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팠고 또 그리운 여름의 클레망틴.

 

 

 

 

바람이 불어오기에 여름에도 축복이 있다는 걸 알았다. 떠올려보면 예민함을 덜어내기 위한 이십대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너그러운 행복 바이러스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친구들 사이에서 까다로운 취급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던 건 그걸 극복하는 다른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입을 꾹 다물거나 모조리 털거나, 묘하게 신비롭거나 묘하게 솔직해서 성격 자체가 화근이었다. 다 말해주면 화를 냈고, 하지 않으면 답답한 사람으로 몰렸으니까.

 

 

 

 

 

게다가, 제일 벼린 칼인 줄 알았던 나 이상 과민한 사람을 만나면 막막해지곤 했다. 타고난 게 무심한 다혈이니, 끓는 피와 허영만 내려놓으면 무뎌지리라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문학에서 길을 찾건, 인문학에서 인간을 찾건, 다윈과 아인슈타인에게 우주를 묻건, 사람은 원래 생겨먹은 대로,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게 정석이다. 그래서 이제 피한다. 모든 걸 구할 수 있을 듯 나섰던 때도 있는데, 그래, 처음부터 본 적 없는 것처럼 눈감지 않았을 때가 있긴 했는데. 왜 그때 생각이 떠올랐을까. 덥다, 덥다, 하며 엄마가 째려볼 정도로 냉장고 가득 아이스크림을 쑤셔 넣어두고 야금야금 꺼내먹으며 씻고나도 금새 끈적해지는 몸을 뒤틀어 우리나라 기후 어쩌고저쩌고, 제습기 어쩌고저쩌고 그러는 중에 밤이 되자, 뭘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선풍기를 풀가동하고 책상에 앉았다. 아, 이건 아니야, 책상이라니. 골목으로 뛰어나가볼까. 동네 끝에서 끝까지 달려볼까. 여름밤, 아무도 없는 어둠 속 도시의 하늘도 까맣게 빛난다. 하지만 역시 귀찮아. 동네에 아직 친한 친구가 산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불러내서 캠퍼스 벤치에 앉아 맥주캔을 들이켜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귀찮아.

 

시내 피자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고 노래방에서 뛰어놀다 폭죽 속 반짝이와 땀과 웃음이 뒤범벅이 되어 깊은 밤 동네 골목을 휩쓸고 다녔던 별처럼 아련한 열아홉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누구의 무엇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던 시간들. 잠깐의 시기나 질투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하지 않았던 만큼, 남자/여자, 연애/사랑이란 것이 앞에 놓이지 않았던 시절.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들, 현재 제일 친한 친구, 같은 동네, 같은 골목, 같은 어린시절을 공유한 편안함의 공동체. 학교보다 동네 독서실이 좋았던 이유도, 공부하다 서로 꼬드겨 저녁 내내 노래방에서 놀거나 햄버거 먹으러 가기도 하는, 그게 아니면 편의점과 시장통, 독서실 마당을 배회하며 수다에 수다를 거듭한 그 깜찍한 생활들 덕분이었지만, 덕분에 추억 대신 성적을 잃었다. 애초 잃을 성적 따위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몰랐다. 그 시간이 누군가를 의사도 만들고 판사도 만들줄은. 대충 졸업해서 대충 입학했다. 모두들 서로의 소식을 모른 채 스무 살이 시작되었다.

 

