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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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은 다른 이유로 밤을 샜고 요즘은 그런 날이 이어지고 있기에 대수로울 게 없는데 침대로 기어들어야 할 시간에 어떤 소설의 끝을 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음은 다른 날과 달랐다. 길고 긴 여정이었다. 이후 사흘이 흘렀고, 몇 권의 소설을 더이상 필사적일 수 없는 속도로 읽어치웠지만 여전히 귓가에는 아비규환의 비명이 울려퍼지고, 눈은 아수라장의 세계를 잊지 못한다. 언제부턴가 동물은 극복 못할 트라우마였다. 어릴 때 외가식구들과 계곡에서 캠핑 중 자루에 넣은 돼지를 패고 또 패서 나중에 구워먹던 걸 보며 한점을 가까스로 입에 넣었다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속을 모조리 게워낸 이후였나, 무섭고 두렵게만 여겼던 개를 처음 기르기 시작한 스무살부터였나, 그애가 집을 나간 지지난 여름 이후였나, 그게 내 아홉수와 연관이 있었을까, 동생이 어린 마음에 길거리 오토바이를 훔쳐타다 잡히던 전날 심한 설사로 몸을 못가누던 작은 강아지가 다음날 새벽 제집에서 혀를 길게 빼물고 죽어있던 이후부터였나. 어른들은 그걸 액땜이라고 불렀다.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낀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한동안 아예 귀를 닫고 살았다. 주변에서 개 짖는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낑낑대는 소리만 들려와도 동물학대 현장의 환상에 시달렸다. 계속됐다면 정신과로 가야 했을 터, 아픈 동물 앞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그로 인해 침체와 우울이 긴 나날 이어지는 것이, 이런 마음을 평생 지속하여 갖고 살아야 한다는 예감에 어느 날은 살아있는 게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쿠키.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만나 얼마나 행복했는지...... 너를 통해 황홀한 꿈을 꾸었다는 것도." (p.173)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동물을 사랑하는 자와 동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 둘 사이에 선과 악의 이분법은 당연히 성립하지 않고, 다만 경험의 차이일 뿐이라는 걸 안다. 언제부턴가 비가 내리면 길에서 살아갈 개와 고양이들이 가장 먼저 걱정이었다. 길에 쪼그리고 앉아 빵과 우유를 놓고 괜찮아, 먹어, 를 반복하던 나는 머지않아 뒷다리를 질질 끌며 사차선 한켠의 인도를 기어가는 아가를 무턱대고 데려온다. 영화 같은 그날을 몇 장면으로 기억한다. 퇴근시간 만원버스에 올라타 창너머를 보다 눈에 들어왔다. 가는 내내 잊혀지길 빌지만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아 내리자마자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하늘이 새까매지고 세상을 비추는 빛이 달과 별 뿐이던 것과 최초 발견지점에서 가까운 도로 끝에서 발견된, 추위와 두려움에 떨다 이젠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아이. 서툴게 구조해 동물병원 문이 닫힐까 두 구역을 죽어라 뛰던 우리. 몇 가지 검사. 내장파열이라면 증세는 금방 나타나지 않는데, 괜찮을 수도 심각할 수도 있다, 자세한 검사는 시간과 돈이 들테니 유기견이라면 구청에 신고하거나 안락사를 권한다, 는 친절한 수의사를 뒤로 하고 엉엉 울면서 케이지에 넣어 집으로 데려온 것까지. 페이드아웃.

 

내가 저보다 분별력 있고 힘센 인간이라서 어떠한 생명체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구청에 가면 어차피 치료도 못받고 애물단지로 전락하다 어찌될지 모르고, 안락사라니, 내 결정으로 그런 걸 하라고? 무턱대고 용감한 편은 아니지만 꼭 일어날 거라 믿었고 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혹 숨을 놓더라도 마지막을 봐줄게, 네가 있었던 곳을 기억할게, 내 손으로 너를 묻을게, 약속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차라리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그애가 멈췄던 그곳에 홀로 두는 게 옳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이주는 생애 가장 긴 시간이었다. 어느 날 일어서고 배변하고 밥을 받아먹고 마침내 두 다리로 섰을 때, 밤새 코에 손바닥을 대보느라 며칠간 오전 수업을 빼먹고 맘졸인 간절함을 그애가 들은 거라고 그땐 믿었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 (p.28)

 

 

인수공통전염병은 정유정 작가가 눅눅하고 질퍽하기 짝이 없는 진흙같은 곳에서 인간 위주로 돌아가는 가혹한 세계를 펼치기 위해 다음 타자로 사용한 카드다.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소재이긴한데, 특이한 건 시점이다. 개의 시점에서도 상황을 묘사한다는 것. 다양하게 변화하는 시점과 등장인물 많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거쳤을 어마어마한 자료조사를 짐작케 한다. 누구나 하나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힘든 과정일지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래서 바로 그게 정유정 작가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으리란 것도. 부단한 시점변화와 다양한 인물 입장은 소설보다는 드라마나 영화와 맞는 기법 아니던가. 뛰어난 가독성, 영화같은 이야기로는 필연적이게도 문단이나 독자가 원하는 문체의 문학성을 획득하기 힘들다. 능력의 문제이기보다는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그러니까 알래스카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황야를 가로지른 철길로 걸어가본 적이 있어요. 레일을 따라 걷다가 마을이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르자 손목시계를 풀어서 선로 위에 놔두었죠."

