찬과 비아냥을 동시에 받는다. 그의 은둔을 두고 한때는 습관적으로 10대 소녀를 탐한다거나 콩만 먹고 산다는 등의 소문이 돌기도 했다. 아름다움과 천박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샐린저의 이미지는 거의 성공과 동시에 자신의 몸과 사생활을 숨겨버린 데서 유래된 것들이다. 작품수가 많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성공하면서, 홀든 콜필드 신드롬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청소년 금서로 지정되게 한다. 또 성공 후 속출하는 아류작들이 홀든을 고정된 인물로 두고자 하는 샐린저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영화화, 연극화 등 텍스트의 2차 사용을 일절 불허한 그는 1980년 이렇게 말한다. "이제 홀든 콜필드는 없습니다. 홀든 콜필드는 그대로 고정된 한순간일 뿐입니다." 하나를 허용하면 다른 작품도 줄줄이 허용해야 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샐린저가 우울한 기질의 내면을 보유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괴팍해서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을 택했다는 가정은 틀렸다. 아마 "세상에 있지만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의 의도 역시도 거기 있다고 여겨진다. 2008년 일찌감치 서른 아홉 편의 작품을 제 이름을 딴 문학 재단을 설립하여 모든 저작권 사용을 일임했다는 것은 사후에도 작품이 생전처럼 지켜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평전은 위인전이 아니고 일대기를 순서대로 서술하지 않는다. <아홉 편의 이야기>, <프래니와 주이> 등의 작품집에 실린 [웃는 남자],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등의 대표작이 어떻게 세상에 나와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지를 읽고 싶다면 이 평전이 도움이 되겠지만 장편소설 보다 단편소설을 여럿 남긴 작가이다보니 한 편 한 편에 작가가 가진 만큼의 의미를 두고 읽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가 끊임없이 작품을 썼고 그로 인해 가족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정도였다는 것과 기고를 거절당할 때도 절망하지 않고 늘 처음처럼 닫힌 문을 두드렸다는 의지만은 높이 사야할 것 같다. 인용한 글처럼, 한 인물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거나 하나의 단어 혹은 문장으로 설명하려할 때 대부분 실패한다. 한 인간은 하나의 세계는 아니고, 보이는 각도에 따라 그 이상 혹은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전은 그중 하나의 각도에서라도 잘 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삶은 세상에서 제일 단순하고 단조롭고 간단하다. 작가는 글을 썼고 인물과 세계를 창조했으며 그것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2010년 1월 27일 샐린저가 사망했을 때 그의 모든 책이 미국 전역에서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극적이거나 영화롭지도, 대단하거나 유일하지도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는 일 역시 그러했음을, 살아간다는 게 결국 채우고 비우고 궁금해하고 얻는 과정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누군가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은 큰 용기와 인내를 요한다. 어떤 작가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영원히 죽은 채 단 한 순간도 죽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