성적보다 친구관계가 더 고달팠고, 야자보다 하교 이후의 사생활을 소중히 했다. 연애 비슷한 것들이 늘 학창시절에 깃들었지만, 내가 혹은 누가 서로의 전부가 된다는 부질없음보다는 자유를 더 사랑했던 것 같다. 여중여고에 다녔으면서도 학교 밖에서는 늘 남자애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특별한 관계가 시작되지 않았던 것은 은연중 굵고 진한 선을 그어버리고 돌아서는 내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애를 하게 된다면 그 연애는 나를 세상 끝까지 데려가야 하리라 믿던 때였다. 그가 아무도 모르는 별로 나를 옮겨주길 원했다. 그 끝은 스무살 연상을 사랑하거나 아님 불륜이라고,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짐작도 못한 채 어렴풋하게 젊음을 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줄다리기는 오래 계속되었지만 사랑은 착실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애틋하지도 깜찍하지도 아기자기하지도 살갑지도 못할 때가 많다. 기념일 같은 건 쭉 못 챙기는 편에 속한다. 기대를 없애버리고 나면 작은 걸 해도 크게 보인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그럴 때면 정말 무심해서 지나치게 도도하구나 싶을 때가 있다. 나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내가 피곤한 사람이라는 걸, 상대를 자꾸만 자극하는 형이라는 걸 알고 났을 때 처음으로 부드러움을 갈망했다. 무뎌져야겠다고. 처음 데이트나 처음 받은 선물, 처음 간 여행, 처음 간 모텔, 처음의 대사나 느낌 같은 것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적어도 예민의 촉이 그런 방식으로는 표출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시간이 흘러 내가 알 수 있었던 하나는, 추억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추억이 추억에 포개졌다는 사실 뿐이다. 좋고 편안한 삶에서는 그렇지 않은 삶을 상상하지 못하듯 나빴든 좋았든, 추억은 추억 안에서 흘러갔고, 나는 곧 괜찮아졌다.

 

 

 

파타고니아의 양
                                         

                                                      -마종기


거친 들에 흐린 하늘 몇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
살아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채로 구워 며칠 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 뿐인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 볼 별 하나 없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하늘이 부르고 바다가 손짓하고 풍경이 부서져내리고 사람들이 함박웃음 짓는 곳에 살고 싶었다. 경쟁하고 헐뜯고 싸우는 살벌함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큰 부도 가난도 모른 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자란 내가 꾸는 꿈이 때로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꿈꾸는 것들은 모두 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꿈이 아니라 내가 나빴다. 내가 꾸는 꿈이 동시에 곁의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게 했으니 몽상에도 책임이 있다. 삶도 그렇지만 사람 역시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너나할 것 없이 딱 그만치씩 갖고 살았다. 가치나 의미 같은 것은 스스로 구해야 했다. 마침내 다시 침잠했다. 나는 몸을 떨었다. 두려움은 그때 지나갔다.  

 

 

삶이란 거, 살아간다는 거, 나라는 존재, 우리라는 인간.

지금보다 조금 더 장엄할 수는 없을까.

 

 

 

고래가 있었다
 
                                                            -박미라
 


붉은 장미*의 기억을 끝으로 바다를 접는 고래.
 
붉은, 호흡을 꺼내 구름을 탁본한다
자신이 끌고 다닌 하루의 기록을 찾아보지만 탁본 속에는
주어도 서술어도 생략된 비문(非文)만 가득하다
겨우 찾아낸 꽃잎 문양 수의를 혼자 입기 어려워서
꼬리를 들썩이다가 눈동자 속 파도를 꺼내 보다가
 
바람이 뜯어먹던 발자국을 지나고 백사장이 구워낸 해당화 그늘을 기웃대며
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이정표 삼아 아는 길을 가듯 간다
쓰러진 채로 고개 끄덕이는 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자꾸만 돌아보며 바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끼니를 잊은 철학자처럼 느릿느릿 잠 속으로 빠져드는 고래
낯익은 물결을 만났을까 잠깐 웃음이 스친 듯도 한데
몸속에 남아 있던 바다가 쿨럭, 외마디를 내뱉는다
제 몸에서 나오는 뜻밖의 비명에 놀란 잔등이 푸르르 떨린다
 
물의 기록이 겹겹이 쌓인 몸속 제 그림자의 그늘이 깊어 몸살을 앓던 중이었거나
다만, 쉴 곳을 찾던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뱃전을 따라 낯선 길을 나서려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꿈꾸던 어둠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는 제 몸이
신기하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머리를 흔들어 보는데
 
너무 멀어, 바다는 고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디서 실컷 싸우다 온 사람처럼 목이 콱 잠긴 오후
처음인 것들이 맨 나중을 설명하는 그곳에
 
고래가 있었다
 
* 붉은 장미 : 죽음의 순간 고래의 숨구멍으로 치솟는 핏물을 부르는 선원들의 말.

