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서 도서관 타령해봐야 별 수 없다. 여긴 책을 파는 곳이니 나는 별로 좋은 고객이 아닐 터. 이제야 책값 걱정을 한다. 주문하는 책 태반이 문학일 때는 정해진 금액에서 어떤 책을 택하는 게 가장 이상적일까만 고민하면 됐다. 관심사 아니 갖겠다는 욕망이 커질 때 상황은 더 열악해진다. 이러면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두껍고 어려운 책을 구입해(그래도 한글로는 쓰여있어야 함) 일 년 내내 읽는다면.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든가 단테의 <신곡>을 암기해보는 건 어떨지. 이래도 괜찮을까. 이언 매큐언과 슈테판 츠바이크, 요 네스뵈와 줌파 라히리, 산도르 마라이와 옌롄커와 오에 겐자부로, 줄리언 반스가 한 페이지에 등장하는 페이퍼. 지금까진 생각의 골이 얕을 때 페이퍼를 썼다. 이제 그냥 단상이 되어버렸지만. 비교적 같은 시기에 내가 '읽었다는' 사실 빼고는 만날 이유나 까닭이 하나도 없는 작가들. 김경주의 시로 표현하자면,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작가가 내 마음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쓸 책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쓴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영혼에 처벌 받을지 모르지만 시체를 사랑해서 묻지 못하는 사제처럼 불가능한 영혼을 꿈꾼다 환영에 습격받은 자로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바람이 내 머리칼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김경주, 『몽상가』중에서

 

아빠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고, 설령 맞다 해도 내가 아는 건 당연히 남들도 알고, 하물며 내가 모르는 것까지도 남들이 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0.1%를 제외하면 주어진 정보, 해결능력, 생각의 방향이나 가치 등이 큰 범주내에서는 대체로 일치하는 법이니 상황의 난이에 휘둘리지 말라는, 그럴 경우 특별히 주눅들것도, 특별히 잘난척할것도 없다고 하신 말이다. 좀 유리하다고 나서고 좀 불리하다고 숨으면 언젠가 내가 휘두른 칼에 내가 다치는 거라고. 그렇건 아니건 어떤 범주에서 이 난이를 인정한다 해도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소통의 불안정성이다.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했다면 이 사회에서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퇴폐적이고 예리한 감수성의 천재 피아니스트가 생겼을 리 없고, 누군가 미쳐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 왔을 리도 없다. 너무 평범해서 그 평범함이 진저리칠 만큼 싫은 우리는 과연 미치지 않아서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언젠가 그들은 고위 관료가 되고, 경례를 붙이고, 권력을 과시하고, 틀에 박힌 일장 연설을 뿌리다가 유순한 닭대가리가 되어 예전의 적들이 되는 대로 던져주는 부스러기에 감읍하리라. 하지만 잊힌다 해서 과거도 죽음도 묻히는 건 아니다. 시간 안에 시간이 있고 과거는 현재를 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다시 죽을 테고, 저주받은 자들은 다시 저주받을 것이다. 절름발이를 제조하는 체제는 예견된 붕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또 다시 그렇게 작동할 것이다. -니콜라이 그로츠니, <분더킨트>

 

 

분더킨트(Wunderkind)는 '음악, 문학, 예술계의 조숙한 어린 천재나 신동'을 일컫는다. 배경은 1987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2년 전부터 역사가 이뤄지는 날까지, 소피아의 영재음악학교에 다니는 소년 콘스탄틴의 기록이다. 소년의 눈에 비치는 모든 세계-레슨, 연주, 수업의 단상과 친구, 사랑, 선생님에 대한 느낌-는 브람스와 쇼팽과 차이콥스키, 멘델스존, 리스트, 라벨, 슈만, 드뷔시, 베토벤, 모차르트 등 수많은 음악의 불꽃과 절망, 음모의 선율로 형상화된다. 핍박당하는 시대와 체제의 아르페지오. 세속적 속박과 창공의 경계선, 화음과 흐름과 모욕과 경멸의 순간을 허공으로 날려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의 흐느낌은 와인에 취한 자의 눈에 비친 거리의 네온사인처럼 흔들린다.

