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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100억은 큰 숫자다. 돈으로 따지면 큰 금액이고, 이 돈이 이자의 명목으로 불어나기 시작하면 말아먹지 않는 한 혼자 먹고 살기에는 넉넉하다. 그런데 극소수 운 좋은 연예인은 작품 두 편을 연달아 성공시키거나 노래 두 곡을 띄우면 순식간에 100억 이상의 자산이 불어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100억의 1/10,000에 해당하는 금액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돈)과 사람의 상하관계는 미묘하다. 돈이든 힘이든 뭐가 됐든 자본가가 되려 발버둥치다 양심도 버리고 신뢰도 잃고 건강도 담보잡힌다. 초가삼간 다 태우고서야 정신 차릴 듯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100억은 큰 돈이다. 일례로, 무이자로 1년에 1억씩 저축을 하면 100억을 모으는데 100년이 걸린다. 복리계산이 기간을 단축시키긴 하겠지만 매년 1억씩 저축할 돈이 없으므로 그림의 떡일 확률이 크다. 씀씀이를 어림잡으면 1억을 저축하려면 적어도 3억 이상을 벌어야 한다. 1년에 1억을 벌면서 1억을 저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S그룹 회장은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외제차 수집이 취미라 80억 짜리를 포함 차고에 열 대쯤 있다는데, 연비 좋고 행여 부딪쳐도 상대방만 박살나거나 죽는대도 날기는커녕 기어다닐 공간도 없는 이 좁은 땅덩어리 어디서 저런 차를 탄들 폼이 날지 의문스럽다. 그들은 단지 남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돈을 쓴다. 우리나라 호텔 최고 숙박비는 하루에 1000만원이다. 코스요리가 아무리 비싸도 한끼에 300만원 이상은 안 된다. 돈을 쓰고 싶어 환장해도 하루 먹고 자는 데 2000만원이면 해결된다. 매일 1억씩 '소비'하라는 과제는 길어야 두 달은 행복하지만 머지않아 고역이 될 게 뻔하다. 자동차도 옷도 빽도 술도 보석도 1년 이상 매일 새로 산들 그게 행복이겠는가. <반란의 도시>는 '도시' 이야긴 줄 알았는데 실은 '반란'에 방점이 찍히는 이야기였다. 왜 도시인가 생각해보면 자본주의의 시작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구가 밀집하고 자본이 집적되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운동(반란), 노동(혁명), 주거, 돈, 권리에 대한 얘기였다.

 

최저임금 얘기를 해보자. 최근 미국 대통령은 시급을 한화로 만원까지 올리는 법안에 싸인했다는데, 기존 시급의 거의 40%에 가까운 인상률이다. 미국은 지금까지도 우리보다는 높은 시급이었지만 복지가 탄탄한 유럽 선진국들에 비하면 턱도 없이 낮았다. 하지만 우리는 각국의 최저임금 책정이 올바른지에 대해 판단할 근거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 단순 시급액의 절대적 비교로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저임금액은 단지 노동자들의 월급 인상에 영향을 미쳐 소득수준과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에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최저임금을 올리는 데 무척 인색한 나라다. 나도 처음에는 사람을 싸게 부리려는 기업에 동조하는 무능력한 정부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최저임금을 '대폭' 상승시키려다 못한 건 우리나라 자영업자의 비중과 관련이 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자영업자의 비중은 이미 10년 전부터 초과상태였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30% 정도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하다못해 이웃나라 일본과 비교해도 월등하고 심지어 두 배 가까이 차이난다. 요식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인터넷 개인쇼핑몰만 봐도 최근 10년 간 폭발할듯 늘어났다. 임금상승은 곧 물가상승을 가져오고, 산업의 재벌독점구조를 개혁하지 않는 한 서민들의 소비는 오히려 위축된다. 높은 제품가격을 다시 고스란히 서민들이 감당해야 한다.

 

이 기형적인 산업구조와 복지수준, 세수(tax revenues)를 포함한 여러가지 문제들 때문에 노동시장과 수요공급의 균형을 예상하기가 매우 어렵고 까다롭다. 복지가 탄탄하면 임금액이 조금 낮아도 살만해진다. 절대적 임금액이 높아도 세를 지나치게 걷으면 설사 절대적 금액이 높더라도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런 노동시장 해석은 무척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당시 임금 상승률의 폭은 지난 7년보다 높았다. 대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최저임금은 지금보다 한참 더 상승해야 한다. 나는 그냥도 아니고 초서민이니 내가 남의 사업체에 고용된 경우에는 당연히 지금보다 배로 높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고용하는 입장이라 생각하면 그 당연한 문제조차 쉽게 답이 안 나온다. 의문이 생긴다. 도시가 먼저였는지 사람이 먼저였는지, 개발이 먼저였는지 권리가 먼저였는지. 개발과 발전이 영원할 줄 알았던 이들에게 주거지 위협 사태와 생활 전반의 몰락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반란의 도시>를 통해 저자 하비는 68혁명 때 사용된 일종의 구호였던, 앙리 르페브르(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의 '도시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the city)'를 재구성한다. 이 책은 '도시권'의 개념에 대한 확정을 시도하는 방법론이자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를 다각도로 분석, 해설, 탐색하는 형상이다. 또 프랑스 혁명(1789)과 파리 코뮌(1871)을 언급하며 파리를 관통한 두 번의 민중적 혁명을 짚어보고, 오늘날 도시 공간에서 일어나는 각양각색의 약탈에 대해 비판한다. 약탈의 근거로 무분별한 개발, 공유재의 비극, 사유화 그리고 노동자, 이민자, 성소수자, 빈민자의 권리 침해를 꼽는다.

 

이후 1930년대 공황과 함께 왔던 부동산 버블과 2008년 금융위기를 언급하며 자본주의 역사를 관통해온 도시의 면면을 훑기도 한다. 세계 꿈의 무대로 꼽히는 맨해튼은 이미 가진 자의 공간을 성벽으로 분리하기 시작했고, 시장은 기계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몸통을 맡긴지 오래다. 이로부터 상당한 물리적 거리에 위치한 아프리카, 중동, 남미 대륙도 지배/피지배 시스템에 들끓는 중이다. 세계는 과열되고 있고 부르주아가 위세를 떨치는 반면 노동자들은 점점 더 도시 중앙부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난다. 자본과 결탁한 순간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는 종교와 예술 역시 겉모습만 다를 뿐, 문화는 또다른 하이에나들의 전쟁터가 되었고 대자본과 권력의 지배로부터 놓여날 수 없어졌다. 음악과 그림이 진열된 소모품으로 변했다. 키치적 소비는 순수한 취미를 고루하고 낡고 보잘 것 없는 개념으로 격하시킨다. 이제 시장은 모든 분야에서 특수함과 독특함, 진정성, 미적 의미보다는 지배, 핍박, 강요에 바쳐진다. 하비는 역사가 말해온 것처럼 개인이 '도시권'을 되찾기 위해 광장과 거리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을 구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권위가 무의미하듯, 점령 당한 민중의 터전을 잃은 민중은 더이상 민중이 아니다. 민중 대 월스트리트당의 투쟁은 지구적 차원의 투쟁이자 지역적 차원의 투쟁이며, 독재 정권 척결도, 평등 교육제도 실현도, 파업 노동자들의 권리 수호도 잃어버린 광장의 탈환와 민중의 결집, 시스템의 전반적 재구축, 투쟁과 반란 등으로 이뤄내야 한다. 도시를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는 우리 모두에게 건강하고 공정한 도시를 지키는 일은 더이상 피할 수 없는 의무이자 숙명이 되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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