 

 

 

끝도없이 침잠하는 밤의 세계에서 하나의 불빛이 되었다, 시는. 나는 아직 완전한 바닥은 아니다. 비로소 세상 전부를 미워하게 됐을 때에도 마음이 살인하게 내버려두지는 말아야지. 바깥 세상이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차더라도 누구도 괴롭히지 말고 내 안에서 평온을 찾아야지. 시 안에서 결심한 것 같기도 하다.

 

문득, 파타고니아의 양과 물 속에서 몸을 뒤집는 고래와 날뛰는 여름, 프로방스와 카뮈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理性)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그보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만약 니체가 주장했듯이, 어떤 철학자가 존중받는 존재가 되려면 마땅히 자신이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 다음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속으로 느낄 때는 자명한 것이지만 막상 이성의 차원에서 분명히 밝히려면 깊이 파고들어가 연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 '시지프 신화' 첫 문단)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 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香草)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 풍경 깊숙이, 마을 주변의 언덕들에 뿌리를 내린 슈누아의 시커먼 덩치가 보일락 말락 하더니 이윽고 확고하고 육중한 속도로 털고 일어나서 바닷속으로 가서 웅크려 엎드린다.

( '결혼,여름' 첫 문단)

 

 

따뜻하면서도 시원하다. 차가우면서도 뜨겁다. 계절과 여행에세이의 콜라보레이션은 늘 벅차다. 그리고 카뮈는 빛난다.

 

 

 

 

 

 

 

 

 

 

                               사랑

 

                                                                                             -이철성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사랑에 빠졌다. 나는 양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익숙지 못한 것들이 배를 뒤틀리게 하고 가슴을 칼로 긋고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사랑이 나의 어두운 방으로 들어와 누워있는 날 문질러댔다. 앙칼진 것들이 내지르는 붉은 소름. 불쾌한 입술이 이를 앙다물었다. 나의 사랑은 날 떠나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난 호소했다. 날 떠나지 말아달라고. 거듭거듭 호소하는 나의 혀가 딱딱하게 갇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난 둘이 되어 있었다. 난 놀란 눈을 하고 날 보고 있었다. 난 놀란 나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놀란 나는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난 무섭게도 도망치는 날 끝까지 추격하여 때려죽이고 싶었다. 어느 날 난 둘이 되어 있었다. 손이 손을 맞잡고, 입술이 입술에 포개지고, 성기가 성기에 삽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죽고 싶었다. 영원히,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으면 했다.

 

 

 

부디, 올 여름 깊어질 즈음 인생의 한때 중 가장 벅찬 순간을 맞이하기를.

그리고 분위기는 반전되어야 한다. 여름에도 사색이, 바다에도 꿈이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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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0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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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6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5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6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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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3-07-15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 시간이 아주 많았으면 좋겠지만.. 하루하루 살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네요. 벌써 7월 중순이에요, 젠장 ㅋㅋㅋ 위쪽 지역은 비 오다 안 오다 그러죠? 올해 대구는 시원한 빗소리 듣기가 어렵네요. ^^

아이리시스 2013-07-16 11:32   좋아요 0 | URL
저는 대구보다 아래에 살잖아요, 까먹은거구나?!(아직 어린데 그러면 안됩니다,,키득키득) 시간이 많아야 음악도 들리고 책도 읽히고 다른 사람 목소리도 들리고 마음도 보이고 알고싶어지고 그런 것 같아서요. 벌써 7월 중순이니, 곧 여름도 지나가겠죠?

주말에 비 한 방울도 안오고 쨍쨍하기만 했어요, 지금도 더없이 쨍쨍한 오후네요! 아직 오전인데.. 아까전부터 오후인 듯한 이 느낌은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