 

소년은 누릴 수 없는 불행을 타고났다. 이해받을 수 없는 약점. 재능을 갖춘 자의 영혼을 먹어치우는 열정은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를 괴롭힌다. 붉은 저주가 되어 비밀을 속삭이는 음성, 시간 안에 갇혀 시간을 뛰어넘는 자의 슬픔, 생각 없는 시계 같은 연주의 야만성. 예술의 열정이 사라진 세상에서 음악이란 최면에 걸린, 악령에 사로잡힌 복종과 다름없다. 같은 상황을 남과 다르게 느끼는 것. 천재는ㅡ 땅 밑에 사는 자, 인생 전체에 걸쳐 반쯤 파인 터널을 걸으며 연주하는 사람이다. 자발적으로 현실에 갇혀 신음하고, 영혼과 유령을 연기하는 카니발에 음악이라는 도구를 들고 참여한 사람이며, 삶의 대부분을 몽유병 상태로 보내는 존재들이다. 시대가 버린 도주한 용의자들. 이 소설을 읽은 후 열고 나온 문을 닫아야 했다. 쏟아진 이데올로기, 불가능한 사랑, 교만하고 잔인한 십대의 레퍼토리가 다시 지하 감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을 읽고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갇혀있다는 사실에서 놓여나기 어렵다. 방, 거실, 집, 놀이터, 공원, 하다못해 기차역, 관광객 들끓는 여행지에서조차도. 나는 기꺼이 갇히는 대신 더욱 바짝 더듬이를 세운다. 겨우 주인공과 함께 비슷한 이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울고 웃을 수 있었다. 미쳤다는 걸 인정하는 게 보통 정신으로는 되는 일이 아닐테니, 독서가 가능한 만큼 덜 미쳤다는 뜻도 된다, 안심하자. 뛰어난 문장도 대단한 사건도 없다. 소소한 사연이 있을 뿐인데도 그게 삶의 본질인 만큼 잘도 굴러간다. 우리가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날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기 때문일까. 나라는 존재의 균형점이 타인에게 있다는 역설이 조금은 슬프게 들린다.

 

 

 

 

 

어둠침침한 침실에서 보면 그녀의 집은 황량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대륙처럼 보였고, 그 광활한 대지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가족들은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달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그녀에겐 어떠한 환상도 없었다. 예전에 자신이 세운 계획들은ㅡ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는지 모르겠지만ㅡ시간이 지나 빛이 바랬고,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세운 것이라서 모든 사건을 다 통제하려는 과도한 낙천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육감의 덩굴손을 집 안 곳곳에 뻗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미래에까지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또한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남에 대한 친절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법이었다. -이언 매큐언, <속죄> (p.107)

 

호손의 <주홍글씨>, 매즈 미켈슨의 영화 [더 헌트]가 다루는 지점은 같다. 합리의 무모한 도전이 어떻게 불합리가 되는가, 그러니까 마녀사냥 당한 헤스터와 루카스가 어떻게 이 상황을 버텨나가는가 혹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대우 받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속죄>는 <주홍글씨>와 [더 헌트]에 해당하는, 사건발생 후 마녀사냥의 행보와 로비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다. 다만 로비가 군인이 되어 전쟁의 시기를 견디는 순간만으로 로비가 견디는 죗값의 상황이 압축되어 펼쳐질 뿐. <속죄>에 한 챕터를 더 쓸 수 있다면 그건 <주홍글씨>나 [더 헌트]가 될 것이다.  