"왜요?"

"초바늘 똑딱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 같았거든. 나는 좀 더 멀리 가보고 싶었고. 기찻길이 끝나는 곳까지."

"그래서 갔어요?"

"아니. 걷다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면 여전히 똑딱똑딱 소리가 들려왔어요. 귀에서 피가 도는 소리보다 더 크게. 열 발짝, 스무 발짝, 시계는 멀어질수록 더 큰 소리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렀어요. 결국 집으로 돌아갔죠."

"시계는요."

"화가 나서 선로에 그대로 두고 와버렸어요. 바람이 쓸어 가든가. 기차가 깔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다음에 황야로 갔을 때 또 나를 불러 세우지 않도록."

"다음에 갔을 때에도 확인 안 해봤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어요. 바람에 날려갔다면 지금도 근처 어딘가에서 똑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pp.237-238)

 

 

구원이 아닌 철저한 실험을 그린 세계. '왜'가 아니라 '어떻게',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 중요한 세계. '왜'가 전염병의 이유, '어떻게'가 인간들의 각기 다른 대처라면 '무엇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켜야 할 저 너머 무언가를 의미한다. 이 세계라는 파이 안에서는 거의 언제나 지켜내려는 사람보다 그 반대의 수가 훨씬 많거나 힘의 크기가 크지 않던가. 전염병의 세계에서 병에 걸리지 않고 죽어가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은 병에 걸린 세계의 절규와 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이 잃어가는 소중한 것을 들여다보자는 얘기. 그러면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 보일 터였다. 공교롭게도 주인공 재형, 기준, 윤주, 수진, 동해, 링고는 전염병의 희생자가 아니다. 작가에게는 여섯 명의 전염되지 않은 주인공을 설정하며 각각을 통해 하고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배경으로 가장 부각되는 유기견보호센터 드림랜드는 인간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다. 병이 발발하자 절차 하나 없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개들이 집단 사살된다. 죽고 살아남는 데에 타당근거가 없어진지 오래다. 인간은 병이 두려워 아까까지 식구였던 애견을 앞다투어 드림랜드에 버린다. 새 식구들은 재형에게 분노를 품은 동해가 고의로 불을 지르면서 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드림랜드 역시 폭삭 내려앉는다. 일순간 희미한 희망의 불씨마저 꺼진다. 살아생전 누군가의 소중한 무엇이었던 피투성이 사체들만이 슬픈 자화상처럼 멍든 드림랜드를 지킨다. 더 무서운 건 국가가 내린 봉쇄령이다. '빨간 눈'의 확산이 두려워 공권력으로 제압, 감금, 집단수용, (사실상) 처형하는 모습에서 인간과 개의 경계가 지워짐을 확인한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스타는 발작을 멈췄으나 죽은 개처럼 몸을 놔버렸다. 링고는 두려움에 휩싸여 스타에게 다가앉았다. 혀를 내밀어 코를 핥았다. 뜨겁고 마른 스타의 숨결이 입안을 어루만졌다. 살아있다는, 틀림없는 증거였다. 살아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는 정신없이 스타의 젖은 몸을 핥았다.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스타의 등에 배를 붙이고 누웠다. 거칠게 울리는 스타의 숨소리를 들으며 희망적인 변화를 감지해보려 애썼다. (p.107)

 

 

가장 인간적인 주인공이 다름아닌 개 링고라니, 인간을 상대로 복수하려다 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재형으로부터 저지당하지만 링고가 해낸 일과 하려던 일을 종합하면 이러하다. 옳고 그름 앞에 인간은 늘 판단을 유예하는 미숙아이며, 시간을 끌거나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는다해서 올바른 판단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링고는 아직은 우리를 둘러싼 시계가 고장나지 않았음을, 초침소리를 듣고 뒤돌아보거나 되돌아오기를, 여전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간절함을 품고있음을 입증한다. 잘한 선택이 늘 잘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력하는 그 순간만 인간, 나를 지탱하는 세계와 버팀목이 나를 초월해버리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무너질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목적과 대가, 시간과 수단은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아는 자는 드물거나 아주 적다. 내내 잘못된 선택을 묵인하거나 용인하지 말라 경고하는 소리를 듣는다. 고요와 공허 속의 초침 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두 번 다시는 개와 인간이 함께 몰락하는, 그래서 다시 일어서기도 하는, 극에서 극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오는 이야기를 읽고싶지 않다. 한 번은 어떻게 지나갔지만 두 번은 극심한 고통과 명징한 몰락을 온전히 견딜 가능성이 없다. 내가 다스릴 수 있는 세계는 정말이지 아주 작고, 하찮다.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건너가는 일은 여전히 벅차고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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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06-2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백만스물아홉열!!! 아이리시스님아...

아이리시스 2013-06-27 05:22   좋아요 0 | URL
고맙 백만스물아홉열!!! 포핀스님 오랜만...

2013-07-02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