 

 

 

 

원제는 구판 <연민>이 아니라 신판 <초조한 마음>이다.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츠바이크는 같은 내용이라도 여느 작가들에 비해 굉장히 집요하게 쓴다. 순간을 포착하는 묘사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읽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고 감정몰입도가 점점 높아진다. 단편도 그런데 심지어 장편에 대해 덧붙여 뭣하겠나 싶으면서도, 이 가능한 상황의 불가능한 묘사, 꼼꼼한 심리전, 예민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연민'이 이토록 양가적인 감정이란 데 어김없이 동의하면서도 어느 경우 소모일 수도 있지만 또 어느 경우 최소한의 호의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고 생각한다. 연민이 아무리 부조리하다고 해도 우리가 인간인 한, 좋은 사람이고 싶은 한,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격상 한 작가를 연달아 전작할 가능성은 지금까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어떤 독서 스타일이나 습관은 각기 다른 분야의 책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거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위대한 해리 홀레 반장만 기억한다면 이 작가를 잊을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것 같다. 놓칠 때가 많았던 추리 시리즈물 중 그나마 첫 스타트를 첫 (번역)작품으로 시작한 드문 작품인데, 겨우 두 권째. 앞으로도 나는 기존에 출간된 해리 홀레 시리즈가 한 권 한 권 구간으로 전환될 때마다 읽기로 한다. 이왕 늦은 거 책값이라도 굳게. 얼마 차이도 안 난다는 게 함정, 이러다 도서정가제 실시되면 그건 그것대로 또 낭패. <스노우맨>이 시릴 정도로 차갑고 순백의 눈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면 <레오파드> 역시 흰 이미지가 월등하지만 콩고 때문인지 상상 돋는 살인무기 때문인지 붉고 단단한 강렬함이 먼저 느껴진다. 더 생생하고 더 정교하고 더 가차없는 스토리. 더 말하기에 이미 늦기도 했고, 더 써봤자 앞으로 읽을 분에게 방해라면 몰라도 도움이 될 리 없다.

 

 

 

파리누쉬 사니이는 1949년 이란에서 태어나 심리학자, 사회학자, 연구자로 정부 각 부처에서 고위직 간부와 고문으로 다년간 경력을 쌓아온 다소 지긋한 나이의 작가다. <나의 몫>을 읽는 일은 말하면 입만 아픈 아랍(이란)의 진부한 현실을 꼼꼼하게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아프간의 실상을 다뤘던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다르지도 않다. 생각해보면 모르는 사건도 더 알아야 할 사건도 없는 현실을 굳이 두꺼운 책과 힘겨루기하듯 읽을 이유가 없다. 아무리 배우고 싶어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아버지나 오빠에게 돌아가는 대가를 위해 제 입이나 덜어줄 양으로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 한다. 강간과 다름없이 관계를 가지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나이 차 큰 남편 수발과 함께 평생 부엌데기로 사는 삶이 나의 몫이 아님을 아랍의 여자들이라 하여 몰랐을 리 없다.

 

여주인공은 가족 몰래 연애를 하지만 오빠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한 남자가 도망가고 힘든 시간을 겪는다. 다행히 잘못된 전통과 관습을 전복시키려는 소수의 반집단(혁명집단) 소속의 남자와 결혼하면서 불행을 피한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관습적 결혼과 핍박의 삶으로부터는 구해졌다. 하지만 남편은 가정보다는 바깥 일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아내에게 원하는 공부를 하게 하고 혁명을 돕게 하지만 가정을 안정감 있게 꾸리지 못한다. 남자가 잡혀가고 홀로 가사와 육아, 생계를 책임지는 마수메에게 더이상의 공부는 무의미하다. 전통과 관습이 고수되는 테헤란에서 여자에게 교육이란 그야말로 삶을 방해하는 사치다. 남편을 잃어도 자식은 커간다. 이 고단한 시간, 지난한 고통의 보상은 아들이 보내는 감사인사다. 서글프고 막막하다. 아직도 이런 사회가 지구상에는 대단히 많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삶이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나, 만약 그 반대라면 우리는 매일 아침 같은 철로를 걷기 위해 사는 것처럼 지루할 것이다. 영혼을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어떨지, 나는 모른다.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문학을 아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살다가 약속도 인사도 없이 한 사람이 먼저 떠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믿을 만한 조력자이자 배우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한 사람들. 어쩌면 다른 사람에 비해 나눌 수 있는 기쁨을 하나 더 가졌기에 잃었을 때 내 팔다리가 두 배로 잘려나가는 듯한 절망을 느끼지 않았을까. '팻에게 바친다'는 줄리언 반스의 헌사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랑고백으로 들릴 즈음, 오랜 시간 침묵을 거듭하다 비로소 입을 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삶의 일부였음을 조심스럽게 선언하는 목소리.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보내기까지 여전히 함께였으므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말은 대개 옳다.

 

 

 

 

 

<저지대>를 읽으며 별로 재밌지도 않은 <나의 몫>이 떠오른 이유가 아마도 '혁명'이라는 화두 때문일 것이다. 배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상황은 별다를 것 없는, 어쩌면 단지 '현재'나 '행복' 혹은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그저 지금 힘든 상황에 대한 '회피'에 치중했을 평범한 선택이 삶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이유. 참으면 현상유지가 가능하지만 삶이 고통스럽고 대항하면 무언가에 나를 바칠 것처럼 살아야 하면서 미래를 가늠할 수가 없어지는 것. 혁명. 하지만 이 얘기는 혁명이 주가 되는 내용은 아니다. 모든 키를 수바시와 우다얀의 한가운데 있던 가우리가 쥐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 떠밀렸다기보다는 셋은 혁명이든 책임이든 배반이든 어떤 식으로든 선택이란 걸 했기 때문에. 행복과 사랑의 순간이 무척 짧고 고달팠던 기억과 그 기억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내어줄 수 없던 한 여자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그렇다면 유독 정해진 운명에 매몰당한 사람은 벨라가 아니었을까. 출생에 얽힌 비밀, 엄마를 향한 원망과 그리움. 그러나 벨라 역시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꾸리게 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전적으로 '선택'의 범주로 엮인다. 처음으로 어떤 역사적 사건에 휘말릴 때는 차라리 가만히 있어야 그 소용돌이가 날 그저 스쳐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에 가까웠기에 선택을 하면 할수록 더 끈적한 갯벌 속으로 자꾸 빠지는 상황을 혼자서는 도저히 그려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아니란 걸 알지만 되돌아 갈 수도 없을 때 우리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세 명의 주인공, 어쩌면 그들의 딸 벨라와 형제의 부모까지도 그들이 한 선택을 후회했으리라 가정해본다. 하나의 삶이란 곧 포기한 다른 삶에의 영원한 갈증이기도 하니까. 결국 가장 불행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일지도.

 

 

 

 

<아름다운 폐허>는 옅고 싱겁다. 아름다우면서 폐허같은 느낌을 형상화했다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 제일 외로워졌고, 그 외로움은 정말 폐허같았으니까. 영화로 치면 압도하는 장면이 없다고 해도 좋다.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아쉽다는 기분이 절로 들 때 그건 어느 정도 필요했던 것이다. 서정적인 표지그림과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 포르토 베르고냐'라는 배경에 끌렸다. 만약 50년이라는 시간 사이로 흐르는 강과 베르고냐에서 할리우드까지의 거리를 짐작했다면 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탈리아 외딴 섬마을(한적)과 할리우드(복잡)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감명깊은 스토리 경우의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놓칠 수는 없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아무도 모르게 훔쳐 수첩 귀퉁이에 적어두고 싶은 문장이 제법 있다. 잊힌 시간과 그리움에 관한 절절한 관조.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감수성은 역시 멀찍이 떨어져 낯설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난 시간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다.

 

 

 

 

어쩌면 고통이란 밤이 새벽빛에 서서히 물드는 것처럼 그렇게 차례를 지켜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숙명이 아닐까. 꼭 만나기로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고, 내가 만든 아이의 평화로움은 순식간이며, 악순환의 고리, 카르마, 불투명한 미래, 오랜 습관, 불행의 꿈나무 같은 사람들. 이 전쟁같은 삶은 실은 아주 극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문학적으로 특별하다는 느낌도 없다. 그런데 간절하다. 뭔가에 쿡쿡 찔리듯 아프다. 현란하고 기교있게 씌어진 소설보다 훨씬 더 깊이 흔들리는 정직한 비극. 삶은 계속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겠다 아우성이고, 그걸 지켜내려는 노력은 전쟁과 같다. 아이는 부모의 땀이고 눈물이고 비밀이다. 더 완벽하고 대단하고 멀쩡해야만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둠과 어둠이 만나면 더 짙은 어둠이 된다는 공식은 끝내 믿지 않으련다. 그럴 수가 없다. 여행은 절망이었다. 수많은 위기의 확률을 마지못해 이겨낸 절.망.

 

 

 

 

 

산도르 마라이는 분명 세 명의 주인공 시점에서 각자의 입장을 써내려가기로 철저하게 구상한 후 쓰기에 돌입했을 것이다. 일롱카의 입장에서 일단 쓰자, 다음은 페터의 입장에서 써볼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유디트의 입장에서도 쓰자, 하고 썼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서늘하고 개인적인 독백을 내것으로 소화하기에는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뭘 하는지 몰랐다. 총알처럼 달렸던 상권이 끝나고 하권을 시작하며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기 시작했으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좋았다, 고 쓰기에 민망한 책이 될 것 같다. 좋았지만 좋지 않다? 이상하다. 평소대로라면 일롱카의 마음을 읽었으니 페터도 궁금해야 정상 아닌가. 페터를 읽어야 유디트의 마음을 읽을 차례가 오는데, 요즘은 읽던 책을 미뤄두는 경우 없이 대체로 끝나면 다른 책을 시작해왔다. 어쩔 수 없이 잠시 미뤄두었다. 이 질식할 듯한 책장과 책장 사이를 오갈 힘이 지금은 부족하다. 

 

 

 

 

동물이라면 또 모르지만 식물에는 통 감정이입이 안 된다. 장미 꽃다발은 집구석에서 몇 년을 갔고 핑크색 국화 다발은 거기서 벌레가 기어나올 때까지 몰랐다. 꽃은 예쁘지만 세심하지 못한 나는 문학 속 꽃들을 일일이 확장시킬 능력이 거의 없다. 한 권의 문학 속에 활짝 핀 꽃들에 동그라미 치며 읽으면 대략 몇 송이의 꽃을 만나게 될까. 저자가 고른 서른 세 편의 문학에서 찾아낸 알록달록한 꽃들을 담은 책이다. 김유정부터 박경리, 박완서, 김훈, 이승우, 신경숙, 정이현까지 골고루 담겼다. 읽고 또 읽어도 꽃이 등장하는 문장은 늘 낯설다. 훌쩍 들판에 나갔다가 한켠에 곱게 핀 야생화 이름을 내가 알아채는 날까지 꽃을 알아가도록 노력해야지. 희고 노랗고 빨갛고 보랗다. 사진이 알록달록 참 예쁘다. 마음이 다 참해진다. 늦기 전에 곱디 고운 꽃을 꺾어 책갈피로 만들어봐야지. 적어도 오늘만은 꽃 생각으로 내 안이 환해진 느낌이다.

 

 

 

 

 

중국에서 인육 식용이나 사체강간은 그리 충격적 소재가 아니다. 내가 읽어온 몇 안 되는 중국문학은 죄다 처음에는 포기하고 싶다가 끝에 가서 전율을 느끼고, 비로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거나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같은 대륙의 다른 책을 집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독서는 망각과 기억이 점강과 점증을 반복하는 증상을 확인하는 일이다. 나는 어느 작가의 작품이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좋을 때 비로소 긴 시간에 걸쳐 전작을 읽으려 결심한다. 비교적 최근에는 모옌과 옌롄커, 앨리스 먼로가 그랬다. 딱 두 권씩 읽어봤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는 같은 기간 비교해 모옌이 앨리스 먼로보다 두 배 가까이 덜 팔렸다는데 중국 역사와 문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이질적인지 말해주는 지표다. 어떤 식으로든 미국보다 중국이 더 멀게 느껴지기는 한다.

 

앨리스 먼로보다 모옌이 월등하게 좋았다. 첫 권 첫 장에서 간파했다. 모옌은 처음부터 매몰차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나는 대개 고통 속에서 질척거리는 삶, 끝까지 가는 삶, 시대적 핍박과 굴종의 삶을 다루는 작품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에 끌린다. 읽은 작품이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삶의 처절함과 무거움, 일상의 소소함 중에 내가 끌리는 쪽은 기질상 전자일 수밖에 없다. 기대를 완전히 넘어서거나 배반당할 때 나는 전율한다. <물처럼 단단하게>가 붉고 뜨거웠다면 <사서>는 질펀하고 차갑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나는 이제 중국문학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굳히게 됐다. 미지의 영역에서 성큼성큼 다가온 중국문학은 아직 정체 파악이 완전히 되지 않을 뿐더러, 오롯이 제모습을 보여준 것 같지도 않다. 넓고 큰 나라인 만큼 문학의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릴 것 같다. <열세 걸음>의 첫 열 장을 다섯 번쯤 재시도한 경험에 비추면 <사서> 역시 읽기 편한 작품은 아니다. 단번에 손아귀에 잡히지 않더라도 일단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교훈, 그러면 더 큰 감동을 얻으리라는 확신이 이제는 생겼다. 뒤죽박죽, 흐릿흐릿, 읽고나서 더 어려워졌다. 절절하고 웅숭깊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상한다 해도 직접 읽는 지식인들의 강제노동수용소 묘사는 더 멀고 더 이 세상 같지가 않다. 심상찮다. 문화대혁명, 대기근의 실정은 잘 모르지만, 처연하고 서늘한 느낌만은 다음 읽을 작품에 되려 압사당할 때까지 지속될 것 같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더 정당하고 너그러운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칵테일을 한 잔 마시고 예쁜 애인과 만나고 하는 사이에 틈을 내어, 말하자면 여가가 있을 때 찬사를 드리면 그만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무를 떠맡긴다면 그건 추억을 요구하는 것일 터인데, 우리의 기억력은 짧거든요. 그러니 친구들 가운데 우리가 사랑하는 건 갓 죽은 사람, 마음 속에 고통을 주고 있는 사람뿐으로 결국 그건 우리들의 감동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들 자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카뮈, <전락>

 

자유를 구속당하고 시간을 빼앗긴다 해서 추억과 사랑을 멈출 수 없듯 고통과 후회와 감동과 의무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나는 과거나 현재보다는 미래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고, 가장 불행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책 속에서 미래를 찾으려 소설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건 아마도 내가 모르는 천상의 시간을 흐르게 하고 색다른 세계를 선물받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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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5-30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잘 지내고 계시는군요.
여전히 많이 읽고 좋은 글 올리시고~^^
오랜만에 들러 좋은 글 읽고 가요.^^

아이리시스 2014-05-31 07:24   좋아요 0 | URL
꿈섬님, 잊을 만하면 그래도 한번씩 만나서 정말 반갑고 좋아요.
저는 잘 지냅니다.. 별일 없는 게 너무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요.
자주 보고 싶어요. 글을 핑계로라도요^^
주말 잘 보내세요. 세상에서 제일 즐겁게.

2014-06-01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02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8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11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